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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에서 안디옥으로

LNCK 2024. 8. 1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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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5 14 고린도에서 안디옥으로 - YouTube

 

고린도에서 안디옥으로       행18:12~22

지난 시간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오늘 본문도 고린도 교회의 남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남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12절에 나옵니다. 

▲18: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이 되었을 때' 라고 말합니다. 
아가야는 고린도가 속한 지역이죠. 

당시 그리스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북부는 마게도냐,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가 속했고)
남부는 아가야 지역입니다. 아덴과 고린도가 아가야에 속한 도시입니다. 


이 아가야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합니다. 바로 갈리오 총독인데요. 
위 사진은 고린도에서 발굴된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 보면 '갈리오 총독'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갈리오 총독이 실제로 고린도를 다스렸다는 거죠. 
역사 기록에 의하면 AD 51년에서 52년까지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 갈리오가 누구인가요?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두 유명한 철학의 학파가 있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였죠.  17:18

이 두 학파는 그 당시 철학의 양대 산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세네카 였습니다. 
세네카는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습니다. 

네로는 로마 황제들 가운데 최고의 폭군으로 불리는 왕이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을 굉장히 무자비하게 학살한 왕이었죠. 

그런데 이 네로가, 처음부터 이상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훌륭한 왕이었죠. 
처음 집권 5년 동안에는 굉장히 로마를 잘 다스렸습니다. *AD 54~68 재위

그때 이 네로를 가르쳤던 스승이 있는데, 바로 세네카 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네카의 형이 바로 오늘 본문의 갈리오 총독입니다. 

그러니까 이 갈리오 총독이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졌겠죠. 
자기 동생이 (얼마 후에) 로마 황제가 된 네로의 스승이니까요. 

갈리오 총독은 로마 황제와 직결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갈리오라는 사람이, 고린도를 다스리는 아가야의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겁니다. 
그런데 어떤 정부이든지 체제가 바뀌면, 민원이 봇물 터지듯 올라옵니다. 
또 새로 부임한 총독 입장에서는, 민심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웬만한 것은 다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갈리오라는 사람은,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유대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던 거죠. 

왜냐면 아직도 바울을 못마땅해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처리할 기회가 온 겁니다. 
총독이 새로 부임한 기회를 틈타서, 바울을 고발합니다. 
그 고발한 내용이 13절에 나오는데요. 

▲18: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을 고발한 내용이 무엇이죠? 
바울이 율법을 어기면서 전도를 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여기 율법(노모스)은, 유대인의 율법인지, 로마법인지는 확실하게 말하진 않습니다. 
문맥으로 보면 로마법이 맞는 것 같습니다. *로마법, 율법 둘 다 '노모스'

바울이 로마의 법을 어기면서 전도를 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이 당시 로마는 종교에 관해서는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마는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나라마다 섬겼던 고유한 종교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종교 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이죠. 

그래서 로마 제국은, 그 나라가 섬기던 종교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로마의 법을 거슬러서는 안 되는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반역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 로마법을 지키는 한에서는, 식민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공인된 종교만, 로마 제국 아래서 전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대교도,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핵심이 무엇이죠?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는 로마법을 어긴다는 겁니다. 
로마법을 어기면서까지 복음을 전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는 불법이라는 겁니다.
만일 그들의 고발대로 판결이 나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게 앞으로 힘들게 됩니다. 
불법이니까요. 
로마 제국 아래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게 어렵게 됩니다. 

지금 2차전도여행 중인데, 3차전도여행부터는 모든 스텝이 다 꼬일 수 있습니다. 
아마 바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갈리오 총독 앞에서 어떻게 기독교를 변호해야 하나?'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들을 정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을 하려고 입을 딱 떼는 순간, 갑자기 갈리오 총독이 끼어듭니다. 
그리고 나서는 바울의 말을 낚아채 버립니다. 
인터셉트해서 총독은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바울이 직접 변호를 하려고 하자, 
갈리오 총독이 바울을 대신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갈리오의 말이 14절에 나오는데요. 

▲18: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먼저 갈리오는, 이 고소를 접수하는 두 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하나는 부정한 일이거나
-또 하나는 불량한 행동입니다. 

이 부정하고 불량한 행동은, 로마법에 위반되는 일들을 말합니다. 
로마 사회를 어지럽히고 반역하는 일을 말합니다. 

