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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국인교회 최황규 목사 간증

LNCK 2024. 8. 21. 10:31


▣ 중국 선교 관련글 모음                     <간증 모음>

서울중국인교회 최황규 목사 |새롭게하소서 - YouTube

 

서울 중국인교회 최황규 목사 간증                 

※서울 가리봉동에, 한국 목회자가 세운 최초의 중국한족교회, (서울중국인교회)
그런데 그 교회당을 그 교회 중국인 성도들이 헌금해서 세웠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정말 쉽지 않은 경우인데요.
마지막 단락 '◑서울에 '한족 교회'를 세우게 된 사연'을 읽어보세요.

.......................................

◑최황규 목사의 성장 과정

(진행) 서울 대림동에 가면 중국분들이 많이 계시다고 하는데 얼마나 사시는 것 같아요? 
제가 일일이 세워보지 못했지만, 대림동에 차이나타운이 있으니까 
조선족과 한족들 합쳐서 한 2만 명 있지 않을까요? 

정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면서 한국을 방문하시고 또 정착하시는 중국인들이 많은데 
보통 한국 사람이면서 중국에 국적을 두신 분들, '조선족'이라고 하시죠. 
그런 분들이 국내에 전체로 한 70만 명 정도 되고요. 

본토 중국인을 일컫는 '한족'이 한 30만 명 정도, 
도합 우리나라에 한 100만 명 정도의 중국인들이 계시다고 합니다. *2016년 상황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데요. 사실 그분들이 멀리 계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우리의 이웃이 됐고,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실 분은, 이렇게 한국에 있는 조선족과 한족들을 위해서 
열심히 앞장서서 그들의 인권과 또 전도, 양육을 위해서 노력하고 계신
최황규 목사님이십니다.

많은 중국인들이 이분을 '우리들의 친구, 중국인의 친구'라고 호칭한다고 하는데요. 
그 주인공을 지금 만나보시죠.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코리안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건너온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 
이곳에 가정폭력, 임금체불 등 한국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중국인을 위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최황규 목사가 있습니다. 

최황규 목사는, 1999년 중국 난민과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국내 체류 중인 중국인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고  
2003년 교회를 개척하며 본격적으로 조선족과 한족을 섬겨왔습니다. 
(*한 사람 전도가 중요합니다)

 

때론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때론 관심 밖으로 외면당했던 중국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넨 한 사람, 중국인들의 아빠 목사, 최황규 목사를 만나봅니다. 
최황규 목사님,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최목) 저는 1999년부터 우리 중국인 조선족과 함께, 또 한족과 함께 사역을 해온 
서울중국인교회 최황규 목사입니다. 

(진행) 제가 듣기로는 목사님의 어린 시절 형편이 좀 어려우셔서 
그래서 중학교 진학하기도 힘드셨다고... 

(최목) 저희 아버지는 여주에서 큰 땅을 소유한 지주였고 한학자였는데 
제일 큰 형님이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나와서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통한 민족 해방, 민족 통일을 꿈꾸고 월북했습니다. 

졸지에 우리 집안이 완전히 빨갱이 집안이 돼서 
그때는 그렇게 가족 하나만 월복해도, 
이후에 625 전쟁이 발발해서 인민군의 학살이 있었으니까, 

여주에서 '빨갱이 집안은 다 죽여야 된다'고 들끓었죠. 
그러니 아버지가 의정부로 숨어들은 거죠. 
그러시다가 제가 5살 때 돌아가시니까, 집안이 갑자기 주저앉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저희들 키우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죠. 

제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야 되는데, 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거예요. 
친구들은 다 가는데... 그래서 참 앞이 캄캄했었는데 
그 당시 시골에 성결교회 한 목사님이 계셨는데, 
제 소식을 듣고 저희 집에 오셔서, '정부 인가는 없지만, 미션스쿨이라고 있다. 
그래서 농업기술학교, 거기 가서 공부할 생각이 없느냐?' 

저는 정말 감격이었죠. 공부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미션스쿨 농업기술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됐습니다. 
그 목사님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교모도 다르고, 모든 게 다르니까 친구들이 저를 좀 놀리기도 했는데요. 
저는 너무 공부하고 싶기 때문에, 공부를 최선을 다해서 했습니다.

