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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11장 남유다의 언약 파기

LNCK 2024. 8. 28. 10:3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언약 관련글>       예레미야

 

남유다의 언약 파기        렘11:1~17            여러 자료 정리

 

▲서론

본문 렘11장부터 12장까지는, 예레미야의 12편의 설교 중에 네 번째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요시아 왕 통치말년 혹은 요시야 왕이 죽은 직후에 선포된 설교입니다.

 

(배경) 요시아 왕은 성전을 수리하게 되었고

그때 발견된 율법책 (아마 신명기) 을 발견했고

그는 그 율법책을 발견한 이후부터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남유다를 하나님의 나라로 돌이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말년에는, 남유다가 피상적으로는 돌아오는 것 같았고,

형식적으로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진정한 개혁에는 실패했습니다.

남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이키지는 못했어요.

 

거기에다가 요시야 왕이 전쟁에 나갔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고 난 이후에는

백성들이 더욱 자행자지 하게 되었을 거예요.

그러한 시기에 선포된 말씀으로 추정되어집니다.

 

이 네 번째 설교는, 거역하는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자로 바라보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어요.

"너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다"라는 관점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어요.

 

우리가 어제까지 살펴보았던 예레미야의 세 번째 설교(7~10)

남유다 백성들을 "성전에서 예배하는 예배자"로 바라보면서,

"예배자의 관점"에서 그들에 대하여 선포한 말씀이었다면,

 

본문 네 번째 설교 (11~12),

이 거역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란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예언자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 장의 11:1~17절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유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기로 맹세했던 언약의 율법(출20장, 레26:12, 신7:12)을

재차 새롭게 언급함으로써,

유다의 범죄행위를 "언약 파기"라는 측면에서 한층 더 심도있게 논의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

언약 파기에 대한 경고 (1-17절),\

예레미야의 암살 음모 (18-23절)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 시킴   11:1~8

 

▲11:1~2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듣지 않고서 말하면 거짓 선지자가 됩니다.

듣고 말하는 것이어야 참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너희'는 2인칭 복수입니다.  *듣다(샤마) 동사의 2인칭 복수형 사용

만약 '너'라면, 예레미야를 가리키지만   *공동번역, 현대인

'너희'는 '지금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 예루살렘 시민들'을 가리킵니다.

시민들이 예레미야의 설교를 듣고, 이웃들에게 전파하라는 거죠.

 

▲11: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물론 그들의 조상 때부터 요구하셨던 것은

언제나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믿는다’는 생각의 차원에서 기독교 신앙이 머물러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언약을 더욱 풍성하게 설명해주는, 일종의 참고서입니다.

‘믿는다’는 말에는 ‘순종한다’는 뜻까지 포함된, 매우 포괄적인 신앙 언어입니다.

 

신약에 '믿는다'는 말이 강조된 것은, 새언약이 강조하는 바 '내면적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구약에서 강조된 '외형적 행동적 신앙'을 배제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일관적으로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래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출6:7

 

그걸 본문 11:4절에 이렇게 상기시키십니다.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에도 보면,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계21:3

 

하나님께서 창세기부터 ‘구속사’를 쭈욱 이끌어가시는 큰 그림, 전체 그림은

‘너희로 내 백성을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로망이고,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11:5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을 상기시키십니다.

‘너희가 언약을 잘 지키면, 내가 가나안 땅을 주려고 했다.

그래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한 게 아니냐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그러자 예레미야가 ‘옳소이다’ (여호와여 아멘!) 했습니다.

 

▲11:6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

 

근데 예레미야 시대에, 그 하나님의 로망이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왜냐면 남유다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림으로써 (시내산 언약에 불순종)

쉽게 말해 하나님과 결혼 관계가 파토날, 깨어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렘11장은, 예레미야가, ‘그 언약을 다시 일깨워주고,

그 언약 관계로 다시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예식의 가장 중요한 핵심 순서는 ‘언약 marriage vow’입니다.

한국 서약은 좀 싱거운데, 영어 서약이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어느 한국 목회자가, 외국 부부의 결혼식을 주례하다가,

‘영어 혼인 서약문’을 미처 준비를 안 해서 갔다가, 크게 망신당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국 결혼식에서는 ‘혼인 서약’을 별로 중요치 않게 여기기 때문이었죠.

 

결혼식에 모든 순서가 다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순서는 ‘혼인 서약’에 YES 하고

그 서약을 성실히 지키기로, 하나님 앞과 증인들 앞에서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반지를 교환하죠.

 

I, ____, take you, ____, to be my lawfully wedded (husband/wife),

to have and to hold, from this day forward,

for better, for worse, 잘 될 때나, 못 될 때나

for richer, for poorer, 부자가 되거나, 가난해지거나

in sickness and in health,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until death do us part.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오늘날 이혼이 급증하는 것은, 이제 놀랄 일이 아니게 되었죠.

