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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성숙한 은사 행5:17~32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과 관련되어 있는 기사들,
특별히 "성령행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도행전을 잘 살펴보면
성령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역사(役事)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 "내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 뜨거워진 마음을 열정적인 동작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사도들이 이 단계에 있을 때 일부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들은 새 술에 취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행2:13)
둘째 단계는 여러 가지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진동 등
그 밖의 여러 가지 은사를 받습니다.
이 때 개인의 신앙이 큰 진보를 이루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은 왕성해지며 교회는 흥왕해집니다. 기적도 나타납니다.
셋째 단계는 성령과 동행하게 됩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427장)
이 찬송가 가사 그대로 됩니다.
말할 때, 판단할 때, 결정할 때, 행동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성령을 파트너로 삼게 됩니다.
사업을 할 때, 누구와 동업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찰 영화를 보면 형사들은 두 사람이 짝을 이뤄서 수사를 하고 범죄조직과 싸우는데
어떤 파트너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트너를 잘못 만나면 목숨을 잃는 일도 있습니다.
제일 좋은 파트너는 성령입니다.
넷째 단계는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최고의 은사인 사랑을 하게 됩니다.
다섯째 단계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은사를 맺게 됩니다.
여섯째 단계는 나가서 전하게 됩니다. 전도와 선교를 하게 됩니다.
이 단계들은 학교에서 1학년이 끝나면 2학년 올라가고, 2학년 끝나면 3학년 올라가고,
1학년에서 배울 것 따로 있고 2학년에서 배울 것 따로 있고,
학년이 올라가면 교실이 바뀌고,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여러 단계가 겹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 단계, 또는 두어 단계가 생략되고
그 다음 단계의 일들을 체험하게 되는 일도 많습니다. 월반(越班)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데 첫 번째 단계, 마음과 행동이 열광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외국어 학원에 등록하려면 반을 배정 받기 위한 인터뷰를 먼저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강사가 "아, 이 분은 기초반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중급반에 들어가도 좋겠구나!"
판단하면 바로 중급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뷰를 할 때는 자기 실력대로 대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인터뷰를 하고 나온 사람에게 "뭐 물어봐요?" 알아 가지고
모범답안을 미리 마련해서 척척 대답해서 공연히 높은 반에 배정 받았다가는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만 공부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 단계가 뒤바뀌는 일도 있습니다.
◑오늘은 요한 웨슬리 회심 기념일입니다.
웨슬리 선생은 성령 역사의 높은 단계부터 체험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24일, 261년 전 이번 주간 월요일 밤에 첫 단계,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갔을 때 그 전 단계에 있었던 일들이 사라지기는 일도 있습니다.
성령 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생활을 할 때
처음과는 달리 차분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용조용하게 말해도 '아, 이 분 성령 받았구나!' 느껴지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반대로 그 전 단계에 있었던 일들이 지속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계속해서 강렬한 마음과 행동으로 성령과 동행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단계는 반복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1900년대 초기에 성령이 역사한 현상이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반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는, 평양이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던 곳 가운데 하나여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었는데
그런 현상이 다시 한 번 일어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령 역사의 단계와 현상은 이렇게 여러 가지이지만
선교가 가장 높은 단계이고, 성숙한 은사라는 점은 같습니다.
축구를 하는데 롱슛을 해서 골인을 시키는 경우도 있고,
숏 패스를 해가며 골인을 시키는 경우도 있고,
코너 킥을 골인으로 연결시키는 경우도 있고
프리킥이나 패널티 킥을 이용해서 손쉽게 득점하는 경우도 있는데
어느 경우나 골인 지점은 하나입니다. 성령 역사의 골인 지점은 선교입니다.
▲사도행전은 이 같은 단계를 잘 모여주고 있습니다.
행1장에서는 성령강림의 약속이 재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말씀하셨는데 승천하시기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하고 재확인하고 그 다음에 있을 일,
"너희들이 증인이 될 것이다, 선교의 주역이 될 것이다" 하는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2장에서는 성령이 강림합니다.
사도들이 열정적으로 성령 받은 것을 표현하고 방언하고 전도에 나섭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확장됩니다.
3장에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고쳐줍니다. 신유의 은사를 행합니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신유의 은사를 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장모가 열병 들었는데도 속수무책이었고(막1:29~31)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어떤 사람이 간질 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은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성령체험한 다음에 제자들은 신유의 은사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4장에서는 성령이 동행하니까 일차 체포되어 갇히고, 심문당하는 것을 이기게 됩니다.
5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성령을 속이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선교와 교회 부흥과 신유의 은사가 계속됩니다.
이어 오늘 본문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혔는데 기적적으로 풀려납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체포되는 위험에 굴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 다섯 가지로 역사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기적입니다.
