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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 초월이 답이다 엡5:15~21 2017.09.15. 녹취록 스크랩
전략 주1)
◑술과 방탕, 여기에 맞서 살아가는 삶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 엡5:18절에 보면,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로마서 8: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신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십니다. 구원 사건에는 성령의 개입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순간,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십니다.
신자라면 성령의 내주하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확인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함께 살아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만’은 가득 채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헬라어 원어상 시제로는 지속성을 말합니다. ‘계속 충만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한 번 채워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채워진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 충만은 한 번 채워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지배하시는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내 안에서 나를 완전히 지배하시는 상태가 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초월적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사로잡으시고 완전히 지배하셔서 나를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심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삶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삶입니다. 초월적 삶입니다.
초월적 삶을 살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최상의 상태로 극대화됩니다.
육체적 감각에 익숙해져서 살던 때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 등 모든 것이 다 축소됩니다.
지각이 희미해집니다. 감성, 지성, 의지력 등 모든 것이 깨어집니다. 의지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있는 내적 자원이 완전히 소멸되거나 마치 없는 것처럼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활성화되고 극대화됩니다.
의지력과 감성이 완전히 살아납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면,
내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통해 일어나는 역사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는 영적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충만함에 사로잡혀있을 때에는 말씀을 볼 때,
완전히 다릅니다. 지각이 열려있기 때문에 말씀이 빨아 당깁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에도 힘이 납니다. ‘그래,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결단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계속 입으면, 우리의 인생은 초월적 경험을 하게 되고,
초월적 삶을 살게 됩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자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자유가 뭔가 하면, 우리의 환경, 주변의 여론 등 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조금도 매이지 않고, 우리를 두렵게 하거나 우리를 핍박하거나 유혹하는 것의 영향을 받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령 충만은 위력적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을 때에 일어나는 현상
▲1. 첫째, 말씀으로 충만해집니다.
성령 충만은 감정적으로 들뜨는 것이나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요16:13절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최고의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채워져
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골3:1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말씀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 이미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마귀의 시험이 오자마자 예수님의 입에서는 말씀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귀 앞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며 마귀를 제압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말씀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주 뚜렷한 것은 내 안에 말씀이 충만해서
말씀이 내 안에서 술술 흘러나온다면, 성령 충만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깊이 스며들어 나의 영혼과 모든 지각을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움직이기만 해도 말씀이 나오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것도 진리로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모호한 개념이 아닙니다. 강력한 빛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전에는 알 듯 모를 듯 정리가 되지 않아 애매모호했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다릅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말씀을 묵상해보십시오. 말씀묵상이 즐겁습니다.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게 느껴집니다. 말씀에 귀와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령으로 기록된 성경이기 때문에
내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저절로 깨달아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라도 말씀을 깨닫습니다. 주의 영이 아이의 영혼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교수라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풍성해지면, 삶이 풍성해집니다. 말씀이 충만하면, 삶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왜 삶에 요동이 일어납니까? 말씀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식으로도 무장하면, 그 지식은 힘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자기 학문으로 사상적으로
무장되어있는 사람은 그것에 생명을 걸기도 합니다. 지식은 그렇게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내 안에 충만하면 담대해집니다.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천하를 다 가진 것처럼 부요해집니다.
돈을 가지고 있다고 든든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이 우리를 든든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든든하게 하고, 우리를 견고하게 하고,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고,
우리를 부요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충만하면 부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충만히 있으면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상관없습니다.
진리가 나를 자유하게 하고, 나를 배부르게 하고, 진리가 나를 당당하게 합니다.
진리 안에서 충만하여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성령충만하면, 둘째, 바른 관계를 맺습니다.
본문의 뒤를 이어 엡6장까지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부부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열쇠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 엡5장 18절에 있습니다.
바른 인간관계를 맺게 하는 열쇠는 성령 충만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왜 힘듭니까? 오늘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정신 질환과 어려움의
원인은 인간관계입니다.
