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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실을 찾으시는 하나님 렘5:1-6 2013.04.07.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성경 렘5:1-6절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죄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말 용서하고 싶으셔서
구실거리를 찾으셨습니다.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찾으면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래 설교문 중에서
......................................
여러분 혹시 ‘빠떼루’란 말을 기억하십니까?
1996~1997년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던 말인데
1996년에 애틀랜타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레슬링에 출전했는데
그때 해설위원이 빠떼루, 빠떼루 라고 말해서 온 국민이 빠떼루란 말을 알게 되었죠.
빠떼루란 말은 파테르란 프랑스 말로, 레슬링 심판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레슬링 선수가 경기 중 반칙을 하면, 꿀밤 정도의 가벼운 벌을 주는 것을 빠떼루 라고 합니다.
김영준 해설위원이 이 파테르를 일본식 발음으로 빠떼루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말이었습니다.
▲제가 1997년 말에 사회적으로 유행하던 빠떼루란 말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빠떼루’란 말로 설교를 했었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설교는 기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설교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칙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빠떼루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의 잘못을 알고 따끔하게 야단을 치거나 가벼운 벌을 주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호되게 야단도 치시고 매도 때리시지만
때때로 우리에게 꿀밤처럼 가볍게 빠떼루를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것은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빠떼루를 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빠떼루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빠떼루를 주시는 분이지만,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할 때
그것을 잊지 않고 꼭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할지라도, 하나님께 내세울만한 일이 있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구실로
우리에게 어떻게 하든지 상을 주시려고, 축복을 주시려고 애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조금 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구실삼아서
그것을 구실로 조금은 억지스럽게 상을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주제
생각해보면 이것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지나친 편애입니다.
사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 앞에 잘했다고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혹시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들의 마음속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워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냉정하게 계산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상은 그만두고
빠떼루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우리들 주위를 보면,
아니 나 자신을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이런 축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상이 아니라,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런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구약성경의 야곱도 그런 사람입니다.
야곱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야곱은
인간적으로 볼 때 질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야곱은 야비한 사람입니다.
먼저 어리숙한 형을 속여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특권을 빼앗았습니다.
그것도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서양에서 결투를 하는 것을 보면, 상대방이 검을 놓치면 검을 다시 집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다시 싸움을 합니다. 이것이 신사도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한 사람은 저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또 야곱은 형을 속인 것은 물론 눈이 어두운 아버지까지 속인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도 야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아주 몰염치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것만으로도 야곱은 하나님의 빠떼루를 먹어도 여러 번 먹어야 할 사람입니다.
야곱의 이와 같은 비열함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외삼촌의 두 딸을 다 차지했습니다. 끝내는 외삼촌의 수많은 재산을 탈취해서
밤중에 몰래 도망을 쳤습니다. 지금까지 돌보아준 외삼촌의 은혜를 배반한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도 못된 사람입니다. 빠떼루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야곱의 비열한 인간성은 얍복강을 건널 때 절정에 달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건널 때 형 에서가 어떻게 나올까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가축을 보내고, 종들을 보내고,
다음에는 여종 출신의 아내 둘과 그의 자식들을 보내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첫 번째 부인 레아와 그의 소생들을 보내고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세우고
맨 마지막에 자신이 따라갔습니다. 잃어버려도 될 순서대로 보낸 것입니다.
에서가 화가 나서 죽인다고 해도, 조금 덜 아쉬운 사람부터 앞세우고
자신은 맨 마지막에 선 것입니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가장이 자식들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겁하고 야비한 사람입니까? 빠떼루를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빠떼루를 주시기도 하셨지만
그것보다도 큰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수많은 재산, 수많은 자녀를 주셨으며 특별히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아들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딱 한 가지 야곱에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빠떼루도 주셨지만, 그 한 가지를 구실 삼아 야곱에게 상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상을 줄 구실, 구실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야곱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딱 한 가지,
그것을 구실로 삼아 그것을 빌미로 삼아 야곱에게 큰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야곱은 나쁜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구실로 삼아 야곱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뭔가 우리에게 잘 해주고 싶어서 안달을 하시는 분입니다.
