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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일어나라 눅7:11~17 1999년 설교 <다음 세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비교적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80리쯤 떨어진 나인 성으로 가시다가
성 가까이에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행렬과 만납니다.
죽은 사람은 한 과부의 외아들인 청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청년에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서라" 하여
청년을 살려주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죽은 사람을 살려 주시는 일을 세 번 하셨습니다.
나사로,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인데
나사로는 누이의 간청으로,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의 간청으로 살려 주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은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살려 주셨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같이 읽으면서 세 가지 질문을
컴퓨터(PC통신)를 통해, 이 설교를 대하는 모든 분들과 저에게 드립니다.
첫째, 당신은 어느 행렬에 속해 있습니까?
둘째, 당신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셋째, 당신은 청년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1. 당신은 어느 행렬에 속해 있습니까?
오늘의 이야기에는 두 종류의 행렬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죽은 자를 메고 나인 성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행렬이요,
하나는 하나는 나인 성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행렬입니다.
나인 성에서 나오는 행렬은 죽은 자를 묻기 위한 행렬로서 슬픔의 행렬이요,
무거운 발걸음의 행렬이요, 소망이 없는 죽음의 행렬입니다.
그러나 나인 성으로 들어가는 행렬은
슬픈 일을 만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행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외아들을 가슴에 묻고 큰 비탄에 빠져 울며 관을 따르고 있는 과부를 보고
'참 안되었다' 생각하며 바라보기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울지 말라" 위로하고 관에 손을 대고 청년을 살려 주셨습니다.
▲지하철에서 시각장애인들이 하모니카를 불며 또는 녹음기를 목에 걸고 구걸을 하며 지나갈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 안되었다' 하는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바구니에 돈을 넣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재민들의 어려운 형편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참 안되었다"하는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찾아가서 위로하고 도와주어야 하고, 그들을 돕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각 종교의 특징을 이렇게 비교해서 설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개울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세 사람이 지나가는데 한 사람은 뚝 위에 서서 뒷짐을 지고
"여보시오, 어떻게 하다가 거기 빠졌소? 거 팔자도 사납소.
사람이 길을 걸을 때 발 밑을 조심하며 점잖게 걸어야 하는데 경망스럽게 걸으니까
그렇게 되지 않았소? 이 다음부터는 조심해서 걸으시오" 훈계를 합니다. 유교입니다.
또 한 사람은 "허허, 안 되었구려. 당신이 그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전생의 업이오.
계속해서 허우적거리시오, 어쩌다가 밖으로 나오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이오." 합니다. 불교입니다.
한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이 사람을 건져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은,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위로하고 문제의 핵심에 가까이 가며, 그 문제를 해결하는 행렬입니다.
이 행렬은 또 죽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행렬입니다.
▲구약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 족보를 보면 사람들이 참 오래 살았습니다.
아담은 930세, 셋은 920세, 므두셀라는 969세,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777세.. 오래 살았습니다.
부럽습니까? 그런데 이 족보는 "죽었더라"의 족보입니다.
"몇 살에 죽었더라", 계속해서 "죽었더라"로 연결됩니다.
창세기 5장에 "죽었더라"가 여덟 번 나옵니다. 사망의 족보입니다.
신약의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낳고"로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태복음 1장에 "낳고" "낳으리니" 이런 말이 43번 나옵니다. 생명의 족보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어느 족보에 있습니까? "죽었더라", "죽었더라" 사망의 족보에 있습니까?
"낳고, 낳고, 낳고", 생명의 족보에 있습니까?
나인 성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행렬을 따를 때
당신의 이름이 생명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이 행렬은 값없이 베푸는 행렬입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을 살려주신 다음에 "내가 너를 살려주었으니
너는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종노릇해야 한다"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이기심은 사람의 본능 가운데 하나인데, 세상은 날로 타산적이 되어가는데,
한 푼이라도 더 보상 받으려고 무리한 주장을 하는 세상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마운 행렬입니다.
이 행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렬이었습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저절로 전도가 되었습니다.
-나인 성에서 나오는 사망의 행렬, 슬픔의 행렬,
-나인 성으로 들어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행렬, 생명의 행렬,
당신은 어느 행렬에 속해 있습니까?
11절을 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가버나움에서 나인으로 가는 길,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은 로빈슨과 스텐리 라는
학자에 의해 발견이 되었는데, 길옆에는 시신을 두는 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이 허다한 무리 가운데 당신도 꼭 들어있기를 바랍니다.