사람들은 관계를 잘 맺지 못합니다. 관계 맺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 인간관계를 풀어가려고 하면 힘듭니다.
자칫하면 한순간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격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원만한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과 부딪치지 않고 어느 정도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문제가 터지면, 관계가 깨어져버립니다.
잉꼬부부로 살던 사람도 그 사이에 문제가 생기니 쉽게 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격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좋은 인간관계를 이루고 살아간다면, 천국과 비슷한 삶일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것이 샬롬입니다.
샬롬은 모든 관계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차별도 없고, 구분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샬롬이고 천국입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관계 사이에서도 긴장과 갈등과 스트레스와 폭력과 미움과 비교와
질시와 다툼과 분열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지 어렵습니다. 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쉽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렵기 때문에 인생이 힘듭니다.
△엡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종과 주인과의 관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직장에서 말도 안 되는 상사에게 복종하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고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므로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의 인격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배우자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 있을 때에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인간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에 속하는 아홉 가지의 성품이 내 삶 속에서 자연히 표출되기 때문에
회복이 일어납니다.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가 자꾸 삐걱거릴 때에 성령 충만이 답입니다.
△부부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도 성령 충만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합니다.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깁니다. 나를 희생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정욕이 죽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타적 삶을 살게 됩니다. 희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힘으로 가능합니까? 오직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온전한 가정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 답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이요, 사랑 충만입니다.
사랑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하면, 내 안에 미운 사람이 없어집니다.
성령 충만하면 미움의 영이 내 안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미워하고 싶은데, 미워해야 할 것 같은데,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내 감정을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축복은 관계를 통해 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날이 갈수록 관계 회복이 일어나고, 관계가 풍성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사랑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성령충만은 셋째, 생각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로마서 8:5절의 말씀에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내 생각을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지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육신의 생각을 두면 어떻게 됩니까?
로마서 8:7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만 골라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을 그대로 두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생각의 힘을 무시하지 마세요.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 행동하는 것이 내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얼마든지 숨길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특히 홀로 있을 때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그것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짜 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생각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그러므로 생각을 그대로 두는 것은 마귀에게 점령당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요즘 무슨 생각을 많이 하십니까? 그 생각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그 생각을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미디어들이 많습니다. 미디어들은 시각적인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 시각적인 것, 이것의 힘이 굉장히 강력합니다.
사실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의 힘이 더 강력합니다.
그리고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생각에 굉장히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점검하셔야 합니다. 책도 함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합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생각을 지배하니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생각이 넘어가면 다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세상에 빼앗기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놓으려고 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 8:6)”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다 보면, 우리 안에 거룩한 생각이 들어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러면 죄 지을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죄가 아예 생각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찹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 충만입니다.
골로새서 3장 2절에 보면,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한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내가 내 생각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관하십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생각의 활성화가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생각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통찰력과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고,
지력, 직관력, 분별력 등이 생깁니다.
이것은 술 취함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면, 분별력, 통찰력, 직관력 등이 무뎌집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직관력, 분별력 등이 살아납니다.
△여러분,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생각 속에 고민과 염려와 잡다한 공상들로 가득했습니다.
뇌 속에 뭐가 있을 것 같습니까? 염려와 잡다한 고민과 공상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아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어두운 생각이 지배합니다.
그러면 삶이 어두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 안에서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새로운 생각을 불어넣어주실 것입니다.
하늘의 생각, 거룩한 생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을 불어넣어주실 것입니다.
그 속에서 놀라운 지각이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언적 말씀이 보일 것입니다.
▲4. 성령충만하면 넷째, 바른 결정을 내립니다.
성령께서 나를 주도하시도록 성령께 나를 맡기면 나에게 결단력이 생깁니다.
무언가 결정할 때 성령께서 영향을 끼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의지를 바꾸어놓으십니다,
의지박약하던 사람이 저돌적으로 변합니다.
