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07 로드맵 컨퍼런스 강의_목회와 설교 - YouTube
◈목회와 설교 행13:49 2019.10.07.
2019 로드맵 컨퍼런스 강의 녹취
'로드맵 세미나'를 시작한지 이제 거의 8년 가까이 됐습니다.
그 다음에는 3년 전에 '로드맵 플러스'라는, 소그룹으로 멘토링 하는 사역을 또 시작했고요.
여기가 부산이니까, 한국은 다 서울 중심이고,
우리가 다 시골이잖아요. 서울 빼고는 다 시골이잖아요.
여기가 복음의 또 사각지대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가끔 있죠.
부산 경남권, 복음의 척박한 곳에서 우리가 목회를 하는데
열악한 환경들이 굉장히 많죠. 또 사역자들 구하는 것도 어렵고,
또 세미나나 많은 것들이 서울에 편중 되어 있고
그러다보니까 상대적으로 굉장히 닫혀진 환경속에 있기 때문에
계속 발전하고, 계속 좀 도전 받고, 자극을 받고 하는 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로드맵 세미나'를 시작했고,
강사를 선정하고 섭외하는 게 쉽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6년, 7년 하니까, 강사도 점점 좁혀지는 게
'결국은 성경에 눈을 여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이제 강사 섭외도 그런 쪽으로 갑니다.
성경에 눈을 열게하는 강사들,
또 우리가 설교자들이니까, 설교를 집중해서 봐야 하는 것,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껴져서, 거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튼 이번에 웨스트민스트 신학교 교수님들을 또 모셔서
이렇게 강의를 들으 수 있는 게 참 좋고,
팀 켈러 목사님이 웨스트민스트 출신이거든요.
이제 팀 켈러 목사님을 한 번 모셔서 부산에서 집회를 하면 해야 되겠다... 소원이 있어서
지금 계속 그 작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2019 강의, 팀 켈러 2023 소천
그리고 지난 번에도 우리 로드맵 플러스 팀들이
여름에 미국 투어를 10일간 갔는데
마크 데버 등 굉장히 좋은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던 그 모든 다리를
피터 릴백 웨스트민스트 총장님이 굉장히 인맥이 많은 분이에요. Peter A. Lillback
그 분이 아주 다리를 많이 놓아 줘서
우리가 만나기 힘든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그런 은혜가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이 로드맵 사역을 통해서
한국 교회 또 가까운 부울경 지역의 목회자의 실제적으로 돕는 사역이 되길 지향합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여러분들이 관심가져 주시고, 또 열심히 또 참여하시면
저희들이 또 힘을 내서 계속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의 주제가 <목회 와 설교> 인데요.
목회, 설교.. 이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지 않으세요?
목회도 어렵고, 설교도 어려운 거예요...
◑현대 목회의 특수성
▲1. 지금은 특별히 '탈 종교의 시대'예요.
지금은 시대적 상황이 '탈 종교 사회' 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전통 종교에 관심이 없어요.
지금은 이제 나이가 이제 젊어져 갈수록 무종교가 많습니다.
지난 번에 통계를 냈을 때도, 실제적으로 옛날에는
뭐 '불교를 믿는다' 했던 사람도, 이제는 무 종교로,
과거에는 부모가 믿기 때문에 자기가 믿는다고 이렇게 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이제 많은 이탈을 하고 있죠.
기독교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죠.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굉장히 지금 낮아졌고,
모든 종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이런 분여에 대한 관심이 없는...
뭐 배척하고 무관심 해졌다는 거죠. 탈 종교 사회입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 자체가 굉장히 전방위적으로 어려워졌다는 거죠.
▲2. 또 '탈권위주의 시대'입니다.
이게 설교하기에 굉장히 힘든 환경이에요. 그죠.
권위를 무시하는 시대 속에서,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것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는 거죠.
설교 자체를 들으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 무덤덤한 수준을 넘어선... 그리고 종교와 그 권위를 무시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청중이 굉장히 까다로워졌다는 거죠.
거기에는 인터넷의 영향이 굉장히 큰 것 같아요.
웬만한 곳은 이제 좀 집회가 안 모이죠.
훌륭한 강사를 모셔도 집회가 안 돼요.
인터넷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뭐 꼭 가서 듣고 싶지 않은 거죠.
그리고 인터넷 설교를 들으면서, 이제 사람들의 귀가 다양해지고, 수준이 높아졌고
비판력이 생긴 것이죠. 비교를 계속 하니까요.
▲3. 그리고 지금은 '지성 사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똑똑합니다.
그래서 민감한 주제를 잘못 다루면 큰 일 나고,
또 어설픈 통계, 어설픈 정보를 괜히 얘기했다가는 이제 망신당하는 정도가 됐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평신도들이 똑똑하고, 많이 알고 있다는 거죠.
요즘 신학책들을 평신도 들이 많이 읽습니다.
