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된 것을 누리는 삶 | 요일 3:1-3 | 이규현 목사 | 주일예배 | 24.8.18 - YouTube
◈보장된 것을 누리는 삶 요일3:1~3 2024.08.18.
자 우리가 세월이 흐를수록, 어떤 사람으로 되어져 가는가?
어떤 사람은 좀 망가져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더 아름답게 빚어져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인생이 좀 쪼그라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더 풍성해 지는 사람이 있어요.
완성을 향해 가거나, 때로는 그 미완의 상태로 멈춰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이 지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유명한 책이 있죠.
우리 인생에, 두 질문, 두 주제가 있어요.
존재를 추구하느냐, 아니면 소유를 추구하느냐?
내 존재가 더 풍성해져 가는가, 아니면 내 소유가 더 많아져 가는가?
둘은 전혀 다른 인생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소유 중심으로 기울죠.
소유가 많아지면 내 삶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소유는 우리의 삶을 더 편리하게는 해주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불편해도.. 좀 불편한 게 있지만,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존재가 풍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빌4:12~13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죠.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해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의 '존재'를 알려주는 그런 고백이에요.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그 형편, 그 상황이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한다는 거죠.
왜요? 내 존재 자체가, 부유하게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그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나'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형편에 처하던지, 나는 만족합니다.
◑원래 허약하고, 비천하고 가련한 '나'의 존재
여러분, 성경 안에서 인간의 존재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성경 안에서 '인간의 존재는 매우 허약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하나도 예외 없어요. 다 허약합니다.
그게 성경의 인간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약합니다.
자 우리는 가끔 사람을 좀 추앙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좀 추앙하고 싶습니다.
아마 그것은, 허약한 자기 자신에 대한, 대리만족적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인간은 다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겉으로는 대단한 일을 하고, 대단한 지위에 앉아 있고, 대단한 능력을 행하는 것 같지만,
연약한 죄인입니다.
여러분, '죄인' 이라는 말 안에는 많은 게 포함돼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풀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왜요? 자기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존재.. 즉 죄인 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다윗의 예를 들면, 그는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군인들이 다 떨고 있을 때, 그 거인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던
소년 다윗의 이야기는, 진짜 전설 같은 얘기입니다. 근데 실제로 있었던 얘기거든요.
그는 어린 시절에 사무엘을 통하여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게 현실이 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다윗은 성경의 어떤 인물보다도 완전해 보입니다. 그 정도면 잘 살아왔어요.
근데 안타깝게도 오점을 남기죠. 밧세바 사건입니다.
자 사실 이것만 가려주었다면, 다윗의 스토리는 완벽합니다.
사실 권력자들,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스캔들 정도는..
세상 사람들은 덮어 버리면 끝납니다.
근데 성경은 다릅니다.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 치부를 완전히 밝힙니다.
얼마나 드러내는지, 오늘날 우리까지도 다 압니다.
그리고 밧세바 사건에서 드러난 다윗은,
그렇게 맑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 다윗이 행한 죄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매우 교묘하게, 교활하고, 극악무도 하고, 폭력적이고, 잔인해요.
근데 왜 성경은 다윗의 죄를 이렇게 노출하는가? 하는 거죠.
그 이유는, 인간은 완전할 수도 없고, 위대해 질 수도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대단한 존재를 만들고 싶어해요.
여러분, 정치인들이 가끔 하는 공약을 하는데... 보면 와~ 대단해요.
아무도 안 믿지만, 가끔 믿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정치 지도자의 그런 공약대로만 되었다면, 이 세상은 파라다이스가 되고도 남았을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는 깃발을 흔들며 거대 담론을 주장하며,
나라를 위한다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런 사람들 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개인적 삶 하나도 건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웅 본색이 있습니다. 영웅이 되고 싶어해요.
그러나 한 40세가 넘어서면서부터, 내가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면 청년들 말로는 '현타'가 오는 것입니다.
자신 안의 모순을 발견하는 거죠. 내 말에 모순을 스스로 느끼는 거죠.