본문 엡5:16절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시간의 질량이 높아지고, 시간의 방향이 잡힙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분명히 이해하기 때문에 탐욕과 정욕을 따라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공상과 잡념과 염려로 인해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시간에 대한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면, 시간이 극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 담대함을 주십니다.
우리는 결정을 잘 하지 못합니다. 결정이 잘못되어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결정을 잘 하지 못합니다. 계속 갈등하고 미룹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오래 갈등하지 않습니다. 갈등은 짧게 해야 합니다.
내가 고민하기 때문에 쉽게 결론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갈등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선명해집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인데, 시간을 끄는 것, 그것이 방탕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방탕은 딴 게 아닙니다. 시간 낭비가 방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선용하지 않고 다 쏟아버리는 것, 그것이 방탕하는 것입니다.
△왜 결단하지 못하고 세월만 보냅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왜 두렵습니까?
부정적인 결과가 상상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데, 최악의 상황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고, 선뜻 하지 못합니다.
그 일을 했을 때, 최선이 될지 최악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최악을 먼저 상상합니까?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시지 않고,
인간적인 관점으로 상황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희망보다 절망적인 상황이 더 크게 보이면 행동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선뜻 행동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은 곧 믿음 없음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추측이 발목을 잡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10년이나 20년이 지나도 똑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담대함입니다.
행4:31절에 보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담대함이 생깁니다. 이 당시에는 담대함이 없으면, 말씀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핍박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성령 충만과 담대함은 따라 붙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의기소침하던 기질이 바뀝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특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두려움이 있습니다. 존재론적으로 불안이 있습니다.
거대한 벽과 같습니다. 그 벽을 넘어야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심리적 요법이나 마인드 컨트롤로는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생각하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완전한 지배 안에 들어가면, 생각에만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행동하는 신자가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행동 충만해집니다. 의지력이 강해지니까 행동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짜릿한 감정적 경험이 아닙니다.
의지를 바꿔놔서 구체적으로 행동하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야성적으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성 안의 장사가 되면 안 됩니다.
종이호랑이가 되면 안 됩니다.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성령 충만해지니까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겁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의지력과 결단력이 생겨 구체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두려움을 뛰어넘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5. 성령충만은 다섯째, 우리의 즐거움을 바꿔놓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기쁨을 찾습니다.
우리는 방탕함이 만연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유희적 삶을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즐거움을 주는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 헤맵니다.
즐거움을 주는 곳을 찾아 동분서주합니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곳을 찾아갑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상의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세상은 술에 취해서 즐거움을 구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쁨은 성령 충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본문 엡5:19절에 보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모습입니다.
성령 충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찬양이 무엇입니까? 찬양이란, 최상의 기쁨의 상태입니다.
육감적인 만족과 즐거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최상의 즐거운 상태에 빠져 찬송하게 됩니다.
찬송은 세상의 노래와 다릅니다. 세상의 노래는 사람을 흔들어 놓습니다.
사람의 혼을 흔들어놓습니다.
그런데 찬양은 다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온전히 열린 상태에서 하나님께 반응할 때,
우리를 묶고 있던 것이 모두 풀리면서 우리의 영이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상태야말로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성령께서 내 영으로 더불어 찬송하게 하시면, 내 안에 치유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 영혼에 행복감이 몰려오고, 걱정 근심이 사라집니다.
술을 마시는 세상 사람들은 술에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려고 할수록
더 많은 좌절과 절망을 맛보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즐거움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희락은 성령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 안에 희락이 넘칩니다.
성령 충만할 때에 느끼는 기쁨은 세상에서 느끼는 기쁨과 견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곧 기쁨 충만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밝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무슨 일을 하든 즐겁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즐거움이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데, 얼굴은 죽어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기쁨이 올 수 없습니다.
△아무 보상이 없는데도, 누구의 칭찬이 없는데도, 오히려 수많은 사람이 핍박하는데도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에요.
그는 사례를 받고 사역하는 오늘날의 목회자와 다릅니다.
