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2 12 바울,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다 - YouTube
◈바울,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다 행16:1~5
▲도입 /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선교여행을 시작했습니다.
16:1절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차선교여행을 시작하면서, 바울이 처음으로 찾아간 지역이 어디죠?
더베와 루스드라 라고 말합니다.
지도를 한번 보시겠어요? 여기가 더베, 루스드라 입니다.
2차선교여행은, 안디옥 교회에서 육로로 갑니다.
더베와 루스드라는 바울이 1차선교여행 때 찾아갔던 곳입니다.
그때는 더베가 마지막 방문지였습니다. 1차선교여행의 반환점이었죠.
2차선교여행 때는, 육로로 더베를 먼저 갔다가 루스드라로 갑니다.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다
이때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서 선교여행에 동참시킵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스치듯 지나가는 그런 만남이 아닙니다.
바울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만남입니다.
오늘 이 만남을 시작으로, 바울과 디모데는 평생을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디모데는, 거의 모든 바울의 사역에 빠지지 않고 동참합니다.
3차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때까지,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동행합니다.
바울의 사역에서 끝까지 남아서 함께한 동역자가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떠나는 사람이 있고, 새로 조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도 보면 중간에 떠났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끝까지, 바울의 순교시점까지, 바울과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보낸 서신서의 대부분을 보면,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문안인사를 했습니다.
편지를 시작하는 서두에, 꼭 자기 이름과 나란히 디모데의 이름을 넣었습니다.
고후1: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인데요. 바울은 디모데를 넣어서 인사를 건넵니다.
이 밖에도 '바울과 디모데' 라는 표현이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에도 나옵니다.
총 6통의 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문안인사를 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서신을 같이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했던 거죠.
뿐만 아니라 바울이 그의 죽음을 앞두고 보낸 편지가 바로 디모데전후서인데,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죠. 그만큼 디모데는 바울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느냐?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르켜 '아들'이라고 불렀고요.
디모데도 바울을 아버지로 믿고 따랐습니다.
물론 육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니었죠. 아시다시피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태 솔로이고요. 그러니까 육적인 아들이 아니라, 영적인 아들이었죠.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 있다면 디모데였습니다.
그 증거가 성경 곳곳에 나오는데요.
고전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냈었으니'
딤전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딤후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이처럼 바울과 디모데는 동역자 그 이상의 관계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누구도 대체할 수가 없는... 그렇게 긴밀하고 친밀한 사이였던 거죠.
그런데 이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이, 성경 어디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가요?
바로 오늘 본문에 처음 나옵니다. 오늘 만남을 시작으로 둘의 관계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누가는, 이들의 만남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는, 디모데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합니다.
▲먼저 누가는 디모데의 가족을 소개합니다. 16:1절에 보시면
'그의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라고' 말합니다.
'믿는 유대 여자'라는 말은, 유대교 신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유대교였는데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16:1
그러니까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였던 거죠.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 가정에서 자랐다는 얘기겠죠.
그런데 디모데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3절에 나오는데요.
3절에 보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 인줄 다 앎이러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게 퍼뜩 캐치가 안되는데,
이 부분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헬라인 이었는 줄을 알밀어라' 라고 과거시제로
아버지를 설명하죠. they knew all that his father was a Greek. KJV
그러니까 현재는 그의 아버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버지가 죽어서 안 계신다는 뜻입니다.
언제 돌아가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디모데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디모데를 가리켜 '제자'라고 부릅니다.
16:1절에 '디모데 라는 제자가 있으니'
'성도'라는 표현은 나중에 쓴 말이고, 당시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의 믿음이 얼마나 좋았냐면요. 2절을 보면
16: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자기 동네 루스드라 뿐만 아니라, 인근 이고니온 이라는 곳에까지 *30Km 떨어진 곳
디모데의 믿음이 소문이 났습니다.
30Km가 떨어진 곳에서도 칭찬을 받을 만큼, 디모데는 믿음이 좋았습니다.
바울이 봐도 믿음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를 선교여행에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안 그래도 바울은 바나바와 헤어진 상태 아닙니까.
바나바뿐만이 아니라, 마가요한과도 헤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더욱더 눈에 들어왔겠죠. *대체 요원으로
'디모데가 빈자리를 채울 수 있겠구나...'
