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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다

LNCK 2024. 7. 20. 16:4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52.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2024-0714 - YouTube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4:16

 

※설교를 해서 꼭 가르쳐야 되지만, 뭔가 부담되고 껄끄러운 주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Attribute of God, 하나님의 사랑’ 등의 주제가 그렇습니다.

 

폴 워셔 목사는 20년 전에 ‘하나님의 속성이 교회에서 설교되지 않는다’고 목청을 높혔는데,

그 주제로 막상 설교하려고 하면... 웬지 부담스럽고, 뻔할 것 같고, 딱히 감동적이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뒤로 자꾸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마는데요...

 

뭔가 부담스럽고 설교하기 애매한 주제들을, 설교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한 번 해 보고, 두 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 네 번째는 훨씬 수월해집니다.

 

언제나 부담스럽고 설교하기 애매한 주제들, 그래서 피해 가고싶은 주제들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한 번도 설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하면, 반드시 전달력이 늘게 되어 있습니다.

 

........................

 

◑도입

 

요즘 ”하나님은 누구신가?“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필요하지만 까다로운 주제

오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A. W. 토저 Tozer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 다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그것은 마치 태평양이나 대기를

우리 두 팔로 껴안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 도와주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세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지금까지 이번 시리즈 설교를 통해 살펴본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힘을 가진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인데,

 

오늘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A.W. Tozer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모든 다른 하나님의 속성을 지배하고 있다’ 라고 말한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 무소부재하심, 거룩하심 등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면서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무소부재하셔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것도,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는 것도, 결국 나를 사랑하시는 큰 그림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들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중에, 내 속에 확신이 더 넘치게 되고,

죄책감은 사라지게 되며, 우리들의 삶에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질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런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도요한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예수님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고,

‘사랑의 책’이라고 부르는 <요한일서>를 기록하였으며,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성경을 집필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 요한계시록를 썼고,

특별한 특징으로 그는 굉장히 오래 살았습니다. 93~94세까지 살았습니다.

당시 시대를 감안한다면, 굉장히 오래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요한의 별명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기록했던 성경 가운데 ‘사랑’이라는 단어가

(번역에 따라서 조금 숫자가 한두 개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80번 이상 등장합니다.

 

요한일서에만 해도 30번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렇게 사랑하십시오.'

'이것을 사랑하십시오.'

'이렇게 그들을 사랑하십시오'라는 사랑에 대한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요한이 사랑이 넘치고, 순결하고,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원래 그의 성격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성경 복음서를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거친 사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보아너게, 즉 우레(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막3:17)

 

사랑이 넘치는 사람을, ‘천둥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셨겠습니까?

‘천둥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성격과 특성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사랑이 넘치고 온유하고 겸손한 그런 특성이라기보다는,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불평하고, 거친 소리를 내뱉는 그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일 때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고, 불평하고,

자기의 욕망과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사도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저술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모든 제자들 중에서 가장 편파적이고, 가장 편협하고,

가장 완고하고, 개인적으로는 자기의 야망을 위해서 열심히 추구했던 사람이다.

가혹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사도’가 되는 데 있어서

가장 가능성이 없는.. 가장 대척점에 있었던 그 사람이 바로 사도요한이었습니다.

 

성경에 증거들이 있습니다.

① 눅9장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가 곧 다가왔다는 사실을 아시고

예루살렘 올라가기를 작정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려고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거절했습니다.

 

그때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나이까'

천둥의 아들답죠. (눅9:54)

‘하늘에서 벼락과 불을 내려서 저 마을 다 태워버립시다!’ 이것이 사도요한의 해결책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② 자기 자신의 성공에 대한 많은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도요한과 그의 형 야고보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이 되실 것으로 예상(착각)하고,

‘우리를 예수님 오른편과 왼편에 앉혀 달라’고 사도요한이 예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막10:35~37)

 

한국 같으면 ‘좌의정 우의정 자리에 앉혀주세요’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려고 하는 잔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사도요한은 ‘저도 마실 수 있습니다.’ (막10:39)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 사도요한 이었습니다.