그런데 ‘결혼식’이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엄중한 서약이고,

‘그 서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개념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이혼을 결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결혼 서약’의 예를 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결혼한 민족입니다. 출19장

이어지는 출20장의 십계명은, ‘결혼 서약 내용’과 같습니다.

‘우리가 결혼한 이후에 이러한 십계명을 지키겠습니다’라고 서약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서약’이 오고간 내용이 출19:7~8에 나오죠.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십계명 포함 계명들)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이렇게 성혼이 성립된 것입니다.

 

이 성혼, 결혼의 장점은.. 언약관계에 정확히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시고,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모든 것을 일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혼, 결혼의 위험성은.. 언약관계가 파기되면, 하나님이 보호막을 거두어버리시고,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방에 절단나고, 각종 질병과 기근과 재앙이 찾아오고.. 망하는 거죠.

 

지금 예레미야가, 본문 11장에서, ‘그 언약을 기억하라’는 것은,

‘그 결혼언약 관계로 다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신28장에 나오는 모든 재앙이 다 임한다는 거죠.

이건 계약내용(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설명한 바로 그 말입니다.

즉 ‘언약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만

언약을 파기하면, 모든 저주가 다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다’ 라는 말에 너무 꽂혀서

‘내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갔다, 결혼한 상태다’ 라는 사실을 미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십계명이 대표) 어기기를 밥먹듯이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복이 아니라, 기록된 모든 저주를 다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약을 파기한 자에게 부과되는 패널티입니다.

 

성경 전체가 한 마디로 ‘언약책, 계약책’입니다.

성경을 Testament 라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계약, 언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율법폐기론, 무율법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믿기만’ 할 뿐, ‘언약’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언약 자체를 ‘율법’이라고 매도해서 버려버리고 있습니다. *무율법주의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계약대로 ‘모든 저주’가 고스란히 자기 몫이 되는 거죠.

 

▲11:7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언약의 핵심입니다. 출15:26, 대하36:15

 

그런데 오늘날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 그러니 믿기만 하면 된다’

이런 율법폐기론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진정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 마음바탕부터 ‘변화’되어

반드시 변화된 삶의 열매를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언약을 지키는 삶’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율법주의죠.
그렇지만 ‘믿어서 구원을 얻은 사람은, 변화된 심령으로 언약을 지키게 되어 있다’

왜냐면 언약을 지킴으로써, 그 결혼관계의 모든 혜택을 다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이신득의’를 강조했던 바울도, 그의 서신 후반부에는 항상 계명을 강조합니다.

일례로 갈5:16~21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면서, 육체의 일을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믿기만 하면, 뭔 짓을 하든지 다 구원받는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리하면, 오늘날 나는 ‘하나님과 결혼언약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신약적 표현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받는 성도가 누리는 복이죠.

 

혹시 ‘내가 하나님과 결혼 언약 관계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지는 않았나요?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지금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에 약속된 대로, 모든 저주와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래 8절입니다.

 

▲11:8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

 

 

◑ 남유다의 언약 파기     11:9~17

 

9-17절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그토록 언약(말씀)을 지킬 것을 호소하셨지만,

여전히 우상숭배로 언약과는 상관없이 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행했던 일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11: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함을 통해서, 언약을 깨뜨렸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의 우상숭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12~13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남유다가 얼마나 많은 신들을 섬겼던지, 그 숫자가 유다에 있는 성읍 수만큼이나 많고,

바알에게 분향하기 위해서 세운 제단은 예루살렘에 있는 거리의 숫자만큼 많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상이 그들을 건져주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또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만큼 많은 신들을 섬겼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불안하고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전운이 감돌면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전운이 뚜렷해지면 질수록, 비상식량을 비롯해서 필요한 것을

최대한 확보해 놓으려고 하는데, 우상까지도 많이 확보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유다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속이 상하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면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의 삶이 이렇게 형편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도 15절에서 유다백성들을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사랑하면서도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그만큼 찢어지신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부부싸움을 연상케하는 표현입니다.

 

진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만큼 내 마음이 상했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이 같은 금지령은 7:16, 14:11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옵니다)

 

▲11:1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당시에도 유다인들은 성전에서 규칙적으로 희생 제물을 바쳤지만,

하나님은 그 제물들을 용납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즉 오늘날에도 예배는, 6일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삶을 사는 가운데서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들이 6일동안 형식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11:16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이스라엘을 감람나무에 비유한 예는 시 52:8, 호 14:6 등에서도 볼 수 있죠.

