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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해도 되는가?

LNCK 2024. 7. 2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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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7soF8FH1sDk

 

이혼해도 되는가?            막10:1~12       2021.06.20.     설교문 스크랩

 

※이혼의 위기에 처해도, 5년 가량 이혼하지 않고 버티면, 다시 합쳐질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는 예민한 주제이기 때문에 쉽지는 않습니다.

이미 이혼을 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가정이 아직 깨어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깨어질 단계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결혼하지 않아 공감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문화와 그리스도인으로 싸워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곧 십자가로 가야 할 지점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특별히 이쯤에는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공격이 더 심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로 와서 질문을 하는데,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질문입니다.

 

본문 막10:2절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바로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라고 되묻습니다. :3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4

그들은 모세를 언급하면서 이혼의 합법성을 주장합니다.

 

이 내용이 신24:1-4절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초점은 이혼 증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법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진다면

그냥 보내지 말고 이혼 증서를 써주고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혼 증서를 써 줌으로 이혼을 합리화시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는 이혼을 허용한 것이 아닌데,

이혼 증서를 써주면 헤어질 수 있다는 쪽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말씀의 왜곡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본래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확대하고, 분리하면 축소시킵니다.

 

주님은 왜 이혼 증서를 써주게 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만들어진 법이었습니다.

 

이혼하려면 이혼 증서에 합당한 이유를 기록하고, 공증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정당한 사유 없이 이혼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 시대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남편들이 편리하게 이혼을 하라고 만든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남성 중심의 사회로서, 여자를 버리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이혼에 대한 정당한 사유는, 배우자의 음행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이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혼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이혼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했습니다.

 

고전7:11절을 보면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갈라섰다면 혼자 지내든지, 다시 합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이혼을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모든 것을 이기적으로 사용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살다보면 힘들 때가 많습니다. 분명 멋져 보여 결혼했는데

얼마 못 가서 “아차 실수였구나!”라는 순간이 옵니다.

 

그런데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만나 함께 산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요즘 시대는 예수님의 시대와 상황이 좀 다릅니다.

 

미국과 같은 사회는 이혼이 위자료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곳에서는 남자가 이혼 몇 번을 하면 거지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시대에는 반대입니다.

이혼하는 순간 여자 쪽이 생존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합니다.

평소에도 여성의 지위가 낮은데 이혼까지 하면 약자 중의 약자가 됩니다.

성경이 왜 고아와 과부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대목입니다.

 

▲요즘은 이혼이 흔해졌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혼의 이유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무너지고 깨어지는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이혼이 잦아진 원인 중 하나는 ‘자아실현’에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시대는 너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자아가 강조될수록 상대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자신의 성공과 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싫으면 끝입니다.

나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되면, 얼마든지 배우자를 버릴 수 있습니다.

요즘은 자기가 낳은 자식까지도 버리는 세상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강요입니다.

나를 어떤 틀 안으로 집어넣으려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라는 틀에 나를 집어넣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내가 이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며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따집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결혼과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결혼의 손익계산이 분명한 것입니다.

내가 손해라는 결론이 나면, 더 이상 유지하지 않습니다.

 

미디어들도 부채질을 합니다. 산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생활을 취재하는 프로그램,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생활을 보여주면서, 싱글의 자유를 누리라고 자극합니다.

 

깨어지는 가정을 보십시오. 부부가 서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결혼을 했다면, 피해자 의식은 불가피합니다.

 

우리는 보통 언제 상처를 입습니까? 주로 이기심 때문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요구조건이 늘어날수록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대로 안되면 결국 상대를 비난하게 되고, 행복은 더 멀리 날아갑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행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입니다.

 

잘못된 지도를 가지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반대 정신이 필요합니다.

결혼한 순간부터 자기중심적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옮겨야 합니다.

나의 행복이 아닌 상대의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결혼에 대한 로망은 빨리 깨어지고 혹독한 고통을 당합니다.

어제까지 함께했던 사람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큰 아픔입니다.

이혼의 이유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정말 이혼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지혜로운 대답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 대답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본문 막10:6-9절에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보다, 결혼에 대한 원본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절대적 기준입니다.

 

사회적 통념, 문화, 전통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절대적 기준은 아닙니다.

세상의 풍조는 나날이 변해갑니다. 사람들이 만든 법, 전통, 생각도 변합니다.

사람들이 만든 것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창세기 말씀을 가지고 왔습니다.

성경은 결혼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를 말씀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법을 가지고 나와

이혼의 문제를 질문합니다.

 

그러나 이혼에 대한 답보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예수님은 언급하십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하나님의 디자인입니다.

 

창2:23절에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너와 나는 하나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태초부터 주신 결혼의 기준은, 이혼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오다가다 눈이 맞아 결혼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이 작동되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인간대사로만 보면 안 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신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억지로 나누려고 하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혼의 과정에 왜 그렇게 극심한 고통이 찾아옵니까?

하나님이 한 몸으로 디자인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눌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나누니까 극심한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결혼한 순간부터 한 몸으로 존재합니다. 마19: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오늘 12절과도 동일한 표현입니다. 왜 다른데 장가들었는데 간음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이미 결혼한 사람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헤어져도 한 몸의 개념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다른데 장가드는 것이 간음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팔과 다리를 떼어버릴 수 있습니까?

