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성전 (앞) 설교 렘7:1~15 인터넷설교녹취, 정리
◑도입
예레미야서 2~25장까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주의 백성들을 향하여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포한 12편의 설교 모음집 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2~25장까지, 예레미야가
진노의 대상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 부패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선포했던 설교들을 듣고 있습니다. *1장은 예레미야의 소명
그 중에 오늘 본문 렘7장은, 10장까지 이어지는 또 다른 새로운 설교의 시작점 입니다.
세 번째 설교(7~10장)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4~
이것은 ‘예레미야의 소명’과 관계되므로, ‘예레미야의 설교’와 관계없고요.
예레미야의 설교는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1:11~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2:1~
3)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7:1~
4)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11:1~
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13:8~
이 설교는 일단 그 배경이, 여호야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본문 렘7장은, 렘26장과 내용이 아주 유사합니다.
그런데 렘26장에 보면, 그 설교는 여호와김이 통치하던 시대에 선포되었죠. 26:1
그래서 본문 렘7장도, 여호야김 시대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어떤 때입니까? 여호야김 하면 악명 높은 왕입니다.
칼로 말씀(예레미야의 예언 기록)을 갈기갈기 찢어서 불에 태웠던 왕이에요.
그러니까 '여호야김 시대다' 라고 말하면,
그의 통치 11년은 종교적으로 매우 타락했던 시대,
원래도 시대적 흐름이 신앙적으로 그렇게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요시야 왕이 그래도 어느 정도 종교 개혁을 해놨는데,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완전히 뒤로 되돌려서, 오히려 더 퇴보해 버린,
신앙적으로 매우 부패했던 시대에 선포 되었던 설교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성전이 파괴되고 주의 백성들이 쫓겨나는가?
이 설교는, 7:1~2절을 보면 이 설교는 소위 '성전 설교' 라는 별명을 갖고 있죠.
즉 예레미야가 성전에 예배 드리러 오가는 사람들한테, 성전 앞에서 선포 했던 설교 예요.
7: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그 이전에 2~6장까지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예루살렘에 가서' 그러니까 거리에 가서 선포하라고 하셨어요. 2:2
즉 예루살렘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 했던 메세지라고 한다면,
지금 본문 렘7장의 설교는 '성전에 가서 성전 문 앞에서 예배 드리러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7:2
▲그래서 이 설교의 강력한 특징을 보게 되는데
이 설교는 이제 진노하신 하나님이, 부패한 자기 백성에게 내릴 징벌이 뭔지
확실하게 밝혀지는 설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설교는, 누구를 통해서 우리가 고통을 받는가,
그 징벌 도구가 누군가가 밝혀졌던 설교잖아요.
바벨론 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이 심판하시나보다' 그걸 알았다면,
오늘 이 설교는, '그들이 어떤 징벌을 받게 될 것인가?'
'그들에게 주어진 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설교입니다.
그게 14~15절에 나옵니다.
7:14~15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1) '실로에 행함 같이' :14
예레미야 당시는 '성전 시대'였고, 그 이전에 '성막 시대'가 있었죠.
성전 시대는 예루살렘이 주 무대였고, 성막 시대는 실로가 주 무대였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때, 엘리의 아들들이 법궤를 메고 아벡 전투에 나섰다가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겨 버립니다.
후에 법궤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지만, 실로에 안치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실로가 그 시기에 파괴되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성경에 안 나옴)
실로는 그 이후로도 복구되지 못한 듯 합니다. 성경에서 잊혀져 버립니다.
그래서 14절은, '실로가 파괴됨 같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실로의 성막처럼 파괴되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죠.
유다 백성들이 금쪽같이 여기는 성전을, 하나님은 파괴해 버리실 것이라는 거죠.
이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레미야를 정신병자 취급했을 것입니다. '그럴 리는 없을 거야... 저 광신자...'
2) 15절에,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이것은 북왕국 10지파가 앗수르에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남유다도 바벨론에게 망하고, 쫓겨나서 포로가 될 것을
예레미야는 예언합니다.
