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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40:1-5 2005년 설교
◑도입
미국의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성으로선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매들린 올브라이트에 이어, 두 번째 입니다.
라이스는 러시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고,
한때는 피겨 스케이트 선수도 지냈습니다.
그리고 2002년에는 Washington DC에 있는 케네디 센터에서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협연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뛰어난 피아니스트입니다.
그의 어릴 적 꿈은 피아니스트였습니다. 4살 때부터 피아노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재능을 보였고, 그의 어머니는 이탈리아어인 콘 돌체자에서 딸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con dolcezza” : 부드럽게 연주하라
라이스는 26세에 러시아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과 함께 스탠퍼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전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냉전에 마침표를 찍은 1989년 몰타 미소 정상 회담에
미 대표단으로 나온 라이스를 회상하며
“내가 아는 소련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고 라이스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몇 년 전 뉴스위크에서 라이스 특집으로 기사를 만들면서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기도하면서 국정을 살핀다고 했는데 무슨 기도를 하는가?”
라이스는 “사람들은 흔히 내가 기도할 때 탈레반을 치고, 후세인을 치는데
기도의 초점을 맞출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나의 기도 내용은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바로 ‘내 뜻과 의지로 결정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소서’라는
한 가지뿐입니다.” 라이스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라이스는 미국 국무장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에는, 많은 역경과 고난과 환란이 있었습니다.
라이스는 1954년 남부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목회하는 흑인 목사였고, 어머니는 음악 교사였습니다.
라이스는 어릴 적 극심한 인종 차별을 경험하였습니다.
9살 때 자기의 친한 친구가, KKK단에 의해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특히 인종차별로, 많은 상처와 가슴속에 한이 맺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가슴속에 있는 상처들을
항상 하나님의 위로로 치료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라이스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고난가운데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큰 위로를 체험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가 나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는 큰 고민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고 난 후에 온 나라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유다 나라 내부에는 온통 죄악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외부를 바라보니 신흥 국가들이 일어납니다. 바벨론이 강대국으로 부상합니다.
외부의 세력들은 호시탐탐 유다를 삼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사람들은 위기 상황을 깨닫지 못합니다.
문제 의식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이러한 답답한 심정으로 괴로워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계시의 말씀이 곧 이사야서 입니다.
이사야 1~39장은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40장에서 66장은 유다의 회복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회복의 메시지 중 처음으로 터져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Comfort ye my people. 사40: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위로를 받을수 있나요?
위로는 물질의 문제도 아니요, 교육의 문제도 아니며, 정치적 문제도 아닙니다.
물질을 주어 위로함도 아니요, 먹을 것을 주어 위로함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환경을 바꾸어 위로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요,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위로함을 주시는가요?>
◑1. 위로는.. 죄 용서함으로 주어집니다.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노역이 무엇인가요? 죄수로서 징역살이를 말합니다. 그 기간이 모두 끝이 났습니다 .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위로하라, 위로하라, 반복합니다.
이것은 강조형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40:1
이사야가 전하는 위로는 속죄함, 곧 죄사함을 통한 위로를 선포합니다.
여러분, 참된 위로와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에서 흘러나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성탄절의 절기가 되어 죄수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안양 교도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찬양대에서 부르지 말아야할 찬송이 있다고 합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집을 나간자여, 어서와 돌아오라, 돌아오라.” 찬525장
거기 수인들에게 ‘죄인’ 취급하면서, ‘불쌍한 사람’이라면 매우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 큰 죄인은 밖에 있고, 작은 죄인은 감옥에 있습니다.
사실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이러한 말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죄의 문제 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그런데 이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참된 위로는 우리의 구속자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성도는 근본적으로 ‘위로’를 이미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1973년 동독의 수도 본 Bonn 에서는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소련의 수상이었던 브레즈네프가 서독을 방문하여
독일의 수상과 국방장관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부드러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브레즈네프가, 2차 대전 때 독일 나치 군이 소련에 쳐들어와서
소련인들을 괴롭혔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분위기는 살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에 가득 찬 분위기로 접어 들어갔습니다.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과거의 모든 아픈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나치 군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지를 슈미트에게 말합니다.
20분간이나 자기의 원한 맺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브레즈네프가 이야기를 마치자 헬무트 슈미트 당시 국방장관이 말을 합니다.
(슈미트 국방장관은 나중에 재무장관과 독일의 총리로 재임했습니다.)
