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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신 목자 시23:1~6 2014.05.30.
◑1. 오해: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인가?
죄인의 본성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3편만큼은 모두가 싫어한다고 단정해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아마 시편 23편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장례식 장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성경 구절일 것입니다.
그래서 목가적으로 표현된 이 아름다운 시편의 고백은 많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여기고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편을 암송합니다.
우리가 시편 23편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는
‘과연 이 시편이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시편 22편을 설교할 때,
시편 22~24편의 배열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세 편의 시는 모두 선하신 목자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시들이고, 각각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22편),
-부활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구주께서 선한 목자로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심 (23편),
-승천하사 영광을 받으시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긴 자들에게 상주시는 영광의 목자장(24편)
을 묘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시편의 또 한 부분의 묶음이 24편으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시편 23편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23편은 22편을 통과한 사람들의 찬송이고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선하신 목자를 볼 수 있는 창입니다.
23편에 묘사된 모든 은혜는 중생한 그리스도인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위한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4)
시편뿐 아니라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많은 은유들이 나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
이 두 구절에만 7개 이상의 은유가 하나님께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주님 자신도 그렇게 말씀하셨던 ‘목자’라는 은유가 등장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사실 목자는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이미지입니다.
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 외에 실제로 목자를 만나보았거나
목자의 삶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를 쓴 다윗 자신은 목자였기에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한 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추상적이지 않고 모호하지 않은 생생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자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조금 더 나아가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면,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목자라는 직업은 그리 좋은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그 일이 매우 고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철주야 양들을 지켜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늘 양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밤에도 양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물론 (겨울에) 우리에 양들을 넣어두었다면 침상에서 잠을 잘 수 있었겠지만
목자들은 종종 양들과 함께 밖에서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강생하셨을 때에도,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눅 2:8)
그들은 밤에도 여전히 밖에서 자기의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집에서도 사무엘이 왔을 때 막내였던 다윗이 밖에서 양들을 치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제일 귀찮은 일을 막내가 감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집안 분위기가 다윗으로 하여금 후일,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라고 고백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 근거, 다윗이 혼외자 출생이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좀 더 고상하고 편안하고 멋진 직업으로 하나님을 표현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년 시절에 그는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섰을 때 염려하는 사울 왕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삼상 17:34~35).”
자기 목숨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사자나 곰과도 싸우는 것이
다윗이 아는 목자였습니다.
아마 그는 자기에게도 이런 목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하나님이 바로 자기의 목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사울 왕에게 했던 이어지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 17:37a).”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모든 위험에서 건져주신 목자라는 신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불철주야, 쉬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자기를 먹이시고 돌보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만이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광 중에 거하시며 스스로 아무 것도 필요로 하시는 것이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친히 그 천하고 고된 직업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분명히 계시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양에게는 목자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다(:1).
다윗은 다른 시편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시 95:7).”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라는 고백은 우리가 그의 양이라는 고백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목자가 어떤 직업인지를 잘 모르는 것 만큼이나 양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양에 대해서 쓴 것들 중에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무력한 동물이라는 것과 둘째로 어리석은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무력하다는 것은 양이 생존을 위해서는 목자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독립을 선언했다가는 금방 다른 짐승에게 물려죽거나
길을 잃고 초장을 스스로 찾지 못해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Cast sheep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네 발로 서지 못하고 뒤집어진 양을 말합니다.
양이 털이 너무 많거나 살이 찌거나 원래 키가 땅딸막하거나
혹은 암양이 새끼를 배었을 때 이런 경우가 생긴다고 하는데,
일단 양이 뒤집어져서 네 다리로 하늘을 향한 채 누운 상태가 되면
스스로는 일어나지 못한답니다. 이 상태가 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고 만답니다.
참 무력한 짐승이지요.