이 두 가지는 참으로 무서운 벌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이 성전 예배(제사)를 안 드린 게 아니었죠.
그러나 형식적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런 일이 계속 지속되었을 때
그 결과는 참혹하고, 끔찍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벌이 뭐죠. 집에서 내쫓는 거예요.
'너희가 이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너희가 이 땅에서 쫓겨나갈 것이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죠.
안식일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옷을 잘 차려 입고, 가족들 손 붙잡고, 교회로 성전으로 예배드리러 가는데,
그 성전 앞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떡 서가지고 하는 말이 뭐예요?
'너희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 성전이 파괴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전부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한 선포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황당했겠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로 바뀌었을 거예요.
'뭐 성전이 무너진다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북이스라엘처럼 포로로 끌려간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뭐예요?
성전에 대하여서 함부로 얘기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이걸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는 설교였고,
예레미야는 사실 자기 생명을 내놓고 설교(예언)한 겁니다.
이런 설교를 들었을 때, 그들은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충격을 받고 분노해서 어쩌면 예레미야를 죽이고 싶었을 거예요.
요즘도 매국노로 낙인찍히면,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든데,
당시에 그런 망언과 망발을 일삼는 예레미야는, 매국노요, 공공의 적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
▲1.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형식적인 예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7:3~7절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에 대해서 지적을 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을 빼먹었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게 아니에요.
예배는 빼먹지 않고 드렸는데, 너무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거죠.
오늘날 우리들은, '예배만 안 빼먹고 드리면 된다'라는 생각을 많이들 갖고 있는데,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것만 갖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죠.
7: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당시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십계명이죠.
그리고 인자와 진리와 공의롤 행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그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고,
삶은 아무렇게나 살면서,
예배시간이 되면,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말이에요.
말씀에 전혀 순종하지 않으면서 예배했단 말이에요.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길을 걸으면서
매일 상번제를 드리고, 안식일에 성전에 와가지고 예배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예배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신 것이 아니고,
'삶의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신 거예요.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종교생활만 했다는 거죠. 성전 문화에만 쩔어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4절에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최상급의 강조이죠.
이 말 뜻은, 당시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의 보호가 보장되므로 유다는 멸망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으며,
또한 모든 백성이 이를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과도한 '성전주의'죠.
5~6절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참 예배가 어때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의를 행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은혜스런 예배를 드리려면,
평소에 6일동안, 이웃을 사랑하며, 의를 행하는 '예배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거죠.
△어느 청년이 목사님께 상담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왜 간절한 기도가 안 되는 거죠?'
목사님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형제, 간절한 삶이 있어야.. 간절한 기도가 되어지는 법일세'
마찬가지입니다.
평일에 간절한 예배의 삶이 있어야.. 주일에 간절한 예배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들 막 괴롭히면서, 그리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서 욕심으로 살면서,
그들은 안식일에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말이에요.
예레미야가 성전 대문 앞에서, 지금 그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없을지라도,
자기 자리에서 쫓겨나고, 자기 직위에서 해임되고, 자기가 살던 곳에서
쫓겨날 때도 살다보면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는 아닐지라도, 오늘날에도 쫓겨나는 일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다 '형식적인 예배, 가증스런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거죠.
말라기에 유명한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까?
말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비슷한 말씀이 본문 21절에도 나옵니다.
7: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들로부터 제사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번제는 희생 제물을 모두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인데,
그 고기를 불 태우지 말고, 너희가 먹으라는 것은
내가 너희 제사를 받지 않을 테니, 아까운 고기 버리지 말고, 너희가 먹어라는 조롱의 말씀이죠.
△유다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는 게 무슨 이민 떠나는 게 아닙니다.
신28:21~24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
이런 '여호와께서 보내신 재앙'들을 겪으면서, 죽거나,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론 포로기를 겪으면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강조한 것은
<새언약>입니다. 너희 마음을 새롭게, 부드럽게 하라는 것이죠.