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기롭고, 결실을 맺는 싱싱한 감람나무처럼 만들어 주었으나

그들은 약해지고 부패해지고 말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갈대아인들의 침입과 방화를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11: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심으셨던 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며,

또한 그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신 이도 그분이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만 주시는 게 아니라, 재앙도 주십니다.

혹시 내가 오늘날 하나님께 ‘재앙’을 받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내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깨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이하 11:18~23절은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아나돗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

 

◑절별 해석 (참고 자료)

 

11: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여기서부터 12:17까지는 언약의 요구조건에 충실하라는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는 단락으로서,

이 단락의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느부갓네살이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무찌르기 얼마 전인

여호야김 시대에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고,

두 번째 견해는 B.C.622년 요시야 당시 힐기야에 의해 율법책이 발견된 후의 것으로서

종교 개혁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왕하 22, 23장).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는 모세의 율법과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촉구와 함께

이교도의 제사 형식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하 34장에 따르면, 율법책의 발견에 앞서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지역 신당에서는 가나안 종교 의식이 중단되었다.

 

11:2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 주민에게 말하라

 

여기서 '언약의 말'이란 것은 시내 산에서 체결되었던 언약을 말하는 것으로서(신 5:2)

하나님은 그들의 일치된 예배와 순종의 대가로서,

민족 초기 단계에 있었던 그들에게 물질적, 영적 필요품들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소유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근거는

이러한 조건들을 수납하고 성실히 이행하는 데 있었다(신 29:9).

 

11: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언약의 규정 조항들은 무시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려지도록 촉구된다.

고대 근동 지역의 국제 조약문(종주권 조약)에도

계약의 이행과 불이행에 따른 축복과 저주 조항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은 모세가 선포했던 것을 다시 부각시킨 내용이다.

 

11: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구약의 거의 대부분의 용례에서 순종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전반절의 '쇠풀무'란 말은 그들의 비참했던 노예 생활을 상징하는 말로

그 문자적 의미는 쇠를 녹이는 용광로나 화덕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노예 생활하던 그들을 주권적 권능으로 이끌어 내셨다.

따라서 그들의 불신앙은 참으로 심각한 것이며, 배은 망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11:5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예레미야는 언약 관계의 핵심이 순종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다음,

'아멘'이라는 익숙한 말을 사용하여

그 당시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에 대한 동의의 핵심을 다시 요약해서 지적한다.

 

물론 이 '아멘'이란 말은, 비록 언급이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3절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신 27:15-26).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충실히 지킨 반면에(6:3, 11:9, 26:9),

정작 언약에 따른 축복에 모든 존재를 의존하고 있는 그 백성은 그들의 의무를 등한히하여 왔었다.

 

11:6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 하나님의 언약에는 축복이 있는 만큼,

저주 조항 역시 있다는 점을 모든 백성들이 다 알고, 그들의 의무가 무엇이며,

또 그들이 받아 누릴 특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야 했다.

 

11:7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본절과 8절은 70인역(LXX)에는 누락되어 있고,

다만 '그들이 순종치 아니하였다'란 어구만 있다.

여호와를 대신하여 전달하고 있는 이 예레미야의 요구 사항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순종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 다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광범위하게 제시한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과거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당시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11:8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

 

'이 언약의 모든 말로 응하게 하였느니라'

사람의 깊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온 마음과 정성을 수반하지 않은 채

외적인 형태만을 갖춘 그런 순종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배도를 통해 시내 산 언약 규정을 파괴하였었기 때문에

이미 실제적으로 저주 조항의 가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직 진정한 영적 회심만이 소멸되어가는 언약 규정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나,

이런 조건이 충족될 수가 없었으므로 이제 선지자는 재앙의 도래 외에는 달리 선포할 것이 없었다.

 

11:9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여기서 '반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케쉐르'는

다양하게 번역되어 '폭동', '반항' 등으로도 쓰인다.

이 말은 원래 숨겨진 음모에 의해 야기된 폭동을 가리킬 때 쓰이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거스리는 모든 완악한 행사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쓰였다.

 

특히 우상숭배는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명백한 거부였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언약 의무 조항에 대한 극단적인 파괴 행위였다.

 

11: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여기에는 본서에서 거듭거듭 나타나는 '슈브'란 동사가 쓰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여호와께 등을 지고 돌아섰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여호와의 언약 요구에 순응하길 거부하였다.

지나간 역사의 사례들로부터 제시되는 경고와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전철을 되밟는 이 같은 유다 백성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타락한 인간 본성의 구체적 실례라 하겠다(롬 1:28).

 

11: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부르짖다'는 뜻으로 쓰인 '자아크'는 단순히 외치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맹렬하게 울부짖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터져 나오는 절규와도 같다 하겠다.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부르면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시 50:15).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은 이미 회개의 가능성마저 없는 상태였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불러 보았자, 그것은 진정한 회개에서 나온 것이 될 수 없었다.