물론 바울한테는 실라 라는 동역자가 있었는데, 두 사람 만으로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침 디모데 라는 믿음이 좋은 청년이 있는 겁니다.
더군다나 디모데는 선교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유대인 아닙니까.
그러니까 유대인들을 상대하기가 어렵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또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 그러니 헬라인, 이방인들도 상대하기가 적합한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생각을 한 거겠죠. '디모데를 만난 게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겠구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동역자일 수 있겠구나' 그래서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았던 디모데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가 3절에 나오는데요.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디모데는 아직 할례를 받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
사실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렇죠?
앞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를 했었었죠. 행15장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에게는 왜 이게 문제가 되는 거죠?
선교를 할 때, 특별히 유대인들을 전도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디모데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모두가 빠짐없이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유대인인데, 아직까지 할레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면, 그도 아버지를 따라 헬라인 아닌가요?
아닙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모계 혈통을 따랐습니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가 이방인이더라도 자식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죠. 그러니 디모데 역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청소년이 될 때까지도,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디모데가 사는 곳이 루스드라인데, 이 루스드라에는 유대인들이 거의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당도 없는 곳이었죠.
그러니까 디모데가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방인이었던 거죠.
더군다나 아버지가 헬라인 입니다. 그러니 주변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권유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던 거죠.
그런데 이게 선교를 나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선교에 걸림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바울의 선교를 보면, 한 가지 패턴이 있었는데,
바울은 항상 유대인 회당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세계 어디를 가도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어디를 가도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당을 지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았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 둘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롬1:16
유대인들은 할례를 굉장히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러 온 유대인 디모데가, 할례를 아직 받지 않은 겁니다.
그러면 복음을 듣는 유대인 입장에서는 어떠한 생각이 들겠어요?
'저 이방 땅에 사는 유대인 디모데는 대놓고 유대인을 무시하는 사람이구나.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매국노, 변절자인가보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마음의 벽이 단단히 쳐지는 거죠.
그러면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예 처음부터 유대인들이, 디모데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디모데를 유대인 회당에서 쫓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했던 것입니다.
유대인 전도를 위해서요. 디모데가 유대인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를 위해서 할례를 받게했던 것입니다.
고전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로다'
만일 디모데가 이방인이었다면 할례를 받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또 수제자 중에 디도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도에게 끝까지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갈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그리고 나서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선교를 다닙니다. 그게 4절 말씀인데요.
16:4절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먼저 여러 성으로 다닙니다. 여기 '여러 성'은 바울이 1차선교여행 때 다녔던 곳일 것입니다.
그곳들을 다시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찾아가는 거죠.
그리고 거기서 어떤 메시지를 전했느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모들이 작정한 규례를 전했다'고 말합니다.
이 규례들은,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 내용을 말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리새파 교인들 때문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너희들이 받은 구원이 취소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방인 신자 너희들이 지켜야 할 규례가 있다.' 네 가지 규례가 있었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말라,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
피채 먹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 이 네 가지 규정을 지키면 된다...'
그렇게 전도한그 결과가 무엇이죠? 5절인데요.
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이렇게 우리는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디모데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누가는 디모데를 '제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언제 제자가 되었는가요?
디모데는, 바울의 1차선교여행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1차선교여행 때 루스드라를 찾아갔습니다.
그 루스드라에 디모데의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디모데의 가정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디모데의 가족은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외조모, 모친, 디모데
유대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구약 성경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이 말하는 오실 메시아가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이 말하는 오실 메시아가 예수님이셨구나'
이때부터 디모데의 가정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디모데의 나이가 청소년 시기였을 것이다... 라고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은, 2~3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런데 불과 2~3년밖에 지나지 않은 그 사이에, 디모데의 믿음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앞에서 본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디모데의 믿음이 빠르게 자랐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3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어린 디모데의 믿음이 잘 자랐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이 디모데후서에 나오는데요.
딤후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위 구절에서 바울이 디모데의 믿음을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이죠?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 속에서도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디모데의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요?
거짓이 없는 순전한 믿음의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가정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기 전까지는 유대교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난 이후에는,
거짓이 없는 순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디모데는, 신앙의 영향을 가정에서 받으며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3:15절에 보면 '디모데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나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배웠다는 말입니다. 어디서요? 가정에서요.
