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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LNCK 2024. 7. 22. 11:2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임재, 교제, 친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라 #6]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  - YouTube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약4:8~10, 눅8:26~39, 신5:30~31         2017년 설교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오늘 여러분들이 이 야고보 사도가 한 약속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 자신의 심령에 이루어지기를... 
말씀하셨으니까, 우리가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니까, 반드시 이루어지게 돼 있는 것입니다. 

◑4:8a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주님, 이 말씀이 제게 이루어지고, 우리 가족들에게 이루어지고, 
이 약속 우리 교회에 이루어지고, 우리 나라의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라도, 우리가 붙잡지 않으면 
그냥 그저 성경의 기록된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믿고 붙잡으면, 말씀이 성취되는 놀라운 감격을, 여러분이 얻게 됩니다. 

오늘 기도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아멘! 입니다. 

그런데 전제가 하나 붙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4:8

위 야고보 사도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실 것이다...' 이렇게 읽혀집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부담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가까이 가지? 
내가 하나님께 과연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아, 나는 그게 정말 어려워...'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하는 말씀이, 선뜻 붙잡아지지 않는 겁니다.
그 앞에 있는 전제 부분(8a절)이, 우리를 딱 마음에 걸리게 만들어요.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더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시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 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 그때 성전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쫙 갈라졌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막15:38

휘장을 만약 사람이 찢었다면, 아래서부터 위로 찢어지는 거죠. 
휘장이 높으니까요. *30규빗, 약 14M

그런데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도대체 극복이 될 수 없는 장벽을 뜻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구약 시대에,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그 성전 휘장이 쫙 갈라졌어요. 하나님이 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하신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신게 아니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먼저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게 하시고, 성전 휘장을 주님이 쪼개셨어요

성전 휘장이 쪼개진 것은, 우리로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심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성전 휘장이 쪼개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서 세상으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오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소원이에요. 

▲하나님의 소원은, 사람의 마음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요1:14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어요.  요14:20 등

근데 그게 인간의 죄로 인해서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성령을 거두실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제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됐어요.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함을 받았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오순절 때 마가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영이 각 사람에게 임하시는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지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가까이 오셨고, 우리 속에 들어오시기를, 
그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를.. 하나님이 더 적극적이세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 사도는 표현을 이렇게 했을까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4:8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어요. 하나님이 먼저 하셨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셨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 마음속에 강제적으로 들어오시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임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어요. 
그렇지만 열쇠는, 여전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게 있어요. 
그건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는 거예요. 

계시록 3:20절에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여러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에요. 
그건 내게 오시는 주님께, 내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게 힘들다...' 그건 몰라서 하는 얘기에요.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이 어디 계실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어떤 고행도 필요하고, 특별한 헌신도 필요한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마음을 열고, 내게 오신 주님을 진짜 내 마음에 영접하는 거예요.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정말 믿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못하는 이들이 있어요. 
눅8:26~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인 지방에 가신 기사가 나옵니다.  *거라사人

근데 거기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가 없어서, 무덤가에서 지내는 사람이었어요. 

얼마나 귀신이 많이 들어갔는지, 한 군단 (병력의) 귀신이 
한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1개 군단(레기온)은 약6천명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내 속에 계실 수 있나요? 
군대 (군단급) 귀신들도 한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걸 보면, 
'아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계실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그 사람의 형편이 얼마나 비참했겠어요? 
그런 비참한 사람이지만, 그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그래서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았고, 그 다음에 그는 증인이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사명자가 돼요.

자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더 사실 충격적인 내용은 
그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온전해진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와서 '우리를 떠나 달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이 기가 막힌 부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예수님은 그 거라사 지방으로 오셨어요.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 거라사 마을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거지요. 
그래서 군대 귀신 들린 자가 놓임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이제는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그 거라사 마을에 임하게 될 텐데, 
즉 이제 마을 사람들도 다 구원을 받게 될 텐데,
그 시점에,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달라고 예수님을 요청하면서, 예수님을 거절해요. 

그 이유는, 자기들이 치던 돼지가 다 몰살 당한 것이 두려웠던 거예요.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이고, 구원의 주님이 아니고, 
그들에게는 아주 부담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어졌어요. 
자기들에게 물질적인 손해를 끼친 존재로! 