뭔가 상을 주고 축복을 해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마치 친정집에 온 딸아이에게 뭔가 주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들이 하는 것을 보면, 상을 주기는커녕 빠떼루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친정에 오는 딸에게 뭔가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하나님께서도 줄 것을 찾으시는데, 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축복을 주어야 할 텐데, 도무지 자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시지만, 객관적으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만한 구실이나 꺼리가 있어야
그것을 빌미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축복을 줄 구실나 구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조그만 자랑거리만 찾아도
그것을 구실로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저런 사람에게 왜 축복을 주시는가 의아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많은 잘못을 하는 중에 한 가지 잘한 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실 삼아 그 많은 잘못 중에 그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무언가 한 가지 잘한 것이 있어, 그것을 구실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잘못이 있지만 한 가지 잘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구실로 그것을 구실로 축복을 주시는 눈물겨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에게도, 이와 같이 축복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복 받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빠떼루를 받아도 크게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부하의 아내를 취하기 위하여 부하를 전쟁에 보내 죽게 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왕으로 세우시고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왜 그러신 것일까요?
다윗의 그 수많은 잘못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구실을 찾으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는 하나님 한 분이면 만족합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이었습니다.
그 한 가지를 보시고, 하나님은 다윗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고도 필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돈도 필요하고 명예와 권력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돈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하고, 권력도 필요한 것일까요?
왜 더 필요하다고 매일 기도하고 불평하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도 상을 줄 구실을 찾으셨습니다.
민12:1절에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빠떼루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점에 모세에게 상을 주셨는데
민12:3절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고 했습니다.
모세가 잘못한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상을 줄 구실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는 신약성경에도 많이 있습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가산을 탕진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가 어떻게 해야 마땅합니까?
그는 빠떼루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아들에게 왜 상을 줍니까?
큰 아들의 항의에 아버지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라고 구실을 댑니다. 그 아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시 돌아왔다는 것으로
작은 아들이 잘못한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상을 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도 빠떼루를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큰 축복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상을 주고 싶으셨는데
상을 줄 만한 구실을 찾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베드로에게서 상을 줄 구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범 답안입니다. 베드로가 모처럼 옳은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을 구실로 상을 주셨는데, 그 상이 천국열쇠인 것입니다.
조그마한 구실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것을 구실로 삼아서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잘해서가 아니라
많은 잘못 중에 한 가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구실거리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빌미로 삼아 축복해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실을 찾아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이 아니라 나라를 축복하실 때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 나라가 축복을 받을 만한 구실거리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빠떼루를 먹어야 마땅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축복을 받을 만한 구실거리를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게 새벽기도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새벽기도를 드리는 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고
새벽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면 우리나라는 안전할 것입니다.
그것을 구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성경 렘5:1-6절을 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죄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말 용서하고 싶으셔서
구실거리를 찾으셨습니다.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찾으면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열 사람의 의인, 다섯 사람의 의인이라도 찾으면 구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실거리를 찾으셔서 그것을 빌미로 용서하고 싶어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구실거리를 찾아서 상을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눈에 불을 켜고 우리들에게서 조그만 구실거리를 찾으려고 하십니다.
마치 데리고 온 의붓자식 걷어 먹이려는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구실만 있으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상을 주고 축복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뭔가 상을 주시려고 축복을 주고 싶으셔서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구실거리를 찾으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구실거리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다 잘못이 많고 부족하지만, 이거 하나는 아시지 않습니까?’
할 만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고 사람들도 인정할 수 있는 구실을 삼으셔서
축복하실 수 있는 한 가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을 변호하고 용서하고 축복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구실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 하나 구실거리가 없다고 하면 정말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서도 구실거리를 찾으십니다.
그러나 뭐 하나 구실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삶에 구실거리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불행이요 인생의 불행입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 많은 잘못을 하고 죄를 지은 부끄럽기 그지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많은 실수와 많은 부족과 많은 잘못이 있지만
한 가지 구실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 때문에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아무리 찾아도, 내 삶속에서 우리 가정에서 축복하실만한
구실 거리를 찾지 못한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반대로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는 구실 거리를
내 삶에서 내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찾으실 수 있다면 복된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들을 축복하시고 상을 주고 싶으셔서
우리들에게서 구실 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게 우리가 구실 거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구실로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귀한 은혜와 깨달음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렘5장 절별 해석
<개요>
본 장은 유다 민족에게 닥칠 심판의 당위성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유다 민족의 범죄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종교적 삶의 변질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까지 철저히 타락하므로 도덕적 공백 상태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더 이상 심판이 유보될 없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1~9절 : 심판의 당위성
10~19절 : 심판의 성격
적의 침략이 임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유다 백성의 잘못된 생각을 뒤엎고, 북쪽의 적이 심판의 대행자로 올 것임을 예언
20~31절 : 심판의 원인
반역적이고 자만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에게 주는 경고
5:1 너희는 예루살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1~9절까지는 다시 예루살렘의 죄악상과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도덕적 타락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되돌아간다.
