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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아의 구원

LNCK 2024. 7. 31.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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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2 26  / 루디아의 구원 - YouTube

 

루디아의 구원        행16:11~15

 

지난 시간 행16:6~10절에서, "가려는 바울과 막으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죠.

바울은 아시아(에베소)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아로 가려는 바울을 막으시고, 마게노냐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노선을 바꾸었죠. 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마게도냐로 떠납니다.

 

◑16: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마게도냐는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그리스 북부인데요.

지금 바울의 일행은 드로아에 있습니다.

드로아에서 누가가 합류해서 4명이 전도팀에 들어와 있는 거죠. *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 해를 건너서 이제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그런데 중간에 사모드라게 섬을 경유합니다. :11

 

왜 들렀을까요? 이 당시에는 야간 항해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기술들이 좋아서, 야간 항해가 어렵지 않습니다.

GPS도 있고, 여러 가지 좋은 장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에는 GPS 그런 게 없었습니다.

그냥 해나, 달을 보고 육안으로 관측해서 미패 가는 거죠.

그러니 암초가 많은 지역은 야간 항해가 쉽지가 않았겠죠.

밤에는 암초에 걸릴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정거장의 개념으로 이 섬에 들렀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일행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11

그리고 다음 날, 네압볼리로 갔습니다.

 

여기서 하선해서, 내륙으로, 빌립보로 이제 들어가는 거죠.

이 여정이, 본문에 보니까, 총 이틀이 걸렸다고 나옵니다.

이틀이 걸린 건, 굉장히 빠르게 간 겁니다.

 

행20:6절에 보면 똑같은 코스가 다시 나옵니다.

올 때는, 반대 경로로 옵니다. 그러니까 그 뱃길은 당시 무역로 였다는 거죠.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20:6

 

이 구절은, 3차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여정입니다.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노선과 같은데, 역방향인 거죠.

그런데 이때는 5일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의 일행은, 똑같은 거리를 이틀 만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빠르게 도착을 한 것이죠. 아마 이 때가 순풍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날씨도 좋았고요. 배는 날씨가 나쁘면, 뜨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바울의 일행은, 네압볼리에 도착합니다. *new city 라는 뜻

자 그리고 이들은 16Km을 걸어서 빌립보로 들어갑니다.

 

◑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빌립보에 대해 누가는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

-로마의 식민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첫 성'이란 말은, '첫째가는' 뜻입니다.

마게도냐 주에서 가장 큰 성이라는 거죠.

 

실제로 빌립보의 별명이 '작은 로마'였습니다.

왜냐면 이 당시 로마의 퇴역한 군인들이 살았던 곳이 빌립보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시가 포화상태가 되어서, 빌립보로 정해서 주거 등 혜택을 주었다 합니다)

 

이 당시에는 로마가 전쟁을 굉장히 많이 했었죠.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땅을 정복해서 로마제국에 편입시켰죠.

거기에 일등 공신이 군인들이었죠.

이들은 한 평생 로마를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로마제국은,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 주었던 거죠.

그래서 퇴역한 로마군인들을 빌립보로 보내서, 주택을 주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를 작은 로마 little Rome 처럼 꾸몄습니다.

군인들이 로마에서 누렸던 모든 혜택을, 빌립보에서도 똑같이 누리게 했습니다.

세금 혜택 주고요. 연금도 주고요. 로마의 도시처럼 빌립보를 꾸며 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는 로마의 축소판, 리틀 로마로 불렸습니다.

 

나중에는 퇴역한 군인들 뿐만 아니라, 로마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어디로 갔느냐? 퇴직의 도시로, 즉 빌립보에 내려가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거죠. '로마의 식민지라' :12

 

▲자 그런 도시로 바울의 일행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난처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12절에 보면 '이 성에서 수 일을 유했다'고 말합니다.

(뚜렷하게 할 일이 없어서) 그냥 머물렀다는 뜻이죠.

 

여러분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애타게 불렀기 때문에 들어온 것 아닙니까.

아시아로 가려는 바울을 하나님이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부르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부르셔서 왔는데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아무런 열매가 수일 동안 맺어지지 않습니다.

 

◑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안식일의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밖 강가로 나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원래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바울의 선교전략은, 선교지를 가면, 제일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구약 성경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설교를 알아듣기 쉬웠겠죠.

