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8 06 사도행전 강해 (77)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 YouTube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행21:1~14 2023.08.06.
앞서 바울은 밀레도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약 40킬로 남쪽에 떨어진 항구 도시입니다.
그곳으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내어 만났습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 그들에게 바울은 고별 설교를 했습니다. 20:17~38
▲21: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그들은 에베소 장로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해야 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제헌금 전달 위해
'우리'라는 표현은, 사도행전에서 모두 네 곳인데(16:10-17, 20:5-15, 21:1-18, 27:1-28:16)
여기서 '우리'는
바울, 누가, 드로비모, 아리스다고 그 외에도
20:4에 언급된 소바더,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였을 것입니다.
그 노정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밀레도에서 고스로 이동합니다.
고스는 아래 지도에 보시면 섬입니다.
이 곳은 당시에 고대 최고의 명문의과대학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 의과대학을 바로 히포크라테스가 설립을 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가 태어난 곳이 바로 이 '고스' 섬입니다.
이 도시에서 최고의 의과대학을 세운 거죠.
이어서 이튿날 고스에서 로도로 이동을 하고요.
그리고 바다라라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여기까지 바울의 일행은, 고스, 로도, 바다라 까지는 작은 배를 타고 이동을 했습니다.
보시면 거리가 비교적 짧습니다.
하룻길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기 때문에, 작은 배를 타고 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다라에서는 바울의 일행이 배를 큰 배로 바꿔 탑니다.
바다라는, 당시에 큰 항구도시로, 큰 여객선들이 다니던 곳입니다.
왜 여기서 큰 배로 바꿔 탔을까요?
2절에 보면, 베니게로 건너가야 했고, 위 지도에서 보듯이 먼 항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21: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베니게로 건너가는'
베니게는 팔레스틴 북쪽 두로, 시돈이 위치한 지역을 포괄하는 지역이죠. *페니키아
그러니까 이제 에게 해를 완전히 빠져나와 지중해를 가로질러
두로에 이르는 항로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지도를 보시면, 바다라 항구에서 두로에 이르는 항해 길이가 꽤 깁니다.
그래서 큰 배로 갈아탔을 것입니다.
앞서 21:1절에 나온 이동경로는 짧기 때문에 '작은 배'로 이동했다고 보는 거죠.
▲21: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지도를 보십시오. 바다라에서 두로까지 뱃길은
구브로(바나바의 고향) 섬을 왼편에 두고 항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바다라에서 두로까지는 뱃길로 5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거기서 배의 짐을 푼다'는 말은, 배가 화물도 함께 운반했다는 뜻이지요.
당시에 곡물과 과일을 배로 운반해서 파는 무역이 성행했죠.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바울의 일행은 두로에 도착합니다. :3
두로에서 바울의 일행은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4
두로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이유는, 배의 일정 때문입니다.
3b절에 보시면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굉장히 큰 항구 도시였고,
그래서 배들이 두로에서 화물을 내리고, 다시 새로운 화물을 실었습니다.
그 작업이 일주일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배가 아주 컸었나 봅니다. :3
그동안 바울의 일행도 일주일을 항구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두로의 성도들을 찾아보게 됩니다.
'제자들을 찾아' :4
이 말은 두로에도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언제, 어떤 경로로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죠. 그러나 학자들은 11:19에 의거하여
스데반의 순교 후 각지로 흩어진 교인들에 의해, 두로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제자'는 당시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가장 자주 사용되던 호칭이었습니다.
'찾아'(아뉴론테스)는 '수색하여 발견하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이는 두로에 있던 교인들과 바울의 만남이 사전에 약속된 것이 아니라
수소문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으며,
그곳에 있던 교인들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합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4
그런데 이들이 지금 자기의 생각으로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했다'고 누가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을 말리고 있습니다.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동사가 원어로 보면 미완료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만류한 게 아니었다는 거죠.