그래서 신학책이 많이 팔리는 이유가, 평신도들이 신학책을 많이 읽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들려요,
심지어 일부는, 원어 공부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해요.
이렇게 청중이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4. '이동하는 교인들'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이동하는 교인들도 있는데
요즘 이거는 좀 많이 적어 졌죠.
지금은 수평 이동을 할 곳을 못 찾는다고 해요.
그리고 이제 지역 이동, 도시 이동
직업을 따라 출장, 이주 등...
그래서 현대 교인들이 끊임없이 이제 움직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청중이 딱 요렇게 내 설교를 듣기 위해서 터잡고 기다리고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거죠.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에서의 설교>의 위치는 그럼 어떤 것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그 어떤 것에도 자리를 내어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게 설교죠.
마틴 로이드존스의 <설교와 설교자> 책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설교야말로 교회의 주된 임무이자, 목회자의 주된 임무이며
그 밖에 모든 것은 보조적인 장치로서, 외곽에서 설교를 받쳐주는... 방편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가장 메인, 주된 사역이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보조적 장치라는 거죠.
사실 우리가 목회를 할 때 가지는 가장 중요한 소스 source 는 성경이잖아요.
이 성경을 청중들에게 외치는 이 설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죠.
이렇게 볼 때 설교는 교회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주된 임무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설교가 위기를 맞고, 또 설교에 청중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이 설교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죠.
목사에게서 타협할 수 없는 중대한 역할인 이 설교를
우리 스스로 폄하하거나, 또 그것을 소극적으로 붙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설교자의 위기
▲1. 먼저 외적인 위기가 있습니다.
외적인 위기는 위에서 얘기했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른 청중들의 변화가 확실해 졌다는 거예요.
불신앙의 시대, 지성적 시대에, 설교에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죠.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호응도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내적인 위기인데요.
교인들이 설교만 듣는 게 아니라, 설교자를 보고 있다는 거예요.
이건 뭐 예전부터 들은 얘기인데요. 요즘은 이런 현상들이 훨씬 더 강력하게 나타나죠.
'과연 저 말씀대로 목회자가 살고 있는가, 설교자가 살고 있는가?'
이것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어쩌면 요즘 교인들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겁니다.
메신저와 메시지의 분리, 일치되지 않는 거.. 이게 정말 중요한 겁니다.
교인들은 설교만 듣고 있지 않습니다.
▲3. 세 번째는 설교자 자신이 말씀 선포에 대한 확신이 약해진다는 거에요.
'과연 이 설교가 청중을 바꿔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하다 보면, 이제 이게 깊어지면.. 설교에 자신감이 없어져요.
'내가 뭘 하지? (오래 설교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렇다면 이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다 보면 설교자 스스로가, 진리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거죠.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나도 확신하지 않는 말씀을, 다른 사람을 설득해 내기는 어려운 거거든요.
설교자가 100의 확신을 갖고서 선포를 해도, 교인들은 60~70 될까 말까인데,
설교자 자신이 그 말씀에 대한 확신이 약해져 있으면 어떻겠어요?
자 이런 문제들이, 결국 설교자의 위기입니다.
▲4. 설교자의 일상
설교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일상'입니다.
일상 속에서 설교가 나옵니다.
일상의 삶과 거리가 먼 설교이기 때문에, 결국 설교가 허공을 치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설교는 책상에서 만들어지고, 책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뭐 주해와 어떤 강의를 통해서 만들어지기 보다는,
사실상 설교자의 일상의 삶이, 설교를 규정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청중이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자의 일상을 보는 것입니다.
'과연 저 설교자가, 저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전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설교에, 설교자의 일상이 다 드러나고 있다는 거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책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목사님의 아버지가 푸줏간을 했는데, 자기가 어린 시절에 보면,
'아버지가 그 흰옷을 입고 고기를 썰고,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얘기를 나누면서
고기를 썰어주는 그 아버지가, 한 번씩 와서 고기를 사 가는 목사님 보다
훨씬 더 성직자 같았다...'고 했어요.
아주 성실하게 그 푸줏간을 운영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하는
그 아버지에게서, 훨씬 더 성직자다운 삶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단순한 설교를 해내는 기능이 아니라
그 설교를 자기 일상에서 살아내는 삶의 내용을 갖고 있는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목회자의 일상의 문제입니다.
목회자의 일상의 삶이, 설교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그릇이라는 거죠.
그 그릇이 늘 경건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좋은 설교가 그 삶의 그릇속에 담겨져 나오는 거죠.
이게 굉장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오늘날의 설교의 많은 부분이 피상적이다... 라고 하는 얘기를 듣습니다.
성도들이 하는 얘기를 우리가 귀를 기울여 보면
우리의 설교가 굉장히 피상적이라는 거예요. 삶을 관통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 성도들의 삶을 통과해 내는, 파괴력, 파급력이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피상적이라는 거예요. 말씀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죠.
