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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12장 심판의 끝에서 사랑을 보다

LNCK 2024. 8. 30. 10:2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

https://www.youtube.com/watch?v=aDuaZwqZxEA

심판의 끝에서 사랑을 보다          렘12:7~17

※예레미야서를 장별로 설교할 때, 설교자들은 보통

11:18~23절과 12:1~6절을 붙여서 설교합니다. *예레미야 살해 음모에 관한 단락

그렇게 끊는 것이, 더 단락 구분이 잘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래 설교는 12:7절부터 설교합니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실 렘1장부터 오늘 본문 12장에 이르기까지,

'남유다의 타락과, 회개치 않음과, 하나님의 심판 선포'라는 주제가

매 장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퍼뜩 읽으면 그래서 길로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렘1~25장까지, 예레미야의 설교가 12번 나오는데,

어쩌면 같은 주제의 말씀을 12번 반복해서 말씀, 예언하신다고 봐도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가르치시고, 
또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려고 
참 많이 애를 쓰시고 노력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또한 우리를 돌이키기 위해서, 인격적으로 많이 노력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게 돼요. 

1)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예요. 

집에서 자녀 키울 때 보십시오.

부모들은 얼마나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합니까?

남의 집 자녀에게는, 그렇게 반복해서 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듣기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신다 라는 거예요. 

왜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하나님께 합당하게 우리를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그분은 반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계속 말씀하신다는 거죠. 

2) 그분의 두 번째 노력은, 여러 측면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시고, 저렇게도 말씀하시고, 
이렇게도 이해시키려고 하시고, 저렇게도 이해시키려고 하시고...
한 면이 아니라, 여러 측면으로 말씀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의 그러한 인격적인 노력, 그것은 무엇이죠? 
그것은 점진적으로 말씀하신다 라는 거예요. 점진적으로! 

한꺼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 쏟아내시면 
우리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혹은 며칠 지나면 금방 다 잊어버립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그 다음에는 저렇게도 말씀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여러 측면으로 점진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레미야의 설교를 통해서도 그것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설교를 통해서, 반복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그리고 또  여러 측면으로 말씀하세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된 입장에서도 말씀하시고,  *2장 1~3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측면에서도 말씀하시고,   *7장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의 측면에서도 말씀하시면서,  *11장

이 측면 저 측면, 그렇게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말씀하세요. 

우리의 상태가 어떤지... 
하나님 앞에 옳다 라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하나님이 예레미야 입을 여시면서 
먼저 그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그들이 받게 될 징벌이 무엇인지를 또 말씀하셨고요. 
그리고 그 징벌의 도구가 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면서, 
점진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렘12장은 이제 예레미야의 네 번째 설교(11~12장)의 결론 부분이거든요. 
여기서 하나님은 동일하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심판에 대해서 네 번째 말씀하세요. 

그리고 여기서는, 언약 백성의 측면으로... 또 다른 측면으로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여기서는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판, 그 이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계속해서 예레미야의 설교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확 쏟아 내시는게 아니에요. 
예레미야의 "점진적" 설교가 이런 내용으로 진행됩니다.

 

-그들의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점진적으로 전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이 받게 될 징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징벌의 도구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셨다가, 
-오늘 본문 렘12장은... 심판이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제 너희가 심판을 받을 것인데, 
그 심판 이후에 너희가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공평한 심판  

▲1. 그 첫 번째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거기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심판이 끝이 아니다는 것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심판 그때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많은 성경적 개념들을 왜곡시켜 놨어요. 
근데 가장 많이 왜곡된 개념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부패한 인생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마음대로 개념화 시켜놓았어요. 
그러나 성경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공의가 포함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저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해도 하나님께서 그냥 바라보시고 덮어 주시는 것이 아니고, 
공의롭게 사랑하신다 라는 거예요. 

본문 7절에 하나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세요. 
12:7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내가 내 집을 버리겠다. 내 소유는 내던지겠다.' 
그런데 여전히 내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나요?
'내가 너희를 원수의 손에 넘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라고 말해요. 
즉 남유다를 심판하시겠다 라고 말씀해요. 

12:8 '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

8절은 남유다를 왜 심판하시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 소유가 내 마음에 사랑하는 그들이, 내 백성이, 
숲속의 사자같이 되어서, 나(하나님)를 향하여 소리를 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힘과,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해서 높아지고 아름다워졌는데, 
그들이 지금 하나님을 향해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부르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들을 미워하였다. 어찌 그들이 나에게 이렇게 행동하는가? 
나에게 반역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의 손에 내던지셨다..  :7
라고 말씀하십니다. 

12:9 '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무늬 있는 매'란, 남유다를 지칭하는데, 
매들 중에서, 좀 독특하게 생긴 매가 되게 하셔가지고,
다른 매들로부터 표적이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매들이나 들짐승들에 의해 삼켜지게 했다... 
왜냐면 딱 표시가 나는 거예요. 딱 두드러진 거죠.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심판하셨다는 거죠.

