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길이 막힐 때

LNCK 2024. 7. 25. 11:3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2023 02 19 / 길이 막힐 때 (youtube.com)

 

길이 막힐 때              행16:6~10                

 

◑4. '하나님이 마게도냐로 가는 계획을 미리 알려주지 않으신 이유'

위 단락이 하이라이트 입니다


◑도입/  아시아로, 비두니아로 가려던 길이 막히다

오늘 본문도 2차 선교 여행의 내용인데요. 
수리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출발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수리아와 길리기어로 갔습니다. 육로로 이동한거죠. 

1차 선교 때는 배를 타고 갔는데, 2차 때는 바울이 육로로 다닙니다. 
그 다음에 더베로 갔다가 루스드라로 갔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 합류시킵니다. 
그래서 선교팀은 바울, 실라, 디모데 세 사람이 한 팀이 되었습니다. 

먼저 이들은 '여러 성으로' 돌아다녔습니다.  16:4
여러 성은 바울이 1차선교여행 때 다녔던 곳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들을 지금 바울이 돌아다니는 이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이미 믿고 있는 이들을 양육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의 믿음이 잘 자라고 있는지, 또 신학이 바르게 유지되고 있는지 
또 장로들이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지... 세웠던 교회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어느새 바울은 세웠던 교회들을 다 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새로운 지역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특히 (소)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을 들고 가려고 했습니다. :6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여기서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말합니다. (아래 지도 참조)
오늘날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터키의 서쪽에 해당됩니다. 

아시아의 중심도시는 '에베소'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 가려고 했다는 것은, '에베소에 가려고 했다'는 말도 됩니다.
지금 바울팀은 갈라디아 지방에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뉴욕의 맨해튼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만큼 에베소는 아시아의 문화, 교통,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실제로 계시록 2~3장에, 아시아를 모교회로 해서 개척된 7교회가 나옵니다.
꼭 교회가 7개 있었다는 뜻은 아니고, 골로새교회 등 더 많은 교회가 있었는데,
그 중심은 에베소 교회였죠)

 


◑1. 하나님이 나의 계획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의 길을 막으십니다. 어떻게 막으셨는지는 모릅니다. 
외부에 박해가 있었는지, 경제적으로 어려웠는지 
어떤 이유인지는 모릅니다. 누가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가장 개연성 있는 이유는, 핍박입니다. 곳곳에서 바울팀이 못 들어오게 하는 거죠.

에베소, 아시아 서쪽으로 가는 길이 막히니까 다른 길, 대안을 찾습니다.
그래서 반대방향인 북쪽으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지도를 보십시오)

그런데 이번에도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7

정리하면, 주님이 남쪽이나 서쪽(아시아)을 막으십니다. 
바울은 반대로 북쪽(비두니아)으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그 길도 막힙니다.
동쪽으로는 다시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쪽은 바울이 이미 다녀서 왔던 곳들입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피해서 간 곳이 드로아 (서쪽 끝 항구) 입니다.

:8~9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길을 다 막으시고 딱 하나의 길을 열어 두셨는데, 
그 길은 바다를 건너서 유럽(빌립보)로 넘어가는 길이었습니다. *당시 무역로

만약 '마게도냐의 환상'이 없었더라도, 바울에게 남은 길은
마게도냐로 가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상을 통해서, 바울은 더욱 확실히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된 거죠. :9
'밤에 환상'이라고 기록했으니, 아마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자기가 본 환상을 일행인 디모데와 실라에게도 알립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마게도냐로 가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개의 장면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가려고 하는 바울과 
-막으시는 하나님 

-아시아로 가려는 바울과, 막으시는 성령님 
-비두니아로 가려는 바울과, 막으시는 성령님, 

이런 일은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려는 나와 막으시는 하나님, 
이게 우리의 삶에도 오버랩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제 그런 경험 있으시죠? 
내가 세운 계획과 뜻대로, 환경이 열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걸음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도, 하나님이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아시아(에베소 쪽)로 가려고 했습니다. 