그들은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구원받은 것보다, 자기들이 구원 받는 것보다,
자기들이 치던 돼지 떼들이 죽은게 더 컸어요. 

마을 사람들은 군대 귀신 들린 사람보다, 모든 점에서 형편이 더 나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그들은 비참한 자가 됐어요. 
그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거절했다니까요. 

이런 일 때문에,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 위해 부어 지셨어도 
거절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가까이 가실 수가 없는 거죠.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그 거라사인 지방의 마을 사람들과,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비교해 보면, 
마을 사람들이 훨씬 형편이 낫지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그들은 영적인 갈망이 없었어요.  

군대 귀신 들린 자는 얼마나 비참했나요! 
그러나 그 속에는 영적인 갈망이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죠. 그리고 그는 변하여 증인이 됩니다. 

근데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은 무슨 큰 문제가 없어요. 
돼지 떼 잃어버린 것만 속상하지요. 

그들은 영원히 예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가 됩니다. 
본인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거부했으니까요. 

▲지금도 형편이 나은 사람들 중에, 영적으로 스스로 속는 자가 있어요. 
먹고 사는 거는 어려움 없어요. 세상 사는 거에 어려움 없어요. 
오히려 세상에서 즐기고 살아요. 그러면 자기에게는 문제가 없는 줄 알아요.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은 너무 불쌍하고,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서, 정말 가난에 찌들려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너무 불쌍하게 여겨지지만,
그러나 그렇게 불쌍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사실은 복이 있는 사람이요. 

왜요? 그래서 주님을 갈망하니까요. 
사실 오늘도 금요성령집회에 오신 여러분들에게,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기도하러 왔다면, 
지금 그 일은 여러분에게 고통스럽지만, 영적으로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이에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갈망하니까요. 

그러나 형편이 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회에 나올 이유가 없을 수 있어요. 
그들 속에는 '내가 무슨 기도 제목이 있어? 오늘 저녁은 불금이잖아!' *불타는 금요일 

이 '불금'에,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한 자리로 나오시는 분들은 참 복이 있죠. 
그러나 세상 불에 휘말려 들어가는 나방과 같은 사람도 있거든요. 
그 사람들은 형편이 좋으니까 그러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그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고 권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가까이 오셔도, 그게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 열지 못하는, 그런 영혼들을 향한 안타까운 외침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게 먼저인 것처럼 보일 뿐이에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거죠)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알게 돼요.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가까이 오셨는지... 하나님이 나를 먼저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게 마음 하나가 달라지는 것에 의해서 바뀌어져 버립니다. 

이번에 제가 하와이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 길에, 
공항에서 어느 항공사의 광고 카피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지루한 천국과 즐거운 지옥, 나는 어느 쪽일까?" 그렇게 쓰여져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이 이렇구나'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은 지루한 곳이에요. 지옥은 즐거운 곳이에요. 
천국은 '이것도 하지 마, 저것도 하지 마!' 거기는 영원히 예배만 드린다고 하니
엄청나게 끔찍한 곳으로 여기는 거죠.

반면에 '지옥은 얼마나 즐거워!' 이게 무섭지요. 
사람의 마음이 이러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가까이 오셔도,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수가 없는 거예요. 

▲J C 라일 목사님은 스펄전 목사님과 동시대 분입니다. 
그분이 19세기 영국 설교자들을 이끌어 갔던, 
아주 청교도 신앙을 가진 참 귀한 목사님이신데, 
그 목사님을 흔히 '영국 교회를 향한 거룩한 폭탄'이라고 그렇게 말해요. 

그때 당시에 영국 교회가 영적으로 굉장히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때 J C 라일 목사님이 불을 토하는 설교를 하셨어요. 

골3:11절을 본문으로 '그리스도가 전부다 Christ is all' 이라는 설교를 하면서 
그가 이렇게 표현했어요. 

'안타깝게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없고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사귐이 전혀 없는게 분명한데도, 
자기가 죽으면 천국에 갈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분과 전혀 교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들이 천국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국은 결코 그들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들에게, 마음에 따분하고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고 변화를 받으십시오. 
천국에 대한 가장 확실한 준비는, 예수님과의 교제 임을 알아야 합니다.'  
  ☞존 라일 설교모음 https://blog.naver.com/coldwater1cup/223183163775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하시고, 
내 마음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하나님 같지 않습니다. 

