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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아픔을 딛고

LNCK 2024. 9. 3. 19:2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깨어진 아픔을 딛고          행15:36~16:10            2024.09.01.설교녹취

◑도입                 

어제 포항 영일해수욕장에서 마라톤 대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많이 참석하셨고요. 
우리 교역자들 10명이 5킬로 달리기에 참석해서 전부 다 완주했습니다. 
아주 좋은 시간이었고요. 

지난 봄에 우리 교회 <소명과 잠재력 클래스> 하면서 
우리 인생에 목적을 정하고, 또 '좋은 습관들이기'를 결심했는데 
그때 제가 '달리기 하겠습니다'라고 말해 놓고, 지키기 위해서 그간 열심히 달렸습니다. 

 

이제 마라톤 대회에 가보니까, 시민들이 굉장히 많이 모였고요. 
60대 되신 분들도 많이 참가하셨고, 젊은 가족들은 유치원생 꼬마들 데리고 와서 
같이 달리는 부모들도 많았아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5Km, 10Km 느끈히 뛰시는 모습을 보고 왔습니다. 

▲우리가 달리기 준비하면서 동기부여한 이야기 중에 하나가 
여러분 <815 런> 마라톤을 아십니까? 
션 이라는 가수가 광복절에, 815를 기념하기 위해서, 하루 동안 81.5Km를 뛰었답니다. 

그렇게 뛰고 저녁에는 또 모여 가지고 '함께 뛰자'는 '국민적 이벤트'를 모집했는데, 
삼일절이라고 3.1Km 를 뛰고,
1945년 광복을 되찾은 해를 기념하기 위해 4.5Km 를 뛰고,
815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8.15Km를 뛰는 이벤트를 열었는데, 
참가자들은 위 세 가지 코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뛰면 된다고 합니다.
2022년에는 전국에서 16,300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2020년에 시작된 ‘815런’은 
80년 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젊음과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그 후손들의 더 나은 주거 안정을 위해 달리는 기부 러닝입니다.

참가자들이 이제 등록비를 내고, 또 모금활동을 벌여서, 
독립유공자들 중에서 집이 없는 후손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운동을 합니다. 
13억이 모금 됐대요. 지금까지 4년 동안에 45억이 넘는 기금을 조성해서 전달했습니다.

가수 션은, 81.5 Km를 뛰는 준비를 하면서 발톱이 6개나 빠졌답니다. 
주위에서 '뭘 그렇게까지 하냐?' 이렇게 말할 만하죠. 
그러자 가수 션이 라디오에 나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위에서 제게, '그렇게 멀리 뛰지 말고 8.15 Km만 뛰어라' 
'굳이 81.5 Km를 뛰려면, 구간을 끊어서 뛰어라'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그냥 감히 제가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하신 분들도, 그 가족들도 그렇고, 
주위에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그냥 웬만큼 하면 되지 않을까?' 
라는 말씀을 듣지 않으셨을까요? 

그래서 저도 8.15 Km를 뛸 수도 있지만, 
최선의 것을, 최고의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고자 그랬습니다.

(그래서 81.5Km를 연속으로 뛰었죠) 

독립운동가 옆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죠.
'그냥 웬만큼 하면 되지 않을까?'
'독립운동, 그거 좋지만... 필요한 거 다 알지만... 
그렇게까지 고문을 당하면서, 몸을 상하면서, 옥고를 치르면서, 
처자식 고생시켜 가면서까지 해야 하나?' 

▲저(설교자)는 이 말을 듣고, 이 말 앞에 한참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말들을 생각하는 가운데, 바울 사도가 떠올랐습니다. 

'웬만큼 하시죠. 그만하면 많이 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그 분은 아마 수 없이 들었을 것 같아요. 

 

고후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를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서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으며... 
(한 번만 맞아도 사경을 왔다 갔다 할 텐데, 그런 매를 5번이나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하루 밤낮)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선교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럼에도 그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러한 고난 가운데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바울의 이야기를, 사도행전에서 읽고 있습니다. 

