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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와 속전

LNCK 2024. 7. 19.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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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와 속전            출30:11-16             2015.07.12.            출애굽기

 

서론

 

성경을 처음 읽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단어가 ‘구속’(Redemption)입니다.

저는 법대 출신이기 때문에 처음 성경 읽을 때 유독 이 단어가 거슬렸습니다.

왜냐하면 ‘구속’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데,

“왜 하필 예수님이 구속하셨을까?”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이 구속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의 주제는 ‘택한 백성의 구속’입니다.

‘구속’은 노예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택한 백성들이 구속받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택한 백성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택한 백성들이 종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노예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것을 예표합니다.

 

그러면 구속을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장자를 죽이려는 죽음의 천사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는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간 것은

구속의 방법이 어린양의 피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이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속전’(Ransom)이 되어

마귀의 종노릇 하던 우리를 자유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속받은 백성들의 의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알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예배하며 사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받은 백성들의 의무입니다. 구약시대에 율법을 따라 예배하던 것이 신약시대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살아야 하는 의무로 발전되었습니다.

출애굽기는 구속의 필요, 구속의 방법, 그리고 구속받은 백성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역시 택한 백성의 구속에 대해 반복적, 예표적으로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 생명의 속전을 성소의 세겔대로 은 반 세겔씩 내라고 하십니다.

성소의 세겔은 무엇일까요? 성소의 세겔대로 은 반 세겔을 내야 계수할 때에

하나님이 온역을 내리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더 핑크라는 신학자는 이 말씀의 내용이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첫째, 과거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 이미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왜 다시 속전을 요구하시는가 하는 질문 때문입니다.

구속받은 백성이 또 구속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은이나 금과 같은 것으로는 구속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왜 은 반 세겔을 속전으로 내라 하시는가 하는 질문 때문입니다.

아더 핑크는 이런 두 가지 면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문점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백성이 또 다시 구속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교육시키시는 것입니다. 즉 반복 교육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것이 1차 교육이고,

은 반 세겔로 속전을 내어 구속받는 것이 2차 교육이고,

제사를 지낼 때 점과 흠이 없는 짐승을 죽여 그 피로 구속받는다는 것은 3차 교육에 속한 일입니다.

똑같은 구속의 개념을 1, 2, 3차에 걸쳐서 각각 다른 재료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구속에 대해 이렇게 반복적으로 교육하실까요?

구속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는 아무 대가없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속전을 치러야 한다는 진리를 교육시키기 위함입니다.

 

죄인은 속전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과 금은 결코 속전이 될 수 없는데, 왜 하나님이 은 반 세겔을 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속전이 실체가 아니고 예표이며,

그 실체는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본문이 가르쳐 주는 실체로서의 구속의 진리가 무엇인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계수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계수하실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고 밝혀줍니다.

모세나 다윗같은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함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수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계수하는 자가 그 물건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돈을 세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 돈의 주인이거나 아니면 주인에게 위임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남의 돈을 세는 사람은 도둑입니다. 무엇인가를 계수한다는 것은 그 물건의 주인임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책장의 책이 몇 권인지 세어보는 사람은 책의 주인입니다.

남의 집에 가서 책이 몇 권인지 세어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 권한도, 책임도 없고,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계수한다는 것은 그가 그 물건의 주인임을 의미합니다.

 

역대상 21장 1절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 다윗이었는데,

그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 백성들을 계수했습니다. 왕이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뭐가 그리 큰 잘못처럼 느껴집니까?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를 주인도 아닌 존재가 계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일어나 다윗을 격동하여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윗의 장군이었던 요압이 “왕이시여, 이런 짓을 하지 마십시오. 왜 죄에 빠지려 하십니까?”