12: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결국은 표적이 되게 하셨고, 바벨론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그 땅을 완전히 황폐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내 집이요. 내 소유요. 내 사랑하는 자이지만, 
그들이 사자처럼 내게 으르렁거리며, 잘못된 길을 걸어갔기에, 반역했기에 
나는 그들을 표적이 되게 했고, 결국 다 황무지로 만들었다... 

△우리는 도대체 이런 하나님의 섭리에 '무슨 사랑이 있냐?'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신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

남유다 심판의 도구가 된 자들을 향하여, 바벨론이죠.
그 이후에 그 바벨론을 심판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케 하는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고 난 이후에 
즉 심판의 도구가 되어서 함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손을 대었던 바벨론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 바벨론의 심판하시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  ... 유다는 그들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거죠.

이것은, 심판 받은 후에, 유다가 다시 회복될 것을 예언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로운 사랑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하나님은 그냥 용납하시고 내버려두시는 
그런 무책임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속성인 공의로움을 견지하시면서,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그 무자비함을 보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공의를 보고, 그 공의가 함께 포함된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특히 심판 이후에 그것을 보게 된다.. 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우리는 또 무엇을 보게 되는가?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사랑'도 보지만 
우리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징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되지? 심판 이후에 어떻게 될까?' 
거기에 대해 매우 궁금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 받은 이후에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해서 관심도 많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 마음에 더 관심 있는 것은 
'저렇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함부로 한 바벨론은 어떻게 될까?' 
거기에 대해서 훨씬 관심이 많아요. 

그렇다면 심판 이후에 바벨론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함부로 손을 대었던 바벨론은 완전히 박살날 거야' 
이렇게 예상을 해요. 

우리는 그들 바벨론을 '지옥의 불쏘시개' 정도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큰 반전을 보게 됩니다. 

12:15 '내가 그들을 뽑아 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내가 그들을 뽑아낸 후에' 
바벨론에 심판하시겠다는 거예요. 

근데 놀랍게도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바벨론도 불쌍히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 중에 회개한 사람들을 가리키겠죠)

더 놀라운 사실을 16절에 나옵니다. 
12:16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 세움을 입으려니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전혀 달라요. 
하나님께서 그들도 불쌍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보면서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고, 
그 바벨론 이방인을 보면서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들도 내 백성 가운데 세움을 얻을 것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면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 안에 편입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백성들을 다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은, 다른 모든 세상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로 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구원하시고, 이방은 모두 멸망당하도록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고, 회복(구원)되는 것을 궁극적으로 원하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반역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죄악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서 바벨론에게도 기회를 주셔서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운다면, 
그리고 살아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한다면, :16 
그들도 내 백성 가운데 세움을 입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지만, 그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뽑혀서 멸망당한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이나 뭐가 다르냐? 
똑같이 내게 반역을 했다. 이제 똑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서 돌아오는 자에게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이나
동일한 기회를 주셔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거죠.

이게 바로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사랑하시되 공의롭게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열방 전체를 사랑하시되 공평하게 사랑하신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 친아들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보기
사랑과 공의.. 이것을 서로 모순적 명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판사가 법집행을 공의롭게 해야 하지만,
판사가 일반 죄인들을 보는 눈과,
법정에선 자기 아들을 보는 눈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공의로운 법정에서
‘일반 죄인들’을 쳐다보는 눈이 아니라
‘자기 아들들’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서로 모순된 명제로서,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집행하면, 다른 하나를 희생시켜야 하는 논리가 아니라)
둘은 항상 같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절별 해석 (참고 자료)   ........................................         한글 주석 - HANGL NOCR

 

12: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악한 자들의 번성에 대해 탄원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끊임없이 적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악이 그처럼 종종 맹위를 떨칠 수 있는지,

그리고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겪으며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의아했다.

 

문맥상 여기서 ‘악한 자’는, 11장 마지막에 나오는 ‘아나돗 고향 사람들’을 뜻한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모의했던 제사장들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모든 것이 다 바르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듯한 일들이 나타나는 사실에 대해

납득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는 바로 이 주제를 놓고 하나님과 쟁론을 벌이고자 하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다.

 

12: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예레미야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 중의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이러한 자들을 심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악인의 번성에 대한 의구심은 욥 21:7 이하에서도 표명된 바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는 말씀을 통해 찾아질 수 있겠다.

 

즉, 하나님의 섭리는 단순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악인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종국적으로 엄청난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악인을 번성케 하셨다기보다는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악인이 번성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해 두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보다 차원 높은 공의와 자비의 실행을 위한 계획이 담겨 있다 하겠다.

 

1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그들을 끌어내시되'

예레미야는 자신의 항변의 근거를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서 찾고자 한다.

즉 악행 중에서도 번영을 누리는 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오직 주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왔음을 주께서 잘 아신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행악자들을 도살당할 양을 끌어내듯이 끌어내실 것을 탄원한다.