또 양은 어리석어서 길을 잘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성경은 양의 이런 면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또 양의 어리석음은 스스로 초장을 찾지 못하는 것에서 나타나고
또 찾았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풀을 뜯어 먹는데 뿌리까지 다 뜯어 먹어버려서
초장을 아예 버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장래 먹거리까지도 다 버려놓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점이 얼마나 인간과 닮았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살지만,
뒤집어진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온전하게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뒤집어진 채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잠깐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먹거리와 볼거리와 온갖 쾌락을 위해서 환경을 망쳐놓고 버려놓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양은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절대적으로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푸른 초장이나 쉴만한 물가를 찾아주는 GPS도,
먹을 양식도, 옷도, 안전한 울타리도, 잠자리도 아닙니다.
양들에게는 목자만 있으면 됩니다. 목자가 그들의 모든 필요로 채워줍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한 것은
이런 의미의 고백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늘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2b~33).”
신자는 누구입니까? 나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만 계시면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세상의 모든 역사를 섭리하시며
주권 가운데 다스리시는 하나님, 스스로 모든 것을 충족하시고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당신의 선하심의 영광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목자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이 아름다운 고백시는 자신이 양인 것을 아는 모든 주의 자녀들의 찬송시입니다.
▲2. 양들을 눕게 하시는 목자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2
필립 켈러(Phillip Keller, 1920~97)는 선교사의 아들로 케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후에 목자의 경험을 자기 삶에서 해 본 그리스도인으로서
『양과 목자』(A Shepherd looks at Psalm 23)라는 책을 썼는데,
특별히 그가 거기 쓴 내용은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는 구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양들은 네 가지 경우가 충족되었을 때에만 눕는다고 합니다.
아무 두려움이 없을 때(양은 천성적으로 두려움이 아주 많은 동물입니다),
다른 양들과 불편한 것이 전혀 없을 때,
파리나 기생하는 벌레들의 시달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때,
그리고 배가 완전히 채워졌을 때,
이 네 가지 조건이 다 만족이 되었을 때에만 양은 눕는다고 합니다.
다윗이 목자였는데 이런 양의 특징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고 표현했을 때,
그는 이런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3. 안식을 주시는 목자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은 2절과 3절에 두 번 반복됩니다.
하지만 히브리 말로는 각각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2절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할 때에 ‘인도’는
‘쉬도록 인도한다’ 혹은 ‘물가로 데리고 가서 쉬게 한다’는 의미로
‘안식을 준다’는 뜻이 강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구절에서 ‘인도’는
‘안내한다’, ‘(다른 길로 치우치지 않도록) 가이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2절에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할 때,
이것은 우리에게 쉼과 안식을 주시는 목자를 노래한 것입니다.
실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수고하고 지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주님은 죄로 인해서 쉴 수 없는 우리 영혼에 참된 안식을 주시는 선하신 목자십니다.
▲4.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목자(:3a)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말은 사실 ‘생명’ 혹은 ‘목숨’을 의미하는 히브리 말입니다.
‘소생시킨다’는 말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죽은 영혼, 죽은 목숨에게 생명을 주시는 목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목자를 여기서 다윗은 표현합니다.
앞에서 cast sheep을 설명해드린 대로,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스스로는 돌이킬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죽고 마는 인생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그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스스로 설 수 없고,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영혼을 찾아오셔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고 은혜로 서게 하시는 선하신 목자로 인해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지 않습니까?
▲5.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3b)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신 후에는 전과 같이 길 잃고 죄악 중에 방황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살려놓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살려놓으신 후에는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성령 안에서 성도 안에 내주하심으로써 날마다 우리를 의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길은 바른 길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합당한 길입니다.
양은 어리석어서 길을 잃는 특징이 있는데
이제 선하신 목자 주 예수님을 만난 양들은 이제 의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주께서 친히 양의 목자가 되셔서 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먼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랍고 복된 표현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이 말을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압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이기적 욕망의 추구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을 소원하게 됩니다.