그는 텐트 메이커(tent maker)였습니다. 생명의 위기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지하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그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직업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즐겁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즐겁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기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이 세상에 즐거운 일이 없습니다. 돈을 쌓아줘도, 잠시 기쁠 뿐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그러면 즐겁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기쁨이 없어집니다. 기쁨이 없으면, 모든 것이 끝난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찾아다닙니다. 즐거움을 찾아다닙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성령 충만하여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외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른 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재미있는 것, 예배드리는 것보다 신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기쁨 충만입니다. 성령께서 내 감정을 지배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둠의 감정이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초월적 힘이 작동하는 것 말고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초월적 경험 성령 충만입니다. 그것이 답입니다.
악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술 취함과 방탕함에 빠져 들어가는 문화의 탁류 속에
우리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는 비결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술 취함으로 세상의 방탕과 즐거움을 좇는 인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 답입니다.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성령 충만하면, 내 지각과 감정과 의지 등이 활성화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멋지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이 세상의 문화에 젖어 찌든 인생으로 낭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낭비하고 탕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답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탁월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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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전략된 부분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악한 시대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종말시대라고 합니다.
시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이 끝날지 언제 알 수 없습니다.
노아 홍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00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홍수로 심판하시는 날은 왔습니다. 노아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악하다는 것입니다.
본문 엡5:16절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때가 악하다’는 것은 악이 만연해있다는 의미입니다.
악이 보편화, 대중화, 문화화 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악의 흐름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부가 악입니다. 때가 악하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특징입니다.
▲본문에서 이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엡5: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악한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술 취함입니다. 술 취함은 방탕한 세상의 특징입니다.
이 세상은 다 술에 취해있습니다.
이 세상은 전체적으로 술에 취해있습니다. 세상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술입니다.
술을 가볍게 보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술 소비량이 OECD 국가 중에 3위입니다. 독주 소비량은 1위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를 조사한 결과,
188개국 중에 우리나라가 11등을 차지했습니다.
음주로 인한 손해비용이 의료비 연2조원, 생산성 손실 연6조원,
조기사망 연3조원 등 연 17조원이 넘습니다.
술은 감각을 무디게 하고, 우리의 지각을 둔하게 만듭니다.
본문 엡5:1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라고 했는데,
이 시대의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술에서 나옵니다.
타락하고 방탕한 세상은 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분별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술로 인해 분별력을 잃어버리니까
온갖 짓을 다 합니다. 실수하게 되고, 온갖 범죄를 저지릅니다.
술에 취하면, 방탕하게 됩니다. 육체적 감각에 의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육체의 즐거움을 좇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특징은 육체적 쾌락이 신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쾌락이 돈과 시간을 다 바팁니다.
육체적 만족에 집중하고 살면, 시간이 줄줄 새어버립니다.
거기에는 ‘세월을 아낀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본문 엡5:16절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제한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악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문화에 깊이 빠져버리면,
육체적 감각에 의존하여 살아가다 보면, 세월을 아낄 수 없습니다.
엉뚱한 데 (매일, 종종 술 마시는데) 세월을 쏟아버립니다.
▲본문 엡5:15절에 보면,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세에, 악한 시대에, 타락하고 방탕한 시대에 그냥 살면 안 됩니다.
그냥 생각 없이 살면 어떻게 됩니까? 악한 세상, 방탕의 문화에 오염되어 휩쓸려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악한 세상에서 방탕하지 않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비결이 나옵니다.
본문 엡5: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오늘날 사람들은 감각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술 취함이라고 했지만, 단순히 술뿐만 아니라,
돈과 이성 등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따르는 방탕하고 지혜가 없는 자, 어리석은 자,
악한 문화의 한가운데서 목표 없이 방향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립지대가 별로 없습니다. 중간지대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세월이 너무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이 빨아 당기는 힘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거나
-술에 찌든 이 세상에서 쾌락과 탐욕에 취해 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