'율법을 네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형식적인 종교생활 집어치우고,
내면적인, 본질적인, 마음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의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새언약과 같은 맥락이죠.
그렇지 않는 형식적,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뿐더러
그게 계속되면,
실로가 파괴되듯이, 에브라임(10지파)이 망하듯이... 남유다도 망하게 된다는 예언이었죠.
삶이 동반되는 예배를 드리라는 거죠. 신약적 표현으로는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겁니다. 롬12:1~2
마치 소위 이런 겁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을 했어요.
그러면 두 사람이 함께 하고 가족이 함께 하는 공간인 가정이 생깁니다.
근데 여자가 가정 밖에만 나가면, 아내로서 합당치 않은 모습으로 막 살아요.
집 밖에만 나가면 오만 짓을 다 하고 다녀요. 마치 싱글인 것처럼.
그래놓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싹 씻고 마치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인 것처럼 행동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들을 향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끌려가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 시간에 은혜 못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치 '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이 그의 예배를 받아주시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그럼 왜 그렇죠? 6일동안 '예배의 삶'이 없었기 때문인 거죠.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 하나님께 전혀 합당하지 못한 모습으로 일주일 내내 살면서,
우상숭배 하면서 방탕하게 살면서,
딱 주일만 되면 싹 옷갈아 입고 나와서, 한 시간 예배드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예배 드려준다'는 심정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예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처음에는 참고 기다려주시겠지만,
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하나님은 엄한 징계를 통해,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실로의 파괴와 바벨론 포로를 통해서라도요.
▲2. 하나님이 너희 성전을 무너뜨려버리고, 너희를 포로로 내쫓아버리겠다고 하신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거짓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7:8~10절
7: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그 거짓말 중에 한 가지가 4절에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였죠.
위 말의 내용은 '너희가 어떻게 살든지, 성전에 나와서 제사만 드리면 OK,
너희는 구원받는다. 너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라는 속뜻을 담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종교지도자들의 거짓말이라는 거죠.
9~10절에, 또 다른 거짓말이 나옵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은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는 잘못된 구원관입니다. :10
구원도 불분명한데,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고 확신하는 거예요.
9절에 여러가지 유다의 죄악들이 나오는데요, 한 마디로 말하면 십계명입니다.
거기 도둑질(8계), 살인(6계), 간음(7계), 거짓맹세(9계), 바알분향과 다른 신 따름(1~3계)
가 다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인 십계명을 어기고 살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는 잘못된 구원관을, 그들은 갖고 있었던 거죠. :10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8
오늘날에도 그런 거짓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그 거짓을 믿고서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하고 안심하고 있습니다.
△1980~2000까지 한국교회에도, 똑같은 분위기가 아주 팽배했습니다.
소위 '율법폐기론'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율법은 사람이 도저히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은 한 가지만 어겨도, 모든 율법을 어긴 것과 같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십계명과 다른 계명들을 무시하고, 요3:16절대로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
이게 당시 유행하던 잘못된 신학이었죠.
여기에 대해서 누가 반박이라도 하노라면, 그는 '율법주의적 구원론자'로 낙인찍히던
그런 시절이 한 때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적 동의'를 통해 예수 믿고, 자기가 구원 얻었다고 착각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 한 때 있었습니다. 또 막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거기엔 회개도 없었고,
-회심도 없었고, (삶의 방향 전환)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의 증거나 열매도 없었고,
-성화도 없었고, 삶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구원론을 '칭의'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경 전체를 볼 때, 구원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칭의-성화'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게 성경적인 구원론입니다.
5만원권 지폐가, 앞에는 신사임당이 있는데, 뒷면이 백지라면.. 위폐요 가짜죠.
구원받았다는데, 전면에 '믿음으로 칭의'는 있는데, 뒷면에 '성화'가 없다면.. 가짜죠.
진짜 구원받았으면.. 성화, 삶의 증거와 열매가 자연스럽게 동반되게 되어 있죠.