(진행) 그럼 그 시절에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최목) 저는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성탄절에 교회에 가면 
사탕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그런다고 해서, 몇 번 따라간 적이 있었는데, 
중학교가 미션스쿨이니까, 매일 예배드리고 성경 보고 하다 보니 
그때 제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싹이 텄고,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의식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중학교 때부터 그래서 매일 기도하고, 성경 보고, 공부하고...
굉장히 목사님 말씀대로 잘 따랐죠. 
목사님이 '기도부터 하고 공부하고, 성경부터 읽고 공부해라'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성경을 제가 굉장히 많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 성경을 26번을 읽었어요. 
사실 10대 때 그렇게 읽기가 쉽지 않잖아요. 목사님 말을 잘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과에도 장학생으로 들어갔고요. 
그 장신대 신대원도 수석으로, 장학생으로 이렇게 다녔죠. 

제가 비인가 중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검정고시를 통과해서, 경기 북부 최고 명문인 의정부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반대학에 가서, 직장 생활을 해서 돈을 벌어서 
기울어진 가정을 돌봐야할 형편이었는데, 
 
그런데 당시 저는 그 당시 인생의 절대자인 하나님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를 진학했습니다. 

나중에 같이 신학교를 다녔던 친구들한테는 
'교수를 해야할 자네가, 왜 지금 중국인들하고 뒹굴어?'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시는 분들이, 유학 가서 공부하고 나서, 학자가 되고 교수가 되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그런 얘기를 지금도 가끔 듣곤 해요.

(진행) 그런데 반전입니다. 이렇게 공부 잘하시고, 신학교 수석 입학을 하셨던 
최목사님께서 지금 이렇게 훌륭한 사역을 하시지만 
신학교를 들어가자마자 엄청난 방황을 했다니... 믿을 수가 없는데요. 왜 그러셨어요? 

(최목) 저희 장로회 신학대학이 신학적 입장에서 중도입니다. *신정통주의
보수와 진보를 다 균형 있게 보는 신학교인데, 
제가 장신대 1학년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예를 들어서 창조 이야기라든가, 노아의 홍수가 고대 중동 문학에 영향을 받았다... 
이런 것부터 교회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얘기를 저도 처음 들어보았는데요. 

그런 게 슬슬 들어오니까, 아주 근본부터 폭탄 맞듯이 맞고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초토화된 거예요. 완전 폐허가 됐고, 너무너무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방황을 아주 너무너무 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졸업이 늦어지게 됐죠.
휴학도 하고, 복학도 하면서, 공부한 횟수는 9년 동안 
학부, 신대원, 대학원 9년을 공부했어요. 보통 7년 하는데, 저는 9년만에 졸업했어요.

하여튼 계속 제 마음 속에는 갈등과 방황이 있었다는 거죠. 그렇죠. 
이 내적인, 신학적 갈등이라는 게, 하루 이틀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진행) 그러면 신대원 졸업 훌에 바로 목회의 길을 가셨나요? 

(최목) 사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저를 성찰해 봤을 때 
제 안에 뭐 확연히 하늘이 열린 듯한 깨달음이나 
내면의 충만한 확신 같은 것도 없었고, 
신학적 질문은 계속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그래서 과연 제가 이런 상태로 목회를 할 수 있겠나? 
일단은 확신이 100 % 들어야, 그래야 전도자로 살 텐데... 
그래서 '나는 목회를 하면 안 되겠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이 길을 가지 말자' 해서 좀 많이 괴로웠죠. 

9년을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확신이 없는데, 목회를 시작해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양주군 유양리 시골로 내려가서, 초야에 묻혀서 번역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영어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는 거였는데, 당시에 번역 수입도 좀 괜찮았습니다. 

(진행) 그러면 그때는 오히려 행복하셨습니까? 

(최목) 그런 면도 일면 있었죠. 고민 안 해도 되고, 목사 안 해도 되니까, 
시골에 묻혀서 봄이 되면 냉이도 캐고, 고들배기도 캐고, 
가을 되면 밤도 줍고, 근처에 저수지에서 산책도 하고... 아주 정신적으로 편안했죠... 