자기의 사사로운 명예나 유익을 위해서 아시아로 가려고 했던게 아닙니다. 
그저 바울은, 아시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을뿐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길을 막으십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도 이런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계획했던 걸음들이 있습니다. 
나쁜 동기가 아니라, 선한 동기를 가지고 계획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걸음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걸음을 막으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한 걸음도 하나님은 때때로 막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의 걸음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내 길을 막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답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고 붙들어야 사실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나의 계획을 막으실 때는, 다른 길을 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바울의 걸음을 계속해서 막았습니다. 
아시아(남쪽)로 가려는 바울의 걸음을 막았고요. 
또 비두니아(북쪽)로 올라가려는 걸음도 막았습니다. 

자 그러나 막으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다른 길을 여시고 계셨습니다. 
바로 마게도냐 라는 유럽으로 가는 서쪽 길을 여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계획이 막히고 있다는 건, 다른 길을 열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2. 두 번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시는 길이, 우리가 계획한 길보다 훨씬 복된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아니 왜 하나님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셨는가? 
왜 비두니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셨는가?' 

여러분이 지역들도, 복음이 필요한 곳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죄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가도록 허락해 주셔야 맞는 것 아닙니다. 
바울이 가도록 적극적으로 사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맞는 건 아닙니까? 

못 들어가는 지역도 들어갈 수 있도록, 오히려 문을 열어 주셔야 맞는 것 아닙니까? 
갑자기 금지가 풀린다든지, 갑자기 도로공사를 해서 길이 뚫린다든지 
하나님이 그렇게 오히려 길을 열어 주셔야 맞는 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왜 하나님은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가지 못하게 하셨는가요? 
하나님은 아시아와 비두니아 사람들은 버리셨는가요?

여러분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아시아도 있었습니다. 
다만 복음 전하는 순서가 달랐을뿐입니다. 실제로 지도를 한번 보시겠어요? 

하나님은 바울팀이 배를 타고 마계도냐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를 다 돌고, 아가야(아덴, 고린도)를 전도하고 
이렇게 2차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에베소(아시아)를 잠시 들립니다.

그리고 3차선교여행이 시작되는데, 이때는 아시아(에베소)를 제일 먼저 들러서

그곳 중심으로 선교가 진행됩니다. 
바울의 1~3차선교여행 중에 가장 길게 머물렀던 곳이 에베소(아시아)입니다. *3년 머움

그러니까 아시아(에베소)를 버린 게 아니었던 거죠. 
다만 바울의 순서와, 하나님의 순서가 달랐을뿐입니다. 

하나님은 아시아(에베소)보다, 유럽을 먼저 가게 하셨습니다.
혹시 아시아(에베소)를 먼저 갔더라면, 거기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바울은 유럽으로 복음 전하러 가는 것을, 관심 가지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2차 때도 보십시오. '드로아의 환상'을 보기 전에는, 바울은 유럽을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드로아의 환상'을 보여주셔야, 바울은 비로소 유럽 선교를 생각하게 될만큼
바울은 '유럽'으로 가려는 마음이, 처음에는 아마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비두니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두니아는, 그 와중에 베드로가 갔습니다. 

벧전1:1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들에게 편지하노니)'

사도 베드로는, 편지를 보내면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을 먼저 기록합니다. 
거기에 본문의 비두니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두니아도,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베드로를 통해서요. 

하나님은 비두니아를 버리신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그 땅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대신에 바울에게는 유럽과 아시아를 맡겼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두니아로 보내는 동시에 
바울은 유럽으로 보내셔서 복음의 전파가 더 넓어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가려는 바울의 계획을 좌절시키신 것은, 
아시아는 조금 후에 바울에게, 
비두니아는 좀 더 후에 베드로에게 맡기실 작정이셨고,
바울을 마게도냐로 가게 하심으로... 선교와 복음은 지경이 더 확장되었습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가 되었고요. 
비두니아까지도 베드로를 통해 복음이 빠르게 확장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생각하지 못한 큰 계획을 가지시고 일하신 거죠.

