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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고 사건의 의미, 부활

LNCK 2024. 9. 3. 10:4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유두고 사건의 의미, 부활            행20:7~12           2023.07.09.설교녹취, 정리

계속해서 우리는 바울의 3차전도여행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3차선교여행의 거점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갔다가,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에서 아가야의 고린도까지 내려왔습니다. 

고린도에서 이제 바울은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왔던 길을 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바닷길이 아니라 육로로 방향을 바꿔야 했습니다. 
이유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죠. 

할 수 없이 바울은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고린도에서 마게도냐로 다시 올라가서, 마게도냐 거처, 배를 타고 드로아까지 갔습니다. 

이 드로아에서 바울은 일주일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아마 배의 출항 시간이, 1주일 지나서였나 봅니다.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20:6

(TV 여행채널에 보면,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다 타면 버스가 출발합니다.
그처럼 당시에, 배에 실을 사람이나 물건이 다 채워질 때까지, 며칠간 기다렸나 봅니다)

오늘 본문 행20:7~12절은 드로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룹니다. 
유두고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바울이 밤늦게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 앉았다가, 졸음이 깊어지면서 3층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그 죽은 유두고를, 바울이 기도해서 다시 살리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처럼 설교를 길게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말씀이 좋아도 긴 설교는 은혜가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유두고를 가지고 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유두고를 봐라. 창 가에 걸터 앉았다가 떨어져 죽었다. 
예배당에서 창가에 앉으면 안 된다. 강대상 바로 앞에 앉아야지, 
멀리 창가나, 기둥 뒤에 숨어 있으면 안 된다...'

자 그런데 만일 그런 의미라면, 이 본문의 이야기가 달라져야 합니다. 
먼저는 바울이 유두고를 다시 살리면 안 됩니다. 

유두고가 졸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은 거라면 
하나님께서 죽이신 건데, 감히 바울이 기도해서 다시 살려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 유두고가 벌받아 죽은 거라면, 본문 마지막에 표현이 달라져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다시 살아난 유두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두고가 벌 받아 죽은 거라면, '위로를 받았다'는 말로 마무리 되어서는 안 되죠.

어떻게 마무리가 되어야 할까요?
그가 벌 받아 죽은 거라면,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더라' 이렇게 마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 시간에 졸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가면 곤란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최소한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 오늘은 유두고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함께 추적해 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7

내일이면 바울은 이제 드로아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드로아에서의 마지막 날인 거죠. 

특별히 7절에 보면 '그 주간의 첫날에' 라고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을 뜻합니다. 일요일인 거죠.    
당시에도, 이방인들도, 일요일에 쉬며 장이 열리는 문화가 있었죠.  주1)

자 그런데 이들이 주일(일요일)날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떡을 때려 하여 모였다'고 말합니다.  :7

여기서 '떡을 뗀다'는 건 성찬을 의미하죠. 
성찬은 당시 예배의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가톨릭은 오늘날에도 매주 성찬을 하죠)

그러니까 이들은요. 공식적인 예배를 위해 지금 모인 겁니다. 
일요일에 예배를 위해 모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요일, 주일을 지킨 전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주일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때부터 유대교의 안식일에서, 기독교의 주일로 예배가 바뀌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지켰다면, 
신약의 주일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지키는 날입니다.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7
그래서 '밤중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밤중'은 자정을 의미합니다. 

요즘은 전깃불이 있지만, 당시는 없었잖아요.
그래서 대부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몸에 습관처럼 배인 시절이었죠.
그러나 '자정'은 상당히 깊은 밤이었습니다. 최고로 깊은 밤이죠.

내일이면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야 합니다. 
이곳을 떠나면, 언제 또 드로아에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더 가르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기 '강론'은 일방적인 설교가 아닙니다. 
헬라어로 보면 '토론하다' 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설교가, 말하고 질문도 하고 나누는 식으로 시간을 밤새 가졌다는 뜻입니다. 