그런데 슈미트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독일군에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히틀러로부터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소위 말해서 과거의 원수끼리 만난 자리가 된 것입니다.
슈미트는 솔직하게 그 당시의 상황을 브레즈네프에게 고백했습니다.
“독일군들이 한편으로는 나치에 충성해야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잘못된 행위라는 양심의 가책 속에 괴로워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옛날의 서로의 아픈 추억을 이야기했을 때,
놀랍게도 그들은 서로 깊은 존경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털어 놓고, 서로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했을 때,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용기와 위로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마틴 부버는 그의 유명한 책 <나와 너 Ich und Du>에서
사람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힘의 터전 energy-field 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이 힘의 터전에서는 두 사람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소유할 수 없는
위대한 능력이 생산되어진다고 합니다.
브레즈네프와 슈미트는 자신들의 상처와 아픔을 서로가 고백하고
서로가 솔직하게 시인함으로 전에 소유하지 못했던
새로운 힘의 energy-field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내적 치유를 위하여 자신의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모두 내어놓고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여야 치료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에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치료함을 받지 아니하면,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에는
무서운 자아가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파괴시키는 매우 무서운 괴물이라고 합니다.
물론 나의 아픔과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놓고, 고백함으로써
어느 정도 치료되고, 회복될수 있겠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심령의 치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치료하며,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치료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by his wounds we are healed”
우리의 모든 죄악이 주님의 보혈에 의하여 정결함을 받을 때에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함이 있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사죄의 은총입니다. 가장 큰 능력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한없이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성도는 ‘주의 길을 예비함으로’ 위로함을 받습니다: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주의 길을 예비하라.” 40:3
이것은 궁극적으로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준비하라. 예비하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 부산에서 APEC 정상회담(2005년)을 앞두고
각 나라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한국에서는 수많은 경찰을 투입하였고, 최 첨단의 기술을 동원하였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부시 대통령을 경호하기 미국의 정보기관 요원들과 백악관 경호팀들이
몇 개월 전부터 한국에 와서 철저하게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왕 되신 예수님이 오실 테니 이스라엘은 대로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대로는 하이웨이를 의미합니다. 고속도로를 말하지요.
여러분 길이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 미국의 도로가 얼마나 좋습니까? 특히 미국의 고속도로망은 대단합니다.
미국 대륙의 동서남북을 잇는 하이웨이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렇게 잘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이 멋지고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비포장도로,
혹은 자갈이 깔린 도로에서 운전을 한다면 어떻겠나요?
덜컹 덜컹 하면서 얼마나 불편하겠나요?
도로가 좋지 못하면 자동차가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승차감이 불편하겠는가요?
그러나 잘 포장된 고속도로를 달리면 기분이 좋습니다. 스무드 합니다.
에수님을 향하여,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시원한 고속도로가 나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와 닿습니다.
내 마음의 고속도로가 있어야 (주의 길이 예비되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광야 같은 내 마음에, 대로가 준비되어 있어야..
내가 주의 임재로 인하여, 주의 말씀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데
조금이라도 장애가 되는 요소가 있으면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야 위로가 넘치는, 은혜 받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것은 진리의 말씀을 받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말합니다.
교만한 마음은 낮아져서 겸손해져야 하며,
낙심하고 절망된 마음은 주안에서 용기와 힘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잘못된 마음이 평정이 되어서, 고속도로가 만들어진 상태에서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와야 하며,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부딪혀야 합니다.
여러분, 올해도 성탄의 절기를 맞이했습니다.
2005년도 1달 채 남지 아니합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며,
어떠한 마음으로 이 한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기 원하나요?
우리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준비하여야 합니다. 회개로, 감사로, 더욱 주님을 사랑한다는 결심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신령한 은혜 받기 위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3. 진정한 소망 가운데..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것은 메시야 대망 Messianic expectation 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메시야의 나라, 메시야가 오기를 대망합니다.
참된 위로는 메시야되신 예수님의 오심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본문 40:2~5절은, 1절에 이어지는, 연결되는 구절로써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에, 연결되어 집니다.
그래서 주의 백성들이 위로 받으려면,
왕이 임하실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
비로소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예가 아주 적절하지는 않지만, 때로 공항에서 보면, 또는 공연장에서 보면,
팬들이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리는 것을 봅니다.
어떨 때는 야외에서 땡볕 아래에서도, 몇 시간씩 기다림을 불사합니다.