바울이 머무는 동안 일주일 내내 지속적으로 바울을 붙잡고 만류했다는 뜻입니다.
▲21: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두로의 제자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그때 두로의 제자들과 바울의 일행들이 함께,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 똑같은 장면이 앞에서 나온 적이 있습니다.
바로 에베소 장로들과 바울이 헤어질 때 나왔던 모습입니다.
20:36~37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밀레도
그러니까 두로의 제자들도 알았던 겁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환란과 결박을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떻게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은 바울에게 일어날 일을 알았습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결국 2년을 수감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뭔가 충돌이 일어납니다.
앞에서 바울은 분명히 '내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20:22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자기의 계획이나 뜻이 아니라,
성령에 강권하심을 따라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이 내용은 아래 11절 이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교의 주 논지)
▲21: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우리는 배에 오르고'
여기서 '배에'라는 문구에 정관사 '토'가 붙여져 있어,
이 배가 처음 타고 비로 그 배 임을 말해줍니다.
'돌레마이'는 두로에서 가이사랴 방향으로 35km 지점에 위치한 소항구입니다.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하루를 있다가'
바울 일행은 돌레마이에서도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성도들을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4절에서는 '제자들'이라고 표현한데 비하여 여기서는 '형제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친근감을 더해줍니다.
이곳 돌레마이에 복음이 전해진 것 역시 두로와 같은 시기였으리라고 봅니다.
▲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가이사랴' 주1)
가이사랴에 가서는, 빌립(집사)의 집에 들어갑니다. 앞서 행6장에 나왔던 인물입니다.
그가 사마리아를 전도한 후에, 가이사랴에 가서 공동체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가 행8장에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행21장에 다시 등장하는데,
학자들은, 그간 약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말합니다.
그때 유대로부터 바울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가보라는 선지자인데요.
이 아가보라는 선지자도 앞서 나왔던 인물입니다.
행11장에서 이 아가보 선지자가 예언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천하에 큰 흉년이 올 것이다' 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 예언이 정확히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 때 성취가 되었습니다. 11:28
▲21: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그런데 두로에서와 동일한 만류가, 또다시 본문 가이사랴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사이비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에게 예언을 했습니다.
그 예언의 내용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일을 아주 생생하게 예언합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방식을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할 때, 시청각 교보재를 통해 예언을 했잖아요.
그것처럼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시청각적으로 예언합니다.
여기서 '띠'는, 유대인의 전통 복장을 입고서 허리를 묶는데 사용하는 긴끈을 말합니다.
우리도 전통 한복을 입을 때 끈으로 이렇게 두르잖아요.
이 바울의 끈을 가져다가, 아가보 선지자는 자기의 수족을 실제로 이렇게 묶습니다.
자기의 수족을 묶고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유대인들에 의해 이렇게 결박을 당해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는 예언을 했습니다.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는 말은, 바울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왜냐면 유대인들에게는 사형 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넣을 수는 있지만, 사형을 언도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사형을 시키려면, 반드시 로마법으로 처결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죽을 수 있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아가보의 예언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한 예언입니다.
11절에 아가보 역시도 '성령이 말씀하시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로의 제자들과 똑같은 내용을, 아가보 역시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가보의 예언에 관련하여 결론도
두로의 제자들과 똑같은 반응을 불러왔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반응이 12절에 나오는데요.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아가보의 예언을 들은 가이사랴 신자들이, 바울의 일행(본문에 '우리')을 포함해서
하나같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뜯어 말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거죠. '대체 누가 맞는 것인가?'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20:22
그러나 두루의 제자들과 아가보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여러분 이 모순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이 문제를 풀어야 오늘 본문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정확히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령은 이들에게 서로 다른 내용을 알려주신 게 아닙니다.
똑같은 내용을 알려 주셨지만,
다만 서로의 해석과 적용이 달랐을 뿐입니다.