전에는 남에게 문제가 있으면, 막 비난을 내리 쏟아 부었는데,
내가 문제가 많은 내 존재라는 거죠. 내 존재의 허약함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거죠.
내 한계를 깨닫는 거죠. 내 말에 내가 얽히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뭘 느껴요?
'내가 왜 그토록 쓸데 없는 말들을 많이 하며 살았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나도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데,
내가 누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이(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것, 인간이 쌓아 올린 것, 모든 것은 다 부실한 것들입니다.
◑복음안에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의 존재
여러분, 십자가 복음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뭔지 아십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가, 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거죠. 그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의 신분과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요일3:2절로 보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나타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위 구절 앞 부분에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그랬어요.
자 이것은 우리의 주어진 신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분이 어떻게 주어졌다고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 여러분, 우리가 무엇이 되려고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에 의해서, 그 사랑 안에서 결정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고,
이 '하나님의 자녀' 라는 이 신분은, 누구도 훼손시킬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결정 되어진, 우리의 믿음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거저 얻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격
여러분, 세상에서 보십시오. 어떤 자격이나 어떤 지위를 얻고자 하면
무지하게 노력해야 됩니다.
우리가 뭐 어떤 자리에, 어떤 위치에 올라있는 분들을 보면
그냥 함부로 폄하할 수가 없어요.
그 자리에,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을 지불한 분인 거예요.
저절로, 쉽게 그 자리나 위치에 올라갈 수 없잖아요.
그 지위에 올라가기까지,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돼요.
다양한 경력을 쌓아야 되고, 자격증을 취득해야 되고,
어디엔가 선택을 받으려고 하면, 그럴 만한 가능성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
겨우 도전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너무 어렵게 올라간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그를 폄하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어느 자리에 하나라도, 치열한 경쟁을 하고, 쟁취하는 세상!
무엇인가 나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하면, 사돈의 팔촌까지 다 그냥 끌어들여
나를 증명하려고 하는 거죠.
'우리 집 안에 유명한 이런 사람이 있다. 내가 누구를 안다. 누구를 만난 적이 있다.
누구와 친하다. 누구와 친척이고 동창이다.' 막 그냥 끌어 당기는 거잖아요.
우리는 무엇인가 되리고 그렇게 몸부림을 칩니다.
▲자 그런데 오늘 여기에 요일3:2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있어서,
내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춰 왔는가? No
우리가 어떤 기준에 부합될 만한 자질이 있었는가? No
내 편에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 조그만한 어떤 건덕지가 있었는가? No
그런 게 없었어요.
단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 라고 하는
이 자격과 신분이 주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세상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자격 요건과 비교하면... 정말 놀라운 특전입니다)
사도요한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됨의 지위를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는,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라고 하는 신분이 주는 무게가 얼마나 큰 가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그분의 자녀 됨의 권세가 얼마나 큰 가를, 내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묘미는 뭐냐?
'나에게 주어진 이 특권, 이 지위, 이 자격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 하는 거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는
그냥 사라져버리는, 그냥 빼앗겨버리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보장 되어진 이 지위, 이 자녀 됨의 은혜를..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있어서, 내가 뭐 보탠 게 있느냐?
내가 보탠 게 하나도 없어요. 0.001%도 없어요.
만약에 우리 편에서 조금이라도 요구되는 게 (자격이나 조건이)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질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파리 올림픽을 보면서 얻은 교훈
여러분, 2024 파리 올림픽이 이제 막 끝났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올림픽의 꽃 중에 해당하는 1백 미터 달리기에
금메달과 은메달을 딴 사람의 차이가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난 그거 보고 매우 놀랐어요.
은메달 과 금메달의 차이! 선수들이 전력 질주해서 들어오는데요.
다 1등 같아요. 근데 금메달 과 은메달의 차이가 0.005초 차이에요.
그러니 육안으로는 분별이 안 됩니다. 비디오 판독해서 일등, 금메달을 가려내야 돼요.