◑20: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그런데 이 초대교회 당시 주일의 분위기를 우리가 스케치를 좀 해야 합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당시 주일(일요일)은, 오늘날처럼 쉬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일요일은 공휴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주일 예배로 모였는데, 다 일하러 나가야 하니까,
모이려면 밤에 모여야 했습니다. 하루 일과를 다 끝내고, 이제 밤에 예배로 모인 거죠. 
당시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자들이었습니다. 
대부분 낮에는 종으로 일하다가, 밤에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녁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모여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20:8
'등불을 많이 켰다'는 말은... 그 윗다락의 장소가 넓었다는 뜻이며,
도한 성도들이 많이 모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등불이 많이 필요했던 거죠. 
그리고 예배로 모인 시간이 '밤'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유두고가 졸았던 이유도, 등불을 많이 켠 관계로
산소가 많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래서 운전할 때도, 자주 창문을 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보니까 사도 바울의 설교가 길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일 떠나야 되니까 :7, 작심하고 길게 설교한 것 같습니다.

'윗다락'
윗다락은 1:13에도 나타났듯이 초대 교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개인집의 다락방을 가리킵니다. 당시는 아직 예배당이 없었으니, 개인 집에서 모였죠.
아래 층은 생활 공간이니, 윗다락을 집회 장소로 종종 이용했던 것입니다.

◑20: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유두고 라는 청년'
먼저 유두고라는 이름은, 그 당시 굉장히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당시는 '유두고'란 이름만 들어도, 그의 신분이 누구인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합니다. 

당시 유두고는, 노예들에게 붙인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버전으로는 '돌쇠, 마당쇠'와 같습니다. 
'유두고'란 이름의 뜻은 '운이 좋은, 행운의 fortunate' 입니다.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이 말은, 다른 데 앉을 자리가 없었다는 뜻도 됩니다. 사람들이 꽉 찼다는 거죠.
또는 일하다가 늦게 와서, 결국 가장 안 좋은 자리(창문 틀)에 앉았던 것입니다.
또 바울이 이제 내일 떠난다고 하니, 사람들도 평소보다 많이 모였겠죠. 
와보니까 앉을 자리가 없는 겁니다.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그것도 3층에서 퍽하고 떨어졌습니다. 아마 건물 바깥으로 떨어졌나 봅니다.
다락으로 떨어졌으면,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때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1층 밑으로 내려갔겠죠. 
내려가서 유두고를 일으켜 보니까, 이미 유두고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두고의 죽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절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바울이 '떠들지 말라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가지고 '유두고는 죽은게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두고가 죽었다'는 건 누구의 진단입니까?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의 진단입니다. 
유두고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 누가는, 유두구가 이미 숨이 멎은 시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래서 의사 누가는 사망 선고를 내렸던 겁니다.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9절에 '떨어지거늘' 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 유두고가 '떨어지다'는 헬라어로 '핍토' 라는 단어입니다. *fall down
근데 이어지는 10절에, 바울은 자 죽은 유두고에 몸 위에 엎드립니다. 

바울이 '(그) 위에 엎드려' :10
이 말은 헬라어로 '에피핍토' 입니다. *fall on, 에피+핍토

9절과 10절을 한번 이어붙여서 보세요. 
지금 누가의 의도가 보이시죠. 일부러 워드 플레이를 하는 겁니다.

유두고가 아래로 떨어진 행동과 
바울이 유두고 위에 엎드린 행동을, 지금 동일한 동사(핍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에피'는 위에, '핍토'는 떨어지다. 

여러분 유두고는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떨어진 그 몸 위로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떨어지다'의 핍토는 .. 은유적으로 '(영혼이) 파멸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유두고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떨어져 파멸된 그 유두고의 몸 위에, 그대로 떨어졌습니다. 
바울과 유두고의 몸이 포개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유두고의 몸에 그대로 합쳐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 표현에는, 워드플레이를 하는 저자 누가의 어떠한 의도가 있습니까? 
바울과 유두고의 신체적인 하나됨을 보여주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 어떤 하나의 그림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바울과 유두고의 신체적인 하나됨에서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 모습이, 즉 십자가 사건이 떠오릅니다. 