◑본문 해석 /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어 헤어지다

그런데 이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는, 의외로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동역자와 크게 싸우고 다투는 겁니다. 그것도 바나바와! 

바나바는.. 바울 인생 전체를 걸쳐서,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은혜를 입은 분입니다. 
이분이 아니었다면, 바울의 오늘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의견 차이로 다투었습니다. 배경은 여러분이 아십니다. 

앞서 행15장 본문에서도, 교회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구원 조건과 관련된, 양보할 수 없는 진리를.. 목숨 걸고 지켜야 했습니다. 

전체 교회가, 이 어려운 문제를 잘 다루고, 일치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대단합니다. 존경받을 만합니다. 
그 결과를, 공적인 편지를 써서 각지의 교회들에게 보냅니다. 

편지가 닿는 곳마다, 감격과 기쁨의 물결이 이어져요. 
이렇게 원만한 결정을 내린 예루살렘 교회의 신망은, 더욱 올라갑니다. *행15장

그 중심에 있었던 바나바와 바울, 
어쩌면 적진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까지 가서, 
이방교회의 상황을 전하고, 이런 결정을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던 두 사람에게는 
가는 곳마다 박수가 쏟아집니다. 

'이제 됐다. 이 정도 어려운 문제도 원만히 잘 결정하고 일치를 이루어냈다면, 
이제는 교회가 반석 위에 선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함께 하면 어떤 파고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는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우리가 다시 전도하러 갑시다!'
이렇게 해서 2차선교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행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근데 그 전도여행을 준비하면서,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싸웁니다. 
팀을 꾸리는데 이견이 생겼습니다.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여러분, 심각한 말이죠.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 

1차전도여행 때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버린 마가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고, 자기 조카이기도 했거든요. 
바울은 '마가는 안 됩니다' 하고 단호하게 자릅니다. 

얼마 전에, 예루살렘 공의회 때는, '구원의 조건'이라는 아주 어렵고 큰 문제였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이거(마가의 합류)는 사소한 문제 아닙니까? 

근데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고 싸웁니다. 
그렇게 호흡을 서로 잘 맞추던 두 어른이,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분들인데...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 뜻을 구하면, 자신을 내려놓게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한마음으로 인도하시는데... 왜 일치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라,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렇게 하나됨을 강조해온 사도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분쟁이 있으면,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특히 젊은이들, 새신자들이 그렇죠. 

저는 미국에서 이민교회를 생기면서, 이웃 교회들이 분쟁하며 고통 당하는 것을 종종 봤습니다. 
청소년들이 친구들하고 교회에서 정말 친형제같이 지냅니다. 

근데 그 부모들이 갑자기 서로 등을 돌리고, 고소하기도 하고,
모일 때마다 친구 아빠 엄마를 욕하면... 그 자녀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는지요... 
자기와 친한 친구관계가 묘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부모들이 서로 싸우므로.

그래서 어떤 아이는, '내가 죽어버리고 싶다'는 말까지 하는 걸 들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 내가 그렇게 존경하던 분들인데,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니...'
이런 일을 겪으면서 교회 떠나는 분들도 많습니다. 신앙을 잃는 분들도 있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원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들 아시잖아요. 
'너와 내가 다르다. 서로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너와 나의 차이는 different 한 것이지, wrong 은 아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죠. 여러분, 사람들은 서로 다릅니다. 
너와 내가.. 생각이, 경험이, 입장이 각자 다 다릅니다. 

우리 교역자들이 이 본문으로 성경공부를 같이 하면서,
여담으로 '바울과 바나바의 MBTI가 뭘까?' 생각해 봤습니다. *성격진단

MBTI로 볼때, 바울은 ENTJ (지도자형) 에 가깝다고 합니다. 
목표 지향적이고, 조직적이며, 자신의 사역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한 점에서 
그는 J형인 것 같아요.  