우선은 하나님 말씀 자체도, 우리가 평신도들의 큐티 수준을 넘어서야 되는데,
여러분 평신도들 가운데서도, 큐티를 굉장히 오래한 분들은 내공이 있어요.
한 20~30년 큐티 생활한 분들을 보면, 굉장히 말씀의 깊이가 있어요.
그런데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다루면, 실망하게 되죠.
'특별히 설교자가 말씀으로 몸부림을 쳐 본 흔적이 있는가?' 이게 중요하죠.
'설교에 설교자 자신의 갈등과 고민이 섞여져 있는가?'
'자신의 인격을 관통하고 나오는 말씀인가?'
'설교라는 게 그냥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면,
설교자의 인격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설교가 흘러 나오고 있는가?'
이게 지금 가장 큰 주제 중에 하나예요.
우리가 지식 전달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신학적인 내용도 전달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좋은 얘기를 잘 구성해서 포장, 정리해가지고 전달 할 수는 있지만
이게 성도들의 삶의 크게 파고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이 말씀 바깥에 와 있을 때 그렇습니다. (삶의 실천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이 말씀과 삶의 현장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어려운 거예요.
'결국 우리 일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살아 내고 있는가?'가 관건인 거죠.
사실 성도들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겪고 있는 삶에 굉장히 고통이 많아요. 아픔이 많아요.
수 없는 문제를 끌어 안고 있어요.
주일날 교회 올 때는 거의 반쯤 죽어서 와요.
어떤 사람은 그냥 그 주일이 마지막이기도 해요. *죽기 직전
그러니까 오늘 현대사회 속에서, 도시 안에서, 이런 경쟁 사회 속에서 사는 성도들...
물질 주의와 세속화가 완전히 들어와 있는 이 삶의 현장 한 가운데 살아가는
오늘 현대 그리스도 인들은, 그냥 투쟁속에서, 갈등과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자세히 들여다 보세요.
'정말 문제 없이 편안한 가정이, 한 가정이라도 있을까?' 할 정도로
그런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의 말씀의 처방을 내리면...
설교를 통하여 오히려 좌절을 줄 수가 있어요.
쉽게 답을 주려고 하면...
근데 그 설교를 듣고, 그 성도들에게 진정한 답이 될 수 있는가요?
아 어려워요. 그러니까 피상적 설교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이 피상성을 극복해야 돼요. 그럴려면 고민이 많아야 돼요.
몸부림을 많이 쳐야 돼요.
성도들의 고통속으로 들어가는 성육신적 설교가 되려고 하면
어떤 면에서는 목회자 자신도, 그 말씀을 가지고 고뇌하고, 절망하고,
또 그 말씀을 끌어안고 기도하고... 몸부림치고...
그래도 때로는 말씀으로 오래도록 답을 얻지 못할 때도 가끔 있어요.
오랜 갈등과 고민과 기도와 묵상과 삶의 체험 이후에, 비로소 답을 얻을 때도 가끔 있어요.
▲5. 다섯 번째 중요한 것은 이제 '영성의 문제'인데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는 주해나 지식이나 전달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주된 문제가 아니고, 설교자의 영성의 문제입니다.
설교 자체가, 설교자의 영성이 받쳐줘야 되는 거예요.
영성의 깊이가 받쳐줘야 되는 거예요.
단순히 해석이나 주해만으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에요.
뭐 설교를 해보신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내용이 너무 잘 정리 돼서 '아 오늘은 내용이 너무 충실해.'
그리고 뭐 주해나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했는데... 강단에서 내려오면 씁쓸한 거예요.
여러분, 영성의 힘이 설교에 영향을 주는 거죠.
설교는 한 주간에 준비되는 거지만, 영성은 설교자의 전체(일생의) 삶이 받쳐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설교자의 영성이, 설교에서 드러나는 것이죠.
평소에는 설교자의 영적 세계는 감춰져 있는 겁니다.
그게 쉽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요.
뭐 내가 한 주간 기도했다고.. 뭐 그게 (영성이) 확 나타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나 평소에 기도 생활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그리고 말씀을 얼마나 묵상하고, 사랑하고, 그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며 살아왔는지... 이것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것이 그 목회자의 영성이 되고, 영성이 뒷받침 되어 갈 때
그 영성의 힘이 설교를 밀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 내용이 아니에요. 설교 내용만으로 설교를 할 수는 없어요.
내가 준비한 만큼 설교가 생명력 있게 증거 되려고 하면,
영성의 힘이 받쳐줘야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설교자를 받쳐주는 영성의 깊이가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역을 하면
우리 한국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사역 자체가 바쁘고 힘들고 피곤하고
막 밀려오는 일들을 하다 보면,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돌볼 여유가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목회하다보면, 영성은 천점 바닥을 치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하는 건 다 기능적인 것만, 스킬만 남는 거거든요.
뭐 외적인 어떤 활동이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건 어렵지 않는 거거든요.
