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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LNCK 2024. 7. 26. 11:4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

https://blog.naver.com/karamos/80141801949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렘4:11~18            2008년

 

※렘4장 내용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맨 아래 ‘◑절별 해석’도 참조해 보세요.

 

서론

 

사람이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소명감입니다.

주의 종은 그냥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소명감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19세의 나이에 하나님으로부터 열방을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심판과 구원 두 가지를 다 전하라는 이중적인 사명입니다.

나이가 19살 밖에 안 된 예레미야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는 좋았겠지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기는 매우 부담이 돼서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이 워낙 강력해서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렘20:9절에 보면 예레미야의 심정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내가 다시는 설교를 안 한다고 작정해도 골수에 사무치고 심령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어

다시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자기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예레미야는 심판이 다가온다 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구원받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사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40년 이상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본문 렘4장은, 예레미야가 받은 소명처럼 심판과 구원의 이중적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에서 예레미야는 두 가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끓는 가마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울어진 환상으로

심판이 북쪽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살구나무 환상입니다. 히브리어 ‘쇼케드’는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이 이루어지는지 두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므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전 587년에 유다는 북동쪽에 있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는데

멸망당하기 40여 년 전에 예레미야는 그 심판을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심판의 여섯 가지 특징

 

예레미야는 심판을 별 것 아닌 것처럼 편안하게 말하고 있지 않고,

매우 생생한 언어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다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4장에 나오는 심판의 특징이 여섯 가지입니다.

 

▲첫째, 불가항력적인(Irresistible) 심판입니다. 저항을 할 수 없는 심판이란 말입니다.

그 심판에는 대항하고 나설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4:7절에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열방을 멸하는 자가 나아 왔으되

네 땅을 황폐케 하려고 이미 그 처소를 떠나 나왔은즉

네 성읍들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게 되리니’

 

사자란 저항할 수 없는 존재의 상징입니다.

또한 열방을 멸하는 자(destroyer of nations), 요즘말로 터미네이터(Terminator) 앞에서

사람이 저항할 수 없습니다.

 

본문 11절에 ‘뜨거운 바람이 광야 자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케 하려함도 아니며’

 

이것은 키질해서 알곡과 가라지를 골라내려는 (추수) 것도 아니요

아예 싹 쓸어버리려는 그런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광야 자산(벌거벗은 산)위에 섭니다. 그런데 민둥산, 벌거숭이 산,

나무 한 그루도 없는 자산에 뜨거운 바람이 붑니다.

한 여름에 등산하는데 뜨거운 바람이 계속 불어오면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자나 열방을 멸하는 자 그리고 광야 자산에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에 저항할 수 없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무차별적인(Indiscriminate) 심판입니다.

4:9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왕과 방백들은 실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면 왕이나 제사장이나 정치인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도

다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이 불면하나님의 지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지식이 많다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셋째, 갑작스러운(Sudden) 심판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라 그가 구름 같이 올라 오나니 그 병거는 회리바람 같고

그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구름과 회리바람과 독수리는 빠르고 갑작스러우며 예상치 못한 때 다가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여러 해 쓸 모든 곡식과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할 때 하나님의 심판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눅12:20절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홀연히 심판이 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지진이 일어 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또 미얀마가 쓰나미를 맞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생각했으면 그곳에 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대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재난이 그냥 갑자기 닥치니 졸지에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갑작스러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피할 수 없는(No Escape) 심판입니다.

본문 16~17절에 ‘너희는 열방에 고하며 또 예루살렘에 알게 하기를 에워싸고 치는 자들이

먼 땅에서부터 와서 유다 성읍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다 하라

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한 연고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누가 자기를 칠 때 그냥 일대일로 치면 조금 저항해 볼만도 합니다.

그런데 깡패 스무 명이 빙 둘러싸서 치면 감당이 안 됩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에워싸서 즉, 완전 포위하고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워싸 포위를 했기 때문에 피하려 해도 도피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다섯째, 변명할 수 없는(No Excuse) 심판입니다.