먼저 성령은 이들 모두에게 똑같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바로 바울에게 일어날 일(체포, 결박, 투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했습니다.
20:23절 말씀이었는데요.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 동일한 일을 두로의 제자들과, 아가보 선지자에게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감동을 가지고, 적용이 달랐던 겁니다.
제자들은 환란과 핍박이 있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나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 ... 여기까지가 성령이 주신 예언이었던 거죠.
제자들은 '그러니 올라가면 안 된다' 라는 해석을, 임의로 보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들은 똑같은 성령의 감동을 듣고서는, 왜 다른 적용을 했을까요?
그 예언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이들의 내적인 동기와 중심이 바울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누구보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말렸던 겁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동기는 '바울이라는 사람'에게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을 보십시오. 마음 동기에 '하나님 뜻'에 맞춰져 있습니다.
바울 역시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당해야 할 일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반응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기를 뜯어말리는 형제들 향해 도리어 이렇게 말합니다.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자기를 말리는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제자들은 울면서 바울을 말렸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여기 '울면서'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계속 울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울의 마음이 여러분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바울도 연약한 사람인데요.
안 그래도 이 길은 결단하고 각오하고 가야 하는 길인데요.
그래서 바울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여기 '마음을 상하게 하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빨래 막대기로 털었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빨래를 마릴 때에는, 빨래줄에 걸어놓고 막대기로 탈탈 털었었죠.
그만큼 바울의 마음이 막대기로 탈탈 털리듯이, 마음이 상하고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말림이, 바울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는 거죠.
그러나 바울은 곧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당할할 일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바울의 중심에는, 그 내적인 동기에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바울'을 위하는 마음과 대조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결박을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기도 각오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던 이유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내적인 동기와 중심과 그 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바울의 마음을 지금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예언을 받았지만, 서로 해석이나 적용이 달랐던 겁니다.
◑적용
이 본문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적용인데요.
한 사람의 성도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가,
그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바울을 말린 건, 마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그동안 괴롭혀왔던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바울을 말린 건, 바울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심지어 바울의 일행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같이 말렸다고 나옵니다. 그 '우리' 안에는 누가도 포함되었습니다. :12
바울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들이,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막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슷한 사실이, 마16:21~22절에도 나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길을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을 말린 것처럼
정확히 오버랩(겹쳐짐)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망치려고 예수님의 길을 반대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길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십시오.
본문의 제자들은 누구보다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말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동안에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13
그만큼 그들의 만류는, 눈물어린 사랑의 권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만류는, 바울의 편에서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큰 방해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내 삶을 가장 방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가 될 수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에
때로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 자신을 돌아 봅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자녀가 둘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쩌면 가장 큰 장애물은
아버지인 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 아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이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어느 날 첫째가 자라서 저에게 찾아와서
'아버지, 저는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떠나겠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겠습니다...'
'그때 저는 은유를 순수하게 보내줄 수 있을까?
아멘! 하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이 자녀를 드릴 수 있을까?'
어쩌면 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선교는 나이 들어도 갈 수 있으니까, 회사 생활을 더 해 보렴!
아니면 선교라는 게 꼭 선교사가 되는 것만 선교가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도 있단다.
보내는 선교사도 선교사일 수 있으니, 물질로 후원하는 것도 기도해 보렴!'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자녀는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마음이, 제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제가,
자녀의 신앙에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제가, 우리 자녀가 하나님 앞에 훈련을 받고
신앙이 자라가는데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기도합니다. 하나님보다 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도록,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데, 저와 아내가 장애물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저와 아내가 이 아이들의 신앙을 망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두 자녀들에게 필요하다면, 주님이 인생의 광야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그 기도를 우리 자녀들은 모르고 있겠죠.