겉보기에 세련되게 해 나가는 이런 것들은 가능하지만,
목회자 자신의 영적인 돌봄이 없기 때문에
내면 세계는 이렇게 점점 점점 밑바닥을 치고 있는...
그러면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죠.
솥바닥을 긁는 거죠. 계속 그냥 행주를 막 쥐어짜는 거죠.
저는 우리 한국의 목회가, 정말 이게 아웃 고잉, 바깥으로 너무 많이 흘렀갔다는 거예요.
영성의 깊이를 가지고 목회를 해 나가는 게 아니고, 활동으로 다 포장이 돼 있는 거예요.
뭐 심방 다니고, 또 무슨 행사하고, 전도 집회 하고, 일면 행사는 재미있는 거거든요.
그런 외적인 활동도 중요하긴 하죠.
근데 우리가 목회자로서의 영적인 어떤 내면 세계를 채워가는...
그래서 존재에 부요함을 경험하는... 영적인 일이 등한시 될 때가 많아요.
영성이 깊어지면, 자기 존재의 부요함이 오는 것이고
목회가 조급해 지지 않고,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자신을 그렇게 다듬어가는 사람들은
진지하고 꾸준하게 목회를 밀고 나가는 힘이 생기는 거예요.
목회는 한 방에 승부를 거는 일은 아니잖아요. 꾸준히 해야 되는데,
그 꾸준 함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그건 내 영적인 힘이잖아요. 영성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자기 영혼을 돌아보는 이 작업을 하지 않고,
우리는 사역에 너무 매몰되어 있는 겁니다.
△자 여러분, 보십시오. 목회를 하다가 도중 하차한 사람들이 요즘 많이 생깁니다.
앞으로 더 생길 거예요.
도중 하자를 하거나 심각한 어떤 사건이 생기면서 그만두는 경우들이 많죠.
안 그러면 그 목회자 때문에 교회가 분쟁과 어려움에 휩싸여 버리는 경우들이 많아요.
요즘은 사실 교회의 대부분 문제는, 목회자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핵심적 요인은 주로 목회자의 영성과 관련되는 거예요.
도덕적 결함도 결국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교역자의 영성 관리가 부실 했기 때문에 생긴 거죠.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넘어진 것도 엄청난 사건이잖아요.
한국교회가 얼마나 가서 탐방도 많이 하고, 그 분이 얼마나 한국에 와서 세미나 많이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윌로우크릭을 얘기했습니까?
그런데 결정적인 결함이 완전히 모든 거를 끝내 버렸죠.
영성이 결여 되면, 그 결여된 상태 속에서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하는데
어느 날 실수를 하는 거죠.
그렇게 하다보면, 설교도 하나의 습관적 행위가 되는 거에요.
스킬이 되고 기능이 되는 거제.
근데 자기 영성을 다듬어가지 않고, 설교 행위는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근데 결국은 이제 강단이 점점 메말라 가는 거죠.
그래서 설교도 결국 목회자 영성이라는 그릇에 담겨져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영혼을 들여다보고, 살펴보는 작업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인 부요함을 위해서 시간을 들여야 된다는 거죠.
기도 시간을 확보해야 된다는 거죠.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내 기도가 점점 깊어져 가고 있는가?'
△제가 이제 한국교회를 보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진단을 제가 하는 가운데
기도가 많이 약해 졌어요.
근데 약해진 이유가, 여러 이유가 있어요.
그 중에 하나가, 기도가 너무 아주 일반적인 기도예요.
기도의 세계가 깊어지지 않고, 부르짖는 기도, 응답받는 기도... 이쪽으로 기울어진 거에요.
근데 요즘은 뭐 또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다' 그래가지고
부르짖는 기도까지도 안 하고 있어요.
하여튼 이 기도가 깊어지지 않는 거죠.
목회자는 사실 기도하는 사람이거든요.
하나님과의 깊은 내밀한 교제가 있어야 돼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지금도 이제 목회를 좀 어느 정도 하면서, 제가 느낀 게 그거예요.
가만히 돌아 보니까, 결정적인 거는, 제가 한 게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여러분, 정말 성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설교가 만들어지려고 하면,
그게 내 힘으로 되나요? 안 돼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겁니다.
내가 아무리 설교를 잘 준비해도, 설교를 할 때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설교가 안 돼요.
그리고 설교자에게만 성령이 감동되는 게 아니라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돼요.
내가 무슨 재주로 성도를 변화시킵니까?
그건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목회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영적인 활동을 해야 된다는 거에요.
우리가 목사니까 먼저 우리가 영적인 활동을 해야 되는데
그 영적인 활동이라는 것은, 어떤 외적인 활동 이전에, 성도들을 돌아 보기 전에,
목자가 건강해야 되잖아요.
그게 뭐예요? 말씀과 기도죠.
이 기도가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제가 보니까.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근데 여러분, 기도를 포기하면, 목회는 인본주의로 가요.
신본주의 목회란 뭐냐? 저는 '기도 목회'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들이 좀 더 많아야 되고,
성도들 앞에 노출된 시간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은밀한 시간이 더 많아야 돼요.