 

11:12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앞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리라고 단언하셨던 바,

이제 부르짖을 데가 없어 그 거짓 신들에게 부르짖게 되었다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히브리어 원문의 접속사 '와우'는 '그 다음에'란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우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마구 부르짖기만 하는 무지 몽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을 반성하거나 진실로 돌아오지 않고 부르짖기만 하면 된다는 신앙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다.

 

11:13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효와 같도다'

선지자는 유다인들이 바알을 위해 쌓은 제단들이 각 시도의 거리 수만큼이나 많았으며,

그들이 섬긴 신들의 수효가 그들의 성읍 수효만큼이나 많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바알’이란 이름이 합성되어 있는 지명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인 바,

그들은 온갖 상상의 미신을 신격화하여 인간 존엄성을 망각하고

또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내팽개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레미야 사역 초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요시야의 개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11: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백성들이 곤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가 이제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성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이 같은 금지령은 7

:16, 14:11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11:1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이스라엘을 '나의 사랑하는 자'(예디드)로 묘사하고 있는 이런 내용은

12:7에서도 보이며, 또한 사 5:1에도 등장한다.

본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혼인 관계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처럼 극진하신 대우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영적 간음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개역)

당시에도 유다인들은 성전에서 규칙적으로 희생 제물을 바쳤지만,

하나님은 그 제물들을 용납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희생 제물은 짐승의 더러운 시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여호와께 대한 순종과 충성이 결여된 그런 제사는 아무리 풍성하고 다양하다 하더라도

속이 빈 것이다. 이런 외형적 산물을 여호와께서 만족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라는 신앙에서

출발한 위선적 희생 제사는 종교를 미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11:16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그 가지는 꺾였도다'

이스라엘을 감람나무에 비유한 예는 시 52:8, 호 14:6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기롭고, 결실을 맺는 싱싱한 감람나무처럼 만들어 주었으나

그들은 약해지고 부패해지고 말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갈대아인들의 침입과 방화를 허용하셨다는 뜻이다.

 

이 구절에도 여러 가지 본문상의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앞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분명하다.

아름답던 나무 잎사귀 위에 이제는 불이 놓여 있고 나뭇가지는 꺾여졌다.

이는 분명히 여호와의 백성들을 삼키게 될 임박한 파국의 참혹한 장면을 서술한 것이다.

 

11: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심으셨던 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며,

또한 그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신 이도 그분이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구절에는 '재앙'과 '악'에 해당하는 원어가 모두 '라아'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악'이란 뜻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재앙'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이른바 언어 유희(wordplay)를 보여준다.

 

11: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그들의 죄악을 꾸짖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언한다는 이유로 그의 생명을 해(害)할 음모를 꾸몄다.

 

하나님은 이런 음모를 비밀스러운 경고를 통해 그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며,

그 결과 예레미야는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한편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예들은

솔로몬시대부터 계속 아나돗에 살아왔었다(왕상2:26). 솔로몬 왕위 계승시에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탓으로 솔로몬에 의해 추방, 낙향당했던 것이다.

 

11: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나는 알지 못하였나이다' 아나돗 사람들은 마치 그 주인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하였다. 그들은 예레미야('나무')를 처치함으로써

그 입에서 선포되어지는 예언의 말씀('과실')을 단절시키고자 계획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레미야가 화(禍)를 면하게는 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고향 마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배경상 크나큰 낙담에 빠지게 할 만한 것이었다.

 

11: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공의로 판단하시며 여호와여' 무죄한 자의 누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의 기도는

시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시17:1-9). 그리고 적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가해 달라고 하는 것 역시 시편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르짖음이다(시17:13).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정당하게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도 검토하신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엄청난 이 문제, 즉 자기 고향 전체가 그와 맞서고 있는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 중재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11:21 여호와에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그들이 이처럼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 해리슨은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 찬동하고 나선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톰슨은 이보다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종교와 사회 생활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아마 요시야나 예레미아의 대적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모두 그 당시의 종교 생활에 어떤

위험한 요소가 있을 만큼 그렇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과거나 현재나 할 것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하는 예레미야의 강도 높은 비난은 아나돗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죄악을 선언한 예레미야는 그를 출생시킨 마을의 명예를 매우 손상시킨 자로

여겨졌던 것이며, 이런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생각되었을 기능성이 높다 하겠다.

 

11: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11: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자기 종을 해하려는 이런 악한 음모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하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남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철저한 살육이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편 아나돗 사람들로부터의 위협은 그것으로 그치지않고 수차례나 더 계속되었다(20:1-3, 38:6,13).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도와주시리라는 확약만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아나돗에 대한 심판 예언은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성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