반면에 바나바는 ENFP 라고 추정합니다. *재기발랄 형, 스파크 형
바나바는 따뜻하고 격려하는 성품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신앙 공동체 내에서 조화와 관계를 중시하는 성격이라고 합니다.  F형의 특징이죠.

MBTI가 이제까지 나온 성격검사 도구 중에서는 가장 유용하다고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런 검사를 한번 해보면, 
'너와 내가 다르다, 나와 다른 성격의 사람이 있다. 나와 정반대의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유익이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목자모임을 하면서, 이 본문을 공부했는데 
제가 한 번 '손 들어 보시라' 그랬습니다. 
'나는 바울에 가깝다'는 사람이 손을 들고, 
'나는 바나바에 가까운 사람이다'는 사람도 손을 들어 보았어요. 

어느 쪽이 더 많았을 것 같아요? 네, '바나바 형'이 압도적으로 많더라고요.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사고구조에는 바나바 형이 좀 더 친근합니다. 
한국 사람들을 포함해서 동양 사람들은 '관계 중심'으로 사고 하거든요. 

◑적용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원숭이와 팬더와 바나나' 그림을 보여주고,          
'가까운 거 두 개를 묶으라' 그러면, 
동양 사람들은 대부분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습니다. 왜요?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달라요. '원숭이와 팬더'를 묶습니다. 
둘은 같은 동물이잖아요. 바나나는 식물이고...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은 '분석적,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동양 사람들은, '따뜻한 관계 중심'적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식구, 우리 친척, 우리 학교 동문, 동향 사람은.. 친근하게 여기죠. 
그래서 '그가 틀려도, 나와 친한 사람이면... 맞다'고 얘기하죠. 

여기에 더해서, 교회 다니는 분들은, 평소에 워낙 

'이해하세요. 양보하세요. 관용하세요. 은혜롭게 합시다' 이런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다 흐물흐물해요. 좋은 말로 너그럽습니다. 

이런 사람마다 성격 차이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아요. 

▲바울을 보세요.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38
'내가 옳다. 당신은 틀렸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보는 각도에 따라서, 양쪽 다 맞고, 양쪽 다 틀렸습니다. 
바나바가 좋아 보이는 면이 있어요. 내가 마가 라면 그렇게 돼죠. 

반대로 바울 입장이 되면, 갑자기 마가가 떠났기 때문에 
큰 프로젝트(1차선교여행)를 진행 중에, 적지 않은 차질을 빚게 되었어요.

 

'기록원'으로 동행했던 마가가 없어져버린 거예요.  *13:5 '수행원'
그러면 프로젝트 전체를 생각하던 목표지향적인 바울에게는... 쉽게 용납이 안 돼죠.

여러분, 바울도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게,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선교 여정이었습니다. 

마치 바이올린 줄처럼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바울에게, 
누가 약간만 잘못 건드려도, 그 줄이 터져(끊어져) 버리는 거죠.

▲제가 지난 7월에, 타우루스 산맥을 차를 타고 넘었는데요. 
밤빌리아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넘어가는 여정에 넘게 되는 험산준령입니다.
 