‘내가 이래서 죄 지었고 저래서 죄 지었다’라고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핑계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네 길과 행사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너의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 고통이 지금 네 심장을 꿰뚫는(piercing)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심장이 뚫어지는 고통을 자기 스스로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네 길과 네 악한 행사가 이 일을 자초하지 아니했느냐는 것입니다.

심판은 누가 하라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심판이여 오라’고 자신이 죽을 심판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심판이 오라고 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4:22절에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우준한 자는 순 우리말로 바보입니다. 심판을 스스로 자초하기 때문에 바보입니다.

내 백성은 바보이고 나를 알지 못하여 악을 행하기는 잘하는데

선을 행하는 데는 무지해서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며 변명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황폐케 하는(Devastating) 심판입니다.

4:20절에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disaster after disaster)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나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23~25절에도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재난에 재난이 연속됩니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지진이 일어나 5만 명이 죽었고,

미얀마에 쓰나미가 일어나 8만 명이 죽었습니다. *2008년

 

요즘 신문을 보면 이처럼 몇 만 명이 죽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이 우리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 심판이 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한 미얀마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악해서 심판이 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별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쓰나미에 이어 지진이 일어나고 지진에 이어 기근이 나고 기근에

이어 전쟁이 일어나고 이런 식으로 온 땅이 파멸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처처에 지진과 기근 소식이 들려도 아직 끝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금방 오신다고 아직 말하지 마십시오.

마24:6절에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기근은 더 나야 될 것이고 지진도 더 날 것이며 바람도 더 불 것이고

쓰나미도 더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죄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증거 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6:14절에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백성의 상처를 고쳐주는 내적치유, 치유목회 등을 하면서

‘평강하다 평강하다(You are O.K. You are O.K.)라고 하지만 평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14:13~14절에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죄가 별것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별 신경 안 써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강력한 심판의 메시지를 말씀하시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계획,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은

마치 감추어진 보물처럼 숨어 있습니다.

 

4:27절에 ‘이는 여호와의 말씀에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I will not destroy it completely)’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세상을 심판하셔도 남은 자를 남겨두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매우 강조한 ‘남은 자’의 교리인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망하고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쓰나미와 허리케인이 와서 심판을 받게 되어도

남은 자는 살아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에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7절에서 소망을 갖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심판의 메시지에 대한 잘못된 반응

 

예레미야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강한 어조로 유다백성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증거 했으나, 유다 백성들은 잘못된 반응을 보입니다.

심판의 원인도 자기들 죄요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시든지 말든지

우리는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보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심판 예언은 눈에 안 보이는 비현실이니,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거죠)

 

4:30절에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찌라도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너를 심판하시겠다. 그러므로 항복하고 너의 죄를 먼저 자복하고

심판하시기 전에 구원받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유다백성들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리고

동네에 나가 다른 남자(애굽)를 유혹해서, 심판을 모면하려 합니다. *바벨론 공격에 애굽에 구조 요청

 

남편이 바람난 아내에게 ‘내가 널 사랑하니까 회개하고 돌아오면 받아주겠다.’고 해도

이 아내가 계속 바람을 핍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화가 나서

‘내가 아무리 착한 남자라도 못 참아 너를 심판하겠다.’고 합니다.  *애증이죠

 

그러자 이 여자가 비웃으며 화려한 옷을 입고 화장하고 동네에 나가

가장 힘센 건달을 유혹해서 ‘내 남편이 나를 때리려 하는데 내 남편 혼내줘라’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런 식으로 반응을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람둥이더라도 이런 여자를 싫어합니다.

바람둥이도 쉽게 유혹되지 않는 여자를 좋아하지,

여자가 먼저 유혹하면 창기라고 생각하고 멸시하게 됩니다.

 

30절 후반에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연인들을 유혹하려고 하지만

연인들이 ‘동네 창녀가 내게 와서 연애를 하려 하냐’며 멸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생명까지 찾는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해 보고자

애굽에 가서 동맹을 맺어 봐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데, 하나님을 피해서

세상 종교나 학문이나 철학이나 권력을 의지해 봐야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없고

멸시받을 창기의 행위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고 다른 종교를 가진 분 계십니까? 종교가 없는 사람보단 낫습니다.