나눌 수 없다는 원리를 이해해야 이 말씀이 와닿을 수 있습니다.

 

힘들면 헤어지는 것이 쉬운 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헤어지는 것이 쉬운 길이 아니고 훨씬 더 어려운 길입니다. 후유증이 너무 많습니다.

 

이혼은 한 가정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녀들, 양가, 그리고 사회 전체로 연결됩니다.

특히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이 겪는 아픔이 큽니다.

이혼을 허용하는 문화는 세상 전체를 어둡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라는 것은 창조의 원리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것을 질서있게 움직여 나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단위입니다.

결혼에 대해서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하고 선명합니다.

 

▲바울은 이혼을 허용한 것처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고전7:15절에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가능한 부부는 하나로 가는 것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고전7:11절에 보면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성경은 줄곧 이혼을 금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갈라서지 말아야 하지만 만약 갈라섰다면 혼자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혼자 지내기 싫으면 다시 화합하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하나됨입니다.

둘이 아니요 한 몸이라는 결혼의 핵심적 원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결혼했다면 여차하면 갈라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어떻게든 함께 살라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헤어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아내려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이 처음에는 하와를 향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탓, 여자 탓을 합니다.

 

문제를 자기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찾으려고 한다면 이미 위기입니다.

이혼하는 가정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허물과 약점이 많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용납하고 품어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길이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배우자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 마땅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한히 받고, 끊임없는 용서와 이해를 받았음에도

함께 사는 배우자에게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된 삶입니다.

 

▲결혼을 신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감정이 필요하지만 감정에 들뜬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자들은 결혼할 때부터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는 두 눈을 부릅떠야 하고, 결혼하고 난 다음에는 한쪽 눈을 감아야 합니다.

포르투갈의 속담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전쟁에 나갈 때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고 합니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 나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전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결혼은 그것보다 더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바꾸려고 하면 안 됩니다. 결혼은 물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는 자동차 타이어 바꾸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최고의 모습은 하나됨입니다.

여차하면 헤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자녀들에게 보여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가정의 불행이고 사회 전체의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결혼을 가볍게 다루는 문화 안에 살고 있습니다. 신자들도 여기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결혼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부부관계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 신자는 무엇으로 구별될 수 있습니까? 결혼의 신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빛 된 삶입니다. 가정은 다른 어떤 공격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왜 가정은 모든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지켜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이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를 깨뜨리고 창조의 계획은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샬롬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임하는 축복이 큽니다.

시편 133편 1절에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나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요17:21절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엡1:10절에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의 중요한 원리는 통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하나됨은 하나님의 뜻이고, 성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는 통일이 있습니다.

 

▲하나됨을 유지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대립과 갈등을 가져오고 깨어지는 위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들을 이겨내는 복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 속에 위기가 오지만, 우리의 신앙의 성숙이 결혼 관계 안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처음 운전면허증을 따서 운전할 때 얼마나 위험합니까? 때로는 사고를 일으킵니다.

그렇다고 운전을 그만두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운전실력이 늘어나면서 편안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운전에 익숙해지면 사고날 일도 거의 없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환상적인 조합이란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요령이 생깁니다.

성숙해져 가면서 싸움도 줄어듭니다. 성숙이란 상대의 약점과 허물을 받아들일 용량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싸울 일인데 어느 순간 씨익 웃고 넘어가는 여유가 생깁니다.

성숙은 자아중심에서 이타적으로 이동해가는 것입니다.

 

갈2:20절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을 가정 안에서,

부부의 관계 안에서 매순간 경험해야 합니다.

 

선교지에서 순교할 일은 우리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선교지에서 죽으려고 하지 말고, 가정에서 순교하시길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복종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만족을 위해 내가 더 희생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결혼은 짐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는 일입니다.

 

이 사람을 만나 내가 고생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은 만나 내 배우자가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이혼한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 “내가 조금 더 노력했더라면….”라고 후회를 합니다.

결혼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그냥 경륜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깊어집니까? 영적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과 부부생활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부부관계가 달라져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도 가정에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배우자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는 것도 성경적 태도가 아닙니다.

가정의 건강한 구도가 깨어집니다. 우리는 부부관계에 가장 많은 것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가정이 많이 무너졌던 이유는 성경적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는 불륜이 넘쳐납니다. 그 속에서 자녀들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밤 문화가 발달하고 성 윤리 의식이 약한 나라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가정을 떠난 행복과 번성은 하나님이 보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큽니다. 기본 중의 기본은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는 일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건강한 교회도 없습니다.

 

이 땅의 무너진 가정을 세우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가정을 가정답게 살려내는 것이 복음의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됨을 지키고자 애를 쓸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믿음이 어디에 필요합니까? 결혼관계에서 필요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견디는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름다운 가정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력과 열심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도우심이 절실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감당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깨는 쪽이 아니라 화해를 추구하시길 바랍니다.

갈라서야 할 현실적 이유들이 아무리 많아도

갈라서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힘쓸 때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됨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됨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