아마 예루살렘에 임할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함인 것 같다.
이런 내용은 2장에서도 이미 다루었던 것으로서 그 전체적 주제는
여호와의 주권과 그의 언약을 거부한 결과 그들이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이며 '진리'는 '에무나'인데,
이 두 용어는 구약의 주요 사상인 '의'(체다카)와 '사랑'(헤세드)과 함께 연결되어
여호와의 언약 사상을 구성하는 주요한 용어들이다.
즉, 선지자는 이를 통해서 여호와와의 언약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만악의 뿌리가 바로 이 언약을 배반한데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의인을 한 사람이라도 찾게 되면,
심판을 면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 조건이었던
의인 열 사람보다 훨씬 더 쉬운 것이었다(창18:22-32).
5:2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어떤 약속이나 의무에 대해
여호와를 그러한 약증의 증인 또는 보증인으로 불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약속이나 의무를 파기할 경우는 여호와의 심판을 자청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맹세가 남용되었으며,
또한 거짓 맹세의 표상이 되고 말았다.
5:3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1, 2절과 관련하여 본문은 유다 백성의 타락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지를 보여준다.
왜냐면 하나님은 성실을 구하시나 그들 중에는 한 사람도 성실히 행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본절 하반절과 관련하여 본문은, 하나님이 이 백성을 성실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징계라는 방편을 사용하셨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5:4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미천하고 어리석은 것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미천하고 어리석은 것 뿐이라'
'미천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달림'인데, 원문에는 명사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다음 어구인 '우준한 것'과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다음절의 '귀인들'(하그돌림)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런 구조적 문맥을 통해서 볼 때 이 말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결여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옳겠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응징에 대한 시대 감각이 없었으며,
그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5:5 내가 지도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정치적, 종교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온갖 속박을 벗어던지고 모든 도덕법들도 짓밟아 버린 사실이,
황소가 멍에를 꺾고 주인에게 반발하는 예화로 소개되고 있다.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선포하던 시기는 요시야의 개혁이 있은 지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른 때가
아니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지적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분명히 요시야 통치 시절에는 왕의 명을 받아 개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그의 명을 시행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5:6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본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함이니이다
'사자...이리...표범' 본절에서는 유다 백성이 언약을 파기하고 마치 황소가 주인의 멍에를
부순 것과 같이 달아난 행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황소가 자기 주인의 멍에를 꺾고 달아났지만,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수풀에서 나온 사자나
또는 사막의 이리, 또는 그 주위를 배회하는 표범의 공격을 당하고 만다.
하나님을 버린 유다 백성의 운명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들 야생 동물은 4, 6장에서 지적되고
있는 침략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용맹성과 난폭함에 있어서는 영락없이 사자와 같았으며,
탐욕과 욕심에 있어서는 이리와 같았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재빠른 활약상에 있어서는 표범과 같았다.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
이는 유다가 짐승의 공격을 받게 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적하는 부분이다.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솨'는 반역된 행위들을 가리키며,
'패역'에 해당하는 '메슈바'는 베도를 가리키고 있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파기하고
언약에 명시된 의무 조항들을 거부하였으면서도 회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5:7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간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여호와를 거역하고 신이 아닌 것들 곧 허탄한 우상을 의뢰하고 경배하였던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
므낫세 당시의 극단으로 치닫던 배도 행각이,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고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이방 종교의 신전 매음 행위가 요시야의 개혁으로 일망 타진된 이후,
그것에 참여했던 창녀들과 포주들은 은밀한 곳으로 숨어 그들의 사업을 계속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창기의 집'이 우상을 숭배하는 곳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겠다.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행음이란말을 종종 사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상 숭배와 함께 의식 순서 중의 일부로서 육체적 행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도 무난할 것이다.