 

여러분 오늘날도 그렇죠. 생판 모르는 불신자들보다,

성경을 기본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전략적으로,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공략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가지고 '너희들이 구약에서 기다린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생깁니다.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 그 유대인들의 지인들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가는 곳마다 한 도시를 복음화 시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안식일 날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강가로 나갔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이 없다는 사실은, 거기에 유대인들이 거의 살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앞서 루스드라가 그랬죠. 근데 거기는 작은 동네이지만, 여기 빌립보는 큰 도시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고, 그 뜻은 유대인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이죠.

 

유대인 회당은, 유대인 남자 10명만 있어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회당이 없었다는 것은, 유대인 남자 숫자가 빌립보 성에 그만큼 적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바울의 입장에서는, 사실 난감한 상황에 처한 거죠.

그렇게 하나님이 오라고 해서 마게도냐로 왔는데,

수일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컨텍 포인트(접촉점)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일생은 할 수 없이, 강가에 기도할 만한 적당한 곳을 찾아 나섭니다.

13절에 '문 밖' 강가라고 했는데, 대문 밖이 아니라, '성문 밖'을 말합니다.

 

왜 강가로 나갔을까요. 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들은 먼저 정결 예식을 했습니다. 몸을 씻고 손을 씻고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그럴려면 물이 필요하겠죠.

 

그래서 바울은 기도할 곳을 찾으려고 강가로 나간 거죠.

자 그 강가에서 바울은 적당한 기도할 곳을 발견합니다.

거기서 바울의 일행은 한 무리의 여자들을 만났고요. 그녀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 강은 지각티스 강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에 여인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빨래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들 말합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모든 대도시들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았는데,

빌립보에 회당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유대인 남자가 없었던 이유는

글라우디오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할 때

그 식민 도시, 리틀 로마인 빌립보도, 그러한 조치을 따랐기 때문일 것으로 여깁니다.)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 여인들 가운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루디아 입니다.

 

누가는 루디아에 대해 누가는 몇 가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본문에 보면, 루디아에 대한 프로필이 나오는데요.

 

먼저 두아디라 출신이라고 말합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에 있는 도시입니다. 계시록의 일곱교회 중 한 곳이죠.

 

그리고 루디아도, 본명이 아니라 '김천 댁, 인천 댁' 하듯이, 그녀의 출신지였습니다.

과거에 소아시아를 지배했던 왕국이 '리디아'였고,

리디아(루디아)는 나중에 페르시아에 병합되었죠.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는 자주색 purple 색깔의 옷을 파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주색 염료가 물들여진 옷감을 취급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옷감장사하는 여자구나' 그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 당시에는 화학 염료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옷감에 염료가 되는 식물이나 조개 껍질들을 가지고 색깔을 만들어내야 했죠.

 

그 중에도 자주 색깔을 내기가 가장 까다로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그 기술이 있었던 것이에요. 굉장히 고급 기술이었습니다.

염료를 배합해서 색을 만들고, 옷을 염색하는 기술. 당시에는 일종의 하이테크였던 거죠.

 

그러니까 이 여성은, 단순히 동대문시장이 아니라, 하이테크 분야의 여성입니다.

더군다나 이 여성은 두아디라 사람입니다. 아시아 사람이죠.

 

그런데 아시아 살던 여성이, 유럽으로 건너와서 국제무역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여성이 국제무역을 한다' ... 굉장한 커리어우먼 이죠.

아무튼 굉장히 시대를 앞서 간 여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주색은 여러분, 왕족의 컬러입니다.

또 퇴역한 로마 장교들이나 고관들, 부자들도

자주색 옷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자 그러니까 자주색 옷은

그 당시 주로 귀족들, 부유층의 옷감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부자도 자색 옷을 입었죠. 눅16:19

 

그러면 루디아는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겠죠. 고객층이 부유층, 귀족이었으니까요.

아마 그녀는 굉장한 재력가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자'라고 말합니다. :14

이 표현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아디라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 여인이 그곳에서 유대교에 개종했을 것입니다.

 

그가 아시아의 두아디라에 있을 때부터, 유대교를 성실히 믿었다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경건한 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주1)

 

그런데 루디아는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유대교인 이었으니까요. 그런 루디아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한 거죠.

그 강가에서 그녀는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선교의 첫 열매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루디아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면, 시작이 참 미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바울이 지금 복음을 전하는 곳이 어디죠? 바로 마게도냐입니다.

마게도냐는 어떤 곳이죠?

하나님이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막으시면서 부르셨던 곳입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특별한 일들, 다이나믹한 일들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여러분 1차선교여행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핍박이 있긴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병자가 치유됐고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 그런데 마게도냐는요. 지금까지는 너무나 조용합니다.