만일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기독교가, 로마법을 위반하는 내용이면, 
내가 이 고소를 접수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너희들의 고소장을 듣고 보니, 
바울이라는 사람이 전하는 내용이, 로마법을 위반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로마법이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 일어난 종교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그 내용이 아래의 15절의 발언인데요. 

▲18: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갈리오가 가만히 들어보니 너희들이 고소하는 내용이 
첫째 언어와, 둘째 명칭과, 셋째 너희 법에 관한 문제라는 겁니다. 

먼저 언어는, 헬라어로 로고스 인데요. 
로고스라는 단어는 많은 뜻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말씀, 교리,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언어'의 문제라는 건, 유대교 안에 일어난 교리적 차이에 대한 
다툼이라는 겁니다. 

-'명칭'은 호칭이라는 뜻인데요.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메시아인지 아닌지, 그 호칭의 다툼이라는 겁니다. 

-'너희 법'은 모세의 율법을 말하겠죠. 
모세의 율법의 해석에 대한 너희들 안의 다툼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어, 명칭, 너희 법은 
유대교 안에 일어난 종교적인 다툼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바울에 대한 너희들의 고소를 받아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로마법이라면 내가 접수를 하겠는데, 
바울은 로마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바울의 전도가, 로마법과 관련된 내용은 아니라는 거죠. 

너희들의 고소를 듣고 보니, 로마법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법과 관련된 너희들 내부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기소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한 판단입니다)

그래서 갈리오 총독은, 이 재판 자체를 기각시켜 버립니다. 
'이건 내가 재판할 범주가 아니다. 너희들끼리 처리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바울의 무죄를 선언해 버렸습니다.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로마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각된 무죄는, 판례로 남게 됩니다. 
여러분 판례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시죠? 
재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판례입니다. 

재판정에서 어떤 시비를 놓고 그것을 판가름할 때 
제일 먼저 꺼내 보는 게 판례집이죠. '과거에는 이걸 어떻게 다루었나?' 
먼저 판례를 살핍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에 대한 첫 판결이, 본문에서 갈리오 총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기독교는 불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로마 제국 아래에서 기독교는 불법이 아니라는 판결이 났습니다. 
합법적인 종교로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게 판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판례 때문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 어디를 가나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그때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새로운 총독이 부임했으니, 이번 기회에 바울을 쫓아내자' 

안 그래도 새로운 총독이 사람이 좋기로 소문이 났으니까, 
잘만 설득하면, 자기들 편으로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리오 총독은, 고린도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판결을 내립니다. 
기독교는 불법이 아니라 합법적이라는 판례를 남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유대인들은 로마법을 가지고, 바울을 고수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기독교는, 로마 제국 어디를 가나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고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불법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기독교는 복음을 전하는 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판결 하나 때문에, 복음이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 곳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합법적인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의 갈리오의 판결은, 복음의 확장에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한 게,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겁니다. 

이 중요한 판결을 받아내는 데 있어서, 바울이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울은 아무 말도 못했으니까요. 입도 벙긋하지 않았습니다.

갈리오 총독이 나서서 말하는 바람에, 바울은 법정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법정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나시나요? 10절의 말씀이었는데요.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여러분 이 10절 말씀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지키신 겁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너를 대적할 자가 없다' 그런 말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를 대적할 자는 여전히 있을 거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적은 하더라도 너를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오늘 바울은, 어떠한 해도 입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해도 입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바울에게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바울에게 신실하게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반드시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결국에는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약속의 말씀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날마다 주어져 있습니다.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믿고 사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우상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행17장 아덴에서 
우상은 걱정의 산물이었죠. 염려와 불안의 산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우상을 만드는 거죠. 
그러나 우리는 불안하고 염려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우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6:31~34절의 말씀인데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또 마28:20절 말씀인데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 때문에, 누구도 우리를 손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약속의 말씀을 얼마나 믿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 약속의 말씀을, 삶 가운데 얼마나 경험하고 계십니까? 

바라기는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이, 인생에 뿌리를 내리시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가장 안전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오늘 바울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풀려나는 대신에, 또 다른 누구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소스데네라는 회당장이었습니다. 

▲18: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갈리오 총독은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16
쫓겨난 유대인들이 갑자기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다가 때립니다. 