◑서울에서 중국인 사역을 하게 된 계기

(진행) 지금 이제 최황규 목사님은 중국인과 함께, 뗄 수 없는 사역을 하고 계시는데 
아주 결정적인 계기가, 듣기로는 어떤 중국인 한 분을 만남으로 인해서 
목사님이 완전히 바뀌는 그런 계기가 있었다고 하던데... 자세히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최목) 1990년대 후반에 북한 동포들이 한 300여 만이 굶어 죽었고, 
탈북자들의 고통이 좀 아프게 알려지고 그럴 때, 
저는 당시 양주에서 지내고 있었죠. 

그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북한인권 난민국제회의>라고 하는 게 열렸어요.
전 세계 인권운동가들이 서울에 모인 국제회의가 있었어요. 
제가 참석해 보니, 실제로 돕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관심 차원이었어요. 

그 회의에, 한국으로 탈출한 중국 반체제 민주인사가 한 명 왔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완전 고립당한 겁니다. 

그래서 국제운동가들을 향해서 '자기를 좀 살려달라'고 했는데, 
이미 회의가 끝나고 나서 온 거예요. 그래서 한국에서 고립됐죠. 

우리나라 정부가 중국과 외교관계, 중국 눈치도 보고 부담을 느끼고 있어서, 
시보 라는 사람을 누르고 있었죠. 숨도 못 쉬게 하고 있었고, 

저는 운동권도 아니고, 인권운동 해본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민주화 운동하다가 서너 차례 감옥에 간 분들도 찾아뵙고 
'이분(시보 선생)을 살려주십시오. 제가 힘이 없습니다'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거절당했어요. 
천주교, 불교, 개신교 인권위원회를 찾아갔는데도 거절당했고, 
그래서 저도 고립당했어요. 

한때는 이분하고 살면서... 그걸 보고 주변 사람들이 저보고
'미친 짓 한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냐?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바보다' 뭐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이 '저 친구 위험한 일을 하는 인간이다' 하면서 제 주위를 슬슬 떠나기도 하고... 

저희 집에서 저도 고립당하기도 했고, (*감시를 당한 모양) 
그래서 국제사회에, 즉 스위스의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 본부로 연락을 취해서 
시보 선생을 보호하고, 유엔이 인정한 난민이 되도록 했습니다. 

시보 선생이 그 당시에 만약에 한국에서 추방을 당했으면 
그분이 중국으로 송환되었으면, 그 분이 (민주적인) 글을 썼기 때문에 
평생 감옥에 있거나, 사형당할 수도 있는 분이었죠. 

그 일을 계기로, 중국인을 돕는 그런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시보 선생을 도울 때, 가슴이 따뜻한 김의정 목사님이 
당시에 서울 조선족교회 부목사님으로 계셨는데,
그래서 자연히 서울 조선족교회와 제가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조선족 동포가, 불법 체류자로서 이제 막 추방당하고 그랬었잖아요. 
그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니, 김의정 목사님이 
'최황규 목사, 나와 같이 좀 사역하자' 

제가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왜냐면 제가 목사의 길을 갈 자격도 안 되고... 
그래서 몇 번 거절하다가, 중국인들을 볼 때마다 마음에 부담이 좀 되더라고요. 
'저들을 이대로 놔둬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많은 생각 끝에, 고민 끝에, 조선족의 고난에 제가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진행) 그럼 처음 그렇게 목회를 하신 곳이 어디예요? 

 

(최목) 목사라고 하는 직임을 갖고 제대로 한 거는 
서울 조선족 교회에 가서 처음 하게 됐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시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많은 중국인들을 보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얼떨결에 이렇게 원치 않게 끌려 나온 감이 좀 있습니다. 

이제 서울 조선족교회 우리 동포들이 당시에 상당수 불법 체류 상태였잖아요. 
(당시는 조선족, 고려인들이 한국 체류비자 받기가 까다로웠음. 요즘은 비교적 쉬움)

그러니까 2백만 조선족 동포가, 한국정부 고국에 대한 원망이 굉장히 컸습니다. 
당시에 법무부 출입국 직원이나 경찰에 잡히면 다 그냥 무조건 추방이니까 
고국에 대한 원망과 한이 많았죠. 