▲또 하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결과가 있습니다. 

16: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행전에서 '우리'라는 표현이 지금 처음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라는 표현이 나온 적이 없습니다. 
즉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라는 표현이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누가가 바울의 선교팀에 합류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아마 드로아에 있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바울의 일행이, 길이 막히고 막히는 바람에 
드로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또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 누가 있었냐면, 누가도 복음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누가가 바울의 선교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네 명이 된 것이죠. 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 

이때부터 누가는 바울의 선교를 다 지켜보았습니다. 
바울로부터 사도행전의 그 모든 이전 스토리를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가 쓴 성경이 우리가 읽고 있는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누가복음도 우리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누가가, 바로 드로아에서 합류했습니다. 

만일 바울의 계획대로 아시아로 갔었다면, 누가는 지금 합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바울의 계획대로 비두니아로 갔었다면, 우리는 누가를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읽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을 막으시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이 남겨진 것입니다. 

무엇을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열으셨던 길이, 바울이 계획한 길보다 훨씬 더 복된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늘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막히는 때가 있습니다. 좌절되고 실패하고 막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계획이 막히는 때에 
하나님은 다른 길을 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여시는 길이, 우리가 계획한 길보다 우리를 더 복되게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3. 그래서 세 번째, 내 계획과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울의 모습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아시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힙니다. 
그러자 바울은 바로 방향을 돌립니다. 억지로 아시아에 가려고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No 하시자, 바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섭니다. 
그 다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No 하십니다. 그러자 바울은 바로 방향을 돌립니다. 
어떻게든 억지로 비두니아로 뚫고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계획을 세웠다 할지라도, 
내 생각에 그 길이 가장 최선의 길로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니야' 하시면, 바울은 '네' 하고 바로 걸음을 돌립니다. 

물론 7절에 보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거절이 아직 없었던 때입니다. 하나님의 아무런 싸인이 없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바울을 마게도냐로 부르십니다. 그때 바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10절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고 말합니다. 

마게도냐는, 원래 바울의 계획이 없었던 곳입니다. 
마게도냐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합니다. 에게 해를 건너 다른 대륙으로 가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날 대륙을 건너는 것은 어려운게 아닙니다. 비행기를 타고 건너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때는 대륙을 건너서 이동한다는 것은, 
굉장히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이 출발한 곳은, 수리아 안디옥이었습니다. 
거기서 마게도냐는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마게도냐로 가면, 언제 파송교회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계도냐로 건너가라 하십니다. 
그러자 바울은 '곧바로 건너가기를 힘썼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계획과 다르다 할지라도, 그 길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멀고, 굉장히 낯선 길이라도,
하나님이 명하시자, 그는 즉시 순종해서, 미지의 곳으로 여정을 떠났던 것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하는데, 청년 때 들었던 설교가 계속 기억났습니다. 
그때 담임 목사님께서 '사명과 야망의 차이'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그 후로도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여러분, 사명(비전)과 야망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실 때 멈출 수 있으면, 그건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그런데 멈추라고 해도 내가 끝까지 고집하면, 그때부터 그건 내 야망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그건 아니야!' 라고 말씀하시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내가 고집한다면, 그건 여러분의 야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들이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이 해야 일들이나, 사명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자기 욕심이죠!