이 소스데네는, 앞서 그리스도인이 된 그리스보(18:8)를 대신하여 
회당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다가 때렸을까요? 

아마 소스데네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 같습니다.
소스데네가 회당장이었기 때문에, 바울을 고발하는 소송 책임을 맡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송에 실패를 하자, 유대인들이 화가 잔뜩 나 있는 거죠. 
쉽게 말해 화풀이를 한 겁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소스데네는 배신자와 다름없으니, 어쩌면 바울보다도 더 얄미웠을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에게 빰을 맞고,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화풀이를 한 거죠.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하나 있습니다. 

그 반전이 고전1:1절에 나오는데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훗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에베소에서
그런데 그때 편지를 쓰는 공동 발신자에,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
소스데네를 고린도 교회에게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에게 두들겨 맞았던 소스데네가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있습니다. 

아마 소스데네는, 오늘 매를 맞고 난 이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의 적극적인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가 막힌 하나님의 섭리 아닙니까? 
앞서 그리스보 라는 회당장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18: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그런데 그 후임인 소스데네 라는 회당장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회당장들이 놀랍게도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은혜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어떤 말씀의 성취이죠? 
10절에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말씀의 신실한 성취입니다. 

구원받을 백성 중에 소스데네도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소스데네가 믿을 거라고는 몰랐겠죠. 
그는 회당장이었는데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는 소스데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무도 모릅니다. 바울이 구원을 받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으려고, 저 멀리 다메섹까지 원정까지 다니던 
그 흉측한 죄인 사울이, 예수를 믿을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울이 회심을 했을 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신비이고 은혜입니다. 누구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고 신비입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이 신비이고 은혜인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10
여러분이 기도하는 그 영혼이 이 약속의 말씀의 범주에 들어가 있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소스데네의 이름이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진 것처럼 
여러분이 기도하는 그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의 고린도 사역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2차전도여행을 끝내고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베소와 예루살렘을 들리다

바울은 앞서 안디옥 교회에서 2차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거치고 거쳐서 마지막으로 고린도까지 오게 된 거죠.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가량 머뭅니다. :11
그래서 학자들은, 바울의 2차전도여행기간을 3년으로 봅니다.
(*1차는 2년, 2차는 3년, 3차는 6년.  2x3=6으로 외우면 쉽죠)

그리고 고린도에서 2차선교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그 돌아가는 과정이 18절부터 나오는데요.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함께 합니다. 
먼저 겐그레아 항으로 이동하는데요. 고린도 도시의 동쪽 항구입니다. 

그런데 배를 타기 전에 바울이 '머리를 깎습니다.' :18
왜 머리를 깎았을까요?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마 바울은 나실인 서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주1)

아마 바울은 고린도에서 나실인 서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가 없는데요. 
고린도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명하게 깨달았고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 때문인지, 
일정 기간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을 마치게 된 거죠. 
나실인 서원도 끝나게 되었기 때문에 고린도를 떠나면서 머리를 잘랐던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에베소로 이동합니다. 지도를 한번 보시겠어요? 



▲18: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고린도에서 에게해를 건너서 에베소로 이제 바울이 이동을 하고요. 
에베소에서 늘 하던 대로 유대인 회당을 찾아갑니다.

(*에베소는 원래 바울이 2차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아시아로 가려다가 길이 막혔다'고 했는데, 그 아시아 지역의 대표도시 입니다.
'에베소로 가려다가 길이 막혔다' 라고 해도 되는 거죠.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남)로 가는 길도 막히고, 비두니아(북)로 가는 길도 막혀서
길이 열려있는 마게도냐로 건너갔던 거죠.

그 에베소를, 2차전도여행 말미에, 안디옥 교회로 회귀하는 여정에서
잠시 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3차전도여행은, 에베소에서 시작한다고 봐도 되죠.
거기서 3년을 머뭅니다. *고린도의 1년 반 체류와 구분 요)

그런데 예상외로 에베소의 유대인들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20 

보통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면, 돌아오는 반응이 무엇이죠.? 
대체로 대적과 비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환대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에게 더 오래 있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하죠? 허락하지 아니하고 작별하였다고 나옵니다. :20

대신에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이제 에베소에 남겨 두었습니다. 18:26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를 떠납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를 싫어하는 장소는 얼른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환영하는 장소는 더 있고 싶어합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전에 경험하지 못한 호의와 환대를 에베소에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를 떠납니다. 