그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이유인 거예요. 
'왜 하나님이 나와 그렇게 가까이 하신다고 하면서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막연하게만 알 수밖에 없는 걸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있는지를, 한번 스스로 돌아보셔야 돼요. 
진짜 여러분에게 오신 주님을, 마음을 열고 맞이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그걸 매일 일기로 써보고... 
이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타교회의 권사님을 만나서 상담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권사님은 상당히 아주 여유로운 분이에요. 
소위 세상적으로 말하면 부족할 것이 없는 분입니다. 

근데 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 권사님이 불쑥 이런 질문을 하세요. 
'저는 권사가 됐지만,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통독해 본 적이 없습니다.' 
권사님으로서는 참 부끄러운 고백을 하신 거지요. 

'담임 목사님이 저를 권사로 억지로 시키셨습니다. 
내가 권사를 그렇게 하기 싫다 그랬는데, 내가 안 나간 그 주일에 임명을 해버리셨어요.'
그래서 자기가 권사가 됐다는 거예요.

근데 자기는 아직도 예수님을 이렇게 친밀하게 인격적으로 만나지를 못했대요. 
그것 때문에 마음이 늘 무겁다는 겁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권사 아닌 권사처럼, 정말 권사답지 못한 권사처럼, 
성경도 한번 제대로 못 읽어본 권사로,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나? 
어떻게 하면 내가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세요. 
제가 그 권사님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권사님, 지금 제게 말씀하신 꼭 그대로 주님께 말씀드리세요. 
'주님, 어떻게 하면 제가 진짜 예수님을 믿는 권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걸 목사인 제게 하지 말고, 주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걸 진짜 믿고 
'예수님, 어떻게 하면 제가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권사답지도 않은 권사로 이렇게 마음이 무겁게 지내지 않고, 
진짜 예수 믿는 권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은 권사님에게 역사하십니다. 주님이 더 원하시니까요. 
주님은, 권사님이 진짜 예수 믿는 권사님이 되기를 더 원하십니다. 

권사님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제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친한 주님으로 만나야지, 어색한 주님으로, 낯선 주님으로 만나는 것이 
가장 두려운 문제입니다. 

권사님은 이제 오래 사셨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 갈 때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아주 짧습니다. 이제 곧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는 순간에, 그 주님이 낯선 분이시면, 이건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권사님, 죽기 전에 아직도 세상에 있을 때, 
주님이 친근한 주님, 친밀한 주님으로.. 그렇게 되셔야 합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권사님을 억지로 권사로 시키셨다고 그랬는데 
아마 제가 느끼기에는, 목사님의 눈에는 권사님이 아주 좋은 권사님이라고 
그렇게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권사님은 좋은 아내예요. 좋은 어머니예요. 
그래서 세상에서 좋은 어머니로 상도 받으셨어요. 
권사님은 친구들에게 아주 좋은 친구가 되세요. 성품도 너무 좋아요. 
목사님이 보시는 눈에는, 권사님은 좋은 권사님이 될 자질을 다 가지고 계세요. 

권사님이 은혜의 눈만 뜨이면, 권사님은 교회에서 정말 좋은 권사님이 되실 거예요. 
그건 하나님이 벌써 권사님에게 그렇게 역사하신 거예요. 

권사님 스스로가 '나는 권사가 될 자격이 없어..' 계속 그러고 있으니, 
하나님도 역사를 못 하시는 거죠. 

권사님, 이제는 받아들이세요.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권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다 주셨고요. 
이제 은혜의 눈만 뜨이면 돼요. 주님만 온전히 바라보면 돼요. 

그 주님을 만나는 것은 간단해요. 진짜 내 마음을 여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하셨어요. 우리가 할 일은, 믿고 마음을 여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4:8
야고보 사도가 그렇게 말씀한 거예요." 

▲여러분에게도 똑같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지요? 
세상에서 무슨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는 것, 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친밀한 주님으로 만날 거냐? 
낯선 주님으로 만날 거냐? 