라고 하며 다윗을 말리려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인구조사를 감행하자, 이 일로 인해 선견자 갓이 찾아와서

세 가지 벌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3년 기근을 당할 것인지,

둘째는 3개월을 원수에게 패하여 쫓길 것인지,

마지막은 3일동안 온역이 일어나도록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다윗은 원수의 손에 빠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온역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3일간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퍼져 70,000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인구조사 한 번 했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인구조사 한 번 했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는 아무나 세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인되신 하나님만이 계수하시고,

하나님께 위임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계수 한 번 잘못했다가 전염병이 돌아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겨우 온역이 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수하는 것은 계수하는 자가 소유권자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계수하는 자가 통치권과 명령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군대에서 아침저녁으로 하는 것이 일조점호와 일석점호입니다.

저는 군대에서 장교였기 때문에 사병들의 점호를 주관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호를 하다보면 어쩌다 한 번씩 한 두 병사가 보이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담을 넘어 술을 마시러 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놈들은 잡아서 영창에 보내거나

몇 대 때려 정신을 차리게 만들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점호를 한다는 것은 상관이 사병들에 대해 통치권과 명령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니엘 5장을 보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이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이다가

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면서 가지고 왔던 성전의 잔을 가져다가

술을 마시는데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기구를 가지고

술을 마시자 잔치를 벌인 건물 벽에 손가락으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가

새겨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벨사살이 이 글자를 읽지 못하자, 다니엘을 불러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물었습니다.

 

다니엘이 ‘메네’는 “세다”는 뜻이고, ‘데겔’은 “무게를 재다”는 의미이며,

‘우바르신’은 “나누다”라는 뜻이라고 해석을 해 주었습니다.

곧 벨사살 당신은 하나님이 세어보셨을 때 오늘로 생명이 끝났고, 함량미달이며,

나라는 오늘로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자 벨사살은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 날 밤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쳐들어와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벨사살을 세어보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계수하는 자는 소유권자와 통치권자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계수하신다는 진리가 수차례 계시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9절에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인침’이라는 것은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 내 백성이라고 도장을 찍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누구며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또 인을 친다는 것은 그것이 내 것이라는 소유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6장 17절에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이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 ‘십사만 사천’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문헌이기 때문에 여기 기록된 숫자들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십사만 사천’은 ‘12X12X1000’입니다. 앞의 12는 구약시대의 열 두 지파,

다음 12는 신약시대의 열 두 사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1000은 그 수가 꽉 찼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시대에 모든 성도들을 총 망라한 상징적 숫자라는 것입니다.

 

여기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가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보면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를 셀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숫자를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계수한 자에게 하나님의 인을 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의 숫자와 구속함을 받은 백성의 수는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들은 영생하는 인류가 되는 것입니다.

 

◑2. 속전이 치러진 백성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수된다

 

누가 영생하는 백성이 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수함을 받겠습니까?

오직 속전이 치러진 백성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수됩니다.

 

‘속전’(Ransom)은 ‘몸값’입니다. 12절에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13절에도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수된 사람은 은 반 세겔을 속전으로 내라시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더 내지 말고 가난하다고 덜 내지도 말고

똑같이 은 반 세겔을 내고 이 돈이 모이면 회막의 봉사에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에 낡고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면 수리하거나 교체하고,

성막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필요한대로 회막의 봉사에 사용하라시는 것입니다.

성막에는 크게 세 군데에 은이 쓰였습니다.

 

첫째는 성막 본체를 세우는 널판의 밑받침입니다. 성막에는 총 48개의 널판(Board)이 사용되었고,

각 널판 아래에 1달란트(34kg)로 된 은 받침 2개가 놓였습니다.

그러니까 총 96개의 은받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성막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 휘장이 있는데, 이 휘장을 걸기 위해서

4개의 기둥이 필요했고, 이 기둥을 세우기 위해 4개의 은받침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이것도 은 1달란트가 소요되었습니다.

