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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닛시 출17:8~16 2014.12.28.
서론
출애굽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담고 있는 영적인 의미가 더욱 중요합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과정에 관한 영적인 진리를 예표로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손을 내리면 전쟁에서 졌다는 내용으로,
거의 모든 주석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성도가 기도하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는 목사님, 아론과 훌은 목사님을 보필하는 장로님을 상징하기에
목사님을 잘 보필해야 교회가 부흥한다는 식으로 적용을 이끌어낸 주석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우리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는 좋은 교훈임은 분명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사건이 기록된 논리적 순서를 살펴봅니다
출16장에는 먹을 것이 없었던 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했던 장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출16장을 ‘만나의 장’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합니다.
요6: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지만, 예수님은 내가 진짜 만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출16장의 만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출17장 전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도착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또 다시 불평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물이 없다고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모세가 엎드려 기도했고, 지팡이로 호렙산 반석을 쳐서 생수가 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생수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강처럼 흘러, 200만 명이 넘는 많은 백성들이
그 물을 흡족하게 마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예표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0:4).
그런데 그 반석을 모세가 때렸으니,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와 백성들이 흡족하게 먹은 것은
속죄사건 이후 오순절에 그가 택한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예표합니다.
그러니까 출16장은 성육신, 17장은
십자가의 속죄제사와 성령강림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출17장 후반부에 기록된 사건,
즉 아말렉 군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해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사도들은 영혼구원에 매진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3천명, 5천명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고,
신약교회는 선교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의 세력이 교회를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 백성들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을 빼앗기고 난 후 가만히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말렉과의 전투는
‘영적인 전쟁’을 예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교회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사탄이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함으로 생겨난
영적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논리적 순서가 대단히 자연스럽고 합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영적인 전쟁은 누구와의 싸움입니까?
이 전쟁은 여호수아의 군대와 아말렉의 군대가 싸우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예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군대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말렉은 창세기 36장 12절에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롬 9:13).
에서가 결혼하여 엘리바스를 낳았는데, 그가 첩에게서 낳은 자가 바로 아말렉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가 됩니다. 이후 아말렉은 사막에 거주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아말렉은 영적인 의미로 두 가지를 예표합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택함 받지 못한 불신자를 예표합니다.
불신자들 중에서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로 이끌려 예수님에게로 오게 됩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택함 받은 야곱과 그의 후손들을
대대로 미워하고 공격하게 됩니다. 원래 아말렉과 야곱은 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가족 안에서 자기 가족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는 다니지만 구원받지 못하고 복음을 대적하는 배교자들이며,
교회 안에서 복음을 공격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말렉이 몸은 교회 안에 있지만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배교자들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 배후에 사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와
사탄의 군대가 교회 시대에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예표합니다.
▲그러면 아말렉은 왜 이 전쟁을 일으켰을까요?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요?
출17장 전반에 모세는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흡족히 마셨습니다.
그러자 아말렉이 그 물을 빼앗으려고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곳에 계속 머무르며 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물을 마시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말렉 민족은 기다리면 얻을 수 있는 물을 전쟁을 통해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말렉 군대는 이스라엘 군대를 공격할 필요가 없었고,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과 성령이 있는 군대이고, 아말렉은 그렇지 않은 군대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쟁은 복음과 성령을 대적하고 공격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들도 천국에 가고 싶으면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을 그들도 먹으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이방인들이 섞여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을 가진 이스라엘 군대를 공격합니다. 복음과 성령을 가진 하나님의 교회를
맹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성령을 환영하지도 않으면서
복음과 성령을 가진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 시대에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의 본질입니다.
저는 불신자들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성령을 받으면 되지
왜 믿지 않고 공격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믿지 않을 것이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교회를 공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로 공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애굽의 군대를 끌어내어 홍해에 모두 수장시키신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교회 시대에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2. 이 사건의 예표적인 의미
영적인 전쟁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군사들이 있습니다.
출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아무나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에베소서 1장 4~5절과 연결이 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다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 구원하러 오셨는데 그 일을 이루지 못하셨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그렇게 무능한 하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모두 다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듯이
오늘날도 택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아말렉과 싸우는 영적인 군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군사는 누구입니까? 택함 받은 백성입니다. 그 대장은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마귀의 세력과 전쟁하는 군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지만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말렉이 비열하게 뒤쳐진 노약자들을 치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노리고 공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이 전쟁을 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합니다. 모세가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맨손으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원래는 모세의 지팡이였으나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의 지팡이’라는 단어가 2번 사용되었는데,
4:20절과 오늘 본문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Power of God)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이 지팡이로 각종 이적과 재앙을 일으켰고, 홍해도 갈랐습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내기도 한 모세의 이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맨손을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11절에는 모세가 한 손을 들었다고 단수로 기록되어 있고,
12절에는 두 손을 모두 들었다고 복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손만 들었어도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팔 다리가 피곤해서 아론과 훌이 모세를 부축하였습니다.