 

③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되는 그 모습을,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보고도

이 제자들이 했던 일은 누가 서로 크냐는 싸움이었습니다. (눅9:46~48)

 

예수님께 집중되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집중이 되었으며,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보다는

자기 자신이 성공하려는 그 생각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천둥의 아들이요, 완고한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사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바로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경의 역사 가운데 사도행전 첫 부분에 요한이 잠깐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그런데 사도요한의 이름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아주 노인이 되어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요한 1, 2, 3서를 기록하는 요한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때 그가 등장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사랑을 외치면서 나타난 거예요.

요한이 변화되었습니다.

 

요한이 변화되었다면 우리도 변화될 줄 믿습니다.

요한이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졌다가, ‘사랑의 사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면

 

나도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가 나에게 적용될 때

나도 천둥의 아들이라는 내 본성적 모습보다는,

사랑의 사도라는 변화된, 성숙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요한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그 단어에 대한, 사람들의 정의가 각각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영어로 ‘I Love You, 내가 당신 사랑합니다’ 그런 고백을 들었을 때,

여러분의 기억으로는 마음이 쿵덩쿵덩 하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청춘남녀들이 말하는 사랑은

금방 없어질 사랑이고, 곧 메말라버리는 사랑이고, 변화될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고백하고도, 얼마 지나면 변심하든지, 식든지, 이혼하든지 하기 때문이죠.

 

◑오늘 요한이 요한일서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랑 안에 흠뻑 젖을 수 있고,

그 사랑 안에 살 수 있으며,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요한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네 가지 특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사랑

 

요일4: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해 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구해서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는 먼저 사랑을 시작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이 본문에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①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이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분, 완전히 순결하신 분,

전능하신 분,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계속 살펴볼 그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외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다 덮는 우산과 같은.. 그런 속성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②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가 회개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모두 다 아닙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신 그때는,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이었어요.

이것은 과학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하신 과학과 이성과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의 작은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 시간과 장소와 이성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때부터 사랑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했고, 구주로 영접했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나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해서도 아닌...

그 어떤 것을 하기 훨씬 이전에, 창세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어,

반면 혹시 어떤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만약 있다면,

오늘 이 시간에, 그 모든 것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요한이 아마 그것을 깨달았을 거예요.

‘나는 천둥의 아들이야. 그렇게 많은 고함을 질렀고, 분노했고, 사람들을 욕했고,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 벌써 나를 사랑하셨고,

그 모든 것들이 내 삶에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나를 이미 사랑하셨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구나!’

이것이 요한이 깨달았던 진리입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신앙생활을 출발할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하십시오.

우리 믿음생활의 출발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가 그 여정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어떤 죄책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할 때가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이전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있다.’

이것으로 신앙생활을 출발하고,

매일 하루를 시작하시고,

여러분들의 모든 삶을 시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것이 진리요, 우리 삶의 모든 바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생명을 주신 사랑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생명을 주는 사랑’인데,

그런데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한 예가 있습니다.

 

 

△안나이야 루커 라는 여자아이 이야기

루커는 한 10살쯤 되었을 때, 자기 동생 케니와 어느 날 걸어가는데

갑자기 트럭이 동생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오자

동생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판단하고

동생을 향해 뛰어들어 동생을 밀쳐내고, 자신이 차에 치었습니다.

 

엄마가 그것을 보고 루커가 죽었다고 생각해 울고 부르짖고 있는 그 순간,

루커가 숨이 돌아와 숨을 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루커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기 시작했습니다.

루커의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두 다리와 목이 부러져 있었고,

신장을 잃었고, 비장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왼쪽 다리는 절단해야 했습니다.

동생을 살리고 루커는 이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루커가 정신이 돌아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 다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에게는 너무 슬픈 순간이었지만, 내가 케니를 구하지 않았으면 누가 구했을까요?

이 조그마한 아이를, 내가 구하지 않았으면 누가 구했을까요?”

 

(그리고 곧이어서 동생이) “언니는 나의 영웅입니다.” 그 인터뷰의 내용입니다.    주1)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누군가가 목숨을 거의 걸고

다른 사람을 구해줄 수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과는 달라요.

 

이제 저들은 또 시간이 되면 다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은 살아났다.

 

이제 시간이 되면 죽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죄의 저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지옥에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나를 밀쳐내시고, 그 죽음이 트럭에 치여서 예수님께서는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역사 한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그 질주해 오는 ‘죽음의 트럭’에 치일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밀쳐내시고, 자신이 그 트럭에 치이신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다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아픔과,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그 죄악의 결과인 지옥을

우리 주님께서 다 담당하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난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시는 방법이에요.