◑2. 당신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는 음성입니다. :14
"그것은 죽어 관속에 누워있는 청년에게 이천 년 전에 하셨던 말씀이 아닙니까?
살아있는 내가 왜 지금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관 위에 누워있는 것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 나입니다. 특히 이 시대의 젊은이들입니다.
지금 제가 "관속에 누워있는" 이라고 말하지 않고
"관 위에 누워 있는"이라고 말한 것은
유대의 관은 우리의 관과 달라서 일종의 침상처럼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뚜껑이 없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그 사실이 명확하게 안 나옴)
호흡이 끊어지고 신체의 기능이 정지된 것만이 죽은 것입니까?
호흡이 끊어지고 신체의 기능이 정지되어 의학적으로는 죽은 다음에도
살아있는 것 이상으로 큰 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국 고사에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중달을 도망치게 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유래는 잘 아실 것이니까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에서는 죽어서 사는 사람도 많고, 반대로 살아서, 살기 위해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구한말에 어느 고관이 한일강제합방문서에 도장 찍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한일강제합방이 된 다음 날 집 앞에서 "애고 애고” 곡을 하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친한 친구가 굵은 베옷상복을 입고 곡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니까
"나는 자네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와 같이 와서 조문을 하고 있네.
도대체 어쩌자고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을 섰나? 자네는 이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네!"
하고 다시 슬프게 "애고 애고" 곡을 하더랍니다.
인생의 분명한 목표 없이 사는 사람,
특별히 그렇게 사는 청년은, 사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사람, 가장 영악한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적이고 피부감각적인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영생의 소망 없이 사는 사람,
사실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 해골로 보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요한계시록 3:1절의 말씀처럼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은 사람’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청년들이 그렇습니다.
일본의 청년들은 육무주의(六無主義)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무책임, 무관심, 무목적, 무행동, 무주의 무도덕, 이것이 육무인데
그렇다면 한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무생명!
일본의 청년들만 그렇습니까?
요즘 로데오 거리라는 것이 여러 군데 생기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중심의 거리입니다.
돈암동 성신여대 앞에, 신촌기차역에서 이화여대로 올라오는 골목길에,
분당에도 로데오 길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는 젊음이 넘친다고 합니다.
가보면 활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경박한 활기입니다.
'이 거리가 과연 생명이 넘치는 거리인가?'
이 질문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새천년(2000~)에 대한 설계가 많습니다. 청년들이 그런 설계에 앞장서야 합니다.
자기가 살 집은 자기가 설계해야 살기가 편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청년들에게서 새 천년의 이야기를 많이 듣지 못합니다.
무미래(無未來)입니다.
▲우리 청년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는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들어야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 목표 없는 삶에서 일어나라!
그 이기적인 삶에서 일어나라! 그 근시안적 삶에서 일어나라!
특별히 예수 믿지 않는 청년들아, 그 사망의 행렬에서 벗어나라!"
교회에서는 여름행사 잘 치르는 것이 일년의 큰 일 가운데 하나인데
저희 교회의 여름 행사들, 아동부 성경 캠프, 중고등부 신앙 캠프,
청년부 수련회가 어제로 모두 은혜 가운데 끝났습니다.
어느 교회 여름 수련회 프로그램에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방을 휘장으로 쳐놓고 청년들에게 "저 안에 들어가면 관이 하나 있는데
그 관속에 누가 있는지 보고, 그리고 앞에 무엇이라고 써 있는지 보고서 나오시오!"
청년들이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휘장 안에 들어가서 관속을 봅니다.
아무도 없고 커다란 거울이 하나 있습니다. 그 거울에 자기 모습이 비추입니다
그러니까 관속에 누가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까? 바로 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앞을 봅니다. 바로 14절의 말씀이 크게 벽에 붙어 있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청년들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오늘 주님의 이런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실의에 빠져 있는 아무개야, 내가 네게 -다른 사람 아니고 바로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염려하고 있는 아무개야,
죽은 사람도 살리는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실직,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주저앉아 있는 아무개야,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인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가정 문제로 괴로워하는 아무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소외감, 좌절감, 무력감에 빠져 있는 아무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3. 당신은 청년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12절 끝부분에 나인 성의 주민들이 "많이" 그와 함께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그랬을 것이지만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청년이라는 점도 많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나인 성의 주민들, 청년에게 관심과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생생한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관 위에 누워있는 시신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청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 많은 관심을 가겼을 것입니다.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주일은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교회력(敎會曆)상의 절기도 아니고
어린이주일이나 어버이주일 같이 유래가 깊은 기념일? 아닙니다.