5:8 그들은 두루 다니는 살진 수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르며 소리지르는도다
'이웃의 아내를 따라 소리지르는도다'
같은 죄악이긴 하나 율법 정신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범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아내된 여자를 범하는 것이 훨씬 더 중한 죄로 여겨졌던 것 같다.
이것은 간음과 함께 타인의 것을 탐하는 죄가 추가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아내를 탐하는 것은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고
또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근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5: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심판은 여호와를 무시하고 또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반기를 들고 나오는
이런 행위들에 대한 반드시 임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새 언약하에서도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를 범하는 이런 자들에게는
반드시 같은 처벌을 내리고 말 것이다(엡5:5, 히13:4).
한편 ‘벌하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의 방문은 여기서처럼 징계를 위함일 수도 있고,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일 수도 있다.
5:10 너희는 그 성벽에 올라가 무너뜨리되 다 무너뜨리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 버리라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
'그 가지만 꺾어버리라’
10~19절까지는 적의 침략이 임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유다 백성의 잘못된 생각을 뒤엎고
북쪽의 적이 심판의 대행자로 올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유다 백성은 하늘의 농부로부터 극상품의 포도 품종으로 심기워졌으나
그 열매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들포도가 되고 말았다(2:21).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다의 대적을 불러 하나님 소유가 아닌
나쁜 포도나무의 가지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맡기셨다.
한편, 70인역(LXX), 수리아역 등은 이 부분을
'그 근본은 남겨 두라. 그것들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해석하였다.
5: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게 심히 반역하였느니라
솔로몬 사후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중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그중 더러 본토에 남아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들마저 심히 패역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패역하다'에 해당하는 '바가드'란 말은 '속이다', '가증하게 행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대단히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들은 유다인들은 예레미야를 몹시 핍박했을 것이다.
5:12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보지 아니할 것이며'
백성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어겨도 아무런 처벌이 없을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 근복적 이유는 여호와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는데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상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거부하는 인생의 추악한 모습을
다시금 보게 된다(롬1:28).
결국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오는 칼이나 기근의 심판이 없을 것으로 보았다.
이런 그들의 말을 근거로 해서 그들이 자기 도취에 빠져 있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백성들은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이 가동되어 그들에게 심판이 닥칠 것이란 점을
새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5:13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람처럼 공허한 것으로 여기고, 그 대신 거짖 선지자들의 감언 이설을 좇아 갔다는 내용이다.
'바람'의 히브리어 '루아흐'는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는 점에서
저자의 언어 유희(Wordplay)를 보여준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을 바람으로 간주하는
중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5:14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하고'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 의해 바람으로 취급되어버린,
바로 그 말씀을 무서운 불로 화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 표현하고 있다.
구약에서 이것은 '전투에 임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전투의 하나님'이란 개념을 가졌다(출7:4 참조).
여기서는 천체와 천사의 무리까지 포함하는 '하늘과 땅의 무리의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시103:21, 사40:26 참조)
5:1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집이여 보라 내가 한 나라를 먼 곳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민족이라 그 나라 말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유다를 응징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바벨론에 대한 묘사이다.
바벨론은 예레미야 당시에 나보폴라살 왕(B.C.625-605년) 때부터는
팔레스틴의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5:16 그 화살통은 열린 무덤이요 그 사람들은 다 용사라
바벨론 군사들은 모두 다 능한 궁수들이어서 결코 표적을 놓치지 않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화살 하나는 한 사람의 목숨과 같은 것이며,
장병들 어깨에 걸려 있는 전통은 마치 뭇사람의 무덤을 짊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5:17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16절이 전쟁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본절은 전쟁의 결과를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추수 곡물, 양식, 양떼, 소떼, 아들과 딸 등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성이 튼튼하다고 자랑하였으나 이것들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때가 되면, 예레미야의 예언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게 되는 셈이다.
차라리 자신의 예언이 틀리기를 바라는 예레미야가
이런 종말적인 상태를 에언한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5:1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
본절의 앞 구절들은 운문체로 기록되었으나 본절과 그 다음절은 산문체로 기록되어 있다.
여태가지 참혹한 심판의 결과를 묘사해 왔으나,
그것이 이 민족의 완전한 종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뜻인데,
이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이 임하기는 하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철저한 심판 중에서도 긍휼과 위로의 메시지가 함께하는 것은(4:27),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파멸에 있지 않고
그들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5:19 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냐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
유다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이방신들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그 이방인들에게 속박당하며 이방인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본절은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임을 지적하는 예언으로서
범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어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한다.