그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의 반응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 예수님의 사랑에 우리의 반응은 어때야 하나요?

하나님의 사랑에 “예”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예”라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 나는 죽게 되었지만, 주님께서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믿습니다’ 라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반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그냥 너 죄 용서받았다’ 하고 끝내시면, 그냥 용서받은 걸로 될 텐데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후에

왜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그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Yes인지 No인지를 고백하게 하셨는가요?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강요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쭈욱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오래 그 관계가 지속되길 원하셨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관계 맺는 방법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하셨어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나의 모든 생명을 다 바치고 힘써 일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반응을 원치 아니하시고 그 하나님의 움직임에

우리가 반응하기를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Yes“ 하는 것, ”믿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아직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지 않고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 자리가 여러분들의 일생이 완전히 변화되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아낌없는 사랑

 

요일3:1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크신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습니까!

그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자녀라고 불러 주셨으니,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쉬운말 성경)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 세 번째는 ‘아낌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낌없이 많이 주시는, 크게 주시는, 끝도 없이 주시는 사랑입니다.

 

(*'아낌없이'라는 단어가 원전에는 안 나오지만, 요일3:1절이 감탄문인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또 독생자를 주신 것은, 아낌 없이 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그 아낌없으신 크신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 영원하신 왕 하나님의 자녀,

그분의 아들이요. 그분의 딸이라는 사실입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에프 케네디가 근무했던 바로 그 집무실,

세계의 가장 큰 힘이 거기에 있고,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정도로

세계 평화가 거기에서 좌우되는 어마어마한 곳이 바로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집무실 대통령 책상 아래에 누가 하나 있죠? 누군가요?

아들이 거기서 놀고 있어요. 편안하게 놀고 있어요. 재미있게 놀고 있어요.

그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놀고 있어요.

 

왜냐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에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요한일서 그 말씀과 어쩌면 그게 그렇게 일치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크신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습니까?

그래요. 그 사실을 알기에 그 '왕좌'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을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의지, rely on)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끝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4장 16절처럼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알아야 해.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믿어야 해.’

 

여기서 ‘믿는다’는 단어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rely on이라고 NIV 성경 등은 번역합니다.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고 그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것이 나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뢰할 만하십니까? 예 믿고 의지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멈춥니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가뭄에 물 마르듯이 말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굉장히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사랑한다, 안 한다'를 우리가 계속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 하다가

내가 오늘 직장에서 승진에 누락 된 것을 보니 ‘하나님은 나를 사랑 안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설교를 들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분명히 여기다가

자동차가 고장이 나자 ‘하나님은 나를 사랑 안 하신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으로 막 밀려 들어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평화를 느끼다가

내가 또 전에 지었던 죄 그 죄를 다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 안 하신다.’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계속해서 ‘사랑하신다/ 사랑 안 하신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하나님의 그 사랑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결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아’

또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응(적용) : 하나님의 사랑에 큰 흠뻑 적셔져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라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그 사라진 기간(행3장~계시록)동안 했던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 나타나서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그 탄성의 소리,

그 위대한 메시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십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이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했고

하나님의 사랑만 묵상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적셔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흠뻑 적셔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요한처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그 하나님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생각 속에 흠뻑 적셔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하나님의 속성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위대하심 그 아래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어마어마한.. 태평양 바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태평양 바다 같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그게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위에 떠 있으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 한가운데 있으면서

손으로 태평양 바닷물을 이렇게 떠올립니다.

그 태평양 바닷물이 손가락 사이로 막 흘러내려가죠.

 

‘하나님의 사랑이 다 없어지네! 그리고 조금 남은 하나님의 사랑이 요만큼밖에 없네.’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한가운데서 우리 속에 올려져 있는

그 작은 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를 위한 사랑이 이거밖에 안 되네!’ 라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푹 적셔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이 어마어마해서 우리들의 고통과 우리들의 고난은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우리들을 향하신 사랑이

우리들의 모든 고난과 아픔과 고통을 다 덮어주실 것입니다.

 

그 태평양 바다보다 더 넓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면

우리들 속에 그 염려와 걱정, 근심이 1초라도 머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냥 흘러가게 될 거예요. 다 흘러가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에요.

