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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의 구원

LNCK 2024. 8. 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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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3 19 주일 2부  사도행전 16:19~40 / 간수의 구원 - YouTube

 

간수의 구원             행16:19~41

오늘 본문 내용은 "간수의 구원"입니다. 
'루디아의 구원' 과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의 구원'에 이어지는
빌립보 사역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끝으로 바울의 일행은 이제 빌립보를 떠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1. 본문에 이해되지 않는 장면은, 선교팀은 4명인데
왜 바울과 실라 두 사람만 붙잡혀갔나? .. 하는 점입니다. 

행16:16절에 보면, '우리가'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 .. 네 명이 기도할 곳으로 찾아가다가, 점 치는 여종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점 치는 여종에 들어가 있는, 귀신을 내쫓아 주었습니다. 
이 일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거죠. 

16: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여기의 '장터'는 단순히 시장이 아닙니다. 
이 당시 장터는 헬라어로 '아고라'인데요. 
물건을 사고파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그 한쪽에는 민사 재판이 열리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법정이 있었던 곳입니다. '광장'이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상관 앞에 데리고 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상관은, 그 당시 도시의 치안 판사를 말합니다. 
그 도시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치안 판사를 '상관들'이라 부릅니다. 

△자 그런데 4명 중에 바울과 실라 두 사람만  잡혀갑니다. 
왜 전도팀 4명 중에, 바울과 실라만 딱 집어서 붙잡혀 갔을까요? 

그 사이에 누가 와 디모데는 도망갔었나요?
그 답이 20절에 있습니다.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0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 이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디모데와 누가는 헬라인 이었던 거죠.)

사실 이들은 감옥에 들어갈 만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제가 어떤 무당에게 들어간 귀신을 쫓아 냈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걸로 제가 감옥에 갈 죄가 성립되나요? 아니죠. 
귀신을 쫓아낸 게, 감옥에 갈 만한 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걸 여종의 주인들이 모를 리 없는 거죠. 
그런데 바울과 실라를 너무 감옥에 집어넣고 싶은 겁니다. 
자기들의 수입이 딱 끊어지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벌을 주고 싶은 겁니다. 

자 그런데 감옥에 넣을 만한 뚜렷한 죄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찾은 방법이, 반 유대인 정서를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아주 컸던 시기입니다. 
지금 바울 일행이 2차전도여행을 하고 있잖아요. 
이 시기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로마시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을 때입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의 빌립보는 '리틀 로마'로 불리던 도시였습니다. *퇴역 군인들 집단 거주지
뭐든지 이탈리아의 로마를 그대로 본받아 하는 곳이었죠.
자 그러니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굉장히 컸던 시기와 장소였죠. 
그걸 여종의 주인들이 이용한 겁니다.

자 그래서 고소 내용을 보면, 대조되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16:20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21절에 보면 '우리들은 로마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편가르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선거 때 보면 정치인들이 이런 거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지역 주의 감정을 조장한다거나, 어떤 편가르기를 통해 선동하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또 잘 먹힙니다. 

자 이 여종의 주인들이, 그걸 사용한 거죠. 
자 보니까 유대인들이 있는 겁니다. 
바울과 실라죠. 원래 이들은 로마시민권자인데, 유대인으로 보였나 봅니다.
우리 나라도 미국시민권자가 한국인으로 보이듯이요.

반면에 누가 와 디모데는 헬라인이었습니다. 표가 딱 났던 거죠.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바울과 실라는 로마시민권자 라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유대인으로만 아는 거죠. 
이런 '인종(차별)주의'를 그들이 악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들끓었던 반 유대인 정서를 이용한 것이죠. 
'그러면 얘네들을 충분히 잡아 넣을 수 있겠구나' 주인들은 계산이 딱 나온 겁니다.

이 선동이 그대로 먹힙니다. 그 다음에는 볼 것도 없죠. 
이미 감정적으로 선동이 됐으니까요. 

치안 판사가 정식으로 재판을 진행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잡아다가 매로 때리고 감옥에 집어 넣으라 명령했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의 기대대로, 반 유대인 정서가 적중했던 거죠. 
이것이 바울과 실라만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입니다. 

▲2. 이어서 오늘 본문에,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바울과 실라가 했던 행동 인데요.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리고 이 일 후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 지진으로 인해서 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차꼬가 다 풀립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가지고 이렇게 접근하기도 합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하고 찬송합시다. 그러면 옥문도 열립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땅도 흔들립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이런 식의 접근에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들은 옥문이 열리기를 기도한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바울, 실라)은 지금 석방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만약 만일 이들이 석방을 위해 기도했다면, 지진이 났을 때 이들은 잽싸게 도망가야 했습니다. 