그는 그와 같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며, 그분이 나의 목자가 되심을 인해서
그분을 자랑하고 그분을 높이며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 마음을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에 담아낸 것입니다.
◑3. 미완료 시제: 현재를 넘어 장래의 은혜로!
본문에 나오는 동사들의 시제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인도하시는도다(2)’,
‘소생시키시고(3)’, ‘인도하시는도다(3)’ 그리고 물론 뒤에도 동사들이 계속 나옵니다.
이 히브리 시제는 현재로도 번역이 가능하고 미래로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 번역을 비교해보면 어떤 성경번역은 현재로,
또 어떤 것은 미래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시제는 사실 ‘지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동사 표현들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것인데,
과거에 대한 감사, 현재에 대한 만족, 그리고 장래에 대한 확신이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잘 나가는 어느 한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과 영원히, 과거와 현재에 언제나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모든 두려움과 불화, 성가심과 궁핍함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사
좀처럼 편안하게 누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데리고 가셔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시는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주님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신대로(요 10:11),
그리고 시편 22편에서 예언한 그대로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신자의 참되신 선한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4.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이런 선하신 목자를 모시고 살아가는 양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들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말입니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장래에 일어날 일을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양이 있다면
그것은 건방진 양일 것입니다. 주제를 모르는 태도입니다.
양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선하신 목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를 바라보면 됩니다. 목자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그분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보이면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목자로 인하여 염려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이로 인해 지금과 영원히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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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신 목자 2 시23:1~6 06.06.2014
◑1. 신앙은 관계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편 22편에 예언한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그 피의 값으로 신자들에게 가능해진 고백입니다.
그래서 23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제로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어떤 신자들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양이 얼마나 무력하고 어리석은 짐승인지를 살펴보면서
동시에 양에게 선한 목자가 있다는 것은 모든 조건의 충족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양에게는 선한 목자만 있으면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충분한 만족을 얻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신앙은 양과 목자의 관계와 같은 관계를
신자가 그리스도와 맺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목자가 되어주시고,
신자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그가 어디로 이끄시든지 따라가며,
어디로 이끄시든지 자족하면서 그분의 선하심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목자시라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그분의 성품과 능력을 더 알려고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이전에는 유익을 주던 다른 모든 것을 도리어 해로 여긴다고 했을 만큼
신자는 그리스도만 계시면 되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이런 관계라는 것을 본문은 가르쳐줍니다.
◑2.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성도(: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
이 구절은 임종의 자리에 있는 성도들에게 특별히 많이 읽혀지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종을 앞둔 성도를 위한 말씀이라기 보다는
고난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를 위한 말씀입니다.
성도는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평생에 고난을 겪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고난이나 해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해가 있지만 그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성도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납니다.
다윗의 인생에는 그런 골짜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필립 켈러가 말했듯이 높은 고원지대에서 여름 초장을 얻기 위해서
목자가 양떼를 고산지대로 인도하기 위해 주로 골짜기들을 통과하는 긴 여정을
비유한 것인지 모릅니다.
대개 목자들은 여름이 오면 양떼를 고산 지대의 초장으로 데리고 가서 지내다가
가을이 오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시 집이 있는 저지대로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지대로 올라가는 길은 거의 골짜기들을 통과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많은 위험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목자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필립 켈러는 이렇게 씁니다. “목자는 과거 경험을 통해 이리와 곰,
승냥이와 표범 같은 짐승들이 절벽 바위 틈 은밀한 곳에서 노리다가
갑자기 양떼를 덮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갑자기 내린 폭우로 거센 물살이 골짜기를 다라 덮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잘 안다.
또한 바위가 굴러 떨어지거나 산사태 혹은 눈사태가 나거나
이 외에 양들을 죽게 하거나 상하게 하는 자연 재난들에 대해서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골짜기가 양떼를 고지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도 안다.”
물론 우리의 선하신 목자가 되신 주님께서는 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기 양떼를
보호하실 수 있는 전능한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단지 양떼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불리는 곳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은
이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1. 겸손의 골짜기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두 개의 골짜기를 묘사합니다.