그러다가 기다리던 팬이 나타나면, “와~” 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OOO, OOO!”하며, 자기 팬의 이름을 계속 연호합니다.
왕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왕이 행차하시면, 임재하시면,
그 분의 영광이 나타나면, 그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때 백성들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왕이 행차하시지 않았지만,
그 기다림 속에서, 그 소망속에서
기대가 있고, 흥분이 있고, 소망이 있고... 그래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지요.
결코 절망하거나 낙심해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이 곧 오신대!’ .. 이게 위로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과거와 현재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미래를 추측합니다.
이것을 소위 Futurology 라고 합니다. 미래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나 현재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적인 미래를 확신하는 것이
기독교 종말론입니다. Eschatology
기독교의 모든 진리와 예언은,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주님의 재림으로 다 완성되어 집니다.
성도들의 삶의 특징은 종말론적 생활입니다.
미래학적인 삶은 과거를 기초로 하여 현재를 살며, 미래를 예측하지만
그러나 종말론적인 삶은 미래를 기초로 하여 현재를 삽니다.
미래에 주님 만날 것을 확신하고, 현재에 진실되고, 신실한 삶을 살아나갑니다.
미래에 주실 영광을 바라보고, 믿으며 현실의 모든 어려움을 이깁니다.
미래에 들어갈 천국의 영광을 확신하고, 현실의 삶을 나그네로 살아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어나 말거나,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아니하거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미래는 분명히 찾아옵니다.
△여러분, 여름이나 겨울 방학을 앞둔 학생들 얼굴을 보신 적 있으시죠?
없으면, 과거에 자기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혹은 여름 휴가를 앞둔 직장인들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다들 흥분해 있습니까?
아마 일년 중에 가장 흥분된 나날들입니다. 그리고 방학 때, 휴가 때 무엇을 할지...
다들 한 달, 두 달 전부터 계획하고 기대에 들 떠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달력에 X표를 하며 날짜를 하루 하루 지워 나갑니다.
이렇게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 위로를 받지 못한다는 사람들은.. 사실은 소망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한 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하여 그렇게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비웃거나 말거나 그것에 상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홍수를 준비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의 미래를 현재의 사건으로,
지금의 현실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유대인들이 메시야 대망속에 살았지만
막상 메시야되신 예수님이 오시니,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왜 이러한 모순이 생겼나요?
그것은 예수를 통하여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유대 나라를 로마로 부터 독립시키고,
유대가 메시야의 힘으로 세계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지배할 것을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이 생각한 대로 해주지 아니하니,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산앙 생활을 해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하면
열심히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주님을 못 박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따르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나의 철학, 나의 고집, 나의 경험, 나의 과거, 나의 교만 모두 버리고,
나의 존재를 완전히 철저하게 십자가에 못을 박아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진정한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말합니다.
여러분, 참된 소망은 예수님께 있으며, 주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 있는 삶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에 있습니다.
▲복음으로 주어지는 기쁨, 위로만이 참된 기쁨과 위로입니다!
인간적인 기쁨을 많이 추구하면, 기쁨이 주어지는 게 아니고, 기쁨과 반대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그런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끝에 뭐가 찾아오죠?
우울이 오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지금 우울하다는 얘기는
기쁨을 추구하고 조작된 기쁨과 위로를 찾다가,
그 끝에서 맞이하는 게 우울이에요. 그리고 허무함이 오는 거죠.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복음에서 오는 위로입니다.
이것은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될 때 찾아오는 어떤 현상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니까, 그 복음이 그들의 삶에 묶여있는 것을 다 자유케 하는 거죠.
그러니까 죄의 노예에서 풀려나고, 또 정욕의 묶임에서 자유함을 얻을 때 찾아온 기쁨,
이전에 전혀 맛보지 못했던 그런 기쁨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기쁨, 위로부터 주어지는 이 기쁨, 오늘 우리가 이 기쁨을 누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치는 말
이제까지 '내가 받는 위로'에 대해 설명했지만,
아래는 '내가 남을 위로할 때'에 관
여러분, 우리 모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참된 위로는 어디에서 생기나요?
1. 예수 안에 있는 죄사함에서 흘러나옵니다.
2. 우리의 마음을 잘 준비하여 주님과 말씀을 잘 모심에 있습니다.
마음에 대로를 준비하는 데 있습니다.
3. 내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위로를 얻습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강의 절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