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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LNCK 2024. 8. 7. 18:4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기독교와 정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눅20:20~26    2024.08.04.인터넷설교녹취

*짧게 보실 분은 ◑본론의  ▲3번 ▲4번 해석을 보십시오!      


※먼저, 본문은 '가버나움에서 성전세 내신 사건'과 구별해야 됩니다. 
그 사건은 마태복음 한 곳에만 기록되어 있죠. 마17:24-27

본문의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문제'는
장소가 예루살렘이며, 마, 막, 눅 등 공관복음서 세 곳에 모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개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또한 전자는 '성전세' (반세겔) 이며, 이것은 유대교에서 부과하는 종교세이고,
본문은 '가이사에게 내는 세금'이며, 이것은 로마정부에서 부과하는 세금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납부해야 할 세금은 인두세, 관세 등 각종 세액이 있었는데 
그 세금은 수입의 1/3~1/2 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고액의 세금을 부과했죠.

특히 로마가 요구하는 세금 중 인두세(人頭稅)가 악명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죠. 
그 인두세는 14-65세까지 해당되는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습니다. 

◑도입

눅20: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정탐(스파이)들을 보냈습니다.
 
2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정탐들은 먼저 예수님을 이렇게 칭송을 했습니다. 
이런 칭송 다음에 예수님을 아주 곤경에 빠뜨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22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가이사는 로마 황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금은 '인구세(인두세)' 입니다.   *성인 1사람이 내는 세

AD 6년경에 로마가 유대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구세를 부과해서
12세 이상 성인 유대인은 모두 1년에 한 데나리온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성경에 보면, 갈릴리에서 유다 라는 사람이 
결국 반역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로마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에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거다' 라고 부추겨서, 
그때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로마는 폭력적으로 그들을 진압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금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가장 예민한 문제죠. 

지금 예수님께 질문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마치 민족주의자인 것처럼, 
반로마적인 사람인 것처럼 행세를 하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가이사가 정한 이 인구세를 바쳐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런데 왜 이 질문이 정말 공경에 빠뜨리는 거냐 하면, 
그래서 예수님이 '세금 바치라'고 대답하면, 
예수님은 백성들의 평판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백성들은 그래도 로마에 대한 반감들이 있었고,  
특별히 세금과 관련된 반감들이 정말 그들 마음 깊숙한 곳에 있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쳐라' 라고 대답하면, 
한순간에 이 백성들의 명망과 신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러면 '바치지 마' 그러면,
지배계층으로부터 예수님은 위험한 존재가 되고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로마 총독의 권세, 치리권과 사법권 안에 
예수님이 빠지게 되는 그런 위험을 예수님께서는 맞이하게 됩니다. 

눅20:23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절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유대 지도자들이 보낸 정탐꾼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거죠. :26

◑본론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의 해석

여러분,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열심당원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반로마) 
바리새인적 성향도 있었고 (중도)
사두개인적 성향도 있었는데 (친로마)
어떻게 모두를 침묵시킬 수 있는 말씀이었는가요? 

먼저 이 말씀이 전통적으로 사용된 것은 
정교 분리를 정당화시키는 말씀으로 종종 인용되었죠.

정부와 종교 사이에 뭔가 혼돈이 있을 때, 가장 많이 사용됐던 표현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래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된다' 
이것에 대한 가장 근거 구절이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의 뜻은, 
학자들이 최소한 세 가지 정도는 동의를 합니다. 

▲1. 첫 번째 동의는 무엇이냐? 
예수님은 가이사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열심당원들의 입장과 예수님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열심당원들과 에세네파는 로마의 권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라'고 하심으로써
가이사의 권위를 인정했다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데나리온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로마의 경제 제도 속에서 그들은 숨 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너희들은 로마의 경제 제도 속에 숨 쉬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속에서 세금을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당한 세금은 바치고, 
그리고 공익을 위해서 너희들은 헌신해야 된다는 거죠. 

이것을 사도 바울은 어떻게 풀어서 가르치고 있느냐? 
롬13:1절부터 로마 정부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느냐?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라는 이야기를 1절부터 쭉 하면서 
7절은 결론을 짓는 부분입니다. 

