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JnAxTgLfR3I
◈감정 수업 삿14:1~4 2023.02.17. 설교문 스크랩
*성경적 기준이 아니라, 자기 감정에 충실하게 반응하며 살면
사사시대, 또는 삼손의 혼란과 실패를 초래하게 된다는 주제의 설교문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삼손은 사사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사사시대는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삼손의 이름은 태양을 의미합니다. 그의 부모는 어두운 시대를 밝히라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나실인, 즉 구별된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구별되게 살아야 했습니다.
사사기 13장에 보면, 삼손의 탄생 배경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삿13:25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으나.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해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4장에 보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본문 삿14:1절에 보면,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딤나는 블레셋 땅으로,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서 북서쪽으로 7㎞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접경지역이었으므로 삼손은 블레셋 땅 딤나에 자유롭게 넘나들었습니다.
본문 삿14:1~2절에 보면,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1절에 보면, 동사 ‘내려가다’, ‘보다’가 나옵니다.
2절에 보면, ‘올라오다’, ‘말하다’, ‘보다’가 나옵니다.
그리고 삿14장에 보면, ‘내려가다’는 동사가 다섯 번 나옵니다.
행동이 반복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의도가 있습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삼손은 딤나에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기 위해 딤나로 내려갔습니다.
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삼손은 한 여자를 그냥 본 것이 아닙니다. 의도를 가지고 보았습니다.
삿14:1절에 보면,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삿14:2절에 보면,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여기서 보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자신이 본 것에 끌렸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저녁 때에 다윗은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다윗의 눈에 한 여인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선은 계속 그곳에 머물러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다윗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보는 행위는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안에서 시작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의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는가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보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있습니다.
삿14:1절에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딤나에 내려가서 블레셋 여자를 본 후, 삼손은 자신의 존재 목적, 자신의 사명을 잊었습니다.
삼손이 본 것은 삼손의 인생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는 블레셋과 싸워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엉뚱한 곳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주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 바라보는 것이 우리를 압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있습니다.
젊다고 해서 에너지가 무한대인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너지는 점점 더 빠져나갑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에너지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집중해야 할 것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삼손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주목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삼손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벗어났습니다.
본문 삿14장 2절에 보면, 삼손은 그의 부모에게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삼손의 부모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려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삼손의 부모는 삼손을 나실인으로 키우려고 애썼습니다.
나실인으로서 구별되게 살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곁길로 빠지려고 했습니다. 삼손은 세상에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의 영향일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에는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기준 없이 살았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타락한 시대에는 기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양육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해도, 세상에 나가면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세상은 매우 악합니다. 부모는 아이를 보호하려고 하지만,
부모의 능력으로는 아이를 완전하게 보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쉽게 오염됩니다. 죄짓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를 잘 짓습니다.
주위에 나쁜 사람이 있으면 쉽게 전염됩니다.
그렇다고 착한 사람이 있으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쁜 것은 빨리 전파되지만, 좋은 것은 전파 속도가 더딥니다.
사사시대는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입니다. 영적으로 악했습니다. 죄에 오염되었습니다.
주변이 타락한 가운데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에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매우 흔했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였습니다.
▲본문 삿14장 3절에 보면,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삼손의 부모는 삼손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의 부모에게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라고 말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그 여자가 좋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감정적으로 끌렸다는 의미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감정에 반응했습니다. 삼손은 이방 여자와 교제한 적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여자가 좋다고 했습니다.
삼손은 지극히 감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감정에 충실한 것은 오늘날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통해 이 시대의 정신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삿17:6, 21:25).
자기의 소견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성경젹) 기준이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감정 훈련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감정에 충실합니다. 이것은 (성경적) 기준이 없는 시대의 특성입니다.
감정 (절제)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매우 위험합니다. *주제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가/아닌가로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과 기호, 만족을 추구하면 감각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예배드려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하다 보면, 예배가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개인의 행복을 절대시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행복을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빨리 만족하려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참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삼손이 좋아한 블레셋 여자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본문에 기록되어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삼손은 그녀의 외모를 보고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삼손은 정욕과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합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자에게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반대하는 것이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본문 삿14장 3절에 보면, 삼손은 그의 아버지에게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나실인이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사랑에 빠져 눈이 어두워지면, 조건이나 기준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인가, 불신자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별력을 잃습니다. 분별력을 잃은 사람은 기준이 없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충동적입니다.
무모하게 행동합니다.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성보다 본능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감정에 충실한 사람은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없이 사는 것은 분별력 없이 사는 것입니다.
분별력 없이 사는 사람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합니다. 본능에 충실한 삶은 위험합니다.
▲오늘날에는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많습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사람들을 동물처럼 만들려고 합니다. 인격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6:1~2절에 보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아들들은 외적 아름다움을 추구했습니다.