사도요한은 이것을 경험했고, 그 경험을 요한 1, 2, 3서를 통해서 쓰고 있고,

특별히 요한일서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큰 소리로 우주가 진동할 만큼 큰 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적셔지십시오.

하루를 시작할 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3~5분간) 묵상하시고 시작하십시오.

 

하루가 다 끝난 후에 잠을 이루기 전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묵상하면,

그러면 그냥 쉽게 잠자리에 잠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적셔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전염되는 사랑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의 사랑은, 받은 자에게서 다른 곳으로 전염이 됩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 한 가지는

요일3:17절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여러분들이 가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여러분들이 해야 할 그 사랑의 행위가 무엇인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사랑이 전염되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반응(적용) :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라

오늘 우리가 읽었던 먼저 시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우리 대신 죽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그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너무 크고 너무너무 무한하게 풍성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보내진 트럭‘에 치이기 일보 직전에 처해 있습니다.

이제 죄의 결과인 지옥의 트럭이 그를 밀고 갈 텐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사랑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마치면서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요한일서 4:16절로 설교했던

위대한 설교를 한번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스펄전 목사의 요한일서 4장 16절 설교 중에서 (1871년)

 

「이제 나는 잠시 시간을 내어, 본문의 진실성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신자라면,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내 말에도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잠시 동안 그 생각을 머릿속에 담아보세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단지 나를 참아주시고, 나를 생각해 주시고, 먹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아, 우리가 사랑하는 아내나 친절한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참으로 감미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다정한 아이나 다정한 어머니의 사랑에는 많은 감미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히 좋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전능자,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나도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랑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나를 좋아하십니다. 나는 하찮은 사람, 죄가 가득합니다.

지옥에 있어야 마땅한 사람, 그 대가로 그분을 거의 사랑하지 않을 사람인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을 녹이지 않습니까?

이 사랑이 당신의 영혼을 불태우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분은 나를 어떻게 사랑했나요? 그 분이 나를 먼저 사랑했어요.

그분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사랑했습니다.

별이 빛나기 전에 그는 나를 사랑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을 때,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그분을 잊었을 때,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죄를 짓고 내가 그분을 저주할 때도,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무릎이 떨리고 나이가 들면서 내 머리털이 백발이 될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끝날 때에도 그분은 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영원히 영원히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오, 이 축복받은 생각을 되새김질해 보세요.

맛있는 음식처럼 혀 아래로 굴려보세요.

 

오늘 오후에 여유가 있으시면, 가만히 앉아서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향한 강한 사랑의 감정으로 크게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당신을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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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생명을 주신 사랑’의 한국적인 예

인천에 어떤 초등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한 가지 큰 열등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엄마의 얼굴이 곰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이는 그 사실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가끔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철모르는 학급 친구, 동네 친구들이 ‘너네 엄마 곰보지?’ 하고 놀리는 것입니다.

 

그 날도 아이는 학교에서, 엄마 때문에 놀림과 왕따를 당했습니다.

친구들은 아무 생각 없이 놀린 것이지만,

아이 자신에게는 그게 마음에 큰 상처가 된 것입니다.

 

아이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원망하며 말했습니다.

‘엄마는 왜 곰보야? 엉엉엉’

 

엄마는 이제 아이가 어느 정도 컸다고 생각하고, 엄마가 곰보가 된 사연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엄마가 아주 젊었을 때, 자기(아이)를 낳고, 형편이 어려워서 낮에 공장에 다니며 일을 했습니다.

아무도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공장으로 출근을 해서,

공장 숙직실에 아이를 눕혀 놓고는, 틈틈이 나와서 아이를 돌보고 젖을 먹이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만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불길은 숙직실도 덮쳤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다 대피했지만, 엄마는 대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길 속을 뚫고서, 숙직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포대기에 쌓인 어린 아기를 안고서, 다시 불길을 뚫고 나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화상을 입어서, 엄마는 곰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아기는 포대기에 쌓이고, 엄마가 보호막이 되어서 아무런 화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그때부터 얼굴에 흉터가 남았고, 곰보처럼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그 다음부터, 친구들이 ‘너네 엄마 곰보’라고 놀려도,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엄마가 그런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 온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그렇게 죽어야 할 나를 살리시고,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