1등과 8등의 차이는 얼마일까요? 0.12초 차이예요. 이 정도 차이는 너무너무 미세해요.
그런데 거기에서 자격유무를 따지는 거예요. 금메달과 은메달이 결정되는 거예요.
신분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 작은 차이로!
0.005초 차이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는 겁니다. 세상은 그토록 냉혹합니다.
우리 같으면, '다같이 금메달 따게 해주지...'
'그 손가락 한 치 차이' 그 간격, 그 거리를 판단하기 어려워요.
근데 거기에 무슨 은혜의 시스템이 있는 가? 없어요. 엄격하게 가려내요.
요즘은 정확한 심사를 위해서 비디오 판독을 합니다.
비디오 판독 하기도 힘들어요. 몇 번을 돌려서 봐야 됩니다.
그 판독 순간에 뒤집어지는 거잖아요. 그 신분과 자격이 종종 뒤집어 지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셨어요.
그랬다면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을 사람이, 오늘 여기에 있을까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자 천국 입구에서, 입국 절차를 위해서, 비디오 판독에 들어갑니다.
'아~ 당신은 이런 죄가 있네요. 아직 해결 안 한 죄가 있네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비디오 판독 전까지) 아무도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면,
여러분 어떻게 될까요?
지금도 주일 날 와서 예배를 드리고, 끊임없이 봉사하고, 헌금 하고,
열심히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
뭔가 하나의 결격 사유가 생겨서, 그게 비디오로 스캔해서 그냥 딱 드러나면...
'어 당신은 안 되겠는데요!'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해요? 천국 문턱에서 좌절되는 거죠!
그렇게 모두 (천국에서) 비디오 스캔을 만약 한다면,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워요. 국가 대표가 되기도 어려워요.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안에서 요일3:2,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게
얼마나 대단히 큰 자격, 축복, 은혜인지를 설명하는 중)
어떤 특정한 자격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그 기준을 넘어서지 않으면,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게 '세상'이에요.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붓습니까?
얼마나 많은 핏방울 땀방울 흘리고, 머리를 쓰며 노력을 합니까?
모든 세상의 시스템은, 그 무엇이 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어서 겨우 되는 거잖아요.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는 뭡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주어진 신분,
그것은 우리의 편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거저주시는 은혜로,
이 구원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이 주어졌다는... 이 사실이 여러분은 믿어지세요?
▲여러분, 그리고 한 번 주어진 이 신분은 결코 훼손될 수 없다는 겁니다.
금메달 딴 그 사람은, 또 4년 후에 다음 올림픽 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죠.
또 딸 수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금메달 보유자 신분이 불안해요)
여러분, 사도바울은, 성도에게 이미 주어진 신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3:1~2a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얘기합니다. 은혜!
엡1:4~5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러분, 우리는 뭐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세상적으로 출세 안 해도, 이미 출세 한 사람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려야 되는 거죠.
이것은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누리는 그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진다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사도 요한이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고,
그 자녀 됨을 누리라는 거잖아요.
여러분, '자녀' 라고 얘기할 때는,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있어서 핵심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해결되고,
그 관계가 점점 부유해지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기도로 구하면 응답 받는다'라고 하는 방식으로만
이해한 사람들은, '존재' 보다는 '소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 많이 기도해서, 더 많이 응답 받기를 원하는'
그 방식의 패턴은 '소유' 중심이란 말이에요.
물론 주님께 구하고 응답받는 것이, 기도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게 기도의 전부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그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 깊어 지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 넉넉함이
내 안에도 흘러 들어와서... 내가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내 안에 자족하는 바울의 삶이, 또는 우리 각자 성도의 삶이
성도가, 그 분의 자녀됨 안에서,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안에 내가 거하고 있는' 그 사실만을 확인해도,
내 안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불안이 사라지고, 초조함이 없어지고,
쫓기지 않고, 자유함이 임하고, 평안이 임하고...