그러면 아론과 훌이 두 손을 들었을 때에 모세의 맨손을 들은 것일까요?
아니면 지팡이를 잡은 것일까요? 아론과 훌은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팡이가 핵심이지 모세의 손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도록 그 팔을 들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목사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도를 상징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세는 성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마지막 훌은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의 남편이라는 전승이 있습니다.
아무튼 ‘훌’이라는 이름의 뜻은 ‘빛’(Light), 또는 ‘고귀한’(Noble)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령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 위에 올라간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듯이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팡이를 드셨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능력을 부으시기 시작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초대교회가 영적인 전쟁을 치르며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한 것은
그들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이 그 때부터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의 교회에 능력을 부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군사들은 자기 능력으로 영적인 전쟁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적인 전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엡6:10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진다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전쟁을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능력이 있습니까?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위로부터 임한 것은 이미 오순절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능력은 지금 우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능력은 내가 빌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와 있는데,
그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면 능력을 경험할 수 있고, 또 강하게 나타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골1:29절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힘을 다 한다’는 말은 ‘고뇌를 하며 수고한다’(Agonize)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듯 고뇌를 하면서
수고하고 기도하면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역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합니다.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의 영혼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말씀연구도 최선을 다하면 신령한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는 교회 부흥성회를 해도 저명했던 부흥사 목사님들보다
손아래 제자들을 부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현재 목회를 잘 하고, 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능력 있는 젊은 목회자들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쓰고 수고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능력을 보이시고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한들 절대로 능력이 경험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군대의 무기는 첫째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둘째는 칼날이었습니다.
13절에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칼날’은 원래 히브리어로 ‘칼의 입’(Mouth of the Sword)이라는 의미의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입이 있는 칼입니다. 즉, 성령의 검이고 말씀의 칼이라는 의미입니다.
엡6장 17절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히4장 12절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성도들의 무기는 결국 애쓰고 기도하며 봉사하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때로는 은사나 불로, 때로는 진동이나
기도응답 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능력과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3. 모세는 이 사건을 후대에 어떻게 가르쳤는가?
모세는 두 가지 방법으로 후손들을 가르쳤습니다.
▲첫째는 책에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1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것이 성경이 되었습니다. 이 성경의 내용이 아말렉 군대는 패배한 군대이고,
여호수아의 군대는 승리한 군대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16절에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말렉은 한 번 쳐들어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사사시대에 에훗과 기드온이 다스리던 시대, 또 사울과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에 쳐들어 왔습니다.
또 에스더서에 보면 아말렉 족속인 하만이 유대민족을 몰살시키려 한 것만 봐도
아말렉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어 공격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말렉은 멸절되었습니다. 육신적인 아말렉 족속이 멸망당했지만
영적인 아말렉 족속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여전히 괴롭히는 자들로 사납게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사사건건 교회가 하는 일에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고 간섭하는 것뿐만 아니라
복음과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배교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모두 영적인 아말렉 족속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성경을 믿지 않고 동정녀 탄생이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며 도전합니다. 예수님이 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실 수 없습니까?
예수님이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못하십니까?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모세는 여호와 닛시의 단을 쌓았습니다.
15절에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가 나의 깃발이다”는 의미입니다.
군대에서 깃발은 그 부대 자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군인들에게 깃발은 매우 중요한 물건입니다.
그 깃발을 보고 모이기도 하고 깃발의 싸인을 받고 흩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깃발을 통해 군인들은 긍지와 소속감을 가지게 됩니다.
모세는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삼위의 위격은 달라도 여호와는 한 분이신 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나의 깃발이라고 한 것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깃발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사야 11:10절에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가 될 것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깃발이 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부대에 소속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이것을 책에 기록하고 단을 쌓은 것은
이 진리를 후대에 계속해서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론
우리가 따라야 가야 할 대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여야 합니다.
이것이 내세와 현세에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깃발을 따라가면 살아도 비참하고, 죽으면 더 비참해 집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살아도 실패하고 죽어도 실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대장을 따라가다 보면 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패배의식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승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능력을 주시도록 간구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하도록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기도와 봉사에 힘을 쏟으시고, 말씀과 성령의 검으로 불신세력을 대적하여
영혼구원에 힘쓰고, 결국 영적인 승리를 쟁취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