예수 안 믿고 나의 지식으로 구원받아 보겠다는 분 계십니까?

지식이 없는 사람보단 낫습니다.

 

예수는 안 믿지만 내가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아 보겠다는 분 계십니까?

나쁘게 사는 사람보단 낫습니다. 유교를 믿고 그래도 예라도 갖추겠다는 사람이

예도 없는 무례한 사람보단 낫습니다.

불교를 믿어 자비롭게 사는 사람이 무자비한 사람보단 낫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는데 전혀무력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바벨론을 피해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는 창기의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3. 심판의 메시지에 대한 바른 반응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심판은 피할 수 없는 무서운 것인데

이 심판의 메시지에 대한 바른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기 죄를 수치스러워하며 애곡하라는 것입니다.

4:8절에 ‘이를 인하여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대저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굵은 베를 두른다는 건 내가 수치스럽다, 내가 겸비해졌다하면서

스스로 낮추고 자기 죄를 생각하며 부끄러워서 애곡(哀哭)하는 겁니다.

 

그런데 애곡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심판 전에 애곡 하는 게 있고

심판 후에 괴로워서 애곡하는 게 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심판 전에 애곡하라니까, 심판 후에 애곡했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예레미야애가입니다.

 

구약성경은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죄를 회개하고

애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헌금을 드린다고,

성가대에 앉아서 찬양을 많이 한다고 다 천국가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행위로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자신의 죄를 직면해서 ‘하나님 부끄럽습니다. 내가 젊을 때는

잘 살아보려고 했지만 평생 살아보니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라고 애곡하며

하나님 앞에 참된 회개를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회개 없이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악이 머물러 있는 자리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악은 생각의 형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머물러 있다는 것은 영어로 ‘lodge’를 쓰는데,

이불 덮고 베개 베고 자며 아주 자리 잡고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악한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 아예 뿌리내리고 자리 잡고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악의 근원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마15:18~19절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악은 마음속에 실제 행위로 표현되기 전에 생각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행위를 교정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람피우는 사람의 얼굴을 할퀴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한 달 동안 집안에 가둬 놔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처가 아물면 또 나가기 때문입니다.

 

도박하는 사람의 손을 끊어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손목으로 또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악이 있는 한 외부행위를 고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고쳐야 됩니다.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악한 생각을 씻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한 생각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생각은 악한생각입니다. 안 계시면 하늘과 땅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히3:4절에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 없고 그러므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생각도 악한 생각입니다.

한번 죽으면 그만이 아니라 그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안 끼치고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 또한 악한 생각입니다.

남에게 해를 안 끼치고 도와주고 산다 해서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위선자가 많아서 안다닌다는 것도 악한 생각입니다.

교회에도 위선자가 있지만 세상보다는 훨씬 적습니다.

교회는 그래도 선한 일을 하려고 언제나 몸부림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 죄와 싸우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죄인이라는 걸 인정하고 드러내놓고 죄짓는 죄인들과는 다른 겁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속으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악한 생각입니다.

이런 모든 생각들이 다 악한생각입니다.

 

▲이사야 55:7절에도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그러면 마음에 악한 생각이 가득한데 이 생각을 어떻게 씻어 버립니까?

슥13:1절에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cleansing fountain)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요일1: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의 피로 우리가 씻어야 됩니다. 이것은 진실한 회개와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의 피가 죄를 씻는 샘인데 예수의 피로 씻는 것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번도 안 씻은 사람, 한번도 예수 안 믿은 사람은 예수의 피로 목욕을 해야 됩니다.

평생에 한 번은 예수의 피로 목욕을 해야 됩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결단하여 교회에 등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히 하는

목욕하는 믿음의 결단이 평생에 한 번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구원 받았는데도 세상을 살면서 계속 죄를 짓는 사람은

발이 더러워진 사람이므로 발을 씻어야 됩니다.

온몸을 목욕하는 씻음과 발을 씻는 씻음은 다릅니다.