그래서 아마 한국 사회에서, 그들 중국인들에게 
가장 처음으로 따뜻하게 손길을 펼쳐준 게, '조선족과 함께하는 전국노래자랑'이었습니다. 
추석 때 그때 1만5천여 명 정도의 동포들이 모였는데,
서울 조선족교회에서도 대표로 누가 나가서, 
'우리 교회가 여러분들의 형제 자매입니다'라는 말을 해 줘야 했는데, 
다른 교역자들이 아무도 나가지 않는 바람에, 제가 대표로 나가서 가요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울 조선족교회'의 존재를 알린 것이죠.

PD가 찬송가를 부르면 안 된대요. 좀 익살스럽고 간드러지게 불러야 된다고 해서,
우리 조선족교회의 예술단 출신 아주머니한테 부탁해서 
그분은 백댄스하고, 저는 가요를 부르고, 
그래서 '조선족은 우리 형제자매다' 라는 걸, 알리러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망가졌지만 말입니다. 

(진행) 목사님이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서 가요를 부르시자 반응이 어땠나요? 

(최목) 조선족 동포들은 열광적이었죠. 끝나고 나니까 동포들이 저보고
'목사님 옛날에 놀아봤죠?' 그러더라고요. 

이렇게 우스운 일들도 있었지만, 사실 사역을 하시면서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조선족 동포가 불법 체류 상태니까 

그 합법 체류를 만들기 위해서 
서울 조선족교회 서경석 목사님이 앞장서셨고 
부교역자로 같이 함께 동참을 했고, 그 외 많은 분들이 
그들이 합법적인 체류를 위한 운동을 하셨어요. (2000년대 초에 통과, 합법적 길이 열림) 

그러나 그 전에, 조선족이나 고려인들은, 불법적인 신분으로 
가슴 졸이며 살아야 했었죠.

△제가 그 서울조선족교회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밀입국했던 조선족 동포가, 밀입국 비용을 다 갚지 못해 가지고 
브로커한테 그냥 온몸을 두들겨 맞아서, 거의 반죽음 상태로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가지고 저희 교회로 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119를 불러서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119가 오고 나서 조금 있다가 순찰차도 함께 오더라고요. 

저는 몰랐어요. 폭행으로 119에 신고되면, 112 순찰차량도 자동으로 같이 온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경찰이 수갑을 탁 꺼내더니, 저기 숙소에 누워있는 동포를 체포하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 당시 서울 조선족 교회에는 숙소가 있어서, 50여 명의 동포들이 기숙하고 있었는데 
다 불법 체류자들입니다. 경찰차가 사이렌 앵앵 하면서 딱 와서
그 중에 한 명(맞은 사람)을 체포하겠다고 하니까, 다들 얼마나 놀랐겠어요? 
동포들이 하얗게 질린 거죠. 

'밀입국 동포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몽땅 다 잡아가는 거 아니냐?' 
그럴 수 있죠. 

그래서 제가 교회 대문을 막아놓고, 경찰하고 대치를 했죠. 
'저 동포는 못 잡아간다. 잡아가려면 나를 잡아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 동포를 잡아가려면, 나를 밟고 가라' 
제가 결사항전으로 저항했어요. 교회로 피신 온 사람을 순순히 내어줄 수는 없었죠.

'제가 수갑에 채이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저 동포는 보호하겠다. 지켜야겠다.' 
그래서 한 30분을 대치하다가, 경찰이 상부하고 의논하더니 
'모든 책임을 그러면 당신이 지시오!' 그러면서 물러섰죠. 

그래서 이제 그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분은 지금 사실 맞아가지고, 피가 나고, 치료가 필요한데 
전신이 시커멓게 멍들었죠. 

그 안에 계셨던 50분의 다른 동포들도 굉장히 놀랐어요. 
처음에는 자기들도 덩달아 잡혀갈까 봐 놀랐는데, 
저는 그때 사생결단으로 저항을 했으니까 
그리고 그 50여 명의 동포들 다 저를 지켜 봤잖아요. 