그래야 목회자가 발란스를 유지하게 돼요.
근데 은밀한 시간은 줄어들고, 노출된 시간이 많으면
목회자는 박살이 나는 거예요.
대차대조표에 이게 안 맞는 거예요. 그러면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내가 하나님과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면,
무슨 일이 밀려 와도 두려울 필요가 없어요.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에서 오는 내적인 안정감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다듬어가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홀로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 목회자에게 도전은, 다른 게 아닌 것 같아요.
이 영성과 지성을 다듬어 가는 작업이 관건인데
이게 길고 지루한 싸움인 것 같아요.
▲6. 여섯 번째는 설교에 있어서, 설교 본문에 대한집중력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어떤 사람이 제게 질문을 한다면
'다시 젊은 목사로 출발한다면, 목사님은 뭘 준비하고 싶습니까?'
이렇게 저게 물으신다면,
'성경을 좀 더 많이 알고 싶다' 그렇게 답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걸 알아요.
성경을 다루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에 대해 설교하는데,
'내가 성경을 충분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이건 가장 근본적인 문제예요.
물론 우리가 성경을 다 알 수는 없죠.
그러나 정말 어느 정도는, 성경에 대해서 자신이 있어야 되는 거죠.
성경 공부를 하면 알수록, 연구를 하면 할수록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모른다는 거죠.
오늘도 이번 집회에서 교수님의 두 번 강의를 들으면서
뭐가 이렇게 같이 잡히는 게 또 있잖아요. 그죠. 참 배움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모르면 어떻게 해요? 잘못 가르칠 수 있다는 거죠.
깊이 성경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지속적인 성경 연구를 하지 않으면,
무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거예요.
△요즘 좋은 책들이 참 많이 나와 있는데, 읽어볼 시간이 없어요.
성경에 관련된.. 텍스트(본문)에 집중하게 하는 설교!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에 깊이 빠져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변두리에서만 맨날 (설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설교를) 지겨워 하죠.
깊이 안 들어가니까...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하는데, 안 파고...
늘 했던 소리를 돌려서 또 하니까...
일례로, 탕자의 비유만 지겹게 하는 거죠.
탕자 얘기만 나오면, 설교 듣기 전부터 식상해지는 거죠.
거기에다가 내용도 빈약하면서 설교가 길면.. 지루함을 느끼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는, 본문을 읽고, 본문을 무시하는 설교를 하는 거예요.
본문을 읽고 본문을 안 다루는 거예요.
혹시 다루더라도, 어떤 때는 절묘하게 핵심을 비껴가서 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선악과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이 본문에 얼마나 엄청난 메시지가 들어있는데, '먹거리 문제'로 딴 얘기를 하는 거예요.
본질에서 벗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성경에서 성경으로 *from 성경 to 성경
성경 자체가 성경의 해석자이고,
그래서 성경 안에 완전히 파묻히는,
성경의 바깥에 있지 않고 성경 안으로 들어가는...
그러려고 하면 우리가, 성경 말씀 본문에 대한 신실한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돼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되게 하는 것이죠.
설교가 마치면 '말씀'이 기억에 남아야 돼요.
'이 말씀이 본래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그 말씀이구나!'
이 말씀이 말씀대로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설교는 없어요.
그러니까 본문에 집중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
그래서 우리가 텍스트(본문) 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예요.
제가 이제 설교를 하면서 보면, 청중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기가 막히고,
설교적인 방법론을 아무리 적용을 해도,
본문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실패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근데 여러분, 이게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는 거예요.
본문의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내는 능력,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성경해석학적인 노력도 해야 되고
성경신학적인 공부도 해야 되고, 조직신학적인 체계도 갖춰야 되고,
인문학적 소양도 있어야 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한 어떤 인간 이해와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을 연결시키는 기술들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자는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거예요.
▲7. 일곱 번째는 설교자의 묵상의 세계
저는 설교자에게서 영성과 기도와 묵상... 이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는 거예요.
묵상이 설교자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요!
연구만 해서는 설교가 드라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연구와 묵상의 균형입니다.
평신도들의 묵상을 훨씬 더 능가하는 깊이 있는 묵상,
그렇게 하려고 하면 연구가 필요하죠.
그래서 연구를 하는 목적은, 묵상하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묵상과 연구가 잘 균형을 이루어 더 깊이 들어갈 때, 설교가 힘이 있게 돼죠.
그래서 이 묵상의 힘이 깊어질 때, 설교는 풍성해 지는 거요.
연구를 많이 했지만, 묵상이 약하면 드라이 해져요.
설교가 유식하게는 보이는데, 성도의 가슴에 파고 들지는 않는 것이죠.
묵상의 능력이 다른 것들을 도와주죠.
그래서 이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내면화 하는 작업입니다.
결국 우리 목회자들에게 말씀 묵상의 삶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설교자들 가운데, 평소에 묵상을 안 하는 분들이 계세요.