그렇게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이 아이들이 고백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단순히 목사의 자녀의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 될 수 있다면
광야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녀들도 때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자녀들이, 저와 제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빚어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반대로 제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때론 제 아이들이, 제게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그 선택을 가장 주저하게 하는 존재가, 제 자녀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 아이들이 힘들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 걱정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는 선택을 머뭇거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 아내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는 선택을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가장 큰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13절의 바울의 답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여러분, 이 13절의 고백을, 여러분의 가훈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적용인데요. 본문에서 바울과 형제들은 똑같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달랐죠.
똑같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는데,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마음의 중심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바울을 말렸던 이유는, 그 마음의 동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바울)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의 내적인 동기와 중심은, 주 예수의 이름에 있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는 마음이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주님을 위해 환란 뿐만 아니라, 죽음도 각오했습니다.
이것이 똑같은 고난을 바라보며, 다른 적용, 다른 선택을 했던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그 마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A W 토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당신(의 본질)이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삶입니다.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가? 어떤 직장에 다녀야 하는가?
어느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가? 어느 학교를 가야 하는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선택 앞에 우리는 놓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그 마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바울과 같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선택하는 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소원과, 여러분의 뜻과, 여러분의 욕심을 위하여 선택하는 길입니까?
이 내적인 동기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다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신앙적인 타협을 해서라도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럴수록 시험에서 낙방하는 거죠.
승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해도, 못 쓰시는 거죠. 낙제생이라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상황에 맞게 자기합리화시켜서라도
그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을 선택합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제목으로 쏟아내고 있는
우리의 감사의 제목들은
어쩌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의 타협의 결과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면,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척 하다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기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가치관과 똑같이 결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다시 붙들고 돌이켜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 14절의 말씀인데요.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의 주변 사람들은 바울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권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같이 고백했던 말이 있습니다.
'이 말로 모든 상황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다.'
그들은 주님의 뜻에 바울의 걸음을 맡겼습니다.
이게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의 결정을 내릴 때, 우리의 방향은, 우리의 내적인 동기는
언제나 이 방향으로 결론이 나도록 해야 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사셨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고백을, 예수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형제들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우리도 이 고백을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처음 들은 예언이 아니죠. 그 전부터 '각 성에서' 이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바울은 꿋꿋이 걸어갑니다.
자기의 인생을 주님의 뜻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이런 겁니다. 믿음은.. 알면서 가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고난의 길임을 알면서도) 가는 겁니다.
그 길로 가면, 장차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 훤히 보입니다.
여러분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쉽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듣잖아요.
근데 그 말씀이 편합니까? 말씀대로 살아가면, 뻔히 눈 앞에 보이는 손해,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뻔히 보이는 손해, 고난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게 제가 뒤늦게 목사의 길을 가게 된 이유죠.
△ 오늘 본문의 믿음의 형제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동일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결과를 우리 또한 알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알면서도 가는 겁니다.
모르고 가는 것도 믿음이지만, 뻔히 보이는 결과를 알면서도 가는 겁니다.
그 길을 가면, 오늘 바울이 갔던 것처럼, 분명히 환란과 고난이 기다라고 있습니다.
손해가 있고요. 핍박이 있고요.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여러분 우리는 가는 겁니다.
그 길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다...'
오늘 바울처럼, 때로는 주위의 성도들 모두가 반대하는 길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고 이루는 길이라면,
꿋꿋이 주님만 바라보고 갈 수 있는...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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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가이사랴
이 도시는 돌레마이에서 남쪽으로 50-6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로마 치하에서는 유대 지방의 행정 장관(총독)이 거주하는 정치적 수도죠.
이 도시는 헤롯에 의해 건설되고, 아우구스투스를 높이기 위해 '가이사랴'로 명명되었죠.
또한 이곳은 거대한 항구 도시로도 유명한데,
바울은 그의 선교 여행 중 이 도시를 세번째로 방문하는 셈입니다.
한번은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여행하는 중에 방문했고(9:30)
두번째는 2차전도 여행 말기에 안디옥에서 돌아오는 길에 방문했으며(18:22)
지금이 그 세번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