로마 정부에 대해서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롬13:7

여러분, 정당한 국민의 의무들을 다 해야 된다는 거죠. 
벧전2:17절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왕이나 가이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왕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도 귀하게 여겨라. 

그래서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열심당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이사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정당하게 돌려야 될 것은 바쳐라'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을 하셨죠.

▲2. 예수님의 이 가르침이, 열심당원의 가르침과도 이렇게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친로마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씀 때문이죠. 

무슨 뜻입니까?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일이 무엇이냐? 
가이사의 것이 하나님의 것을 침범하려고 하는 시도들을,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 가지가 강한 긴장이 있을 때 
가이사의 것이 하나님의 것을 침범해 들어와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요청할 때'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야 된다'는 겁니다. 

두 가지가 강렬한 충돌이 있을 때... 
마치 신사참배 같은 것들이 되겠죠. 

하나님께 바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동을 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성경의 예를 보면 

지금 출애굽 직전에 애굽의 바로가 산파들에게 
출1:17절 '히브리 남자아이들이 태어나면 다 죽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국 왕의 명령을 어겼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그들은 왕의 명령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생생하게 나타나는 곳은, 다니엘서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라고 할 때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걸 거절하면서 
단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리자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행5:29절에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유대의 권력자들이 이것을 잠재우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때 사도들의 유명한 선언이 나오죠.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마땅하니라'
라고 하면서 

가이사의 것이 하나님의 것을 부당하게 공격할 때, 충돌하게 될 때 
성도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 라는 해석
그런데 이상 두 가지는 대부분 다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저한테 참 곤란했던 것은 뭔가 하면 
이렇게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우리 대부분의 삶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정부와,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정말 강렬한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죠? 
교회와 성도가 세상의 권력, 정부와 관련되어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저는 참 이게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김세윤 교수님이라고 계셨어요.
당시 신약신학에 대해서는 이분이 세계적인 학자셨는데 
이분이 '사회 참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권력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되는가?' 
라는 주제의 소책자를 쓸 때, 이 본문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긴 주해를 마치면서 결국 내린 결론은 무엇이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중간에 접속사가 하나 있어요. 

접속사 영어로는 and라고 번역을 했고, 원문에는 kai 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결국 여러 가지 다른 본문과 문맥을 통해서 봤을 때 
"여기 and 라고 번역된 것은, 오히려 but 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그 분은 "but 의 의미를 가져야 된다"라고 이 구절을 해석했습니다.   주1)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  

즉 '가이사의 상이 새겨진 것이라 할지라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 

저는 제가 그때 그 책을 보다가.. 정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참 청년 시절에 이 문제 때문에 정말 오랫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정리하면, 본문의 접속사 kai 를, and 가 아니라 but 으로 번역할 때,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50:50으로 균등하게 해석하는게 아니라,
가이사의 것은 작게, 하나님의 것은 크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조점, 방점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에 있었다는 거죠.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거는 
지금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10만 원짜리 지폐가 있다고 칩시다. 
(당시 1데나리온의 가치를, 하루 품삯 오늘날의 10만원으로 볼 때) 

그 지폐에 황제의 상이 새겨졌어요. 그 지폐가 여러분 지갑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렇다면 그 지폐는 누구 거죠? 
여기 계신 대부분은 '내 거죠' 이렇게 대답하시겠죠...  

그런데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지만, 궁극적인 주인은 누구죠? 
네, 모든 물질,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고백이 하나 있는데, 
시24:1절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배드리러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드리는 고백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10만원짜리 황제의 상이 새겨진 현금 지폐'를 보여드린다고 할 때, 
여러분, 그 돈이 누구 거죠? 

'거기에 황제의 상이 새겨졌다고 해서, 그게 황제의 것이라면, 
그렇게 믿는다면, 그 질서, 그 방법대로 살아라!