저는 다른 분의 설교를 들으면, 그게 금방 딱 제 귀에 들어와요.
'어 지금 설교하시는 목사님은, 내적으로 묵상을 깊이 안 하시는 분이구나'
묵상은 끊임없이 말씀을 내면화 하는 거죠.
즉 자기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해 내는 작업이잖아요.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묵상 역시 굉장히 긴 세월 동안 이루어지는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설교자의 인격이나, 영성, 말씀 묵상 등 모든 행위는
이게 단칼에 끝나는 작업이 아니에요.
오랜 세월 동안 기본기를 가지고 꾸준하게 살아가는... 묵상이 그런 거예요.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죠.
기도 뭐 한주간 바짝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고 왔다고,
뭐 막 불이 임하고 그런 거는 아니잖아요. 불이 올 수도 있죠.
단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라는 거죠.
우리가 빨리 뭐를 단칼에 해보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는 거죠.
설교가, 묵상이 그런 것입니다.
꾸준히 깊어져 가는 거예요.
여러분, 영적 허기를 교인들이 많이 느끼고 있어요. 다른 거 아니에요.
말씀에 대한 허기 입니다.
설교는 오랜 시간동안 말씀을 곰삭혀 내는 거죠.
그리고 그 말씀을 청중에게 주기 전에, 목회자 자신의 영혼을 기름 지게 하는,
그 묵상의 행위가 쌓여가는 거죠.
아무리 좋은 책을 갖다 놓고, 뭐 위대한 설교집을 다 검토해도
그거 가지고 짜집기 해 가지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은 이것은 시간의 축적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리고 기도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시간의 축적이
어느 날 한 사람의 설교자를 이제 만들어 가는 것이죠.
▲8. 여덟 번째는 사색, 관조입니다. 이게 묵상하고 다 연결되는데요.
그러니까 너무 쉽게 성도들에게 단답형으로 설교를 하면, 듣는 성도들이 답답해 해요.
성도들의 삶 안으로, 말씀을 가지고 깊이 들어가려고 하면
교리적인 설명 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묵상을 할 때, 가장 쉬운 일반적인 패턴이 뭡니까?
그 말씀 본문을 읽고 질문을 하는 거잖아요.
질문하는 사람이 답을 얻는 것이고, 질문하는 수준이 영적인 수준을 결정하는 거죠.
그 질문에 어떤 때는 답을 얻지 못하면, 그것을 1주일 2주일, 한 달 두 달 가지고 가는 거죠.
그래서 그 말씀 속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하는 노력들... 이게 사색이죠. 고뇌하는 거죠.
△저도 최근에 어떤 아주 중요한 주제들을 가지고, 굉장히 많이 고뇌 했어요.
'하나님, 이게 뭡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고민하고, 갈등하고, 힘들어하고, 계속 질문 하는데... 하나님이 답을 주십니다.
그러면 이제 내 것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것을 청년들과 함께 나누는 거죠.
제 금요철야 설교는 주로 그런 것들이에요.
사색이 이제 없는 게 참 문제예요.
그래서 스마트폰 이런 게 참 안 좋아요. 굉장히 안 좋아요. 우리 집중력을 빼앗아 가니까요.
그러니까 목회자에게 가장 큰 적은 '분주함' 입니다. 늘 바쁜 거예요.
그래서 집중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거예요.
목회를 하는데, 목회에 집중력을 가지지 못하고, 굉장히 산만한 거예요. 스마트폰 때문에.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앉아 있지 못하게 되고, 사역 일변도가 되고,
빠른 결과를 내기를 원하고, 또 그 결과를 요구하는 성도들의 원함에 부응해 가려고 하는...
몸부림 칠수록 이제 피곤하고, 힘들어하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결국은 균형이 깨져 버리는 거죠. 이 결과주의라는 건 굉장히 위험한 거잖아요.
△자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독서가 중요하죠.
'서재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느냐?'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 이게 참 중요.합니다.
두 종류의 목사가 있어요.
책을 읽는 목사와, 읽지 않는 목사... 가는 길이 달라요.
이렇게 꾸준히 책을 읽는 목사와, 책을 거의 읽지 않는 목사!
근데 여러분, 목회 여정에서 꾸준히 책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한국의 목회 패턴에서는, 밀려오는 일들을 감당하느라,
즉 분주한 활동주의가 목회자의 독서 시간을 거의 내지 못하게 만들어요.
웬만해서는 책을 그렇게 많이 못 읽어내요. 그래서 의외로 책을 안 읽어요.
친구들끼리 신간서적, 의미있는 책들 얘기를 꺼내면,
'내가 벌써 샀어!' 하는 사람이 있고,
'무슨 책? 처음 들어보는데?' 그러면 이제 문제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목회자는 끊임없이 영적인, 지성적인 양식을 계속 공급해 줘야 되는 거예요.