5:20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20~31절까지는 반역적이고 자만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5:21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 지어다
하나님은 이들 미련하고 무감각한 백성들에게 그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들으라고 초대하신다.
이들은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명백한 많은 증거들이 있었음에도
그겻들에 전혀 무감각했으며 징계의 채찍을 맞고서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눈이 있다고는 하나 보지 못하였으며,
귀가 있다고는 하나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던 것이다(사6:9,10, 마13:14,15).
5:2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여호와 앞에 떤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을 존중하고 경외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들 백성은 앞절에서 지적되었다시피 우준하고 무감각한 백성들이었던 까닭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예레미야 선지자는 설명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여기서 바다를 예화로 사용한다.
거대한 산이나 바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집력이 없는 모래에 의해서 거대한 파도가 땅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기묘함을 한층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의 무감각 상태가 심각하였던 관계로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5:23 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반역'에 해당하는 원어는 '소레르'인데, 이것은 반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로 작심을 하고 돌아섰다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강력한 힘을 가진 바다라도 하나님이 설정해 두신 한계를 넘지 않고
순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22절)
그들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유다 백성의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이른 비와 늦은 비' 이것은 가을비와 봄비를 말하는 것으로서,
때를 따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했다(호6:3, 히4:16).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바알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추수 기한'이란 것은 초실절과 오순절 사이에 끼어 있는 7주를 말한다.
무교절 기간 중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의 초실절에는 하나님께 소산의 첫단을 바쳤다(레 23:15, 16).
이는 여호와께서 곡식을 주셨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너희 허물이...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 땅의 가뭄을 화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언약 파기를 가리키는 데 흔히 사용되었던 두 용어가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허물'(아온)과 '죄'(헤트)이다.
'허물'은 '방황하다', '빗나가다'란 말에서 파생되었으며, '죄'는 '표적을 놓치다'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유다는 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로부터 멀리 떨어져 방황함으로써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바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5:26 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26~31절까지에는 7:2-15의 성전 설교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것을 요약해 놓은 것이란 느낌을 받는다.
본절에서는 동료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악인들이 새 사냥꾼에 비유되어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이들 사냥꾼은 유다 백성들을 노예로 끌려가도록 하는 데 일조한 자들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5:27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악인들의 집에는 사기나 속임수를 사용하여 부당하게 얻은 소득이 가득하였다는 말이다.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던 아모스도 당시 사람들에게 이와 비슷한 내용의 비난을 하였다(암2:6 이하).
그들이 거부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올랐던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서 재산을 강탈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富)를 축적하였기 때문이었다.
5:28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않고도 어찌 번영을 누리려느냐'란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선지자는 여기서 악인들의 악행이 끝도 없고 한계도 없음을 지적하려는 것 같다.
그들은 고아의 송사에 대해서는 변론하기를 거부하였고 가난한 자들의 주장을 묵살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사리 사욕을 채우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한 사회는 이같이 악이 만연하는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고 만다.
5:29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 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같은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모세의 율법은 궁핍하고 사회적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피지배층의 보호에 대단히 관심을 두고 있다.
(출22:25-27, 23:3,6, 레25:35-37, 신14:28,29, 24:12,13).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직간접적으로 압박하고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유다의 주권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신 이상
이러한 악행이 결코 용납될 수는 없었다. 심판을 앞둔 유다 사회의 상황은
심판받지 않을 수 없는 극도의 악행이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5:30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을 '기괴한 죄악과 엄청난 범법 행위가 이 땅에서 저질러지고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죄사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낱낱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은 다음절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5: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은 사회적 불의에 편승하여 온갖 부당한 특권을 누리던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심정을 전달하며,
사회악을 고발하는 참선지자의 예언을 대적할 수밖에 없었다.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거짓 선지자들이 제사장들과 야합하여 그들의 기득권 옹호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대표적인 계층인 선지자와 제사장이 이처럼 불의를 위해 공모한다는 것은
앞절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참으로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제사장의 권위를 내세워 하나님이 원하시는 개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로만 충성을 다할 뿐 그 당시의 유행에 편승하여 죄악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스리며'(이르두)를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은 '자기 손으로 박수를 쳤다’
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어떤 이는 '그들과 연합하였다'라고 해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