차를 타고 넘어도 굉장히 험한 길입니다.
이 길을 걸어서 넘었다니... 
그리고 그 지역에는 산적이 출몰했다는 기록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로 팀으로 움직여요. 또한 운반해야 하는 물품들도 많았을 거예요.
일단 식량이나 물을 배낭에 짊어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젊은 일꾼 한 명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빠진 것은, 
굉장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라고 우리가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팀의 사기가 완전히 꺾이는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리더십'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한국 역사를 통틀어서 '리더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은 이순신 장군이죠. 
리더십이 탁월한 분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난중일기>나, <칼의 노래> 이런 책을 읽어 보면, 
이순신 장군이 정말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부하 장수들을 격려하고, 
병사들의 복지, 먹을 것까지 아주 꼼꼼히 챙기는 자상한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탈영하는 병사가 나올 때는, 가차 없이 목을 베었습니다. 참수형에 처했죠.
군기가 서릿발 같았습니다.
<난중일기>를 읽는 우리가 '비정하다. 냉정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리더의 입장에서는, 여러분 군율이 무너지면, 
그래서 전쟁 때 두려움에 눌려서 도망가는 이들이 속출한다면, 
더 많은 부하들이 희생될 것입니다. 나라가 위태해질 것입니다. 
훨씬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래서 리더는, 때로는 그런 비정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순신' 하면 무슨 느낌이 떠오르세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실 거예요.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一聲胡笳 : 한 곡조의 피리소리
 
여러분, 임전무퇴로 막 앞으로 나가는 장면보다도,
이순신이란 한 인간이 수루에 홀로 앉아, 깊은 시름하는
그 외롭고 고독한 모습... 

그렇죠. 리더의 자리가 본래 그래요. 
이 나라가 지금 경각에 달렸는데, 임금도 나를 안 알아줘요. 
많은 신하들이 자신을 공격합니다. 그 긴장 관계를 견뎌내는게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런데 이순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14개월 전까지만 해도, 저 시골의 말단직이었어요. 정읍 현감. 

이때 그를 알아보고, 전라좌수사로 전격 승진된 게 류성룡 때문이었습니다. 
종6품이 일거에 정3품으로, 7계단을 승진했습니다.

공직에서는, 전무후무한 발탁이었습니다. 
당시 좌의정 겸 병조판서였던 류성룡의 천거였습니다. 

'이순신이 나라를 구했다' 라고 하는데, 류승룡이 없으면 불가능했습니다. 
그 후에도 이순신이 많은 모함을 받을 때마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 류성룡은 이순신 편에 서 주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는 '두 사람의 만남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위대한 만남이었다'고 평했죠.
<난중일기>에는 꿈 이야기가 40번 나오는데, 
그 중에 4번이 류승룡에 관한 것입니다. 그만큼 류성룡 꿈을 많이 꾸었습니다.
이순신도, 그가 자기에게 중대한 인물이었다는 거죠. 꿈에 자주 출몰할 만큼.

이순신이 쓴 많은 서신들 중에, '류승룡' 이름이 등장하는 서신이 15개나 됩니다. 
이순신에게는 절대적인 존재가 류성룡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류성룡 같은 존재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던 사람이, 
이제 예수 믿게 되었고, 전도자가 되었는데... 그런데 아무도 자기를 안 믿어줘요. 
다들 사울을 슬슬 피해요. 뒤에서 욕해요. 

그런데 바나바가 사울의 손을 잡고 와서 '우리가 이 사람을 믿어줍시다.' 
그래서 바울이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리고 또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인의 핍박에 직면해서 
자기 고향 다소로 내려가 있는데... 그 시간이 10년 가량 되었습니다. 낙향 기간이 길었죠.

그래서 사울은 낙심해 있었는데, 바나바가 그 험한 길을 먼 길, 다소까지 찾아가서 
수소문해서 사울을 찾아서, 안디옥으로 데려와서, 다시 사역자로 세워줍니다. 
바나바 없이는 바울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류승룡 없이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요! 
근데 만약에 이순신이 유승룡을 들이받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사도행전은, 본문의 갈등 사건이 벌어진지 한 30~40년 후에 기록된 역사이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기 때문에,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그때 바로 그 현장에서 있었던 그 갈등이 주는 파급, 교회에 미쳤던 영향, 
그리고 그 속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겪었던 심적인 혼란과 고통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바나바와 결별하고 나서, 자기가 이제 선교팀의 팀장이 되어서 
길을 앞장 서서 가야 되는 바울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다. 