사실 우리는 지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책의 장르도 참 중요하죠. 실용서적들, 당장 무슨 결과를 내는 책들,
그런 책들은 사실 도움이 별로 안 돼요.
특히 예전에 우리의 한국 목회의 패턴은 다 그거였잖아요.
하여튼 어떤 그런 어떤... 목회자가 딱 쓸 수 있는 책,
설교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내용들,
이 실용주의, 방법론 중심의 이 실용서적들,
이거는 당장 몇 번 써 먹기는 좋은 것이지만,
목회자 자신의 영혼에 도움은 별로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씨름은, 결국 본질에 집중하는 책들이어야 되거든요.
오늘날 우리의 목회 현실은, 본질의 싸움이에요.
누가 상황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본질을 끌고 갈 거냐 하는 거예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이걸 붙잡고 가겠다' 라고 하는
그 복음에 대한 확신을, 나에게 갖게 만들어 주는 독서들이 필요한 거죠.
이렇게 여러분, 분주한 목회 현장에서 떠밀리면
목회자에게 어떤 형태로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게 쉽지 않고,
지적 성장이 일어나는 게 쉽지 않고, 도태되기 쉬운 거예요.
제가 부교역자로서 한 3년 열심히 사역하니까,
딱 무슨 생각이 드느냐면 '야, 이러다가 깡통 되겠구나!'
책을 들고 읽을 틈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호주에 간 여러 가지 요인 중에 하나가, 독서가 그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호주에서 목가적인 삶을 살면서
사색과 묵상과 독서가 이제 가능한 환경이어서 참 좋았어요.
제가 또 목회 패턴을 그렇게 만들었고, 또 개척을 했기 때문에
제가 제 시간을 내가 매니저먼트 하는 거니까,
그래서 독서, 묵상, 연구 이런 삶을 비교적 일찍 시작했고, 또 그런 삶이 세팅이 되었고,
그래서 아웃 고잉으로 가지 않고,
좀 더 내적인 체험을 하며 몸부림을 쳤던 그런 것들이,
지금 뒤돌아보니 얼마나 축복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9. 그 외 중요한 내용들
1) 설교자의 기본인데 '논리적 구축'입니다.
요즘 갈수록 이게 중요해집니다.
원래 설교에 논리성이 있어야 되죠. 기독교는 반지성주의가 아닙니다.
'무조건 믿어라' 해가지고 믿을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변증적 설교가 굉장히 중요하죠.
팀 켈러, 존 파이퍼의 설교들이 굉장히 변증적인 부분이 있어요.
이 시대적 이슈에 대해서, 굉장히 논리 전개가 분명해요.
요즘 '무조건 믿으라' 해서 믿을 사람은 없어요.
근데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반지성 주의가 좀 많아요.
막 아멘을 유도하고...
2) 감성적 터치, 위 '논리적 구축'과 반대적 측면이죠.
여러분 요즘 감동할 게 하나도 없어요.
짜증만 나고, 사람들이 다 분노하고, 완전히 열받아 있고...
감동에 목말라 있는 거예요.
논리는 사람의 머리를 움직이지만, 감동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예요.
결국 설교는 마음을 움직여야 되는 거잖아요. 감성적 터치가 필요해요.
목회자가 목회 하다 보면, 목회자 자신부터 감성이 다 메말라 있어요.
그래서 안 되면 하여튼 시집이라도 열심히 읽으세요.
3) 상황적 이해, 공감 능력
시대적 분별력을 길러야 되죠.
이게 이제 변증적 설교와 다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이해에요.
공감의 능력,
허공을 치는 설교가 바로 이런 거에요. 공감이 안 되는 거죠.
청중의 바깥에서 설교자가 혼자 지금 외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의외로 목회자가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목회만 하다 보면, 성도들의 삶, 그 일상 속에 못 들어가 봤거든요.
그들의 일상을 몰라요.
그래서 우리 목사님들이, 우리 교인들이 일하는 작업 현장, 공장에
일일 봉사하는 경험, 프로그램이 있어요.
하루 갔다오고 나서도 '와~ 목사님 장난이 아니네요.'
교인들이 뭐라고 하냐면 '하루 꼴랑 경험해 보고 그러십니까?'
우리가 그 성도들의 치열한 삶을 이해 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아이들의 삶에 공감하는 것 쉽지가 않아요.
오랜 세월을 지나와서 잘 몰라요.
그러니까 성도와 목회자인 우리의 삶의 거리가 너무 먼 거예요.
목회자에게서 책 냄새는 풍기는데, 땀 냄새를 맡을 수가 없는 거죠.
청중의 이해력을 높이려고 하면, 결국 공감 해야 되는 거죠.
'근데 그 공감을 위한 노력이 얼마나 나에게 있는가?'
이게 설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잖아요.
▲10. 설교자의 자기 관리
뭐 다 뭉뚱그려서 얘기하면 시간 관리입니다.