어머니가 디모데를 데리고 성경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1차전도여행과 2차전도여행 사이의 2~3년 사이에)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누구시고, 또 구원은 무엇이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거짓없는 믿음을
어머니 유니게가 아들 디모데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아직 디모데가 어리다고 볼 때
그래서 디모데의 믿음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믿음은, 가정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본문에서 이 대목을 놓치고 가면 안됩니다.
여러분 자녀의 신앙교육의 책임은, 늘 부모에게 있습니다.
1차적인 신앙의 책임은, 교회가 아니라, 언제나 부모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늘 일관되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자녀의 신앙을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
그 자녀들의 믿음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아니라, 부모들에게 자녀들의 신앙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부터 출발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한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가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예배를 가르치고, 구원이 뭔지를 가르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치고.
죄로 인해서 타락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서
믿음의 유산이 이어져가도록 했습니다.
디모데도 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믿음의 기준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부모님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부모로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는가요? 이 시간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믿음의 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을 잘 가르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저 또한 부족한 게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자격으로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기록된 성경의 권위로
또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잘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
우리 부모 세대들이 잘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 성경에서 말씀하는 걸 보기 때문에
제가 또다시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구약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언제 세대가 망하는지 쭉 보십시오.
자녀들이 신앙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망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대표적으로 여러분 사사시대 아닙니까?
그걸 성경은, '다른 세대'라고 꼬집는 것 아닙니까?
삿2:10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부모로부터의 신앙의 교육이 가정에서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걸 우리가 보면서도, 똑같은 절차를 밟는 게
여러분 어리석고 미련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단순히 교회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디모데같이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자녀가
우리 교회에서도 나오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이끌어갈 믿음의 사람이, 우리 교회 밖이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 나오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마음 동일하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님들의 세대들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녀들을 위해서 반드시 기도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이게 정답을 알아도, 사실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가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 아이들을 잘 지켜주십시오' 여러분 그런 기도 말고요,
'내 자녀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아이들의 점수가 아니라, 아이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내 자녀들의 가치관과 삶의 기준이 성경적으로 변하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내 자녀들이 몇 살이든 상관 없습니다.
평생 우리가 부모로서 주님 앞에 설 그날까지,
우리들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성격과 기준대로 자녀들을 교육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방법대로 가르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우리가 더 주님 앞에 철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의 삶으로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말만이 아니라, 기도를 하십시오.
'성경이 중요하다'고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을 중요하게 여겨서 읽고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 나는 저녁 내내 드라마를 보면서, 자녀들에게는 '성경을 읽으라'고 말한다면,
그건 교육이 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보는 것으로 교육을 받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신앙을 '보배'라고 정의합니다. 신앙은 '보고 배우는' 겁니다.
보는대로 배웁니다.
그러니 우리 부모님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부터 똑바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라는 것을, 여러분의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여러분들이 먼저 주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목숨을 걸고 자녀들 앞에서 지켜주십시오.
그래야 아이들이 여러분 주일성수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주십시오.
자녀들에게 예배를 똑바로 드리라고 말해놓고, 나는 다리 꼬고 예배 드리고,
삐딱하게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아이들은 그걸 그대로 무의식 중에 배웁니다.
내가 말씀을 들으면서 졸고 있다면, 그리고 찬양을 건성으로 드린다면,
우리 아이들도 예배를 그렇게 똑같이 가볍게 여길 겁니다.
예배뿐만이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그렇게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두려운 얘기 아닙니까?
우리가 그렇게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 자녀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진 않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는데요.
여러분 이 예배가, 아이들에게 예배를 가르치는 너무나 귀한 시간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로부터 예배를 배우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시간이 아니면, 예배를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아이들의 믿음에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통합예배를 우리가 작년부터 시작했는데요.
통합예배를 시작하는 그날, 설교에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세대가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떠들고 조는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예배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같이 예배를 드린지 1년이 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 부모님들로부터 예배를 배우고 있습니까?
아이들은 다 보고 있습니다. 보면서 사실 예배를 무의식 가운데 배우고,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말하지 말고요. 내가 예배 시간에
정말 주님 앞에 똑바로 예배를 드리셔야 합니다.