'끌어내시되'에 해당하는 '하티켐'은 '잡아떼다', '근절하다', '당기다'는 뜻의 '나타크'의

히필형으로서 완전하고 철저한 파멸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12: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혹자는 본절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 역시 1절 이하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확실하다.

예레미야는 창궐하는 악한 새력들로 말미암아 그 땅의 모든 거민과 심지어 짐승들에게까지

재앙이 미치게 되었음을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존 브라이트는, 이 부분을 다음 구절과 연결시켜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거기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짐승들과 새들이 모두 멸절하였습니다.'

 

12: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느닷없는 대답을 볼 수 있다.

아마 하나님은 '현재의 이런 고난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더욱 험난한 일이 닥치면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하고 타이르신다.

 

여기에는 또한 두 가지 은유법이 쓰이고 있는데,

첫 번째, 보행자와의 경주가 힘이 드는데, 어찌 말과의 경주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박해나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가 장차 임할 재난과 파멸에 비하면

쉬운 것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 은유는 요단 강의 창일함에 대한 내용으로서,

이것 역시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이 평화로운 땅을 덮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12:6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5절 말씀에 대한 하나의 실례로서,

집안사람들에게마저 핍박을 당하는 고통스럽고 다급한 상황이 소개되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도 성도들의 당할 핍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셨다(마10:21).

 

12:7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내 집, 내 산업,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과는 내용상 정반대되는 동사들이 쓰이고 있는데 버리며,

‘내어던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 란 말들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의 애정과 보호의 대상이었던 백성이었지만,

이제 심판이 불가피한 것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12:8 내 소유가 숲 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다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는 고로' 이는 유다 백성들의 뻔뻔한 반항심을 묘사한 말이다.

그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악의에 찬 교만한 행동을 보였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참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

 

12:9 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벌게이트역(Vulgate)이나 시리아역(Syriac Versions)은 이를 '다채로운', '변색된' 등의

의미로 옮겼다. 결국 '무늬 있는 매'란, 위 설교에 의하면,

남의 눈에 잘 띄는 매가 되어, 주위 다른 매들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12: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이 구절은 빈정대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즉 이제 유다 백성은 주변 열국들의 약탈과 유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적들에는 모압, 블레셋, 암몬, 앗수르, 애굽 등과 함께 특히 갈대아인들까지 포함된다.

한편 하나님의 백성을 포도원에다 비유하는 표현은 이사야에서도 자주 나타난다(사 3:14, 5:1-7).

 

12:11 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

 

'온 땅이 황폐함은' 대적들의 침입으로 유다 땅 전체가 초토화되리라는 예언이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B.C. 7세기 말경 유다의 어떤 도시들,

예컨대 라기스 같은 도시는 두 단계에 걸쳐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12:12 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

 

이들 파괴자들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도구로서 그의 심판의 목적을 성취시키게 될 것이다.

이런 자들 중에는 느부갓네살(34:2, 3)과 앗수르 군대(사 10:5, 6)도 들어 있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실행에 옮기시는 날이면, 그 누구도 환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편, '육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사르'는 창 6:12의 용례에서 미루어 볼 때

죄악된 인생을 암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12:13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본절은 7-12절에 언급된 파멸 상황에 대한 결론 역할을 하는 바,

유다 백성의 죄악된 행위는 결국 그들의 기대와 노력과는 정반대의 불운을 초래함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본문은 애굽을 의지했다가 도리어 낭패에 봉착하게 될,

혹은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할 사실에 대한 언급이라 하겠다.

 

12: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버리겠고'

유다를 황폐화시키려고 작당한 주변의 모든 이웃 나라들은

이제 그들 차례를 맞이하여 황폐화되고 말 것이란 내용이다.

그들 역시 사악하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공의의 집행인들로 삼았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똑같이 공의의 집행이 시행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종종 한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악한 민족을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그런 다음 다른 민족을 불러 그 악한 민족을 응징하셨다.

 

12:15 내가 그들을 뽑아 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이것은 포로에서부터 귀환과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서,

여기에는 또한 적들 중에서도 얼마정도는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2:16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원문상 이 구절은 '그들이 배우고 또 배우면'이라는 강력한 조건절로 시작된다.

또 이 구절뿐만 아니라 10:2에도 언급되고 있는 '도'(데레크)란 '길', '여정', '양식' 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종교적 관행, 곧 여호와 신앙을 뜻하는 것 같다.

 

이들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이웃이 하나님의 관심의 테두리 내에 포함될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를 따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본문에서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맹세를 주장하는 자가

여호와를 섬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창 31:51-53 참조).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전에는 그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으며

또한 바알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가르쳤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고

여호와를 그들의 주권적인 주시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장성할 것이고 또 하나님의 백성 중에 들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약속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놀라운 우주적 구원의 성격을 띤 분명한 서술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원수라고 하더라도 구원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유용한 것이다.

 

12:17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뽑으리라'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는 자면,

이스라엘이든지 이방이든지 간에 재앙을 받아 끝장이 날 것이다.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가능성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