수일 동안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유대인 회당 하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거점이 없는 거죠.

 

결국에는 강가에 나갔다가, 루디아 한 명만 복음을 믿습니다.

복음의 열매가 몇 십 ~ 몇 백 명이 아니라, 루디아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허탈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기대한 결과는 아닐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바울을 막으시고 막으시고 유럽으로 보내실 정도라면

여러분 준비된 영혼들 충분히 많이 예비시켜 놓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 그런데 열매가 무엇이죠? 수백 명이 아니라 달랑 한 명이었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마음이 허탈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 그런데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루디아라는 여자를 통해서, 바울의 유럽 선교가 탄력을 받습니다.

 

◑16: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루디아를 통해서 그의 집이 다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건, 그의 집안이 다 예수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가, 이 루디아의 집에 세워집니다.

그 증거가 이후에 나오는 40절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위 구절은 바울과 실라가 나중에 감옥에 끌려갔다 나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바울과 실라가 루디아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빌립보의 형제들' 즉 빌립보 교인들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루디아의 집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얘기입니다.

 

유럽 최초의 빌립보 교회가, 루디아의 집에 세워집니다.

루디아는 재력가였고, 집도 넓었겠죠.

그래서 루디아의 집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루디아의 집이 유럽 최초의 예배당이 된 것이죠.

 

이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선교를 계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그 많은 선교비를 재정적으로 충당했을까요?

 

배를 타려면 뱃값을 내야 합니다. 숙박을 하려면 숙박비를 내야죠.

자 그 돈이 어떻게 감당이 되었을까요? 물론 헌금으로 채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도시에서는 헌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에서 선교를 할 때는, 예배 시간에 헌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선교비는 어떻게 충당이 되었을까요?

바로 루디아를 통해서, 그리고 루디아가 있는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충당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빌1:4~5절에 나오는데요.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로마감옥에서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서

바울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너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첫날부터'는 루디아가 복음 받아들인 그날을 말합니다.

빌립보교회가 세워진 그날을 말합니다.

그날부터 루디아는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다는 얘기입니다.

 

즉 그녀를 통해 그녀의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요.

그리고 그 집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고요.

그렇게 시작된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선교를 도왔습니다.

 

▲자 그 부분이 구체적으로 빌4:15절에 나오는데요.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의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여기서 '주고 받는 일'이란 재정적인 후원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회만이 바울의 선교에 재정적인 후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 다른 교회들도 선교비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의 선교비를 후원하는 핵심적인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회 안에 루디아라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루디아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회심의 역사가, 빌립보 교회를 만들었고요.

그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지원한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모든 선교에 큰 힘이 되었던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자 그런데 그 빌립보 교회가 여러분 어떻게 시작이 되었다고요?

몇 백 명이 아니라, 몇천 명이 아니라, 한 사람의 회심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루디아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이, 우리의 눈에 보기에 미미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많은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미미함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 미미함 속에서 하나님은, 어느 때보다 당신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겨자씨 한 알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의 깃들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하나를 통해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루디아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혼자 믿는다는 것이 외롭고 힘들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이 미미한 것일까?'

 

그러나 여러분, 오늘 루디아 한 사람을 통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겨자씨와 같은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을, 여러분의 후손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루어 가십니다. 이 약속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열매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듦으로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교회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미미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루디아 한 사람을 통해 빌립보의 교회를 세우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루디아 한 사람을 통해 가정을 변화시키시고, 그 가정에 빌립보 교회를 세우시고,

그렇게 세워진 빌립보 교회를 통해, 바울을 끝까지 도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여러분 절대로 우리 교회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루디아와 같은 진짜 믿음의 한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루디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이 부분이 오늘 설교의 핵심인데요.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여러분 어떻게 루디아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어떻게 루디아가 예수를 믿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강가에 나온 다른 여자들은 믿지를 않았지만, 루디아는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루디아가 믿게 되어지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바울이 전하는 말을 따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루디아가 주님을 정말 믿게 되자, 자기 가족을 전도합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이 정말 믿어지게 되자, 자기 삶이 변합니다.

 

그동안 그녀는 옷감 사업을 통해 삶의 풍요와 안정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갑니다.

자기의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물질을 가지고 바울의 선교를 평생 후원합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거죠.