'최황규 라는 사람이 한국 사람인데, 우리를 위해서 저렇게 확 자신을 던지는구나!' 
하는 걸 보면서 신뢰가 형성이 됐습니다. 

그 상황에서 사실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아무리 목회자라도, 법과 공권력이라는 게 또 있는데, 
그거와 맞서서 조선족 동포들 편에 서 주었거든요.

당시 제 별명이 '대장군'이었습니다. 조선족 동포들이 저를 '우리의 대장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정말 진심으로 우리를 위해주는구나..' 하면서 저를 신뢰한 거죠.

◑여러 가지 어려운 사역들

(진행) 당시에 조선족 가운데 찾아오시는 분들이 대개는 신분이 어려운 입장인데, 
오갈 데가 없으니까, 또 다치거나 아프면 
정말 마지막에 교회를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겠습니다. 

그러면 이분들이 병원으로 결국 가야 되잖아요. 
그러면 보험도 되지 않고,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병원비라든지.. 치료하는 일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최목) 당시는 동포들에게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됐습니다. 
지금은 이제 합법적 제도가 도입돼서 의료보험도 다 되지만, 당시는 그런 제도가 없었죠. 

그래서 병원 입원, 중병에 걸린 동포들, 암 걸린 동포들, 사고 난 동포들을 
병원에 입원을 시키려면, 그렇게 입원시키기가 어려웠어요. 
최소한 입원 보증금 5백만 원을 납입해야지만 입원을 시켜줬어요. 

그런데 일일이 5백만 원을 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입원 보증을 서고, 
또 치료비가 없어서 어떤 분은 응급실에다 데려다 놓고 
간호사님한테 '제가 잠깐  화장실 갔다 오겠습니다' 하고 도망간 적도 있었고... 
어떻게든 입원을 시켜야 했으니까요. 그런 일들이 많았었죠. 

하도 동포들을 병원에서 안 받아주니까요. 
옆에 보호자가 있으면, 오히려 보호자한테 자꾸 5백만 원을 내라고 하니까,
제가 낼 돈도 없고.. 교회도 낼 돈이 없고.. 치료는 받아야겠고... 
일단 병원에 데려다 놓으면, 병원에서 어떻게해서든지 치료는 해 주죠.

(진행) 그런데 그렇게 병원비는 둘째치고, 형편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보증을 그렇게 많이 서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최목) 당시에는 동포들이 불법 체류자라서, 핸드폰도 개통이 안 되고, 
통장도 개통이 안 되고, 또 현장일 어디 가면 합법 체류자만 써야된다고 그러니까 
'제 주민등록증 복사 좀 해달라, 등본 좀 복사해달라' 그러면 
원하는 대로 다 해줬습니다. (최목사 신분으로 일하고, 전화개통 했다는 뜻)

또 급한 돈이 필요하니 돈 좀 빌려달라고 해서, 
얼마 돈을 마련해서 빌려 줬는데, 또 안 갚고 달아나기도 하고... 
뭐 이런 일들이 많았죠. 

지금은 정말 과거의 에피소드처럼 얘기하지만 
근데 저는 조선족 사역을 할 때 
제 자신을 다 그냥 우리 동포를 위해서 바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일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분노하거나 화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한족 교회'를 세우게 된 사연

(진행) 처음에는 조선족을 위해서 목회를 하시다가, 
이제는 아예 중국인 한족을 돕는 목회자가 되셨습니다. 
왜 중국인 한족을 돕는 목회를 하시게 된 건지요? 

(최목) 우리 조선족 동포들이 '동북 삼성'에서 살면서  *랴오닝省, 지린省, 헤이룽장省  
주류 민족인 한족으로부터 굉장히 차별을 당했습니다. 
이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심지어 일제시대 때는, 만주에 사는 우리 조선인을 향해서 
한족들이 '너희는 일본의 개들이다.' 그래서 집단 학살한 적도 있었고, 
또 농사를 지으면 한족들이 그걸 뺏어가요. 