겸손의 골짜기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겸손의 골짜기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는 선하신 목자께서
양떼들을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한 가지 목적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크리스티아나와 일행들이 겸손의 골짜기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목동을 만났습니다.
그 목동은 매우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주 순박하고 복스러운 소년이었는데,
그가 부르는 노래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자는 떨어질 염려를 하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자는 교만함이 없네.
겸손한 자는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리.
나 가진 것 많든 적든 이제 나 만족하겠네.
주여, 제가 더욱 만족하옵는 것은 당신이 저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 가득 지고 순례길을 가는 자여,
이 세상에선 보잘것없더라도 이후에 세세토록 복 받으리.」
선하신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심은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시려는 선한 의도 때문입니다(신 8:2).
여기서 우리의 믿음은 연단을 받습니다.
▲2. 친밀함의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겸손의 골짜기이면서 또한 친밀함의 골짜기입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는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영어 성경만 보더라도
앞의 내용과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목자를 3인칭으로 표현하다가
4절부터 2인칭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는 ‘주’라고 되어있지만 영어로는 ‘you’라고 되어있고
원문이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2절과 3절에서 ‘그가’라는 3인칭으로 표현되다가
4절과 5절에서는 2인칭인 ‘주’(우리말로는 ‘당신’이 2인칭 존칭이 아니기에
다윗이 목자이신 주님을 직접 부르는 표현으로 ‘주’로 표기됨)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1~3절은 마치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선하신 목자되신 주님을 자랑하는 듯 하지만,
이제 4절부터는 친밀함을 가지고 직접 주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여름에 고지대의 초원으로 가기 위해서 골짜기를 지나는 길은
길고 고달픈 여정이기는 하나 양들과 목자와의 친밀함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지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양떼가 전적으로 목자와 함께 지내는 시기라고 합니다.
양들은 목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밤낮 목자의 보살핌을 받는 시기입니다.
4절에서 2인칭으로 주님을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친밀함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다윗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과의 깊은 친밀함을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4절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리스도를 자기의 목자로 모신 양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신자에게
이 고백은 얼마나 힘이 있고 가슴 깊은 데서 흘러나오는 고백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사실 친밀함의 골짜기입니다.
◑3.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안위(:4b)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고대 근동의 목자들은 보통 지팡이와 막대기 두 개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지팡이는 양들을 인도하는 장비이고 막대기는 양들을 공격하는 맹수들과 싸우는
무기라고 구분해서 보는 학자들도 있고,
이 두 가지가 용어상으로는 서로 혼용된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위의 설명과 같이 양을 돌보는 것과 짐승을 공격하는 것,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먼저 양들을 돌보는 것인데 여기에는 양들을 징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무리를 이탈하거나 독초를 먹으려고 하거나 위험한 데로 가려고 할 때,
목자는 지팡이로 그 양을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또 지팡이로 목자는 양을 살피고 수를 셉니다.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레 27:32)”고 했는데,
양들이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지난다는 것은
목자의 다스림과 돌봄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수를 세다가도 목자는 그 지팡이로 털을 헤치고 몸에 병이 있는지를
검사하기도 합니다. 양들은 풀을 먹기에 바빠서 옆이나 위를 보지 못하고
땅만 보고 가다가 종종 가사덤불 속에 털이 꼬이면서
갇혀 꼼짝을 못하는 일들이 생기는데
이 때도 목자는 지팡이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양을 꺼내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목자의 지팡이는 양들을 돌보는데 매우 다양한 용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물론 양들을 공격하는 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싸울 때에도
그 끝이 아주 거칠고 딱딱한 막대기를 이용하게 됩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목자의 이런 지팡이와 막대기는 실로 위로의 도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운 돌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주권과 은혜로운 돌봄을 신뢰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라도
여전히 주님의 주권과 은혜로운 돌봄을 인하여 위로를 충만히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내 잔이 넘치나이다” (:5)
모든 신자들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본향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와 영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다윗은 인생에서 수많은 원수들을 만났습니다. 원수들은 다윗을 조롱했고 비웃었습니다.