△예레미야 당시에 '너희는 선민이고, 성전에 나오기만 하면 돼! 그럼 구원받았어!' 했다는 거죠. :10
그리고 율법폐기론 antinomianism 이 유행했다는 것입니다. :9
그런 거짓을 믿었다는 거죠. :8
우리나라도 한 때, 그런 불충분한 구원론이 시중에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그런 instant gospel, healthy-wealthy gospel, antinomianism 이 기세가 꺾였습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이 단락 펀 글)
그런 건 율법주의요 잘못된 신학입니다.
그렇다고 십계명을 무시하고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마음의 심비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새겨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으로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멸시하고 어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해도 그것은 가짜 확신입니다.
십계명을 100% 다 지킬 수 있는 분은 역사상 예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다 지키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을 버리거나 일부러 어기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십계명을 마음 심비에 새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또 살다 어긴 경우에는
회개하여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십계명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십계명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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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별 해석 ............................................. (참고 자료, 출처)
7: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말씀이 임하니라' 본절부터는 성전 앞에서의 설교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은 긴 산문체의 연설문 형식을 띠고 있으며, 다소 공식문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두드러진 패턴이 엿보이고 있는데, 다른 설교에서도 나타난다.
이 패턴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의 선언,
-민족의 배도에 대한 묘사,
-심판의 공표(公表)가 그것이다.
7: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씀은 여호야김이 왕이 된 직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것 같다. (추정)
그는 '여호와께 경배하러 들어가는' 유다인에게 말씀을 선포하는데,
여기서 '경배하다'란 말의 원어는 '솨하'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래 이 말은 높은 신분에 있는 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부복하여 엎드린다는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유다인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러 왔다면, 그것은 그에게 충성과 언약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행동으로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7: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 길과 행위를...이곳에 살게 하리라' 5~7절에서 보다 상세히 부연 설명되고 있는 본문은,
성전에 들어가는 자의 합당한 조건을 제시하는 입당송(入堂頌)과 같은 인상을 준다.
(시15,24편, 사1:16,17, 미6:6-8 참조)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이 그의 주권과 언약 요구 사항을 거부하고 있는 이상은,
앞으로는 결코 성전과 예루살렘의 보호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축복과 보호의 약속은 오직 그의 언약과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유효한 것이다(신7:12-15).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의 보호가 보장되므로 유다는 멸망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으며,
또한 모든 백성이 이를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 성전 자체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우상 숭배일 뿐이다. 예레미야 역시 성전 예배를 무시한 적은 없다(31:6, 33:11).
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탈굼역(Targum)은 본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경배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제사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찬양할지어다.
그리고 일 년에 세번 그 앞에 나아올지어다 라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
여기에 근거하면, '여호와의 전'이라는 말이 삼중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미혹되어, 성전 예배가 계속되는 한 안전할 것으로 보았다.
즉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을 예배하는 이런 제도를 이방인들의 손에 내맡겨버리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7: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계속 살 수 있는 조건들이 지적된다.
그리고 다음절에도 이어서 세 개의 조건문들이 제시된다.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첫째 조건은 정의를 행하라는 것이다.
십계명 중 제1-4계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지켜야 할 의무 사항들이고
제5-10계명은 이웃간에 지켜야 할 의무 사항들인 바,
그들은 이미 첫 번째 언약 조항들(제1-4계명)을 파기한 결과
이제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 의무 조항들(제5-10계명)을 어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7: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이 명령은 이미 모세 율법에서 규정하였던 사항이다(신10:18).
하나님은 특히 약자들의 권익에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이들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뜻에 대해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였다.
'무죄한 자의 피를' 이는 여호야김 통치 기간 중에 벌어진 살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형이 흔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통치자의 악의로 말미암아 부당한 살육이 자행될 소지가 다분했다.
한편, 31절에는 무죄한 유아들을 우상 제물로 바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7: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이곳에 살게 하리니' 백성들이 5, 6절에서 제시되고 있는 조건절들을 충족시킨다면,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 살 수 있다는 약속이다.