앞 뒤 볼 것 없이 감옥에서 뛰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감옥에 그대로 있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발에 묶여져 있던 차꼬가 다 풀렸는데 
'이때다' 하고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기도는, 감옥에서의 구출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이 열린 게, 그들이 기도를 했기 때문에 열린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기도를 애초에 하지 않았으니까요. 

자 그러면 이들의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들의 기도에서 무엇을 적용해야 할까요. 

△자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5절을 제대로 풀어야 합니다.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위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주 동사가 '찬송하다'입니다. 
'기도하고'는 현재분사 입니다. '찬송하다'를 수식하죠. 꾸며줍니다.
'기도하면서 찬송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다가 마음 속의 기도가 찬송으로 터져나와서, 찬송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다가, 기도가 변하여 찬송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을 보면 이런 비슷한 일들이 종종 나옵니다. 
시편에 보면 (탄식, 비탄의) 기도를 하다가 → 찬송으로 갑자기 바뀌는 패턴이 종종 등장합니다. 

일례로 시22편인데요. 
1절부터 다윗의 기도로 쭉 시작됩니다. 

시22:1~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윗은 지금 절망적인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탄식하며 자기의 처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탄식의 기도가 갑자기 찬송으로 바뀝니다. 
22절부터인데요. 

시22:22~23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갑자기 탄식으로 기도를 시작했다가
뜬금 없이 찬송으로 고백이 바뀝니다. 분위기가 단숨에 역전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시인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셨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도우시겠다는 확신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탄식의 기도가 갑자기 찬송으로 바뀝니다. 

여러분 이 일이, 본문의 바울과 실라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들은 아마 마음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바울과 실라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여기 빌립보에 오려고 하질 않았죠. 
자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 떠밀리고 떠밀려서 빌립보로 오게 되었습니다. 

자 왔더니, 반기는 자 아무도 없이, 여자 몇 명 만난 것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루디아가 구원을 받았지만, 그 전처럼 무리가 (여러 명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루디아 한 명만 구원을 받았고요. 
귀신들린 점치는 한 여종이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선동에 몰려서, 붙잡혀서 심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것도 억울하게 정식 재판을 한번 받지도 못하고 붙잡혀 왔습니다. 
그러니 아마 바울과 실라는 '이게 뭔가?' 싶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23절에 '많이 친 후에 감옥에 가두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많이 맞았냐 하면, 살이 터지도록 맞았습니다. 
33절에 보면, 나중에 간수가 바울의 상처를 씻겨야 할 정도로, 살이 터지도록 맞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바울과 실라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거죠. 
자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절망적 상황이고, 낙심의 상황입니다. 

자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한 내용이 무엇이죠? 감옥에서 빨리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빨리 풀려 나기를 기도한 게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지진이 나서 감옥 문이 열렸을 때, 잽싸게 밖으로에 나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옥 안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니 석방 기도를 하지 않았던 거죠. 

△자 그러면 그들은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그들은 감옥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빌립보에 왔는데, 우리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여기로 왔는데, 감옥에 갇힌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감옥에서 하시려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 하나님의 섭리를 물었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바울과 실라의 기도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기도하는 바울과 실라에게 확신을 주셨을 것입니다. 
어떤 확신이었을까요?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는 확신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 확신이 들자 바울과 실라는 찬송이 터져나왔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들을 통해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있다는 확신을 주셨을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영혼이 있다는 확신을 주셨을 것입니다. 

자 그래서 바울은, 옥문이 열려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면 복음을 들어야 할 누군가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자 그것 밖에는, 지금 이 상황이 달리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거기에 간수가 있었습니다. 
밤잠을 자다가 된 간수 는 열려진 옥문을 보았습니다. 
그때 간수는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면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죄수가 탈출하면,
지키던 간수는, 그 죄수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사형수가 탈옥을 하면, 그 사형수를 지키던 간수가 대신 사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감된 죄수 한 명이 빠져나가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감옥에 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놀라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간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자 그런데 그때 감옥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울의 소리 였죠. '우리 모두가 여기에 있다'하는 소리였습니다. 

자 그러자 간수는 바울 에게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습니까?' 
자 그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31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 보면 '주 예수' 앞에 정관사가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한 구원의 이름이라는 얘기죠. 

지난 시간에 들었던 귀신들린 점치는 여종의 말과 딱 대조 되지 않습니까? 
자 그때 귀신의 말이 기억나십니까? 슬그머니 정관사를 빼 버렸죠. 