자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땅의 모든 인생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모든 이 땅의 인생들은 
결국 유두고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파멸된 존재이고요. 
끝장난 존재이고요. 더 이상 소망이라고 하나 없는 완전히 파탄난 존재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 밖에는 없습니다. 
유두고와 같이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은, 사망 선고를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위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덮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 보좌 위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마치 바울이 내려가서 죽은 시체를 덮었던 것처럼 
주님은 하늘 보좌 위에서 내려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위를 덮으셨습니다. 
우리와 하나 된 그분이, 우리를 안고, 우리의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10

△여러분, 비슷한 사건이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베다니 촌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 십자가를 앞두고,
그 얼마 전인 드로아에서,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린 것입니다.

죽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사도바울은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해졌을 것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더라도... 나는 다시 살아난다. 부활할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코 앞에 앞두시고,
베다니 촌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다시 한 번 각오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나는 다시 살아난다, 부활한다!' 

△그래서 이것이 본문에 '유두고 사건을 성경에 기록한' 이유입니다.
'설교 들으면서 졸다가 낭패를 당했다' .. 그 얘기가 아니고,
'성도의 부활 사건'을 예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예배로 모인 날이, 특별히 또한 '주일,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주일)에, 유두고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도바울은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유두고처럼) 다시 살아나리라!'
 
◑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20: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요. 
살아나서 다시 3층 다락으로 올라간 유두고와 함께 
교회가 떡을 떼어 먹습니다. 성찬을 했다는 의미죠. 

그런데 이 누가의 본문 기록을 '수미쌍관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inclusio
'수미쌍관'이란 말은, 처음과 끝이 같다는 뜻이죠.
쉽게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하는데, 중간에 들어가 있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서
처음과 끝을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는 문학기법을 뜻합니다.

7절에 '사람들이 떡을 떼려 모였다'고 했습니다.   *수
그런데 11절에 또 '떡을 떼었습니다.'   *미

그 사이 9~10절에,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중간에 들어간 얘기가 핵심, 강조하는 부분이죠.

그러니까 이 본문의 배치에는, 누가의 신학적인 의도가 담겨 있는 겁니다. 
누가는 단순히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다가 운좋게 살아난 이야기를 기록한 게 아니고,
그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통해 '부활 사건'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본문에, 어쩌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법한 이야기,
별로 사도행전 전개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유두고의 이야기'가 
특별히 배치된 이유입니다.

지금 죽음의 위험을 목전에 앞둔 사도바울에게,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는... 너무나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더라도,
여러분 우리는, 유두고와 같이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죄로 인해서 누구나 예외 없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 영원히 파멸당해야할 비참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죽은 우리 위로 예수님의 몸을 덮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안에서 in Christ'라는 표현을, 그의 서신서마다 강조합니다.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와 하나 된 그분의 몸을,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살아나심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두고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생명이 날마다 필요합니다. 

3층 다락에 걸터앉아 있는 유두고의 모습이, 
이런 면에서 오늘 예배에 나와 앉아 있는 우리 각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세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종같은 삶을 살다가 
마음의 근심과 육체의 피곤함을 끌어안고 예배의 자리로 나옵니다. 
예배의 자리에 올 때, 우리는 세상에서 녹초가 되어 나옵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싸우다가, 우리는 여기저기 찢어진 채 상처를 가지고 나옵니다. 

또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유혹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죄에 넘어져서 
피폐해진 영혼을 끌어안고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피곤하고 지친 삶을 어찌할 수 없는.. 유두고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이 부활의 생명이 날마다 필요하고, 매 주일마다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부활의 생명을, 날마다, 매 주일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12절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더라’
이 부활의 생명이 특별히 임하는 날에,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위로가, 오늘 드리는 예배에도 우리에게 가득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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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일주일을 7일로 언제부터 구분했냐 하면,
천지창조 때, 하나님은 7일째 안식하셨죠.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숫자 7을 
신성한 숫자로 생각했다고 해요.
7일째마다 '장이 서는 날'이라고 정했답니다.

또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유대력에
하나님은 안식일을 제정해 주셨죠.

그러다가 주후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7요일을 정식으로 채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