이제 선하신 목자께서는 다윗의 생애의 궁극에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에게 진수성찬을 차려 주실 것입니다.
승리한 왕이 자기를 대적했던 원수들을 사로잡아 놓고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그들 앞에서 승리의 진수성찬을 받는 것과 같은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시고 (포도주)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5절에 나오는 세 가지, 진수성찬과 기름과 포도주는 시편 104:15에도 함께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선하신 목자는 신자들의 인생을 이 세 가지로 축복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우리의 물질 생활에서 모자람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가장 적절하게 베풀어주시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누리지 못할 때가 있었을지 모르나,
다윗은 결국에는 선하신 목자인 주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대접해주실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표현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고백입니까?
인색하게 조금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풍성하시고
후히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성품이 얼마나 분명하게 표현된 고백입니까?
다윗은 이런 주님을 자기의 목자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주님을 아십니까?
이런 주님이 여러분의 목자가 되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정녕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와 주님이 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잔이 넘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기쁨의 잔이 넘치게 되면
그것이 우리들 주변의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선하신 목자 주님께서 그 잔을 넘치게 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서 쓰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해야지”하는 결심과 의지의 문제에 앞서, 내가 그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내가 그런 은혜를 주시는 선하신 목자 주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내가 그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추적하는 인생(6a)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6a
존 파이퍼는 6절을 설명하면서, 마치 경찰차가 빨강과 파랑색의 쌍불을 켜고 추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신자의 평생을 추적한다고 했는데,
아주 적절하고 가슴에 와닿는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누가 경찰차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 모든 신자들의 인생을 추격하는데
누가 과연 이 하나님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인생은 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붙잡힌 바 되게 될 것이고,
그 때 비로소 참된 자유와 안식을 목자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따른다’는 동사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냥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잡기 위해서 ‘추격한다, 뒤쫓는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얼마나 경험하고 사는가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선하신 목자가 되시는 주님은
반드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잡아내실 것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신자는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6.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b).”
언젠가 우리 인생의 여정은 끝이 날 것입니다. 그날을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났지만,
이것은 여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푸른 풀밭이나 쉴만한 물가에서 영원히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일 뿐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는 다 본향인 아버지의 집에 이르게 될 것이고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집에 이르기까지도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고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선한 목자’가 설교 주제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성도에게는 영원한 안식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시편 92편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 92:13~14).”
목자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인생은 반드시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계시록은 마지막 환난 때에도 주님은 믿는 자들의 목자가 되사
그들을 보호하시고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6~17).”
◑7.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만을 쳐다보십시오.
양은 제 몸을 스스로 돌볼 수 없는 동물입니다.
어떤 가축보다도 사람의 세심한 보살핌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동물입니다.
필립 켈러는 자신의 목자 경험으로부터 이런 말을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들에서 나를 보는 것만큼 양들을 진정시키고
안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인이요, 목자요, 보호자가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은
다른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평안을 양들에게 주었다. 이것은 낮이나 밤이나 매한가지였다.”
양들 사이에는 쉼없이 경쟁하고 적대하는 알력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도 똑같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양들은 그렇게 서로 불화하고 싸우다가도
목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이내 어리석은 경쟁과 싸움을 그치고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 필립 켈러는 말합니다.
우리가 목자를 바라보는 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싸울 일도, 경쟁할 일도, 불편한 감정으로 뒤틀어지는 일들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 계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양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되셨고
유월절 어린 양으로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선하신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께 우리의 신뢰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기도해 보셨습니까?
“주님, 제가 주님의 양이어서 그리고 주님께서 저의 목자가 되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앞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라는 이 복된 사실을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친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