그러면 '예수가 여러 구원의 길 중에 하나이다'가 되는 거죠. 
그 여종의 말은 '구원의 유일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자 그러나 바울의 말에는, 원문에 보면, '주 예수' 앞에 정확히 정관사가 붙습니다.   *톤 (호)
즉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라는 말뜻이죠. 

이 말을 들은 간수는, 복음이신 예수를 믿었습니다. 
간수 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게 바울의 기도와 찬양이었습니다. (뭔가 이런 결과에 대한 감이 왔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바울에게 확신을 주셨던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도 하실 일이 있다'는 확신을 주셨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매 맞고 사슬에 매여있는 상황이지만, 이것이 실패가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매임을 통해서도 반드시 이루어 나가실 것이다' 라는 확신을 주셨을 것입니다. 

자 바로 그때, 그들의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마치 시편의 패턴처럼, 절망의 상황에서 드렸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송으로 갑자기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도의 은혜입니다. 
기도의 사람은 종종 이러한 일들을 경험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개입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확신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확신이 찾아옵니다. 
그 분이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나의 아버지라는 확신이.. 기도가운데 찾아옵니다. 

때로는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들을, 기억나게 하시면서 
이 문제들 또한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실 거라는 확신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그때 문제에 잠식되었던 우리의 마음이, 순간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러면 두렵지 않는 거죠. 겁나지 않는 거죠. 

그렇게 나의 인생의 걸음이, 그 분의 손에 있음을 확신하게 되면서 
기도를 시작했던 절망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으로 
기도의 내용이 확 바뀌어지는 은혜를 누립니다.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터져나오는 오늘 바울과 실라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도 됩니다. 
그러니 이들이 특별해서 이런 은혜를 누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 역시도 동일하게 그 은혜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찬송으로 바뀌어지는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도 동일하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평생에, 이런 은혜의 역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기도의 모습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적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이 가둘 수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는, 세상의 권세에 갇혀서 옥에 갇히고 차꼬에 매여있는 상황입니다. 
겉으로 보면 갇힌 자들이고,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사슬에 매여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는 전혀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도, 깊은 감옥도, 그들을 묶고 있는 차꼬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결코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감옥 안에서도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어디서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분께 나아가는 사람은, 어디서나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옥이나 차꼬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가둘 수 없습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리는 없습니다.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감옥이 그들을 가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죠? 이들을 가두고 있던 감옥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묶고 있던 차꼬도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이들이 기도를 했기 때문에 감옥이 열린 게 아닙니다. 
이들은 감옥에서 나가기를 기도한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나 기도 이후에 감옥문이 열립니다. 
마치 이들을 가두게 한 세상의 권세, 세상의 힘도, 권력도 
이들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는 생생한 모습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가지는 힘인 거죠
바울과 실라가 가진 힘과 능력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로마 시민권 자들입니다.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지만, 법적으로는 로마의 보호를 받는 로마의 시민입니다. 

이 당시 로마시민에 대한 법 조항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시민은 누구에 의해서도 재판을 받지 않고 판결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구속되거나 매를 맞아서 안 된다." 

여러분 지금 바울과 실라는, 정식적인 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만일 바울과 실라가 처음 고발을 당했을 때 
"우리는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이 하나만 밝혔어도, 매를 맞을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꼬에 매일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걸 바울과 실라가 몰랐을까요? 알았겠죠. 
자 그런데도 이들은 로마시민권자 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물론 뒤에 보면, 이들이 로마시민이라고 밝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감옥에서 놓인을 받았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감옥에 들어갈 때까지, 감옥에 들어가서도 
자신들을 로마시민권자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자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주석을 찾아보니까,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더라고요. 

1) 어떤 학자는, 바울과 실라가 잡히는 과정에서 로마시민권자라고 말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장터니까 너무나 주변이 시끄러워서, 이들의 말을 듣지 못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속된 말로 외쳤는데 이제 '씹힌' (무시된) 거죠. 