사도들이 옥에 갇혀 있는데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21절 이하, 이제 회의를 소집하고 피의자들을 심문하기 위해 가서 호송해 오라고
사람들을 보냈는데 관리들이 옥에 갔더니
갇혀 있던 사도들은 없고 옥문은 든든히 잠겨있고 지키는 사람들은 잘 지키고 있습니다.
당시 법률로서는 죄수가 탈옥하면 그 죄수를 지키던 사람은 사형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사도들 지키는 사람들은 처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근무 열심히 했으니까요.
옥에 갔던 사람들이 "근무자들이 근무를 태만히 해서 피의자들이 다 탈출했습니다"라고
보고하지 않고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은 문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한 것을 보면 이런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옥에 가서 잡아와야 할 사람을 26절 보면 성전에 가서 잡아옵니다.
12장을 보면 헤롯 왕 박해 때 베드로가 다시 투옥 당했는데 같은 체험을 합니다.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네 명이 일조가 된 군인들이 4교대로 지켰습니다. 엄중한 경비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끌고 나가는데 첫 번째 초소 통과, 두 번째 초소 통과,
쇠문에 이르니까 문이 저절로 열려서 베드로는 마가 요한의 집으로 무사히 갑니다.
사도들이 투명인간이 되고 벽도 투과(透過)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과학이 발달해서 지금 복제인간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데
조금 더 발달하면 투명인간들이 탄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성경에는 2천년 전에 이미 그런 현상이 있었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면 이런 기적도 가능합니다.
▲둘째, 즉시 순종입니다.
밤중에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면서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했습니다. 5:20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어이쿠, 죽는 줄 알았더니 간신히 살았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게 무어야. 다음 번에 또 걸리면
그 때는 정말 국물도 없을 거야! 우리 내빼세!" 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되 즉시 순종했습니다. 새벽에 성전에 가서 가르쳤습니다.
그 때 성전제도를 아무리 열심히 살펴보아도
오늘날 한국교회와 같이 새벽기도회 제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날이 밝고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합리적일텐데
즉시 순종해서 성전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마 성전이 열리면 얼른 들어가서
제사 드리려고 성전 앞에서 노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종, 귀합니다.
즉시 순종, 더 귀합니다.
여러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즉시 전도하십시오.
미루는 사이에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식습니다.
헌금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즉시 헌금하십시오.
미루는 사이에 헌금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대신 아까운 마음만 커집니다.
영화배우 고은아(高銀兒) 권사님의 오래 전 간증인데
이 분은 CF 교섭 같은 것에 잘 응하지 않았는데
조미료 미원을 생산하는 회사에서 "우리 CF에 출연해 주십시오" 교섭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웬일인지 응하고 싶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쪽에서 제의한 액수보다
더 많은 출연료를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실무자가 그 말을 듣고 가서 사장에게 보고를 하니까
사장도 웬일인지 순순히 승낙을 했다고 합니다.
그 출연료를 받고 그야말로 즉시, 고은아 권사님의 표현을 빌면
"가지고 있으면 미련 생길까봐 눈을 질끈 감고" 그때 삼양동에서 안요한 목사님의
막 시작된 새빛맹인교회에 전체를 헌금했다고 합니다.
새빛맹인교회는 그때는 지금처럼 알려져 있지도 않고
그 때는 영수증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 영수증을 가져오면
당국에서 얼마씩 보상해 주는 제도가 있는데,
시각장애인들이 다방들을 돌아다니면서 그 영수증들을 모아서
교회와 새빛맹인학교를 간신히 이끌어 나갈 때입니다.
더구나 사기를 당해서 존폐위기에 서 있을 때인데
그 헌금을 가지고 재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즉시 순종하십시오. "나 교회에 나가기는 하겠는데 다음에, 조금 있다가 교회 나갈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허리띠를 잡고서라도 즉시 끌고 나오십시오.
성도들, 주일예배 불참 사유를 보면 "늦잠 자느라고" 이런 것이 의외로 많습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즉시 일어나야지 "조금만 더 자자" 하다가는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조금 있다가" "내일" 이런 소리가 마음속에 들리면 성령 역사를 방해하는
악령의 속삭임으로 여기세요. 즉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비복음과 타협을 거부합니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전도하는 것, 그 당시 기득권자들에게는 보통 심각한 사태가 아니었습니다.
21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측근들이 모였습니다.
"공회와"- 공회는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만 소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 - 원로들까지 모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국이 혼란해지면 대통령이 원로들을 모셔다가 상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관계기관대책회의, 시국대책회의, 국정자문회의가 혼성으로 열린 것입니다.
분위기가 삼엄하고 급박합니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가르치느냐?" 심문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삼엄하다고 해서, 심문이 준엄하다고 해서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고 대답합니다.
한쪽에서는 "아-"하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오-" 하라고 할 때 "어-"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세상과 타협해 가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아-"하라고 하시면 분명히 "아-"했습니다. 이 때 성령충만해 있으니까
"아, 아!"했을 것입니다.