 

셋째는 성막 울타리에 필요한 것이었는데, 기둥을 5규빗 높이로 세우고 세마포장을 걸기 위해

은 갈고리(Hook)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기둥을 서로 고정하고 세마포장이

흘러내려가지 않도록 은 가름대(Band)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을 건설할 때 많은 양의 은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은 반 세겔로 생명의 속전을 낸 것은 이런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한 차례 은 반 세겔을 속전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후에 이 속전은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고 난 후, 그 전을 수리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남 유다에는 20명의 왕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신앙이 좋지 않거나

배교를 주도한 왕들을 보면 제일 먼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 성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이 낡게 되어도 제대로 수리를 하지 않고 방치하며, 오히려 우상을 가져다 놓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왕들은 왕위에 오르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성전수리였습니다. 속전을 가지고 성전을 수리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8대 왕 요아스 때,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성전 문 밖에 돈통을 두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은 반 세겔을 납부하는 것입니다.

강제로 거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은을 모아 성전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충당했습니다.

 

유다의 왕들이 많이 있었지만, 성전을 수리한 왕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요시야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여 그 내용을 듣고

회개하며 옷을 찢고 이스라엘을 개혁했던 ‘구약시대의 칼빈’으로 불립니다.

 

이 속전은 예수님의 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성전세’라는 명목으로 징수되었는데,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성전세를 거두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야, 너희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우리도 성전세를 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낚시를 하라고 말씀하셨고,

잡은 물고기의 입 속에서 은 한 세겔을 꺼내어 두 사람의 성전세를 납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전세의 실체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세의 실체가 되시는데, 왜 성전세를 납부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와 같은 문제로 징수하는 자와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재치 있게 낚시를 통해 성전세를 납부하신 것입니다.

 

은 반 세겔은 그 당시 가치로 4데나리온이었습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임금이었기 때문에 은 반 세겔은 노동자 4일치 임금이었습니다.

 

▲속전에는 네 가지 성격이 있었습니다.

 

첫째, 속전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수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속전을 내야 합니다.

 

둘째, 속전은 성전의 세겔대로 반 세겔입니다.

그러면 왜 ‘성전의 세겔대로’라고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시장에서 사용하던 세겔과 성전에서 사용하던 세겔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 쓰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손을 오가며 닳아 중량이 정량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또 제대로 만들지 않아서 은의 함량이 떨어지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세겔대로 은 반 세겔을 내야했던 것입니다.

 

셋째, 속전은 하나님이 정하신 정확한 금액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더 낼 필요가 없고, 가난하다고 덜 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과된 정확한 액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정확한 생명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값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단히 소중하고 값비싼 존재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영혼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넷째, 속전은 그 자체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예표한다는 것입니다.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도 예표이고, 마찬가지로 속전도 예표입니다.

 

그러면 속전이 예표하는 실체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0장 28절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속전입니다.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속전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이 치러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죄로부터 해방되고 마귀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어

구원받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 반 세겔을 드리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죗값의 속전은 우리 스스로 치를 수 없습니다. 속전은 우리가 치를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핏값으로 치러주신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은 한 세겔은 이십게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반 세겔이 10게라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숫자 ‘10’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십계명도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 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치를 수 없는 속전을 대신 내 주신

구주이심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죄인은 ‘예수님이 내 죗값을 치러주신 구주’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속한 속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만 이 진리가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택자의 믿음’(The Faith of God’s Elect)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딛 1:1).

 

◑3. 속전이 지불된 하나님의 백성들만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다

 

12절 후반에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속전을 내라하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역을 없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다윗은 속전 없이 백성의 수를 세었다가 70,000명이 3일 만에 죽는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속전이 되셨다함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이 없는 세상의 모든 종교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아무리 철학이 높고 학문이 높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종교를 의지했다가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최후 심판의 날에 예수의 피로 속전이 치러지지 않은 종교인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지게 되고

진노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에서 면제되고 지옥이 아닌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입니까?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짐을 받고 천국의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에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예수님의 속전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속전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 천국에 가야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노하시면서 동시에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예수님이 택하신 백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속전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속전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내게 대하여 명령권과 통치권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인 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소유권자 되신 하나님, 통치권자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