여기서 '이 곳'이란 예루살렘성이나 성전을 포함한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7: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 여부가 파국을 막아주는 면제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 말을 하였다. 하나님은 마음의 회개를 요구하셨던 바,
그것만이 평화와 안전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7: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유다가 범하고 있는 죄악의 목록들이 상세히 열거되고 있다.
이 범죄들은 시내 산에서 주어진 언약 규정 조항들과 대단히 유사하다.
첫번째 네개의 죄목들, 즉 도적질과 살인, 간음, 거짓 맹세 등에 관해서는 출20:13-16에
언급된 바와 같다. 그리고 '바알'과 '다른 신들'이란 말도 출20:3-5의 내용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십계명 전체에 대한 위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Thompson, Calvin).
7: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유다는 일상 생활 속에서 언약의 규정 사항들을 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서도 하나님 앞에 나섰다.
그들의 위선된 행위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본절의 '앞에 서다'의 히브리어 '아마드 리프나'는 복종과 굴복을 시사하며
한 봉신이 군주 앞에 나아가 그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Thompson).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의 성전 숙정(肅正) 장면을 연상 시키는 구절이다(마21:13).
유다 백성들은 악행과 온갖 가증한 일들을 범하면서도 성전이 있는 한 무사할 것이라는
미신 속에서 마침내 여호와를 무시하고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고 말았다.
강도들은 외진 곳에 은신처를 마련해 놓고 약탈을 감행하는데, 추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백성들은 바로 이러한 강도들과 같이
성전에 숨어 있다가 나와서는 다시 언약을 범하곤 하였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성전에서의 종교 의식을 통해 해소하고 또다시 범죄 행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성전이 어찌 죄악의 온상이 될 수 있겠는가?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전(殿)일지언정, 그것을 파괴해서라도 그들을 찾아낼 것이다.
7: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실로에 가서...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 지역이나
어떤 구조에 얽매여 있지 않으심을 생생한 예화를 사용해서 설명한다.
'실로'는 엘리 제사장 당시 여호와의 성소가 있던 곳으로서 그 당시 백성들은
이곳 실로를 중심으로 해서 여호와께 제사하였다(삼상1-4장).
그러나 이 실로는 B.C.1,050년에 불레셋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며 벧엘과 세겜 사이에 있었다(삿21:19).
하나님의 법궤는 무려 백년 이상이나 이곳에 있었으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빼앗겼다가
다시 반환받은 이후 다시는 실로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다 사람들은 이 실로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 역시 예외가 되지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라 하더라도
백성 중에 죄악이 있는 한 그것이 결코 불가침의 수호자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성전과 성전에서의 모든 종교 행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귀한 수단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언약을 대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장 확실한 표시였다.
7: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어나서
자식을 교훈하는 예화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세워서 열심히 그리고 빈번하게
경고하고 호소하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강퍅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7: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면서 여호와께서는 그곳이 다름아닌 자신이 그들의 열조에게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1) 여호와께서 주셨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파괴시킬 수도 있음과,
(2) 하나님의 은총은 열조들과의 언약에 근거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한편, 그 당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방 세계의 조약 문서들을 참조해보면,
우선 군주는 봉신에게 그를 위해 보여주었던 여러 가지 은혜로운 일을 지적한 다음에
봉신이 군주의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약속했음을 볼 수 있다.
유다 백성도 이와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으며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었다.
7:15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실로의 파멸'이라는 분명한 예화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의 경고를 뒷받침하는 명백한 사건이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것이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지만, 죄악으로 인한 결과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비극이었다.
열 지파도 아낌없이 멸망시켰는데 숫적으로 훨씬 더 열등한 유다가 과연 어떻게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7:16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본절에서부터 20절까지는 유다 백성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있다.
이 말씀은 다른 장에서도 여러번 나타나는데(11:14, 14:11),
본절에서는 세 번이나 반복되어 강조적 의미를 전달해준다.