불신자는 목욕을 해야 되고 신자는 발을 씻어야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번도 예수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일이 없는 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하시고 예수 믿겠다 하시며

그 피로 내 죄를 씻어 나를 목욕시켜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으면서도 세상을 살면서 날마다 발을 더럽히고 발에 냄새나게 하고 다니시는 분도

역시 예수의 피로 발을 씻으시기 바랍니다. 요13:1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결론

 

구약 예레미야의 심판 메시지는 가혹하지만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신약 심판의 메시지는 더욱 더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것을 주님의 공포(the terror of the Lord)라고 했습니다.

*고후5: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 error of the Lord 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KJV

 

계시록 20:14~15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의 피로 목욕하지 아니하고 죽으면 불못에 들어갑니다.

 

제가 거짓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막9:48~49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불못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옥가고 불못에 떨어질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을 이렇게 명백히 보고도

거기가 좋다며 가는 사람을 우준한 자(fool)라고 말합니다.

악한 생각은 악한 행동을 낳고 악한 행동은 악한 인생을 만들며

악한 인생은 지옥 심판을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며 사는 것이 악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믿는 확고한 결단을 내리지 않은 분이 계시면

‘하나님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피로 온몸을 다 목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예수 믿으면서도 허구한 날 죄 짓고 다니며

발 냄새 나는 거 그대로 신고 다니는 분은 예수의 피로 자신의 저지른 죄를 자백하여

발을 깨끗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악한 생각을 고치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생각, 순종의 생각, 축복의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시기를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

 

<렘4장의 개요>

본장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발로에서 시작된 회개 촉구를 최종적으로 선언하고

머지않아 도래하게 될 심판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1-3장에서 암시되어 오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극적으로 공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는 심판에 앞서 언약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며

동시에 심판이 주어질 때 근거를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4:1~4절, 진정한 회개 촉구

5~18절, 임박한 심판 경고

19~31절, 예레미야의 슬픔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의 처한 상황이 매우 어렵고 절박하였음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은 안팎의 여러 문제들이 직면하여 이제까지 취해오던 노선을 변경시켜

다른 방도를 따르고자 나름대로 모색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을 의뢰할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특히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 나타났던 그런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그들이 가담하고 있는 모든 의존적 외교 조약과 우상을 타파하고

오직 여호와의 주권만을 인정하는 실질적인 회개를 통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가증한 것을 버리고'

여기서는 가나안의 거짓 신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런 가증한 것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와 다른 신들은 양립될 수 없고 화합될 수가 없다.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새번역) 네가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면,

세계 만민이 나 주를 찬양할 것이고, 나도 그들에게 복을 베풀 것이다.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때로는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란 말로도 번역되는 이 구절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맹세할 때에 사용하는 상투어였다.

그러나 이 말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출20:7, 신5:11).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맹세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구약 예언서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단어들이다.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여호와의 주권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 이스라엘이 약속된 축복의 삶을 누리는 것을 보고

다른 민족들도 축복의 참된 근원이 여호와께 있으며

그의 언약에 순종할 때 축복을 받게 됨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참된 회개는

이스라엘 자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되는 것이다(사42:6, 49:6).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묵은 땅을 갈고'

분문은 요시야의 개혁 기간 동안의 형식적, 피상적 회개가 아닌 근복적 회개를 요청하는

내용으로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란(마9:17, 막2:22) 예수의 비유와 일맥 상통한다.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라는 토지가 과거, 특히 므낫세 통치 이후에 악행이라는 가시덤불로 만연되어 있으며,

유다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새 토지를 경작하는 것뿐임을 지적한다.

즉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야기된 온갖종류의 폐단들, 곧 가시덤불을

회개와 순종이라고 하는 쟁기로 갈아서 온전히 제거해버리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할례를 행하여...마음 가죽을 베고'

할례가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와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이 의식은 언약의 표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으며(창17:10-14)

단순히 외적인 표징이 아니라 여호와의 주권에 전혹적으로 순종한다는 내적 실체에 대한 증거였다.