그렇지만 황제의 상이 새겨져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너희가 고백한다면, 
하나님의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걸 사용해!' 
이게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던지신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결론은 무엇이냐? 'It's up to you 바로 너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올가미 씌우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 
그래, It's up to you 바로 너에게 달려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돈, 이게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이사에게 바쳐! 
그러나 황제의 상이 새겨져 있다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너가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방식과 방법대로 사용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앞에 다가오는 시간, 일들, 물질, 모든 것들이 
누구의 상을 가지고 다가오느냐? 
황제의 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도대체 이거 누구 것이냐?' 
황제의 초상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황제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질서대로 살아가라! 

그러나 그것이 황제의 상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의 궁극적인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하라는 겁니다. 
'너가 바로 믿음으로 선택하라!'는 겁니다. 

▲4. 마지막 네 번째 해석은, 제가 지금으로부터 3~4년 전부터 접하고 
정말 도전을 많이 받았던 해석인데요.

지금 예수님께서 황제의 초상이 새겨딘 데나리온을 보시면서 
'여기에 누구 형상이 새겨졌지?' 
'가이사의 형상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 

여기서 '형상'이라는 단어는,    *헬. 에이콘, image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너무나도 강력한 단어입니다. 

왜요? 창1:26~27절에 보면, 
너무나도 그들이 잘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

*창1:26절의 '형상'을 LXX에 '에이콘'으로 번역.      *히 '젤렘'
즉 창1:26절의 '형상'과, 본문 눅20:24절의 '형상'은 같은 단어.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데나리온 동전 위에 바로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것이 황제의 것이라면, 
우리는 누구인가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이 황제의 것이어서, 
황제를 위하여 바쳐져야 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인간,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우리가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해석을 접하고, 참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제가 여러 학자들의 해석들을 참조하면서 
이 해석도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아지더라고요. 

△정리를 하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말씀이 담고 있는 뜻은 

1) 주님은 이 세상의 권력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공익과 관계되는 정당한 책임을 성도가 다하도록 도전하셨습니다. 

 

2) 가이사의 것이 하나님의 것을 침범해 들어올 때는 
성도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3) 그러나 일상적인 생활, 황제의 형상을 가진 것들이 
시간과 돈과 모든 것들이 우리들 앞에 다가올 때 
여러분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황제의 형상이 새겨졌다고 해서 황제의 것이 아니라 
이거 역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식과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성도들이 되어야 하고요.

4) 무엇보다 우리들 자신은 누구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하나님의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롬12:1절처럼, 우리들의 몸으로 하는 모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나서 
제가 청년시절 다녔던 내수동교회에서 아주 재밌는 일이 생겼는데 

내수동 교회 성도님들 중에, 
그리고 과거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4명의 국회의원이 당선이 됐습니다. 

재밌는 분포가 생겼어요. 4명의 소속이 
국힘 1명, 민주당 1명, 조국혁신당 2명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대학부 때부터 같이 크고, 뜻을 나누고, 말씀 공부하고 이랬던 분들이 
이렇게 소속들이 다 달라졌어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이게 그림으로 잘 나타나는 게 바벨론 포로기에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들을 보시면 
이 그림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거대한 제국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고 위협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죠? 이게 왜 중요하냐? 

'지금 미국 그리고 서구권에 있는 교회는, 지금 어떤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가요?' 
라고 만약 질문하면 
요즘 신학자들은 '바벨론 포로기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같은 형편에 놓여져 있다'
라고 말합니다. 

이건 우리는 아직 현실이 아니지만, 최소한 유럽, 캐나다 정도만 가더라도 
'이제는 바벨론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교회가 처한 상황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성애 이슈 등

여러분 그때 바벨론 포로기에도, 한 색깔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1) 첫 번째 약간 극우적인 성량, 즉 강력한 민족주의적 성량을 가진 사람은 
요나입니다. 요나가 어떻게 했죠?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 그랬는데, 
말씀 전하면 니느웨가 바뀔 거잖아요. 그거 꼴보기 싫어가지고 도망쳤잖아요. 

그리고 나중에는 다시 불려와가지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그리고 앗수르가 정말 회개하는 거 보고, 산위에 올라가서 견디지를 못하는... 

그가 기대했던 것은 뭡니까? 
'이 앗수르 제국에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야 돼!'