그런 점에서 바울은, 야망이 아니라, 사명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No 하시자,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낯선 곳으로 가라'고 하시자, 곧바로 거기로 믿음으로 곧장 떠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더 놀라운 일들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내 계획대로, 내 생각대로 되는 것만이.. 복된게 아닙니다.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부르심이 있을 때, 믿음으로 그 길에 순종해 보십시오. 
이게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실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저와 여러분들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부름받은 길을 믿음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보다 더 크고 영화로운 일들을,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이 마게도냐로 가는 계획을 미리 알려주지 않으신 이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남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왜 하나님은 미리 바울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셨을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마게도냐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미리 알려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수리아 안디옥에서 처음 떠날 때부터 '이번 2차선교여행은 저 마게도냐이다.' 
이렇게 미리 알려주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바울의 일행이, 갈라디아 지역에서 헤맬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시아로 가려고 했다가,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다가, 이렇게 방황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생을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미리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막으시고, 또 막으시고, 그리고 나서야 나중에 알려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것도, 우리의 삶 가운데 동일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유학을 계획했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 유학을 가려고 준비를 했었습니다. 

그때는요, 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주변에 교수님들의 권유도 있었고요.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영어학원도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저는 유학을 못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순수 국내파인데요.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 질문이 생기는 거죠. 그러면 처음부터 영어학원에 등록할 때, 
'너는 유학을 못 갈 거야!' 라고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수고나 비용을 많이 절감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미리 알려주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러분 결혼도 마찬가지죠. '너는 몇 살 때 누구랑 결혼할 거야' 
미리 말씀해 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자 그러면 그 동안에 누구를 만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엉똥한 사람에게 시간이나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수치를 다 당하게 하시고, 아픔을 다 당하게 하시고, 
그러다가 내 짝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직업도 마찬가지죠. 직업도 미리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너는 결국에는 어디를 들어갈거다' 미리 말씀해 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자 그런데 내버려 두셨다가, 그 직장에 떨어지도록 놔두십니다. 
합격을 해도 적성에 맞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을 또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떨어지고 좌절하고... 직업을 바꾸는 과정들도 그대로 놔두십니다. 
그리고 나서야 어느 (딱 맞는) 직업을 갖게 하십니다. 

자 오늘 본문의 과정이, 즉 바울의 여정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바울팀에게 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미리 알려 주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왜 하나님은 미리 바울의 선교팀에게 '마게도냐다!'라고 미리 알려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알려 주셨다면, 시간 낭비나, 동선 낭비를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또 바울의 일행이, 바로 마게도냐로 갔다면, 훨씬 선교가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 미리 알려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여기에는 여러분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선교의 주체가 자기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자 그래서 앞으로도 하나님을 매 순간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짧게 5절만 끊었는데요. 
놀랍게도 이 5구절 안에 삼위 하나님이 다 나오고 있습니다. 
6절에 성령, 7절에 예수의 영, 10절에 성부 하나님, 
이렇게 짧은 5절 안에 삼위 하나님이 다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선교에 주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선교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본문은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들의 계획대로 바로바로 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시아로 가면 아시아로 가는 길이 열리고, 비두니아로 가면 그 길이 열렸다고 한다면
자 그러면 이들은, 자기들이 선교를 이끌어 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들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매순간 의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은 유럽으로 가는 선교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로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에 끌려다니는 분이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며 
그래서 그들은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확실성 가운데 두십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도, 미리 알려주시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가 세운 계획들이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그분을 의지해야 하는 자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운 계획대로 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겁니다. 

아니 하나님의 인도를, 처음부터 구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세운 계획대로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성공하고 성취하는 모든 것이 
우리가 잘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보다 신앙의 위험한 지점은 없습니다. 

실패보다 더 위험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공하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삶이, 실패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삶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훨씬 더 불행합니다. 

아니 그걸 우리는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죠? 
여러분 지옥의 본질은 하나님이 없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확실성 가운데 두십니다. 
물론 어떤 부분들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미리 알려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또 설교를 듣는 가운데, 확신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리 알려주시지 않는 부분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우리가 세운 계획들이 좌절되도록 내버려 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때마다 깨닫게 하십니다. (늘 순간순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한 걸음 한걸음씩)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일궈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생을 일궈가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매 순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의지하도록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