그리고 분절에서부터 20절까지에서 지적되고 있는 죄상을 참조하건대,
이 같은 당부는 이 백성에게서 이제 회개의 가능성을 전혀 찾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고집스럽게 지속되는 우상 숭배에 대한 처방책은 언약의 저주 조항을 가동시키는 것뿐이었다.
7:17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너는...보지 못하느냐' 본절에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들을 위한 기도를 금하신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7:18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하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하늘 여왕'에 대해서는 '달'(Clarke), '별'혹은 '샤파쉬'(Dahood)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앗수르-바벨론의 여신 '이쉬타르'를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44:17).
므낫세 당시에는 유다 내에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신들과 함께 이 '이쉬타르'를 경배하는 일이
유행하였다(왕하21장, 23:4-14 참조).
B.C.5세기 경에는 애굽에서도 이 여신이 숭배되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의 발굴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본절에는 이 여신 숭배에 관한 몇가지 두드러진 양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아이들이 나무를 주워 모으고 아비들이 불을 피우고
여인들이 과자를 만든 데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 종교 행사가 가정 단위로 행해지기도 했다는 사실이다(Clarke).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여인들의 은밀한 활동에 대해서는 요시야의 개혁 당시에도
규제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설명을 통해
우리가 본서 초반부에서 언급했다시피 요시야의 개혁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으며,
그 영향력이 대단히 미약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7: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언약 백성 유다가 하늘 황후에 대한 제사에 몰두하는 것은
언약의 최고 주권자이신 여호와의 배타적인 권한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다.
이들의 이런 도전적인 행위는 여호와께 큰 고통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상 숭배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닥치고 말 것이다.
결국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머리 위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7: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불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이 백성의 부도덕하고 언약 파괴적인 도전행위는 결국 여호와의 심판을 초래하고 만다.
그래서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이 필연적으로 부어질 것이다.
즉, 그들은 성전을 신뢰하여 왔지만 그 성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며,
아울러 전민족과 사람과 짐승, 그리고 들나무와 땅의 소산까지 심판을 받게 된다.
이 백성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이런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회개의 가능성이 전무한 상태였다.
우리는 훗날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장면을 목격하고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 완고해질 대로 완고해진 그들의 심령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유다 멸망 후 일부 잔민들은 애굽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들은 거기서도 이 하늘 황후에 대한 제사를 그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7: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들로부터 제사를 받지 않겠냐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실상 그들은 희생 제사를 여호와께 바치지 않고 자신들을 위한 잔치의 일종으로 바쳤을 뿐,
그것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번제는 희생 제물을 모두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인데, 그 고기를 먹으라는 것은
그들이 드렸던 번제가 단순한 고깃덩어리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음을 신랄하게 지적하신 말씀이다.
7:22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희생 제사가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였으며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들이 희생 제사의 참뜻을 더럽힌 이상,
그것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나님은 희생 제사의 규례를 명하실 때부터 영적인 예배를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율법 정신이 살아 있지 않은 형식적인 예배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도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고 말씀하신 바 있다.
7: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여기서 제사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다시금 강조된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의식 절차만 거치면 그것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7:24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죄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멸시와 반항에 이어 고집과 방자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순종을 요구하였으며, 사회 정의를 역설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그들은 뒤를 향하고 앞을 향하지 않았으며'인데,
하나님의 길을 거슬러 자신들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앞 구절의 '악한 마음'이란 말과 연결지으면,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기로
아예 작심을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김을 암시하고 있다.
고대 역본들을 참조하면,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후회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지적은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할 때 종의 근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다시 애굽으로 가서 종살이하고 싶어했던 것(출17:3)과 똑같은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7:25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출애굽한 그들의 조상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모세를
비방하고 모세에게 원망한 바 있으며(출14:11,12, 15:24, 17:3등)
그 뒤를 이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었지만 유다인들의 사악한 행위는 근절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원문에는 '매일'을 나타내는 단어 '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찍 일어나다'란 뜻의 '솨캄'이란 말이 또한 쓰이고 있는데,
이를 종합하여 재번역하면,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매일 일찍 일어나서 보내었으나'가 된다.