 

여러분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루디아를 보세요. 루디아 한 사람을 통해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루디아는 가정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내어드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가족을 변화시키십시다. 우리도 물질을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싸우며 살아갑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행함을 촉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촉구를 하는 거죠. 여러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은 순서가 다릅니다.

행함이 아니라, 행함보다. 먼저 믿음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믿음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행함이 나오고 있습니다.

루디아의 삶은, 열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믿게 된 믿음에, 자연스러운 열매로 삶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루디아에게 복음이 딱 들어와서 진짜로 주님이 믿어지게 되자,

그 전과는 다른 삶이 시작됩니다. 말씀을 따르는 삶이 딱 수반됩니다.

여러분 이 두개는 절대로 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는 자꾸 성도의 삶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절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삶이 없는게 아니라, 바른 거듭남이 없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게 아니라, 참된 믿음이 교회 안에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회심의 역사가, 신자들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 거죠.

그러나 참된 믿음이 있으며, 반드시 삶이 변합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믿음과 삶, 이 둘을 붙여 놓은 종교이지, 떼어 놓는 종교가 아닙니다.

진실로 믿게 되어지면, 삶의 실천적인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루디아처럼, 예수가 진짜 믿어지면,

믿지 않는 자기 가족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입니다.

진짜 지옥이 믿어지는데, 어떻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들을 보며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가 진짜 믿어지는데, 어떻게 그동안에 살았던 것처럼

이 땅의 부요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을 만나야 하는데,

진짜 영원한 나라가 어디인 줄 아는데,

내가 섬겨야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데,

그리고 진짜 나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아는데,

내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는데, 예수가 진짜 믿어지는데,

어떻게 예수의 뜻을 거슬리며 살아가는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요.

어떻게 그 죄를 버젓이 계속 지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거죠.

비록 넘어지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할지라도, 죄와 피 흘리며 싸우는 모습이

자기 삶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가 믿어지면 삶은 변화합니다.

변화되지 말라고 해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삶이 먼저가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삶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믿음이 생겨야, 삶이 변합니다.

아무리 삶을 족구해도, 진실된 믿음이 없으면, 삶이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진정 거듭남의 은혜가 있어야 삶이 따라옵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잘한다고 믿음이 일어나는게 아닙니다.

믿음은 설교를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회중이 설교를 듣고 이해한다고 믿어지는게 아닙니다.

 

또한 여러분의 그동안의 교회에 나오는 연륜과 경험이

여러분을 성도로 만드는게 아닙니다.

굉장히 특별한 성령의 역사로만 오직 가능한 일입니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믿어질 수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말씀이 믿어지고, 예수가 믿어집니다.

 

여러분 너무나 두렵지 않습니까?

예배당의 문이 열려서 사람들은 들어오는데, 마음의 문은 정작 하나도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문은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배당의 문을 열어 두시는데,

예배당에 들어와 앉아 있는 각 사람의 마음의 문은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세상에 돌아갑니다...

이것은 여러분 너무나 끔찍한 일 아닙니까?

아무런 마음의 은혜도 없이, 회개도 없이, 거룩하게 살기로 다짐하는 마음의 결단이 없이,

왔던 마음 그대로 가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기 때문에,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예수가 믿어지고, 말씀이 믿어지고,

믿어져야만 삶이 변합니다.

 

한국교회는 교회만 다니면 성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다니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여러분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물론 예배당에 나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첫 걸음인 것은 틀림없지만

출석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혼이 거듭나는 것은 교회에 나오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돕지 않으시면, 아무리 교회 안에 있어도 거듭나지 못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어주셔야만, 오늘 본문의 루디아처럼

예수가 믿어지고, 말씀이 믿어지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삶의 변화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그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마음이 열려지지 않은 채로, 얼마든지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도 교회를 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교회 문화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이니까요.

얼마든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교회로 모일 때마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는 이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마음의 문들을 열어서 믿게 해주시는 것은, 성령님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매주마다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말씀이 증거될 때마다,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열으셔서

친히 그 영혼에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들이 거듭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이러한 일이 우리의 교회 안에 풍성히 일어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실 때에도, 말씀을 전할 때마다

저의 부족한 언변이 아니라, 설득력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안에서 말씀이 전해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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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행16:14절 '하나님을 섬기는’ 여자 *헬, 세보

 

13:43 '유대 사람들과 경건한 개종자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많이 따랐다' *세보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세보

 

그외 13:50; 16:14; 17:4; 17:17; 18:7; 18:13; 19:27

 

그래서 '경건한(세보)'는 이방인인데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루디아는, 이방인 여자인데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는 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