 

한편 선지자는 여기서 남자 성기 표피 끝을 잘라내는 할례를 말하지 않고

마음 가죽을 베어낼 것을 명하고 있다. 이 '마음'이란 지성과 의지, 감정 등을 다 포함하는

내적 삶의 전체를 뜻한다. 즉, 마음이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한

물리적인 할례 의식으로는 언약의 취지를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언약 파괴의 결과를 강조하고 있다. 고대근동의 종주국과 봉신국 간에 체결된 언약에도

축복과 저주가 뒤따랐다. 언약을 배반한 봉신은 대군주의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주권 군주이신 여호와는 자기와의 언약을 깬 이스라엘을 징벌하고야 마신다.

 

그리고 그 징벌을 예레미야는 '끌 자가 없는 불의 심판'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런 비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7:20, 사1:31, 암5:6등).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응징했던 것과 똑같이 이제 유다도 심판하실 것인 바,

유다는 이미 그의 주인 이스라엘보다 더 범죄해 있었다(3:11).

 

5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여기서부터는 심판의 상세한 내용이 묘사된다.

'나팔을 불라'는 것은 사자(使者)의 가슴 아픈 전달 사항을 유다와 예루살렘에 알린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은 호세아가 외친 경고의 말씀과 유사하며(호5:8),

후대의 요엘 선지자도 이와 비슷한 경고를 고하였다(욜2:1).

 

6 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

 

'시온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라'

'기호'는 '표준', '기준', '신호'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무슨 신호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위급한 상태를 알리기 위해

먼 지역까지 전달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봉화와 같은 것을 올리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라기스(Lachish)의 발굴에서 나온 편지 중의 하나는 B.C.586년 느브갓네살 침략 당시

남유다에 긴급 사태가 발생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왕께서 지시한 대로 우리는 리가스의 기호('네스')를 지켜보고 있나이다.'

 

7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나아 왔으되

네 땅을 황폐하게 하려고 이미 그의 처소를 떠났은즉 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되리니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여기서 사자에 비유된 침략자는 바벨론을 가리킨다.

51:38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혼비 백산하는 바벨론 거민들을 부르짖는

사자새끼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회개하지 않는 유다 백성은,

마치 먹이를 찾아 나온 굶주린 사자에게 찢기듯이 처참한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당시 바벨론은 B.C.612년에 앗수르를 점령한 데 이어서

근동 지역의 패권을 잡기 시작했으며, 여세를 몰아 주변 열국들을 초도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8 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왕과 지도자들은 낙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던 왕과 방백, 제사장, 선지자 등의 지도층 인사들이(2:8,26)

이 소식에 놀라 공포에 사로잡히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왕과 방백 등의 정치 지도자들은 안전과 희망의 근거를 잃었기 때문에 쓰러진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내세운 희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며

배도한 제사장들이 내세운 공허한 안전 역시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10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이르렀나이다

 

'슬프도소이다...주께서...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는 예레미야가 받은 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계시에 대단히 슬퍼하고 있는 모습이다(19절).

이것은 또한 예레미야의 성품이 어떠한지 그 일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과 많은 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얼핏 보면 예레미야의 이런 항의는 참람되어 보인다.

감히 인간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속이셨나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확실히 믿고 있었고 언젠가는 하나님의 신실한 계획이 실행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자기 자신의 삶이든 아니면 타인의 삶이든 간에

비극적인 처지를 보고 깊은 슬픔을 느낀 데서 나온 일시적인 한탄인 것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본절 상반절과 마찬가지로 본 구절 또한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혹자는 '이르시기를'을 '그들이 이르기를'이라 번역한 70인역에 근거하여,

본문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원문 독법상의 혼란을 야기시킨다. 보다 적합한 해석으로는,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들의 감언이설을 허용하신 하나님께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인간의 자의적 악행을 하나님이 허용하거나 내어 버려두신 것을

마치 하나님이 그 악행에 개입하신 것처럼 표현한 사례가 종종 나온다(출9:12, 살후2:11).