내가 아버지의 자녀니까, 그 분과 사귀면서 관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요일3:2
그 자녀 됨의 신분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축복이요, 은혜요, 우리 안에 있는 그 꽉 참이
이 세상의 결핍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그 자녀 됨으로 인하여, 내 영혼은 참된 자유를 누리는
그 역사가, 그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구원 받은 자녀는 .. 미래를 봅니다 (못 보면 못 받은 겁니다)
자 본문 요일3:2절을 다시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장래에)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자 요한은, 지금 현재에서 미래로, 시선을 옮기고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는 연결되어 있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는, 미래의 어떤 시간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장래에 어떻게 될지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러나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이 말은 종말론적인 순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순간이 언제죠? 종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시간관은 뚜렷해요.
기독교의 시간은 미래의 소망을 향해 정확히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의 시간관념은, 그냥 덧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미래를 못 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시간에 방향 표시가 없습니다. 그냥 흐르고 있어요.
어제가 있었고, 오늘이 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이고...
근데 그 시간이 어디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세상은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내가 어디쯤 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냥 하염없이 흘러가는 거죠. 시간의 방향성이 없어요.
그 시간의 목적도 없어요. 그 시간의 시작도 끝도 없어요.
혹자는 시간이 끝도 없이 돈다고도 말해요.
그러니까 시간에 대한 이해가 없고, 시간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시간에 대한 측정을 하지 못하니까
그냥 살아갈 뿐이란 말이에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이 뭔지 아세요?
시간에 대한 이해력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월등히 높아요.
'깨어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간에 대한 이해력이 높다는 겁니다.
시간의 흐름과 방향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시간의 개념이 높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질문을 합니까?
'당신은 몇 살입니까?' ... '나이가 몇 살입니까' 하는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몇 살이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방향도 목적도 없는 공허한 질문이에요.
중요한 것은, '인생의 여정에서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가?' 하는 거예요.
'인생의 긴 여정에,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남은 시간은 얼마냐?' 하는, 시간에 대한 방향을 잡고 있어야 됩니다.
요즘 치매 환자들이 많아요.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안타까움 중에 하나는
질이 낮은 수명의 연장이 많아졌다는 거예요.
그냥 돌아가셔야 될 분인데, 그냥 안 돌아가도록 계속 호스를 꽂아놓아요.
근데 그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진 거죠.
치매 환자들의 특징이 뭡니까? 시간 개념이 흐려져요. 시간 측정을 하지 못해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물으면, 치매환자들은 모릅니다.
'오늘이 몇 월 몇 일이죠?'
치매환자들은 몰라요. 왜 모르죠?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인 거에요.
그 말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얘기에요.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그러니까 방금 약을 먹었지만, 약을 먹은 것도 잊어버리고, 또 약을 먹는 거예요.
여러분, 시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게 흐려지면, 결국은 뭡니까?
언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큰 의미가 없이 그냥 흘러간다는 거예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시간 감각이 없어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시간 안에 살아가고 있지만, 시간과 분리된 삶을 사는 거에요.
여러분, 내가 시간 감각을 가진다는 건, 너무 중요한 거예요.
'내가 어느 시점에 있는지를 바로 아는 것' 시간의 감각이 무뎌지지 않아야 돼요.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보아야 됩니다.
도대체 이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고, 이 시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아야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시간 바깥에서 사는 분은 한 분도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시간 안에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는 말은. 시간 안에 살게 하신 거예요.
자기가 처해 있는 현재 시점을 알고, 자기에게 남은 시점이 얼마인지 깨닫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게 치매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요.
자기 나이는 몇 세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어디쯤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거예요.
무슨 일이 나에게 닥쳐오는 지를 알지 못하는 거에요.
시간 개념에 대한 인식이 약해져 있는 거죠.
그 뚜렷한 증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래의 소망에 대한 인식이 희미하다는 거예요.
시간 감각이 분명해지면, 무엇이 뚜렷해 지느냐면
'장차 이루어질 소망이 확실해진다'는 거예요. ☞ <소망>
그러니까 시간에 대한 분별력이 분명해져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가 분명해지는 거죠.