그래서 조선족이 항의를 하면, 
낫으로 조선족 동포의 목을 잘라 죽이기도 했다고 해요. (극단적인  일이겠지만)
심지어 '조선 놈이 조선 땅에 살지, 왜 중국 땅에 사냐?'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조선족, 한족이 다 같이 한국에 오니,  
조선족들이 한족들을 향해서 '너희들도 한번 우리처럼 당해봐라' 그게 생길 때도 있겠죠. 
민족 감정으로...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관계가 역전된 거죠. 

제가 봤을 때, 한족은 마치 한국인한테는 '되놈' 소리 듣고, *'때놈'의 표준어
조선족한테도 또 눌리고 멸시당하고... 

'이거 안 되겠다...' 한족들은 목자 없는 양 같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들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게 됐습니다. 
그래서 정말 '한족들을 위한 첫 교회'를 서울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리봉동에, 당시 제가 돈이 없어 가지고, 쪽방을 하나 사무실로 쓰고, 
예배당도 없이 시작을 했습니다. 
그게 2003년도 9월에 시작했습니다. 

(진행) 그럼 지금 교인이 어느 정도 되시나요? 

(최목) 저희 교회를 거쳐간 한족은 그동안 연인원 한 5천여 명 되는데, 
다 이렇게 도움받고 가시는 분들이죠.

현재 교인들은 한 100여 명 정도 되는데, 주일날 출석하는 교인들은 30~50명이죠.
왜냐면 이분들이 주일마다 쉬지를 못하고, 일을 나가거든요.
이렇게 좀 작은 공동체입니다. 

(진행) 그런데 놀라운 거는 정말 그 중국인들이
스스로 헌금을 해서 또 교회를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최목) 가리봉동이 이제 재개발 계획이 발표돼 가지고 
저희가 사무실을 이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는 사실 수중에 돈도 없었고, 그래서 대림동에 예쁜 예배당이 하나 나왔어요. 
한국교회였는데, 보증금, 시설비 등등 다 합해서 7천6백만 원이 들었어야 해요. 

근데 저는 뭐 안 되는 거였죠. 돈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중국인 교인들과 함께 한번 구경을 갔었습니다. 
근데 저한테 덕담으로 이렇게 말해요. 
'목사님, 걱정 말라. 우리가 하겠다' 여러 명이 와서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믿어지지가 않았죠. 
'목사님, 걱정 말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저는 그게 그저 덕담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뭐 말이라도 고맙다'고 그랬는데, 
한 주간이 지나니까, 한족 교인들이 전체가 저를 찾아오는 거예요. 

'우리가 할 말이 있다.'   *중국어에 한국어같은 경어체 거의 없음
'무슨 말이냐?' 그랬더니 
'걱정 말라'는 거예요. 
'목사님이 우리를 한족을 위해서 일하다가 뭐 모욕도 당하고 수치도 당하고 
뭐 그러다 보니까... 건물구입비는 우리가 감당하겠다.' 

그렇게 해가지고 우리 교인 중국인 성도들이 6천만 원을 헌금했어요. 
그분들한테는 큰 돈이잖아요. 

그 외 부족한 건 도림교회에서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정말 그분들이 모여서, 십시일반 헌금해서 교회가 세워진 거예요. 

다들 어렵게, 힘들게 일하는 분들에게, 얼마나 귀한 돈이에요? 
저는 놀랐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한국의 국내 선교 역사상 이런 일이 처음이다!'
이런 얘기도, 중국 선교를 해봤던 분들이 하시더라고요.       

(진행) 말씀하신 대로 정말 중국인들을 위해 사역하시면서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셨는데,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최목) 2008년도 북경올림픽 때, 성화봉송을 한국에서도 했잖아요. 
그때 시민단체들이 '중국은 인권이 없는 나라인데 
어떻게 중국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느냐?' 하면서 시민단체들이 반대했을 때, 

1만여명 정도의 중국인 유학생들이 규합해서, 각목 들고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폭행하고, 호텔까지도 깨부수고... 
그렇게 난동을 부리자, 한국인들이 열이 났죠. 