바울을 움직였던 건, 바울의 감정이나 환경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바울을 움직였던 동력이 21절에 나오는데요. 

18:21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바울을 움직인 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면, 마치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바울은 계속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가 아무리 환영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바울은 더 이상 머물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서처럼요. 

바울을 움직였던 건 감정이 아니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너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쿨하게 에베소를 떠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바울의 걸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18: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그 후에 바울은요. 에베소를 떠나서, 배를 타고 가이사랴에 상륙합니다. 
원래 바울이 안디옥교회로 돌아갈 목적이었다면, 가이사랴 대신에
실루기아 항에 내렸을 것입니다. 실루기아 항구가 안디옥에서 가깝거든요.
그런데 가이사랴에 내렸다는 말은, 예루살렘으로 갈 목적이 있었다는 거죠.
(광주에 가려면 목포에 내리면 되는데, 인천에 내린 것은 서울에 갈 요량이었던 거죠)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간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봅니다. (예루살렘이란 말은 안 나오지만)    주2)

가이사랴에서 '올라갔다'고 나오잖아요. 올라가서 간 곳이 어디냐면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안디옥은 '내려갔다'는 말을 쓰고,  15:30, 18:22
예루살렘은 '올라갔다'는 말을 씁니다. 

우리나라도 서울에 '올라간다'고 얘기합니다.
과거에 이북 사람들도 경성에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내려간다'고 하지 않았죠.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해서 2차선교여행을 보고한 다음에, 
파송교회인 안디옥교회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2차선교여행이 끝났습니다. 
15:36절부터 시작된 2차선교여행의 기나긴 여정이, 본문 18:22절에서 끝납니다. 

◑적용 / 그 가운데서 사도 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2차선교여행이 마치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움직였던 힘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움직인 건, 바울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또 환경의 어떠함도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계획과 뜻도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자기를 환영하던) 에베소를 일찍 떠나 
2차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귀환합니다. 

그러면서 누가는 우리에게 묻는 거죠. 
'당신은 무엇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에 따라 반응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동기로 반응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움직이고 계십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 그분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그분의 말씀만이 결국에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고린도에서 일어난 나머지 두 가지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10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0
  
이 약속의 말씀대로 바울은, 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법정으로 끌려가게 되었지만, 누구도 바울을 손 대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 약속의 말씀이 또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회당장 소스데네였죠. 

10절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 바울의 삶 가운데 다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말하는 거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가장 안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내 삶을 맡기는 삶이 가장 안전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19: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한 주간도 붙잡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디에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합니까? 

또다시 시작하는 한 주간,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 그분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건합니다. 

.............................................

주1)
구약에 보면 나실인 서원이 나옵니다. 나실인이라는 말은 구별된 자라는 뜻인데요. 

그럼 구약의 삼손이 대표적인 나실인이었죠.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이 '나실인 서원'입니다. 
일정 기간 동안 자기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거죠. 

그런데 나실인 서원을 하는 동안에는 지켜야 할 세 가지 규정이 있습니다. 
포도주도 마시면 안 되고, 시신을 만져서도 안 되고, 머리카락을 자르면 안 됩니다. 

왜 머리카락을 자르면 안 될까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음으로써 
내가 나실인 서원 중에 있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알리는 겁니다. 
'지금 나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걸 외적으로 보여주는 표시가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르는 겁니다. 

그리고 나실인으로 서원했던 그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자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머리를 자르는 겁니다. '나실인 서원이 끝났다'는 표인 거죠. 

주2)
바울이 서둘러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던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보면,
1) 서방 사본(Western Text)과 비잔틴 사본(Byzantine Text)에는 본 구절에 
'내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절기를 지키야 하리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사본들의 구절을 참고해 보면 
바울은 아마도 유월절 내지는 오순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서둘러 가려고했을 것입니다. 

2) 바울은 2차전도여행의 성과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함으로써 
예루살렘교회와 이방교회간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1차전도여행 때도,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보고한 적이 있었죠.  15:4

3)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 성전에서 그의 머리카락을 번제로 드리고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을 것입니다. 18:18절, 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