찬송가 521장 가사에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는 가사가 있는데
빛 편에, 진리 편에 서겠다고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타협을 거부합니다.
▲넷째, 복음의 진수(眞髓)를 소유합니다.
30절과 31절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복음의 진수입니다. 케리그마, 설교의 원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큰 줄기입니다.
교제, 교양적인 도움 같은 것은 복음의 가지입니다.
가지를 붙들고 매달려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지는 꺾어지기 쉽습니다. 성령은 복음의 줄기를 잡게 합니다.
▲다섯째, 선교의 의지를 선언합니다.
32절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계속해서 선교하지 않을 수 없다!" 담대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합니다.
42절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이 성령 역사의 가장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님, 나 사업 새로 시작하는데 같이 합시다" 하면
성령님이 같이 하실지 혹 안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업인가?" 하실 것입니다.
"성령님, 나 선교하는데 같이 합시다"하면 즉시 "OK"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령 역사의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적이 일어나고 교회가 확장되는 단계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전부인줄로 압니다.
한 단계, 두 단계 앞으로 더 나가야합니다. 그래서 선교의 단계에 이르러야합니다.
한국교회가 성장이 둔화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70년대, 80년대 여의도에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엑스플로,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의 이름으로 모이면
백만 이상이 척척 모이던 때를그리워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 집 금송아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백만 이상이 모이려고 해도
여의도 광장도 없어졌고 그저 십수만 정도 모일 수 있는 잠실 공설운동장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성령의 열풍이 한반도를 거쳐 지금은 중국대륙으로 갔는데 중국의 교회가 지금 이 단계입니다.
교회의 확장이라든가 기적 같은 것이 왕성합니다.
1988년에 중국 남경(南京)에 성경출판을 목적으로 하는 애덕(愛德)인쇄공사가 세워졌는데
지난 3월 16일에 2천 만 권의 중국어 성경을 인쇄했습니다.
특별히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성경 18,000권도 출판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장애인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이 희박한데
중국교회가 앞장서서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왜 백만 명이 모이지 않지?"
"만 명 이상이 모이는 메가 처치가 왜 더 많아지지 않지?"
하지 말고 이제는 성령과 동행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어야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얼마 못 가서 한계에 부딪힙니다. 성령과 동행하면 한계가 없습니다.
사람이 현금을 가지고 쓰려면 몸에 지닐 수 있는 현금은 한도가 있습니다.
007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쓴다고 하더라도 한도가 있습니다.
성령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서명이 들어 있는 백지 수표,
또는 지급한도가 무한대인 신용카드를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저희 교회 성전신축 공사에 성령이 동행하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형식적인 말, 어딘지 공허한 느낌을 주는 말이 아니고
생동감 넘치는 말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풍년든 과수원과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이 서른이 넘은 사람이 "내 키가 왜 더 커지지 않지?" 해서야 되겠습니까?
▲성령의 최고은사는 사랑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 이야기 한 다음에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보여주었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로미오와 쥴리엣의 사랑도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
그리스도를 모르고 헛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표현되어야 하는데, 실천되어야 하는데 그 표현, 그 실천이 바로 선교입니다.
사랑에 바탕을 둔 선교가 순수한 선교이며 바른 선교이며 성공하는 선교입니다.
의무감에서 하는 선교, 보이기 위한 선교, 유행을 따라서 하는 선교도
안 하는 것보다는 좋습니다만 껍데기 선교입니다.
성령은 사랑이 된 선교에 밀착해서 함께 하며 무한대로 도와주십니다.
알맹이 선교가 되게 해 주십니다.
요한 웨슬리가 회심 이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위해 선교사로 간 것은
의무감에 의한 선교였습니다. 실패하고 돌아 왔습니다.
회심 이후 말 타고 다니며 한 선교는 사랑이 동기가 된 선교였습니다.
그 결과가 감리교라는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선교부터 하십시오. 일을 할 때 차근차근 앞뒤를 재고 절차를 따르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만 때로는 먼저 저질러 놓고
그 다음에 수습해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오늘은 세 가지가 겹친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이고 웨슬리 회심 기념주일이고 저희 교회는 해외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토끼가 세 마리입니다. 어느 토끼를 잡아야합니까?
초점이 세 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선교, 하나입니다.
성령 역사의 최고 단계도 사랑이고 웨슬리 선생도 회심 이후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했습니다.
성령강림이라는 동그라미와 웨슬리 회심이라는 동그라미가 겹치는 부분이 선교입니다.
이 하나의 초점, 성령 역사의 가장 성숙한 모습인 선교 - 이웃 전도, 개인전도, 사회선교,
그리고 해외 선교에 더욱 힘쓰는 목양교회 성도들과 컴퓨터를 통해
이 설교를 대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선교를 지상명령으로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