그때 저희 교회 담벼락에 "떼놈 교회 문 닫아라. 불 질러 버리겠다. 
떼놈 교회 목사 양반, 민족 반역 행동 하지마라" 
뭐 이런 글도 적어 놓았고, 
성난 시민들이 교회 문을 확 걷어차고 들어와서 폭행을 하려고 했었고, 

또 중국인들이 한국인하고 결혼하잖아요. 
남편들이 심하게 아내를 때려가지고, 도망가면 우리를 찾아와요.
그래서 저희가 보호하고 있으면, 남편들이 알고 교회로 찾아와요. 죽이겠다고... 

제가 여러 차례 맞을 뻔도 했는데,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예배가 끝나고 한 20명의 중국 여성들이랑 여전도회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자기 아내를 그렇게 때려놓고, 자기 아내를 찾으러 왔는데, 
그 아내가 우리 교회에 피해 있었어요. 

그러니까 남편이 예배당에 들어와서 육두문자를 써서 고함을 지르는 거죠.
"이년, 네가 어디를 도망가? 너 이년 여기 있었네. 
이년을 이렇게 도와주는 목사 XX" 하면서 

갑자기 나한테 달려들어서 무지막지하게 저를 때리려고 했는데 
그때 저는 20명의 중국 여성들이 다 도망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20명의 중국 여성들이, 그 남편의 팔을 붙잡고, 몸을 붙잡고 늘어졌어요.
그러니까 그 남편이 이 중국 여성들을 바닥에 내동댕이 치면, 
또 이 여성들이 울면서 다시 달라붙어 팔 잡고 다리 잡고 늘어졌어요.

중국어로 "뿌싱 뿌싱" (안 돼, 안 돼) 하면서 달라붙으니까 
약 30분을 몸싸움 하니까 이 남편도 진이 빠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거기서 안 맞았습니다. 

제가 그때 감동했습니다. 원래 중국인들은 남의 일에 간섭 안 하는 게 하나의 룰이잖아요. 
그런데 저를 지키려고, 목사를 보호하려고, 자기들이 내동댕이 쳐지면서도 또 달려들면서... 
그때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야 이제 진짜 중국교인들과 꽌시(관계)가 형성된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거죠.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감동이었죠. 

◑마치는 말

(진행) 이제 어느덧 중국인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들어와서 
이제는 정말 한 이웃이 되고, 또 한 동포처럼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더 많이 가속화될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 

오늘 이 방송 보시는 많은 분들에게 
'우리가 중국 사람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될까?' 
많은 선입견도 있고, 오해도 있고, 또 그동안 잘 사귀지 못한 그런 부분도 있었는데, 
오늘 방송을 통해서 '우리가 중국인들은 어떻게 대했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경험이 많으시니까! 

(최목) 제가 올해로 한 17년 차 사역인데요.    *2016년
17년 동안 중국인과 함께 이렇게 같이 지냈는데,  *1999~ 조선족사역, 2003~ 한족 사역

일단은 중국인에 대한 은연 중에 우리 한국인의 우월 의식이 좀 있는 거는 현실이고, 
또 그들을 단지 노동자, 종업원으로 보는 의식이 팽배하죠. 

저는 우리 신앙인들이, 기독교인들이 
조선족 동포든, 한족이든, 또 유커(중국인 관광객)든 
단순한 노동자로 볼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해야 할 이웃 또 복음을 전해야 할 이웃으로 보고, 
사랑으로 감싸안고... 그럴 때 복음을 전하는 효과가 크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이들이 한국으로 흘러온 황하의 물결 아닙니까? 
한 100여만 명이 들어와 있는데,  *조선족 70만, 한족 30만, 2016년 상황  

또 전 세계에 황하의 물결이 파도치고 있는데 
이들이 복음을 싣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면 
복음의 불씨를 대륙 전체에 퍼트릴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되고 

또 한국에 사는 100만 명의 중국인들은 한국을 총체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한류의 전도사 역할도 할 수 있고, 
또 한중 간의 어떤 매개, 다리 역할, 가교 역할도 할 수 있고, 
통일의 조력자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는 귀한 집단이다... 그렇게 우리가 통찰해야 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