오늘도 '이 나쁜 정권 불받아라!' 이렇게 나오는 신자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요나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죠? 하나님은 이 요나를 변화시키셨어요. 
그리고 그가 불받기 원했던 그 앗수르를 회개시키는 도구로 
하나님은 요나를 사용하셨어요.  *유대민족주의자
여러분 요나와 같이, 오늘날에도 정말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분이 계세요. 

2)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에, 성도들 중에 가장 모범생은 누굽니까? 
가장 모범생은 누구냐?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 바벨론 왕궁 한복판에서도 
뜻을 정해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고 
(마치 초기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는 삶을 그들이 실천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영역 말고 충돌이 없는 곳에서는 
그는 바벨론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다니엘은 그 제국에서 총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제국이 바뀌어도, 그는 70년 동안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이게 우리가 정말 기대하는 모양이죠. 

이 세상 속에서 순교냐, 타협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내면서도, 이 세상 중심 한복판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3) 그런데 제가 참 요즘 충격받는 세 번째 그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바로 에스더 모델입니다. 

에스더는 어떤 사람이었죠? 철저하게 자기를 감추었던 사람입니다. 
한 번도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사람이죠. 

그래서 그는 바벨론 제국의 왕비가 되었어요. 
왕비가 되었어도, 한 번도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에스더서에 '하나님'이란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바로 '침묵하는 비겁한 성도의 모습'이 될 수도 있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람을 사용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페르시아 제국에서 모든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수 있는 위협에 빠져 있었을 때 
이 침묵하고 자신을 철저히 감추면서 살았던 한 여인을 일깨우셔서 
바로 그 거대한 위협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에스더 모델을 접하면서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의 가치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요나, 참 얼마나 멋있어요? '불 떨어져라!' 라고 외치는 요나!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요나를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다니엘과 같은 사람을 한번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법도를 지켰지만, 
그 바벨론 제국을 붕괴시키기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에스더와 같이, 한 번도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다 라는 정체를 
나타내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셔서 
민족을 구원하는 데 두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성도의 정치적인 입장은 누구도 구속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 각자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저는 경상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정말 대구 경북 지역 사람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어떤 입장들을 바꾸기가 참 어려워해요. 

그런데 호남 쪽으로 한번 가보시죠. 정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그들이 정치적인 선택은, 대구 경북과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인위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바리새인적인 성향도 있었지만 젤롯(열심당)도 있었고, 
정말 로마의 앞잡이처럼 활동했던 세리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색깔이 아니라, 섞여져 있었어요. 
교회도 똑같습니다. 한쪽 색깔의 사람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다른 색깔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고, 

우리만 하나님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향의 사람들도, 다른 정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님은 그들을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고요. 

우리가 볼 때는 겁쟁이고, 세상의 어떤 쾌락과 권력에 젖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에스더와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사용하실 수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정치적인 입장과 견해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여러분은 그 길을 가시되,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자꾸 강요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과 다른 사람의 길을 우리가 존중해 주라는 겁니다. 
그리고 침묵하고 비겁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셔서 이 민족을 바꾸는데 
에스더처럼 사용하실 수가 있잖아요. 

그러므로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이랄지라도 
그들을 존중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마침내 세상의 역사를 바꾸는 것은 
바로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님이신 주님께서 이 땅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것이지,
우리들의 운동, 우리들의 활동에 의해서 그것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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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헬라어 접속사 kai 는 주로 and로 번역되나, 
문맥상 also, even, indeed, but 등으로 번역될 수도 있죠. 원래 문법상 그렇습니다. 

약 20개의 영어성경 번역을 보니까, 본문 눅20:25절의 kai를
모두 and 로 번역하고 있고, 
but 으로 번역한 영어성경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4:32절에서 kai 가 but 으로 번역되었습니다. KJV  
'(그러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참고로 막4:25절에서는 kai가 even으로 번역되었죠.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even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NASB

kai 를 대부분 and 로 번역하지만, 문맥상 다른 뜻으로 번역할 수 있는 예를
성경속에서 찾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