아이들이 졸고 있고, 장난을 치더라도 여러분 그대로 놔두십시오.
속이 터지더라도 그냥 놔두는 게, 그들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고, 최고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변화시켜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놔두시고,
먼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리는 모습을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예배할 시간만큼은, 다른 어떤 곳에도 한눈 팔지 않고
하나님께만 온전히 예배한다는 모습을, 끝까지 유지해 주십시오.
여러분 그것이 진짜 신앙의 교육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러분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려주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부터 예배를 드려야, 아이들이 교회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정 예배를 시작한지가, 이것도 1년이 넘었는데요.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오래전에 제가 도서관에서 읽은 책에서, 어느 목사님이 겪은 일화가 기억납니다.
교회 안에서 지나가다가 어린 학생을 만났다고 합니다. 초등학생이었다고 하는데요.
목사님이 아이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너는 예수님을 아니? 너랑 예수님을 믿니?'
아이가 '믿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어보셨대요.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니?'
그때 그 아이의 대답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믿게 되었어요!
엄마 아빠가 가정 예배 때,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주셨는데, 그날 믿게 되었어요!'
이 얘기를 듣고, 그 목사님이 너무나 놀랐다고 합니다.
'와~ 지금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정이 있구나!'
그 당시 그 교회는 자체적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놀란 거는,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자녀들이 정말 믿음이 생기는구나!'
오늘날 보기 드문 모습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원래 가정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들을 다시 가정예배로 데려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자녀를, 부모인 여러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십시오.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온전한 예배자로 서십시오.
그리고 세상에 빼앗겼던 여러분의 자녀들을, 가정으로 오늘부터 다시 데리고 오십시오.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또 유니게와 로이스와 같은 믿음의 부모가 되기를
그래서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의 무너진 가정예배부터 다시 세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날처럼 사실 가정들이 이렇게 무너지고 있는 시대도 없습니다.
믿음의 가정이라 할지라도,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사실 세상의 가정과 구분이 안 될 만큼, 그 가치관과 기준이 무너진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가정만큼은, 믿음의 가정으로 구별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모인 우리 교회의 한 가정, 한 가정은
디모데의 가정처럼 '거짓없는 믿음'의 가정으로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더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만납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과 함께 교회를 세우는 신실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을 이어서 다음 세대를 이끄는, 차세대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디모데 라는 복음의 열매가 맺힌 곳이 어디죠? 바로 루스드라 입니다.
루스드라 어떤 곳입니까? 바울이 1차선교여행을 할 때 가장 큰 고난을 받았던 곳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을 성 밖으로 끌어내 버렸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곳이 루스드라 였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 중에, 가장 힘들게 사역했던 곳이 루스드라 였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가장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곳이 루스드라 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1차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가장 큰 박해를 당하고,
사역이 가장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곳이 루스드라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루스드라 에서의 사역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디모데라는, 장차 교회를 이끌어갈 큰 열매를 주셨습니다.
바울의 1차전도여행의 가장 큰 열매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가
이 루스드라에서 나왔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하나님은 디모데라는 가장 귀한 열매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알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가장 어렵고 힘든 사역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 열매가 없고 핍박과 반대만 가득하게 보이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2~3년 후에 디모데라는 제자를 주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 때문에, 오늘도 설교를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설교를 하다보면, 제가 죽을 쑬 때가 있습니다.
물론 매주 잘 하는 설교는 아니지만, 어떤 날은 특히 죽을 쑬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설교를 준비하고, 또다시 설교를 하는 이유는,
설교를 죽을 쑤는 그 처참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그 설교를 통해
누군가에게 은혜를 주실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망했다' 싶었던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누군가에게는 말씀을 듣게 하시고, 누군가의 믿음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것을, 사역해 오면서 경험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인생의 가장 실패처럼 보이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아니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가장 귀한 열매를 맺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그 곳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디모데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바울이 가장 실패한 곳에서, 그리고 가장 '여기는 안 되겠다' 생각한 그 곳에서
디모데가 배출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디모데와 같은 열매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게는, 실패의 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안 된다' 생각이 들지라도, 하나님께는 '안 된다'는 절망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실패라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실패라고 느끼는 그 순간이,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의 삶 가운데 보여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