주님 만나는 시간에, 잘 아는 (친밀한) 주님으로 만날 거냐? 
아니면 처음 본 주님으로 만날 거냐?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합니다. 주님, 예수님 한 분이면 저는 충분합니다!'
이런 고백이 된다는 건 엄청난 일이에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늘 그런 고백이 됩니까? 
'하나님 사랑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 안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생명이십니다. 
예수님, 나는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혼자 말처럼 그렇게 고백하고 노래할 때, 그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설 때 알게 돼요. '예수님은 나에게 낯선 분이 아니시구나' 

아마 우리가 눈이 열려서 주님을 딱 보는 순간에 
너무나 잘 아는 주님이시라면... 이건 엄청난 축복이죠. 

우리가 (천국에 가서) 주님을 딱 뵙는 순간에 '실례지만 누구세요?' 이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그건 지금 여러분에게 달려 있어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그때 천국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로마서 8: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그들이 광야에 나와 호렙(시내)산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현존, 임재를 처음으로 경험합니다. 
산에 하나님의 거룩한 구름이 임하고, 거기에 천둥 번개가 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하시는 놀라운 장면을 그들이 보게 돼요. 

근데 하나님이 임하시는 그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가 쫙 갈라집니다. 
반응이 달라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서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질칩니다. 자기들이 죽을까봐요! 

신5:25절에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이 확 밀려왔어요. 
이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반응이에요. 

'다시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셨을 때, 그때 그 하나님이 무서워요. 
그건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니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신5:30 그러셨어요.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서, 광야로 인도해 내신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같이 살자는 거예요. 같이 이제는 함께 살자는 거죠.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하고 싶어 하시고, 우리 안에 오시고 싶어 하시고...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무섭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러면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 

신5:30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합니다. 
'모세야,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이 다 같지 않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벌써 느낌이 달라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서우면 돌아가라' 하시고,
'모세야, 너는 여기 있어, 넌 내 옆에 있어!' 이건 황홀한 일이죠. 

하나님이 '너는 내 옆에 있으라'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복이 뭔 줄 아세요? 모세가 비교가 안 돼요. 
그냥 옆에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려고 교회 온게 아닙니다. 
주님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교회로 이끄신 거예요. 

우리는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함께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것이지, 
여기 와서 주님을 만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 믿고 우리가 누리는 이 엄청난 축복!
우리 안에 일어난 변화가 뭔지 아십니까?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이 무섭지가 않아요. 

하나님은 내 아버지신 걸,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라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게 아무렇게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4:8b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야고보 사도가 말합니다. 
약4:8b절에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죄를 짓고나서도 태연하다는 말은 아니에요. 
정반대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죄를 숨기고 도망가요. 
그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요. 
지금 야고보 사도가 하는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4:8b

우리가 아이들을 야단쳐 보면, 아이들이 둘로 갈라지죠. 
매를 들면 막 도망가 버려요. 근데 매를 들면 오히려 가까이 다가와서 
'잘못했습니다. 저는 맞을 짓을 했어요.' 하는 아이도 있죠. 
그럼 때릴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둘로 갈라져요. 
하나님이 무서우면, 죄를 숨기고 도망 가 버립니다. 세상으로 도망 가 버려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눈이 뜨인 사람은, 자기 죄를 고백해요. 
'하나님 제가 이런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품으로 더 깊이 들어가요. 
오늘 밤이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어느 신학생이 신학교 다닐 때, 처음으로 그는 음란한 영화를 보고 
너무 하나님 앞에 죄책감이 들었지만 
하나님께 '다시는 이런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약속을 못 했어요. 

그런 세상에 영화들을 보지 않고 살면,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았어요. 
그 이유는, 아직도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지 않으니까, 
그러면 나에게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에 대해서 잘 분별이 안 되었던 거죠. 

근데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서, 완전히 뒤집어졌어요. 
음란한 것이 주는 그 무서움과 고통을 알게 되니까요. 

◑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약4:9절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어떻게 보면 '아니, 예수 믿는게 이렇게 힘들까?' 이런 생각도 들어요. 
슬퍼하고 애통하고.. 웃지 말고 애통해 하라.. 즐거워하지 말고 근심으로 바꿔라...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심정이에요. 
오늘 하루도 뭐 웃을 일도 있을 수 있죠. 우리에게 즐거울 일도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웃거나 즐거울 수가 없어요. 나라를 생각하면... 사회를 생각하면... 
우리는 항상 이와 같은 문제들 속에 있어요. 

