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80124198604
※하나님은 사전에 미리 경고하시며, 그 때 알아들어야 된다는 주제의 설교문
◈나귀가 밭으로 들어갈 때 민22:21-35 2010.10.10.
민22: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길에는 늘 파란 불만 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길가의 신호등이 늘 파란 불이 아니라 빨간 불, 노란 불이 켜지는 것 같이
우리 인생길의 신호등도 늘 파란 불이 아니라
때로는 빨간 불이 때로는 노란 불이 켜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순탄하고 별일이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어려움이 생기고 빨간 불이 켜질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살다보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불쑥불쑥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생각지도 않은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우리 식구들에게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잘 되던 사업이 난관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인생의 길에서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의 인생길에 빨간 불이 켜진 것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가다가 빨간 불이 나오면 차를 멈추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길에도 빨간 불이 들어오면 가던 길을 멈추고 서야 합니다.
빨간 불이 들어왔는데도 자기 고집대로 계속 가면 큰 사고가 나고, 위험한 일이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빨간 신호는 위험을 나타내는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어야 하는 것처럼
인생길에도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의사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 몸도 갑자기 큰병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큰 병이 생기기까지, 우리 몸에 조그만 이상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때 얼른 알아차리고 대처해야 합니다. 무슨 병이든 불치의 병인 암이라 할지라도,
초기에 알아서 치료를 하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의 초기 증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무시하다가
진짜로 큰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손댈 수 없는 안타까운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큰 병을 앓는 분들 중에 "그때 알아차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했으면 되었을 것을,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긴 가야 되는데 시간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크게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가족들이 후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편이 이상하다고 할 때 강제라도 병원에 가야 했는데.."
나중에 땅을 치며 크게 후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병은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병은 조금 꾀병을 부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큰 병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태풍이나 지진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미리 징조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요즈음에는 그 징조를 과학적으로 예측하여 기상예보를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를 잘 관찰하고, 그래서 일어나는 자연의 여러 징조를 보고
기상의 변화를 예측했습니다.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 개미가 드나드는 구멍에 큰 구덩이를 쌓으면 비가 많이 오고,
쥐가 쥐구멍에서 나오면 지진이 난다고 했습니다.
요즘 쓰나미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짐승들이 산으로 올라가면 쓰나미가 온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동물들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옛날 사람들은 다가올 재난을 예측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듯이 인생이 늘 편안하고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날씨처럼 더위와 추위가 있고 장마와 가뭄이 있습니다. 태풍과 지진이 있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엄청난 일들이 당황스러운 일들이 우리의 삶에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가만히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갑자기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러 가지 징조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셨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일이 닥칠 것이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가 그것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조그마한 징조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인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희미하고 조그만 징조를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괜히 그런 징조가 나타난 것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조그마한 징조이지만 엄청난 태풍과도 같은 일이 일어날 엄청난 씨가
그 속에 담겨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이런 저런 이상한 징조, 때로는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미미한 징조는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징조입니다.
무엇인가 미래에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큰 병이 나기 전에 우리 몸에 나타나는 징조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구약 민수기 22장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 번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항상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제 인생의 소중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발람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모압이라는 나라로 가는데
발람 선지자가 타고 가던 나귀가 갑자기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깜짝 놀란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때려서 나귀가 다시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귀가 벽에 몸을 부벼서 발람 선지자의 다리가 벽에 긁히게 되었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나귀에게 채찍질을 합니다. 이번에는 나귀가 길에 털썩 주저앉아서
길을 가지 않습니다. 화가 난 발람 선지자가 자기가 들고 있는 지팡이로 나귀를 때립니다.
왜 나귀가 가던 길을 가지 않고 밭으로 갔습니까? 왜 털썩 주저앉았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나귀는 길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길을 막고 서있는데,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앞으로 가면 하나님의 사자의 칼에 죽을 것이 뻔한데,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나귀는 밭으로 들어갈 수밖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비참한 것은, 일개 짐승인 나귀도 보았던 하나님의 징조를
발람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발람은 당대의 선지자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징조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의 징조, 하나님의 신호가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람에게서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징조를 보지 못하고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의 불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귀가 밭으로 들어갈 때 채찍으로 때리지 말고
이것이 무슨 뜻인지 어떤 신호인지 깊이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했습니다.
왜 길을 잘 가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가,
이것이 무슨 신호인지 무슨 징조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행하게도 발람은 그 신호를 무시하고 징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리가 긁히고 두 번 세 번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내라는 나귀가, 자녀라는 나귀가, 사업이라는 나귀가, 건강이라는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잘 가던 길을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순조롭던 사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부부간에, 자식에게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에 돈을 쓰고, 생각지도 않았던 손해를 보고
내 인생길을 가로막는 복잡한 일이 일어나고
내 인생길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보통 때는 없던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무엇인가 일어날 징조입니다.
발람 선지자의 나귀가 그냥 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러 했듯이
우리 인생길의 모든 징조들은 절대로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날 징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잘 가던 여러분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면 긴장해야 합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 서야 합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사건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신앙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길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징조일 수 있습니다. 이유가 있는 시련입니다.
이유가 있으니까 우리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귀가 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과거에 우리가 한 일에 대한 결과일 수 있고
우리의 미래를 예시하는 징조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발람 선지자는 가지 말아야 할 곳,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을 가려고 하니까 나귀가 밭으로 간 것입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는 발람 선지자의 길을 하나님께서 막아서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발람 선지자는 세 번째가 되어서야 드디어 하나님의 징조를 깨닫고
왜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발람 선지자가 땅에 엎드리자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 선지자를 꾸짖었습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22:32~33절 말씀을 보면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발람 선지자의 나귀가 밭으로 간 것은 그의 가는 길을 막아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악한 길이었기 때문에, 가지 않아야 할 길이었기에 막아서신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이지 모릅니다.