 

11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뜨거운 바람이 광야 헐벗은 산에서'

여기서는 사하라 사막의 열풍으로서 파멸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맑은 바람이 '파멸'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바람을 막아줄 나무나 그 어떤 방파제 같은 것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람은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오는데,

KJV, RSV에서는 이를 '내 백성의 딸'(the daughter of my people)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내 딸'과 '내 백성'은 동격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내 딸=내 백성'으로 이해함이 무난할 것이다.

비록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상황이긴 해도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분명하게 지적하였던 것이다.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케 하려함도 아니며'

이는 타작 마당의 키질하기 위해 부는 바람을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인데,

앞으로 유다에 임할 바람은 알곡을 추리기위한 키질용 바람이 아님을 선포한 것으로서

이들을 몽땅 날려버리는 엄청난 파멸의 바람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2 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할 것이라

 

'나를 위하여 오리니' 유다에 임할 심판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나왔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태까지 유다 백성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았던 것에 대한 보응으로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베푸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을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사 유다의 범죄 행위에 대한 형을 선고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13 보라 그가 구름 같이 올라오나니 그의 병거는 회오리바람 같고

그의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 하리라

 

'구름같이...그 병거는 회리바람 같고'

심판의 도구로서 유다에 밀어닥칠 적군의 진군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다.

예레미야는 환상을 통해 유다를 침략할 적군이 마치 빽빽한 구름과도 같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고 고뇌에 찬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그의 고통스러운 심정은 심판 장면을 묘사하는 12-18절이 끝난 다음에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백성의 반응은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란 것이었는데,

이는 온 땅이 황폐화 된 것에 대한 백성들의 자책과 후회의 한탄을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비록 더딘 것 같아도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질 때는

그 어느 누구도 이를막을 수 없고 또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14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예레미야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그들에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들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이다.

3장에서도 예레미야는 이와 유사한 회개로의 부르심을 촉구하였다. 아마 예레미야는 심판이

문 앞에 이르렀다고 해도 회개로의 부르심이 늦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5 단에서 소리를 선포하며 에브라임 산에서 재앙을 공포하는도다

 

'단에서 소리를 선포하며' '단'은 팔레스틴 북부 변방의 한 도시로서

오늘날의 '텔엘-카디'인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의 발굴에 의하면 예레미야 당시 이곳은

정치,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에브라임 산은 이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예루살렘의 전방 기지와 같은 곳이었다. 바로 이런 곳에서 적의 침략을 알리는 소리가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16 너희는 여러 나라에 전하며 또 예루살렘에 알리기를 에워싸고 치는 자들이

먼 땅에서부터 와서 유다 성읍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다 하라

 

'에워싸고 치는 자들'

이는 유다 성읍을 점령하고 파멸시킬 느부갓네살을 가리킨다.

 

17 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밭을 지키는 자같이' 본절의 장바변은 시골 농부가 곡식단을 돌보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 둔

오두막에서 들짐승이나 도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보던 것에서 따온 예화인데,

아마 이런 알기 쉬운 예화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8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네가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

 

'네 길과 행사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예레미야는 고통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에 밀어닥친

심판의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는 너의 악함이라'는 말은

심판이 백성들의 악으로 말미암았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표현이다.

 

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본절에서부터 21절까지는 갈대아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멸과 유다의 황폐를 내다보는 에레미야의 내적인 고통과 근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아마 그는 앞에서 예언한 그 모든 환난의 내용을 환상을 통해 직접 목격했던 것 같다.

'슬프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에'의 뜻은 '창자'인데, 아마 정신적인 충격이 대단히

심각하게 주어졌을 경우, 신체 내부 기관이 이를 감당할수 없어 어떤 방응을 나타냈던 데서

유래한 단어인 것 같다.

 

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재앙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 결과성들이 불타고 거민들이 내어쫓기고 학살당할 것이다.