16:6~9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못하게 하시거늘...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여러분, 위 구절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이미 바나바와 결별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러분, 이게 바울에게, 얼마나 마음 저리고, 실망되고, 좌절되는 일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사역하려고 그러는데, 길이 자꾸 막혀요. 
하나님이 못하게 하시는 것 같아요. 
(아시아로 가려는 길을) 왜 허락 안 해주시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여러분의 인생에 이런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하려고 하는 일마다 막히고, 꼬이고, 안 풀리고... 
그럴 때 어떤 생각이 들지요? 
'내가 뭘 잘못했나?'하고 자책하게 되죠. 

여기서 바울도 그랬을 것 같아요. 
내가 바나바를 따라다닐 때는, 거침없이 그냥 갔어요. 마음이 편했어요.

근데 막상 내가(바울이) 팀장이 되고 보니까, 앞에 길이 안 보여요. 
어디로 가야될 지, 결정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요. 
'혹시 바나바랑 헤어진 거 때문에 이렇게 됐나?' .. 이런 생각도 들었을 거예요.

사역자들도 그래요. 부목사로 사역할 때는, 뭐 목회를 다 알 것 같아요. 쉬운 거 같아요. 
그런데 막상 담임목사가 되고 나면, 결정 하나가 얼마나 힘들고 부담이 되는지요... 
긴장이 되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다' 다들 그럽니다. 

바울이 지금 그래요. 남쪽(아시아)으로 가려고 해도 안 돼... 
저기 북쪽(비두니아)도 길이 막혀요. 
동쪽은 자기가 이미 왔던 길이고, 서쪽은 바다로 길이 막혀 있어요.
 
이때 바울은, 바나바 생각이 났겠죠. '팀장 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여러분, 인생에서 참 어려운 때는, 내가 내 감각과 판단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과정입니다. 
근데 이 분별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뭐가 하나님의 뜻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특별히 리더가 되면... 외로워집니다. 
그 외로움이 너무 깊으면... 그리고 그것이 자책과 함께 갈 때, 
우리의 영적 감각이 교란됩니다. 

평소에 잘 선택하고 가던 것들도... 그 때는 자신을 의심하게 돼요. 
내 판단을 내가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영적 감각이란, 인생 행로 전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삶의 모든 결정들... 어디로 진학할까, 어디에 취업할까, 
사업을 어떻게 진척시켜 나갈까? 이번에 투자를 해야 될까 말까, 
결혼에 관한 결정... 그렇죠. 중요한 결정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내 결정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영적 침체의 징후입니다. 

대체로 자책과 위로를 오가죠. 
'야, 내가 진짜 잘못했어.. 나는 왜 이럴까.. 나는 바보 같아..' 하는 자책과,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지..' 라고 하는 스스로 애써 위로하는 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불안이 더해집니다. 

▲저는 미국에 유학 가서, 박사과정 논문 자격 시험 마치고, 바로 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교회가 많이 성장하고 부흥했는데, 
2년쯤 되어가던 시점에 시카고 지역에서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아주 뭐 성장 과정이 지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근데 그러고 몇 주 후에 제가 '교회를 사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해 가을에,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문제가 더 커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2주 후에 사임하겠다'고 통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2주 동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숨은 죄가 다 드러나고요.
침묵하고 조용히 신앙생활하던 분들이, 담임목사가 그만둔다 그러니까,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2주 만에 교회의 문제가 다 정리가 되었고, 제가 그만두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대신에 몇몇 분들이 교회를 떠났고, 저는 계속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문제가 생겼어요. 
제가 복귀해서 그 다음 해부터 사역을 해 나가는데, 
교회의 성장세가 꺾이고, 목회가 뭘 해보려 해도... 과거처럼은 안 되는 거예요. 