여러분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다' 마28:20
'세상 끝 날까지' 이 말은, 시간의 끝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거거든요.
시간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계세요.
주님은 시간 속에서 일하시고, 그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제공해 주십니다.
중략 주1)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매우 필요한 게 뭐냐면
종말론적인 훈련이 필요해요. 종말론적인 훈련!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은, 그냥 견뎌내는 것을 강조해요.
그리고 기다리는 시간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소망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단순히 견디는 삶이 아닙니다. 소망은, 미래에 주어진 막연한 약속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이 되면 안 돼요.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의 활기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면에서 우리는 멀리 바라보아요. 가까이만 보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소망을 바라보고, 마지막 날 주어질 완성된 그 날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약속을 바라보며, 멀리 바라보는 거예요.
지금 일어나는 수 없는 사건들과 일들 속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멀리 바라보면서, 그 소망으로 바라보면서
좀 느긋하게 갈 수 있는 태도를 갖춰야 된다는 겁니다.
현실이 힘들어도, 그 (그리스도처럼 되는)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겨 낼 여유가 그 안에서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운전을 할 때도 그래요. 운전할 때 초보자들은 앞만 보고, 앞 차만 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사고 나기 쉽죠.
운전을 오래 하다 보면, 이제 여유가 생기죠.
전체를 바라보고, 멀리 바라보고... 당황하지 않죠.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진짜 좋은 것은 미래에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결론을 낼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의 결론은,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이에요.
그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간 속에, 하나님은 통치 하시고 계시고, 일하고 계시는데
그 일을 완성 하시고, 마무리 하시는 그 날이 올 때,
그 날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에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답답한 일을 당해도
우겨쌈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이 현실에서 결론을 낼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삶의 결론은, 미래에 완성될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 날을 바라보면서, 좀 느긋한 태도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거기에서 당장 결론을 내지 말고... 기다리라는 거죠.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겁니다. 주님은 언젠가 우리를
완성의 자리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 소망, 그 시간의 흐름과 방향과 목적을 분명히 알고,
이 시간이 어디로 흐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즉 그 소망이 완성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그 소망 때문에, 현재의 삶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게 3절의 말씀이에요. *주제
요일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마지막 날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가 분명해 지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예요?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하여, 우리가 주님과 같아져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요?
주님과 같이 깨끗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망한다는 것은, 그냥 모든 걸 체념하고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망이 분명해지면, 세상의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현실에서 우리가 자주 죄에 무너지고, 죄에 대해서 무능해지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예요.
거룩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왜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까?
거룩하신 주님과 교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로 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아야 되죠.
근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사귐" 입니다.
그리스도와 계속 사귀면, 분명히 우리 안의 변화가 일어나요.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빛과 사귀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요한은 관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여러분, 나를 바꾸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돼요.
그리스도와 교제가 깊어지면, 저절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더 깨끗하게 살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냥 죄와 싸우려고 하면, 죄와 싸워서 이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나 주님과 가까워지면, 주님 안에서, 어둠이 물러가는 거예요.
거짓이 물러가는 거예요. 죄가 물러가고, 더러운 것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끊임없이 '닮아간다' 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날,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 소망의 완성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망가지고 깨어지면서 그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지만
때로는 죄 속에 허우적거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는 그 날에,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깨끗하게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돼요.
이 시대가 얼마나 혼탁하고, 오염되고, 죄로 얼룩져 있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뭘 해야 돼요? 회개해야 됩니다.
▲2024년 9월 8일날 해운대에서 모이는 연합집회 가운데도
가장 중요한 순서는, 회개하는 것일 것입니다.
여러분 요일1:9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죠.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랬습니다. 어떻게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지 않는 거죠. 왜 자백 하지 않을까요?
죄를 왜 고백하지 않을까요? 왜 회개하지 않습니까?
죄를 죄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죄 인식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요즘 우리 시대에 가장 어려운 문제예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없어져 버렸어요. 죄에 대해서 너무 둔감해졌어요.