7:26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목을 굳게 하여' 유다인들의 완악한 행위를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하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백성들의 부패한 행위를 지적하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포하였는데, 당시 유다 백성의 영적 실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의 마음속은 정직하지 못하고 교만하면서, 종교 행사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합2:4).
7:27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유다의 멸망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예레미야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을 파국의 길에서 끌어내려는 것이었으나,
그들의 불행은 이에 대한 완고한 불순종으로 피치 못할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7:28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이제는 하나님이 유다에 대한 경고의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그 어떤 권고나 경책이 무의미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2:30, 5:3, 17:23, 32:33, 35:13등에도 나오며,
잠1:3, 8:10, 24:32, 슥3:2,7에서도 나타난다.
7:29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 버리셨음이라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통곡할지어다' 본절에서부터 34절까지는 한놈의 골짜기에서 자행되었던
극악 무도한 더러운 행위에 대한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죄상에 대해서는 본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통곡해야 마땅한 것이다.
머리털을 베어버리는 것은 슬픔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미가 선지자는 유다에 임할 심판에 대해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미1:16)라고 선포하였다.
한편 '머리털'에 해당하는 '네제르'는 '화관', '왕관', '면류관'이란 뜻도 있는데,
이는 머리카락이 면류관으로 여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나실인의 머리 카락에 비교해서 살펴보면,
나실인은 여호와께 헌신하였음을 나타내는 표로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으며,
이들이 머리털을 베어버리는 것은 헌신을 포기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이다.
7: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
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가증한 것’에 대한 원어는 '쉬쿠츠'로서 구약에서 약 28회에 걸쳐 쓰인다.
대부분 이 말은 제사나 예배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모욕하고 더럽히는 모든 것을 지칭하였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받는 성전에 그 더러운 것들을 두었던 바,
이 같은 행위는 여호와를 모독하는 최고의 행위였다.
7: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성전의 악행 이외에 또 다른 더러운 행위들이 지적되고 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란 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에 '도벳'이란 사당을 건축하였다.
이 '도벳'이란 이름은 '태우는곳'을 의미하는 아람어에서 유래된 것 같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 태워 죽인 바가 있는데, 아하스와 므낫세 통치 기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왕하16:3, 17:31). 이처럼 인간을 제물로 바쳐 태우는
끔찍한 관행은 몰렉 신에 대한 제사와 관련이 있는 절차였다(레18:21, 20:2-5, 왕하23:10).
7: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이는 반역된 무리들이 모조리 살육당해
이곳에 버려질 것임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 그들의 시체를 모두 매장할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 시체들을 태워버리거나
또는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9:6-15에서는 이 말이 반복되고 있으며 그 의미를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다.
한편, 이처럼 특정한 대상에다 의미 심장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에언적 상징으로서
사1:26, 56:7, 58:12, 60:14, 61:3,6, 62:4,12 등에서도 나타난다(D.R. Jones).
7:33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사후(死後)에 자신의 시체를 매장해주는 자가 없다는 것은
큰 저주로 여겨졌다. 에루살렘의 멸망을 고통스럽게 회고하는 시편 중에는 이런 노래가 있다: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흐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시79:3).
그리고 율법은 죄인의 시체라도 매장하도록 명하였다(신21:23).
그러나 패역한 유다 백성은 성전 파괴와 함께 매장해주는 자 없이 멸망해야 했던 비참한
종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저주는 신 28:26에 그대로 예언된 바의 성취로 이해될 수 있겠다.
7:34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기뻐하는 소리...신부의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니'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당연히 흘러나올 이러한 소리들이
심판의 결과로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예루살렘에는 즐거움이란 것이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혼도 끊겨질 것이고 땅도 완전히 황폐해버리고 말 것이다.
엄청난 죄악이 엄청난 형벌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