 

'나의 천막...나의 휘장' 이는 유목민 시대의 천막 생활에 대한 잔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튼튼한 요새들이 아무런 방어 수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21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저 기호를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예레미야의 내면에서는 재앙으로 인한 전쟁의 함성과

나팔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귀는 이미 이러한 소란스러운 고함 소리에 지쳐 있었으며,

그의 눈에는 자기 동족의 비극적인 고통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를 막을 수 없다는 깊은 절망감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나를 알지 못하는 우둔한 자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단순한 지침이나 교훈에 대한 앎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백성들에 대해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하실 때,

이 말속에는 그 백성들의 불신과 반역 및 계명에 대한 불순종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혼돈하고 공허하며'

본절에서부터 28절까지는 임박한 파멸에 대한 심판의 참상이 환상을 통해 표현된다.

본문의 히브리어 '토후 와보후'는 창1:2에서 땅이 창조되기 전의 무질서한 상태를 묘사할 때 쓰인 말이었다.

이런 표현을 통해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이 마치 땅이 창조되지 않은 것과 같은

혼돈을 초래할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진동하며...요동하며'

클라크(Clarke)는 본절의 '산들'과 '작은 산들'이 '왕과 방백들'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놀라서 달아날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물론 이 해석도 무난하겠지만 앞 구절과의 연결을 중시할 때,

산들이 진동할 정도로 유다에 밀어닥칠 바벨론 군대의 공세가 무시무시할 것을 나타낸다.

'산들'과 '작은 산들'은 흔히 힘과 안정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힘과 안정의 상징이 모두 흔들리고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새가 다 날아갔으며' 파멸과 황폐함의 철저성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한편 하나님은 악인을 멸하실 때에 짐승과 새와 물고기도 함께 멸하신다고 말씀하셨다(1:3).

 

26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본절에서는 쓸쓸함과 파멸이 그 이전의 풍성한 결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황무지로 변해버린 '좋은 땅'의 원어는 '카르멜'인데,

이것은 어떤 특징 지역을 가리키기보다는 풍요로웠던 그 지역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앞 구절들에서는 이 땅 전체가 황폐해질 것으로 지적했으며,

이어지는 28절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땅이 비록 황무지가 된다 하더라도 23-26절에 묘사된바와 같이

완전한 종말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주석가들은 이를 심판 중에도 남은 자가

이 재앙에서 살아 남게 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28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땅이 슬퍼할 것이며...' 여기서는 땅과 하늘에 대한 의인법이 쓰이고 있는데,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도 흔히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혹자는 '땅이란 그 땅위의 거민들을 가리킨다고 하나, 땅의 멸망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깊은 선지자의 내면에 접근할 수 있겠다.

즉 감각이 없는 땅조차도 슬퍼하는데, 정작 슬퍼해야 할 사람들은

이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점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29 기병과 활 쏘는 자의 함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읍 사람들이 도망하여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르며 각 성읍이 버림을 당하여 거기 사는 사람이 없나니

 

본절에서부터 31절까지는 시온의 극심한 고통을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침략자들의 진군 소리에 놀라서 달아나며, 안전한 곳으로 숨는다.

또한 사람들은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며, 절벽으로 기어 올라가기도 한다.

한편, 이사야도 하나님의 심판이 교만하고 자고한 자들에게 임할 것임을 예언하면서

이와 유사한 장면을 서술하고 있다(사2:19-21).

 

30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네가 붉은 옷을 입고...꾸밀지라도' 고운 옷으로 차려 입고 온몸을 황금으로 장식하고

눈썹을 그리는 이 같은 행동은 창녀가 손님을 맞을 때 하는 행위를 암시하는데,

이는 우상 숭배자들이 갖추던 장식(사3:18-23)을 비유하기도 하며

약소국이 대국의 침략을 당하여 제3국에게 원군을 요청하며 예물을 바치는 모습을 비유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 곧 바벨론의 침입을 당한 유다가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31 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시온의 딸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의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가 있도다

죽이는 자로 말미암아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창녀의 행위를 예화로 들었던 선지자는

여기서 그 표상을 바꾸어 첫 아기를 해산하려고 울부짖는 여인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 여인의 고통하는 소리를 딸 시온의 소리로 설명한다.

유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자기의 진정한 남편을 거부하고 앗수르, 애굽, 바벨론 등과 같은

정부들과 놀아났었다. 그리고 이제 음란한 유다의 악행은 그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