▲저는 전에 설교를 할 때 '아, 교인들을 많이 웃겨야 되겠다.' 
그래서 재미있는 유머, 이런 것들을 일부러 막 찾아서 모아둘 때도 있었어요. 

왜냐면 그렇게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설교를 할 때 항상 교인들을 몇 번을 웃겨야 된다. 그래야 교인들이 좋아한다.' 
그게 잘하는 설교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요즘도 어느 목사님은, 계속 유머를 모으는 분이 있어요. 
그분 설교를 들어보면 진짜 썰렁해요... 

설교를 앞두고 기도해 보면, 반드시 하나님이 (웃음이 아니라) 울게 하세요. 
저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그리고 성도들이 겪는 여러 가지 영적인 어려움들,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시험들...
이 세상이 악한 것 때문에 오는 여러 고통스러운 일들 때문에... 그냥 울게 돼요. 

주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건 눈물이에요. 
울고 애통하고... 

그런데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부터 진짜 기쁨을 주시는 거예요. 
그게 진짜 중요한 거죠. 


◑4:10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10절에서는 '주님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말씀도 여러분이 꼭 붙잡으세요. 주님이 주시는 약속이니까. 
내가 스스로가 만든 것도 아니에요. 
주님의 말씀이니까,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주님이 저를 높이시고, 주님이 우리 가정을 높이시고, 
주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를 높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면,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대단히 중요하죠. 

▲그런데 여기도 역시 전제가 있어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8절과 똑같은 구조예요. 
'너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8 

여러분,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와, 하나님이 높이는 자는 
사실은 같은 내용이에요. 

여러분 주변에 하나님이 정말 저 사람과 가까이 한다고 느껴지는 분은, 
여러분들의 마음으로부터 그를 높이고 있을 거예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분이, 가장 높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이게 돼요. 
'하나님이 저 사람과 가까이 계셔!' 이렇게 믿어지면요. 

보디발이 주인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과 같이 계신다는 것을 보디발이 알았어요. 
그때부터 보디발이 종인 요셉을 높여요. 가정에 총무로 세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거 하고, '하나님이 높이시는' 거하고는 같은 내용이에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사람들이 알면, 사람들이 나를 높이게 돼요. 
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 높아지려고 할 이유가 따로 없어요. 

근데 이게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낮추면.. 나를 낮추면..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높여 주십니다. 

이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는 것임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게 뭔가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낮추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어떻든지 사람들 앞에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할 건 자랑하고, 
알릴 거는 알리고, 스스로 자존심을 세우고... 그게 세상이 가르치는 교훈이에요. 
그게 세상 처세에요.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죠. 
근데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건 끔찍한 일이에요.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끔찍한 일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기독교의 아주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가 엄청난 분량의 <신학대전>을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Summa Theologiae
당시 모든 신학의 총집대성이죠. 그걸 써 낼 만한 능력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근데 그가 어느 날 성 니콜라스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1273년 12월 6일입니다. 그가 기록해 둔 날이에요.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가 기도 중에 하나님을 체험해요. 

구체적으로 어떤 체험이었는지는, 그는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였어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 그는 더 이상 신학 서적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쓸 수가 없습니다. 
난 내가 지금까지 썼던 모든 것이,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그동안에 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그렇게 책을 썼는데,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 보고 나니까 
'아, 내가 그동안 썼던게 다 지푸라기에 불과하구나.. 내가 정말 나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썼구나..' 
그 다음부터는 그는 책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를 낮추게 돼요. 
그래서 '이분이 하나님을 아는 분이구나/ 아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따금 이렇게 목사님들을 만나보면, 자기 자랑을 하시는 분이 계세요. 
자기 자신도 자랑하고, 시무하는 교회도 자랑하고... 

뭐 면전에서 뭐라고 말씀을 드리기는 좀 어렵지만 
'아 자기를 자랑한다는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 느낌이 확 와요. 

인간관계 때문에, 뭐 그 분의 비위를 맞춰 드리기도 하고, 이렇게 하지만 
마음에는 '아, 이분은 굉장히 수준이 낮으시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근데 문제는 그걸 깨닫고도, 나도 은근히 스스로 자랑할 때가 있어요. 
한동안 저희 교회 예배당 건축이 다 끝나고 
누가 우리 교회를 방문하면 '꼭 여기(본당)를 데리고 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이 (넓은) 예배당을 한번 보라' 그 말이죠. 
대부분 손님들은 여기 본당에 들어오면 '우와 너무 놀랍다' 
'뭐 이런 예배당이 있는 줄 몰랐다고' 뭐 감탄을 하세요. 