이것은 발람 선지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람 선지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신호를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란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업, 건강, 자녀 그리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다리가 긁히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믿음의 눈을 떠서 칼을 빼들고 서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간다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애꿎은 나귀를 때리고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발람 선지자의 나귀가 괜히 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나귀가 괜히 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주시고자 하는 징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갈 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의례히 그러려니.. 그러다가 말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나귀가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면 긴장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그 징조가 무엇인지, 무슨 뜻인지.. 무슨 징조인지...
알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신호가 무슨 뜻인지 신앙적으로 잘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발람 선지자가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 것 무심하게 생각하다가 큰일날 뻔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나귀가 멈추어 설 때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주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무슨 징조인지 무슨 신호인지 여러분의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길에 들어섰으면 되돌이키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가던 길을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가정에 여러분의 나귀가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갈 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신호인줄 알고 엎드려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 삶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새로운 삶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나귀가 밭으로 들어갈 때 오늘 이 귀한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큰 깨달음과 은혜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
▲적이 안 보이면, 적에게 패한다.
개인/가정/교회에서 왜 우리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는가?
마귀의 작전, 마귀의 궤계가 자기 눈에 안 보일 때.. 그렇게 된다.
적의 침입이 안 보이니까, 대비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안 보이는 이유는, 고지와 능선을 점령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 하고,
반대로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된다.
기도 중에, 마귀가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궤계가 (능선에 서면) 다 보인다.
엘리사는, 적(아람 군대)이 어느 경로로 올 것인지,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또한 자기 집에 누가 찾아 올 것까지 다 미리 알고 있었다.
‘기도의 능선’을 구축해서 <마귀의 역사>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보이면, 마귀에게 안 속는다. 마귀가 역사해도 금방 이긴다.
능선에 올라가면 적의 동태가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적에게 속을 이유가 없다.
100% 명확하게 비디오처럼 보일 때도 간혹 있겠지만,
보통은 7~80% 어렴풋하게 어떤 징조, 계시, 싸인, 꿈, 환상, 음성, 강박관념을 주신다.
그래서 자기가 그 보고 들은 것을, 현실에서 잘 분변해야 한다.
자기가 보고 듣지만, 잘못 엉뚱하게 해석/적용하는 경우도 많다. 분변 훈련이 필요하다.
△실제로 어떻게 ‘기도의 능선’을 구축할 것인가?
‘능선’은 ‘고지’가 연결된 선이다. 혼자서 구축할 수 없다.
능선은 여러 사람이 함께 연결해서 구축하게 된다.
즉 기도의 능선을 구축하려면, 여러 사람이 기도의 고지에 함께 올라야 한다.
새벽기도 때에도, 자기 혼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성도와 같이 기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능선’ 구축이다.
더 강력한 ‘영적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당연히 개인적으로 구축하는 진지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진지가 된다.
개인적으로도 기도의 능선을 구축할 수 있는데,
일례로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매일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기도가 (줄줄이 사탕처럼) 계속 연결된다.
단 하루 드리는 기도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도의 부담/사명’을 주시면,
새벽뿐 아니라 저녁 9시에도 기도하는 성도도 있다.
그렇게 기도가 연속되어질 때, 강력한 기도 능선이 구축된다.
속회 별로 ‘기도의 능선’을 구축하기도 하는데,
속회 식구들끼리 매일 아침 10시에 모여서, 1달간 작정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그 사이에 속회 식구들 가정 문제가 깨끗이 풀리는 경우가 많다.
남자 성도들, 기관별로 ‘기도의 능선’을 구축할 수 있는데,
매주 목요일 아침, 또는 저녁에
남자 성도들끼리, 또는 기관별로 모여서, 오직 기도에만 열중하는 것이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꼭 기도의 능선을 구축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축원드린다.
기도의 능선 구축 없이는, 부흥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 안 하셔도, 눈치로 알아들어야...
이요셉 집사님은 사진작가시죠. 이요셉 집사님이 작년 필리핀 코스타에서
학생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한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보는데,
실제로 주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었다고 말하는 것인지를, 거기서 설명을 했습니다.
꼭 어떤 소리를 들어야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밤에도 그렇습니다. 꼭 소리를 듣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예를 들기를,
자기가 사진 작가로서 작품활동을 이렇게 하다 보면
이렇게 정리 정돈을 다 하고 있기가 쉽지 않대요.
그래서 항상 방에 이렇게 어질러 놓게 된답니다.
근데 아내는 아주 깔끔한 성격이라, 방을 치우고 정리하기를 좋아하는데
그 어질러 놓은 것을 보면, 아내가 늘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어 한다는 거예요.
하루는 자기가 뭔가 작업을 하느라고, 잔뜩 어질러 놓고 있는데
아내가 문을 열고 딱 들어와서 잠시 이렇게 쳐다보는데
아무 말을 안 하고 그냥 '참 답답하다' 이런 표현으로,
그날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문을 닫고 나가더래요. 근데 아무 말도 안 한 거죠.
근데 그때 아내가 '좀 정리하고 사세요. 어떻게 이렇게 하고 사세요?'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을, 자기 마음으로 들었다는 거예요.
아내는 정말 아무 말을 안 했어요. 그냥 자기 눈빛 하나로 말을 했던 겁니다.
그런 걸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시간에, 주님이 여러분에게, 똑같이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거예요.
'아 주님이 지금 나를 보시고, 주님은 지금 내 마음에 이런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시는구나'
그게 주님의 음성을 들은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