목회자가 왜 쫓기느냐?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고, 시간 관리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시간은 많아요. 그러나 시간이 관리가 안 된 거죠.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만
굉장히 프라이어리티(우선순위) 가 정해져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시간 관리에 실패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분주하다면, 시간을 리세팅을 해야 돼요. 강약을 조절해야 되고요.
모든 걸 다 잘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힘 뺄 때는 빼고, 힘 줄 때 주고... 이거 자기가 해야되는 거예요.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을 우선 순위의 앞에 두는 것이고,
특별히 자기 영성관리, 설교준비는 최고 우선 순위잖아요.
그 시간을 앞에 배치해 둬야 돼죠.
특별히 이제 시간을 잘 관리하면,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자기에게 맞는 시간 세팅을 해놓으면 편리해요.
근데 이게 이제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단 틀을 잡아서, 그 시간 안에 자기를 집어 넣어야죠. (시간표를 지켜야죠)
기본적인 분명한 자기의 스케줄이, 24/7 이렇게 정확하게 세팅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없어야 하고, 그 시간에는 뭘 한다..
이게 분명히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그게 습관이 되어야 하고요. 그래야 낭비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저도 사역이 좀 많은 편인데요.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제 경우에는, 새벽기도부터 12시반까지는, 즉 오전 내내는
가장 중요한 일에 할애합니다.
오전에 한 시간은 어마어마한 시간에요.
하루에 두 시간을, 정말 자기를 위해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여러분 이게 모이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돼요.
한 달이면 50시간입니다. *주일 빼고
일 년이면 얼마나 되겠어요? 어마어마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시간인 오전에, 가장 우선적인 일들을 하죠.
이때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딱 정해져 있어야 돼요.
그 시간에 뭐 장보러 가고, 운동 나가고, 전화 통화 길게 하고... 이러면 안 되는 거죠.
이런 시간 사용이 습관이 되면, 나중에는 쉬워져요.
그게 자기 몸에 익어져 있으니까요.
일본 말로 와꾸 box 가 딱 짜여져 있어야 돼요.
여러분, 작가들은 주로 재택 근무 하는 사람들이에요.
집에 있으면서 시간 관리하는 게 어려워요.
근데 책을 한 권 내는 거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써야 되는 거거든요.
김훈 작가 같은 사람은, 일주일에 원고지 몇 장을 안 써요.
그렇게 해서 책 한 권이 나오는 데는 굉장히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겁니다.
작가 같은 사람들은 집 안에서 시간 관리를 하는 게 몸에 배여 있어요.
우리 목회자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어떻게 해주는 게 아니거든요.
자기 자신이 시간을 관리해야 되는 거예요.
교인이 뭘 아나요? 모르죠. 내가 나를 관리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선 순위가 참 중요합니다. 특별히 그 안에 설교준비가 참 중요합니다.
가능한 설교 시간을 많이 써야 됩니다.
제대로 된 강해 설교 한 편을 하려고 하면, 상당한 시간이 들죠.
그러니까 이 말씀 연구, 또 기도 시간을 다 포함해서
시간의 우선 순위를, 가장 좋은 시간대에 배치해서 사용하는,
그게 습관이 딱 되어 있어야 되는 거죠. 그 시간에는 절대 다른 거를 하지 않는 거죠.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특별히 목회에서, 설교는 포기할 수 없는 위치에요.
그래서 말씀 선포의 사명을 우리는 놓치면 안 돼요.
저는 이 말씀에 길이 있다고 믿어요.
목회는 설교입니다. 회중에게 정확하게 하나님 말씀을, 설교를 통하여 전파되면
거기에 행정에 있고, 그게 모든 공동체에 질서가 잡히고
그게 모든 공동체의 헌신과 모든 것들이 거기서 다 나오는 거죠.
심장의 피가 온 모세혈관을 통해 몸의 곳곳에 전달되듯이, 설교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목회자가 설교자로서 성장해 가는 것, 그건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교가 되면, 사실 그 다음에는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어요.
말씀을 받고, 선포하고, 회중이 그 말씀에 반응하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내가 뭘 이래라 저래라 할 것도 없어요.
말씀이 말씀으로만 바로 선포되면, 그 공동체는 하나님이 통치해 가실 거예요.
'저 말은 목사의 얘기고...' 전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어디로 갈지 몰라요.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라, 사람들이 통치하는 교회가 되고 말지요.
그래서 목회는, 목회라는 활동에 의해서 결정되는 일이 아닙니다.
목회자 일상, 일상의 삶에서 성실함이.. 설교로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탁월한 설교 한 편 하고 끝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냥 신실하게 설교 한 편에 최선의 정성을 다해서
그 성도들을 사랑함으로 그 말씀을 먹이는 목양자로서,
설교를 꾸준히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 저는 그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래서 '아 우리 목사님은, 정말 설교 한 편 한 편에,
정말 정성을 다 기울여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구나' 근데 그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게 전달되는 거예요.
여러분, 목회는 장기전입니다. 지치지 말고 계속 그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