그러면 저는 겉으로는 부인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죠. 멋있지요' 하고 인정해요. 

제가 다른 사람이 자랑하는 거 보면 '저 분은 수준이 아주 낮구나' 이렇게 판단하면서도,
나는 또 은근히 나를 자랑하려고 하는게... '아,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죄성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요.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려고 하면서, '자랑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인가'
를 강조했지요. 
기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에요. 그건 무서운 죄예요.

로마서 1:29~32절에 보면, 사형에 해당되는 죄의 목록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랑하는 겁니다. 

여러분 자랑하는 것은, 어떤 죄와 같은 반열이냐? 
추악, 탐욕, 살인, 분쟁, 사기, 부모를 거역함, 약속을 어김,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 
이런 죄와 똑같아요. 자랑하는 자도 사형에 해당된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 정확하게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은근히 자랑해요. 

하나님이 성경 말씀에 기록한 것 중에, 정말 믿어지지 않았던 말씀이에요. 
고전1:27~28절 '하나님이 일부러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은 자, 
가진 게 없는 자를 택하여 쓰신다...' 이 말씀은 정말 믿어지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왜 그러실까?' 

그건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고전1:29절에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거예요. 
사실 자랑은 자기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높이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은근히 자기 것이라고 자랑하면, 그건 도적질을 하는 거지요. 
그걸 모르니까 은근히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고... 

교회 안에서도 직분 문제 때문에, 우리 마음이 얼마나 복잡해요? 
그게 마치 계급인 것처럼, 직분이 있는 사람도 스스로를 높이고, 
없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시기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시험 들고... 몰라서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으니까요.

자랑할게 많은 것은, 그것은 절대로 복이 아닙니다. 
가문이 좋고, 능력이 많고, 인물이 잘생겼고, 소유가 많고, 출신 학교가 좋은 거... 
영적으로 보면,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왜요? 자랑하지 않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아마 인물이 잘 생긴 분들은 다 공감하실 거예요.
그건 깨닫고 보면, 
아 그건 나에게 있어서 정말 하나님이 나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내게 주어진 중요한 연단과도 같아요. 그 시험을 이기라는 거죠.

우리가 진짜 자랑하려면, 언제나 주 안에서 자랑하라 그랬어요. 
고후10:27절에 '주 안에서 자랑하라'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자랑하는게 어떤 건지 
로마서 15:17~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 그거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은 자랑을 꼭 하나만 했어요.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것!
그거 하나만 자랑한 거죠. 여러분도 꼭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자랑할게 있다면, 주님이 역사하신 것만 자랑하는 거죠. 
일절 다른 것은 자랑하지 않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세요.
나는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이 하세요.

여러분, 혹시 우리 교회 교인인 것을, 다른 교인들에게 자랑한다면 
그건 완전히 바보 같은 신자예요.
혹시 주변에 그렇게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인정하지 마세요. 

영성일기 쓰는 거 자랑하는 분도 있더라고요. 
혹시 여러분 주변에 영성일기 쓰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분이 보인다면, 
'아 저분도 아직 진짜 예수님의 사람은 아니구나' 생각하시면 돼요. 

또 유기성 목사랑 친한 거 자랑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저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알면 돼요. 
그런 사람은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우리가 자랑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밖에 없어요. 

우리가 영성일기를 쓰는 것도,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드러내자고 
우리 자신을 매일 다독거리면서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기록하는 것인데 
그것 자체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거잖아요. 

우리가 진짜 예수님만 자랑하고 나 자신을 완전히 낮추면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나를 높이세요. 
이건 약속이에요. 4:10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고 싶으신 거예요. 
이 약속이 여러분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나와 가까이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높이신다'고 하신 말씀을 
여러분이 붙잡으세요. 이것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 위하여 여러분도 주님께 가까이 가세요. 

그리고 주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세요. 
내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오직 순종뿐이지... 내 고집도, 내 생각도 아닙니다. 
오직 순종뿐이에요. 그러면 나머지는 주님이 일하세요. 오늘이 밤에도 역사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