2) 또 어떤 학자는,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위해 로마시민권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감옥에 들어가는 일을 통해 하실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위해,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정확히 나오지 않으니까요. 
확실한 것은, 바울과 실라는 로마시민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시민권자라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걸로 자기들이 빠진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무엇을 택합니까?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찬송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비록 세상 권세가 그들을 가두고 차꼬를 채웠지만 
그들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때, 그들을 가두는 감옥에서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이 
찬송으로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거죠. 
여기에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진정한 생명과 기쁨이 있는 거죠. 
여기에 진짜 성도가 가지는 힘과 능력이 있는 거죠.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힘과 능력이 동일하게 허락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눈에 보이는 실패와 절망의 상황에서, 갇힌 것 같은 감옥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힘과 능력을 얼마나 자주 경험하며 사십니까? 
무엇을, 나의 힘과 능력의 원천으로 믿고 삼으며, 이 땅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의 자리를 찾으십니까?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서 자유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로마시민권과 같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세상의 힘이나 여기는 그것들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 이 땅의 성도는, 감옥도 가둘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권세와 힘으로도, 가둘 수 없는 존재가 이 땅의 성도입니다. 

감옥에 가두고, 차꼬에 묶고, 사람을 못 만나게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는, 누구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나 경험 되어지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떠한 절망의 자리에서 시작된 성도의 기도일지라도 
찬송으로 바뀌어지는 자유와 영광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이고, 가장 큰 능력인 거죠.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기적입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도움입니까? 
사업이 잘 되고, 질병이 없고,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여러분 그게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바라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입니까? 

진정한 기적과 능력은, 
비록 사업이 실패하고, 질병에 걸리고, 자녀들이 대학에 낙방할지라도... 
기도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기적 아닙니까!

세상에 그 어떤 것에도 속박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기도가 찬송으로 바뀌어지는 기적, 이것이 진정한 기적 아닙니까! 

그러니 어떠한 세상의 권세와 힘도 성도를 가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힘과 능력을 믿음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 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보다
더 큰 능력이요, 진짜 힘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며 사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처지가 기도가 되고, 그 기도가 찬성으로 변하는 
참된 자유와 기적을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마지막 세 번째로, 본문에서 주목해야할 장면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의 긴 내용이, 결국 향하는 지점이 어디입니까? 
간수 한 영혼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큰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차꼬들이 다 풀어집니다. 

자 그런데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옥문이 열렸는데, 누구도 감옥에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옥문이 열린 것도 하나님의 기적인데, 죄수들이 다 그 자리에 있습니다. 
딱 문이 열리면 도망갈 사람들이 죄수들인데, 아무도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기적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습니까? 간수 한 영혼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가 믿는 기독교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한창 감옥 밖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곧 빌립보를 떠나는데, 얼마나 시간이 아깝습니까? 
가능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런데 그런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이 아까운 시간에, 
감옥에 들어가도록 해서 하나님이 뭐 하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을 
감옥에 박혀 있는 간수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가십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를 
그 아까운 시간에 감옥에 들어가게 허락하시고, 그 곳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간수가 (그 가족이)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또다시 우리는 마주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게 기독교이죠. 기독교는 경제성과 효율성이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참 어리석은 종교입니다. 

만일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시간에 수백 명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보내면서까지, 
그리고 옥문이 열리는 큰 기적까지 동원하는 이유가,
몇백 명이 아니라, 몇 십 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원받을 한 영혼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온갖 수고와 대가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99마리의  길 잃지 않은 양은 그대로 두시고, 
1마리의 길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다니시는, 주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본문을 통해 전해집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한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와 끝끝내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그 분의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게 한 것 아닙니까! 

오늘 잃어버린 간수를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바울과 실라, 
도망 하지 않은 죄수들, 
그리고 옥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기적들이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이러한 흔적들이 고백되지 않습니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우리인데, 오늘 잃어버린 간수를 찾아와 주셨듯이,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동일하게도 우리에게 고백되지 않습니까? 

만일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진실되게 만났다면, 
이러한 동일한 고백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한 영혼 때문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러한 주님의 스피릿(정신) 들이 묻어나는 
우리 각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어 다시 한 번 결단을 했습니다. 
저희 교회가 이제 새벽기도를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제가 다시 한 번 결단을 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많이 나오진 않지만, 비록 한 영혼이 나오더라도 
말씀을 열심히 준비하자. 한 영혼을 위해 주님이 일하신 것처럼,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고, 한 영혼을 위해 열심히 말씀을 준비하자' 
그러한 결심을 새롭게 다졌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바라기는, 
정말 우리 교회가 한 영혼, 한 영혼.. 정말 신앙이 바르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무리가 오고 가는 교회가 아니라, 
한 영혼, 한 영혼의 신앙이 바르게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무리가 아니라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정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바른 믿음으로 세워지는 
한 영혼의 진실된 성장이 묻어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일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영혼이 주님을 만나는 교회, 한 영혼이 바르게 자라나는 교회,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교회, 
이런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부어지시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잃어버린 간수를 찾아가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 교회에도 풍성해 나타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