신학교 주일이 되면 "신학교 주일을 꼭 지키고 주일헌금은 신학교로 보내 주시오"라는
공문이 옵니다.
평신도 주일에는 "평신도 주일을 꼭 지키고 주일헌금은 평신도 사업을 위해 사용하도록 해 주십시오“
라는 공문이 옵니다.
그런데 청년주일에는 그런 공문도 오지 않습니다.
청년주일을 언제부터 지켰는지, 왜 이 주일이 청년주일인지 유래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싱싱한 계절인 8월에 청년주일을 지키는 것은 퍽 지혜로운 일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한마디로 해서 안 지켜도 좋은 주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안 지키는 교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와 같이 청년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둘입니다.
첫째는 청년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 교회가 젊은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는 청년주일에는 "꿈을 품고 달려가는 젊은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젊은 교회는 젊은이들이 많이 출석하는 교회 생동감 있는 교회,
꿈을 가지고 달려가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죽어 관 위에 누워있는 것을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의 청년들이 인생의 분명한 목표 없이 살고 있는 것을 보시며
가슴아파 하십니다.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행동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가슴아파 하십니다.
순간적이고 피부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가슴아파 하십니다.
특별히 영생의 소망 없이 사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이 안타까워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청년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요즘 성도들이 많이 읽는 책 가운데 「생사를 건 교회개혁」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붐은 김동호라는 비교적 젊은 목사님인데
이 분이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더니 본당에는 에어컨 시설이 잘 되어 있는데
청년부실, 중고등부 실에는 에어컨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그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들에게
"이 교회는 10년 안에 틀림없이 망합니다"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청년 문제에 관심이 없는 교회는, 미래가 어둡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면도기를 제조하는 어느 회사 사장님은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수염은 쉬지 않고 자라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자고 만물이 활동을 쉬는 밤에도 수염은 쉬지 않고 자라지 않느냐?",
제가 이 이야기를 읽고 면도할 때마다
'아, 그 사장님 행복하게 해 드리기 위해 면도하는구나!'
이 사장님이 어린이 전용 야구장에, 자기 회사 제품 광고판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사원들이 반대했습니다.
"사장님 어린이들이 면도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은 효과적인 투자가 아닙니다.
낭비입니다. 재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장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10년 뒤에는 그들도 우리의 훌륭한 고객이야!"
그 회사가 성장하는 비결이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청년 주일입니다.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설교는 구체적인 반응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여러분 오늘 청년들 만나면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다가가신 것처럼
먼저 다가가서 꼬옥 악수하고 따뜻한 말 한 마디씩 해 주십시오.
저는 가끔 1부 예배와 2부 예배 사이에 중고등부실에 가서
학생예배 잠깐 돌아보고 오후에 있는 청년예배 잠깐 돌아봅니다
'예배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나?' '어떤 설교가 선포되고 있나?'
그리고 '몇 명 나왔나?' 이런 것들을 살피지요.
오늘은 청년예배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겠습니다.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서라!" 하는 음성을 듣는 주일입니다.
청년들만 듣는 것이 아니라, 살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진이 나인 성에서 밖으로 나가는 슬픈 죽음의 행렬이 아니라
나인 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생명을 주는 행렬이 되도록 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나인 성의 성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관이 나가고 있는 슬픈 문이었습니다.
서울 신당동 부근에 광희문(光熙門)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양에서 시체가 나갈 때는 서소문과 광희문으로만 나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광희문을 시구문(屍驅門)이라고도 했습니다.
미국 감리회 선교사들은 들어와서 제일 먼저 저희 교회의 모교회인 정동교회를 세웠고,
10년 뒤에 남감리교회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제일 먼저 광희문교회를 세웠습니다.
광희문교회에서 분립해 나온 것이 광림교회입니다.
나인 성의 성문은 시구문 屍驅門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예수님을 만나 생명의 문이 되었습니다.
나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아름다운 "즐거운" '귀여운" 이런 것인데
예수님을 만나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성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여러분과 저, 우리들이 사는 곳에도 있어야겠습니다.
1999년 청년주일이 새로운 생명을 우리에게 주어 청년들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복된 주일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