그래서 요일1:8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이유가 뭘까요? 죄인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근데 요한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살 길은, 지속적인 회개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9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망의 그 날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데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죄를 짓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마지막 날까지 낙심하지 않고...
때로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의를 기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우리 죄를 고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주님과 같이 우리도 깨끗하게 되어,
주님을 온전히 만나는 그 날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소망을 가진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주님을 닮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소망을 우리가 붙들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라고 말해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이 왜 소망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시작한 일을 완성 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이 소망을 품고 살아가시고, 소망안에서 행동하고, 소망을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 대해서도 소망을 말하세요. '아 나는 구제불능이야'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고, 나에 대해서도 긍정 하십시오.
내 안의 소망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자녀들에게도 '저 구제 불능!' 이라고 말하지 마시고,
'넌 안 돼!'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 소망의 눈으로,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언어를 선포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은혜로 주어진.. 내가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세상은 0.005초 차이로 떨어뜨려 버리지만,
나는 0.001퍼센트도 구원을 위해서 내가 행한 게 아무것도 없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고,
그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이렇게 죄많고 실수하고 연약하고 깨어지고 망가져도
마지막 날 그와 같이 될, 그 완성될 그 날까지 우리를 데리고 가실
그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낙심하지 말고, 내가 결론 내리지 말고,
그 완성된 나라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오늘 주어진 내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 가시고
이 자녀됨의 그 신분을 충분히 인조이 하시고,
그 주님과 더 깊은 교제 가운데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요일3:2절 해석의 문제
성도가 죽으먼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쉽게 이름을 지어 붙이자면 '자동 성화론' 인가요?
오늘날 이렇게 믿고 있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일3:2절과 3절을, 여러 번역을 비교해 보면서 읽어봅니다.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 그분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 ...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생을 얻어서, 죽지 않을 몸을 입어서
'그 분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가지셨던 그 깨끗한 모습!
예수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에 영화된 모습이 더해진 거죠.)
이렇게 해석하면, 이어지는 요일3:3절과도 문맥이 자연스럽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3:3
천국에, 우리가 죽을 때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예수님이 그대로 가지고 가셨습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할 것이라는 거죠.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2
위 개역개정을, 우리가 '자동성화론'으로 오해하면,
이어지는 3:3절과 문맥이 맞지 않습니다.
죽고 나면 자동으로 성화될 건데, 뭐하러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까? 그 힘든 일을...
그리고 '죽으면 자동으로 예수님처럼 변한다 - 자동성화론'을 지지하는 다른 구절들이 있나요?
그런데 '성도가 죽을 때까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성화를 추구하며 살아라'라는 구절은
성경에 수 십~ 수 백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NIV, KJV, NASB도 다 '현대인의 성경'처럼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원문에 가깝게 잘 번역했지만)
읽는 독자들이 '자동 성화론'으로 오해하기 쉽도록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위 설교에서 인용) "여러분, '자녀' 라고 얘기할 때는,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있어서 핵심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해결되고,
그 관계가 점점 부유해지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먼저 되고, A
그 후로는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이, 그런 변화된 삶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B
그렇게 되어져 간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흐름입니다. A와 B 성경은 양쪽을 다 가르칩니다!
...........................................
주1)
그 소망이 어떤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요한은 미래의 소망을 말씀하는데, 그 소망은 무엇이냐?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는 거죠.
그리스도인에게 최종적인 목적지는 그리스도 예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 분을 닮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라고 하는 현재적 신분 뿐만 아니고,
그 신분의 끝이 아니라, 변화된 신분으로,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은 자로,
마지막 날 우리에게 주어질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에요. 우리는 아직은 망가져 있죠.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날에 주어질 그 완전한 회복,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그 날,
우리의 누추함을 다 벗어 버리고, 우리의 죄악으로 때 묻은 우리의 육체를 벗어버리고
완전히 그와 같이 되는 그 날을 소망한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