사람의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인격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타락하기 시작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도덕적으로 많이 타락했습니다. 기준이 없는 시대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세상 속에 휩쓸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건강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려면, 신앙의 기본기를 갖추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되 지속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본문 삿14장 3절에 보면, 삼손의 부모가 삼손에게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라고 말하자, 삼손은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삼손의 부모가 조언한 것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부모의 조언을 거부했습니다.
삼손의 귀에는 부모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조언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복입니다. 조언에 귀 기울이면 위험한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
조언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자신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아집을 버리게 하고, 자신을 일깨워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조언을 듣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조언을 듣는 것은 아픕니다. 그래서 조언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조언을 듣지 않아 대가를 치르는 것보다는 조언을 듣고 아픔을 겪는 것이 낫습니다.
사람들은 조언을 듣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조언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조언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된 후,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젊은 사람들과 의논하여 그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르호보암은 크게 실패했습니다. 조언을 거부한 결과,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쉽게 무시합니다.
어느 영역이든 성취를 경험한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성취를 경험한 사람은 아는 것이 많습니다.
핵심 몇 가지만 짚어주어도 길이 보입니다. 고수(高手)는 멀리 봅니다.
자신이 지나온 길이기 때문에 환하게 보입니다.
영적 지도자의 조언은 특별합니다. 진리를 통해 경험한 영적 원리를 조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중에 시편, 잠언, 전도서는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 지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씀을 매일 묵상한다는 것,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놀라운 복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에게 조언을 구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조언해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조언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훌륭한 조언자를 곁에 두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고집이 센 사람은 삶이 힘듭니다. 교만합니다. 조언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겪지 않아도 되는 고난을 겪습니다.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은 삶이 험난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부모와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삼손은 그의 아버지에게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삿14:3)”
삼손은 자신밖에 모르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예전에는 자녀가 많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녀가 많지 않다 보니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부모도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려고 합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이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주변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감정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기 매우 힘듭니다. 결혼생활에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자신의 만족, 자신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상이 심해지면,
정신적 결함이 생깁니다. 이러한 현상을 ‘소시오패스(sociopath)’라고 합니다.
소시오패스는 사회생활을 하지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삿14:7절에 보면,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삼손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조언을 듣고 있습니까? 멘토가 있습니까?
영적으로 인도해주는 가이드가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최고의 카운슬러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최고의 조언을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성령과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삼손은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삼손의 부모는 삼손을 나실인으로 키우려고 애썼습니다.
나실인으로서 구별되게 살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타락했습니다. 경건한 가정에서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이지만
구별되게 살지 못했습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해 자녀를 키웁니다. 그런데 자녀가 말썽을 부려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부모는 잘못 키워서 그런가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낍니다.
부모가 경건하다고 해서 자녀가 경건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녀가 부모를 실망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엘의 가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은 영적 거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망나니였습니다.
삼상8:3절에 보면,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본을 보였지만,
사무엘의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봅시다. 어린 시절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요셉은 이방 땅에서 혼자 혹독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방 땅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아버지의 집과 이스라엘을 일으키는 데 쓰임 받았습니다.
▲삼손은 강점이 많았습니다. 잠재력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자신의 약점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약점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관리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그의 삶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약점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약점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약점을 관리해야 합니다.
약점을 그대로 두면, 약점으로 인해 실패합니다.
강점이 많아도, 약점 때문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강점이 약점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 강점을 압도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약한 곳에서 넘어집니다. 실수하는 곳에서 항상 실수합니다.
돈에 약한 사람, 이성에 약한 사람, 명예에 약한 사람, 권력에 약한 사람,
의지가 약한 사람 등 약한 곳이 있습니다.
돈에 약한 사람은 항상 돈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성에 약한 사람은 이성 문제로 삶이 복잡합니다.
의지가 약한 사람은 아무리 굳게 결심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과신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약점을 보완해야 합니다. 보는 것에 약한 사람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술에 약한 사람은 술을 멀리해야 합니다. 유혹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차단해야 합니다.
▲딤전4:7~8절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무엇보다 경건을 훈련해야 합니다. 경건을 훈련해야 옛 습관을 버릴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큐티하는 것이 몸에 배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을 통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훈련하고 나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시편1:2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말씀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제자훈련은 습관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것보다 좋은 생각을 실천하는 것이 실력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습관이 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삶을 계속 재정비할 때, 옛 습관은 사라집니다.
딤전4:8절에 보면,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속적 훈련을 통해 경건하게 사는 것이 몸에 배면, 우리의 내면이 평안해집니다.
그러므로 경건하게 사는 것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점점 더 악해집니다. 죄를 쉽게 범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감정은 죄에 오염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기 쉽습니다.
우리를 통해 일하시려는 하나님과 오히려 멀어질 수 있습니다.
허접하게 신앙생활해서는 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육체의 본성을 꺾어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려면,
우리의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무엇을 좇아가는가, 무엇을 주목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향, 기호,
생각과 감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곳을 향해 가면 안 됩니다.
어두운 시대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