처음 2년 동안에는, 뭘 하기만 하면 잘 됐습니다. 
심지어 야외예배를 갈 때도, 좋은 날씨가 따라주었고요,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교인들 모두들가 얼굴에 행복한 표정들이 가득했습니다.
'우리 교회 야외 예배가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거야?'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교회가 한번 꺾이고 나니까, 뭘 해도 과거의 동력이 안 나오는 거예요.
교회를 떠나간 몇 분들의 여파인지도 모르죠. 그 분들도 자기 역할이 있었던 거죠.
그러나 얼마나 성도들이, 기가 죽는지 모릅니다. 분위기가 활발하진 않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영적인 위기는,
목회자인 제가, 나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는 거예요. 
참 힘들게 그 시기를 지났습니다. 

지나고 보면 그 시간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때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막 박사 과정 공부하다가, 교회를 개척해서 급성장했기 때문에 
막 정신없이 달리는 가운데, 공부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 거예요. 

근데 제가 미국에서 교회 개척했다는 소문을, 한국에서 들은 분들이 
저를 걱정하신 거예요. '이제 박 목사(설교자) 박사 학위는 물 건너 갔구나'

그럴 즈음에,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밟으신 것 같아요. 
교회에 어려움이 있으면서, 오히려 제가 자신을 돌아보고, 
박사 학위 공부할 시간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한국에 와서, 교수도 하고, 또 지금 여기서 목회도 할 수 있게 된 거죠.
하나님이 교회의 어려움을 통해서, 선하게 인도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거죠.

개척한 교회도 그런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내적으로 탄탄해지고, 더 성숙해 졌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때 모두 다 잘했다 라고 할 순 없어요. 
굉장히 목회자로서 제가 미숙했습니다. 

교회에 분쟁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한 쪽의 책임인 경우는 별로 없어요. 
교통사고 나면 쌍방 과실인 것처럼, 교회에 갈등이 있으면 
내가 잘못 처신한 부분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가장 큰 자랑 중의 하나가 
큰 분열 없이 하나의 교회로 지금까지 1백년 이상 이어져 온 것입니다. *1905년 창립

우리 교회라고 지나온 오랜 세월 속에서 왜 갈등의 소지가 없었겠습니까?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에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하나의 교회로 이어져 왔다는 것은, 그 이면에 
많은 분들이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속으로 삭히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여러분이 힘 써서 하나가 되십시오!'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 될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되게 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이미 하나되게 해 주신 것을 지키기만 해도 
그거는 대단한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큰 실패를 자기가 경험 안 했다고, 
어떤 면에서 보면, 잘 살아온 게 결코 아닐 수도 있어요. 

예를 들면 '초보 운전' 표시를, 차 뒤에 붙이고 다니는 분들 가운데, 
막 끼어들고, 더 난폭하게 운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서울시내 강남에서 출발해서 종로까지 차를 몰고 갔어요. 
초보 난폭 운전으로 갔어요. 사고 안 나고 종로에 잘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운전 잘 했습니까? 아니에요. 나야될 사고가 안 난 거예요. 은혜지요.

여러분, 내가 멀쩡하게 오늘까지 아무 일 없이, 큰 대과 없이 살아왔다고, 
내가 다 잘한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 주셔서, 오늘까지 왔다는 거죠.
'나는 난폭 운전을 했어도, 하나님 은혜로 사고가 안 난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오늘 지금 이만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저희 교회가 오늘까지 하나되어 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서, 그 분쟁 가운데서 정말 하나 될 수 있었던 것도
물론 사람들이 잘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믿습니다. 

은혜 아니면.. 사람들은 싸우게 되어 있어요. 
은혜 아니면.. 내 못난 자아가 삐죽삐죽 튀어나와요.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 될 능력이 없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무슨 날카로운 도구들 있잖아요. 
칼이나 송곳, 이런 것들을 들고 가야 되는데, 
두꺼운 가죽 재질의 가방이나, 단단한 케이스가 있어야 되겠죠. 
그게 없어서 비닐 쇼핑백에 넣고서 들고 갑니다. 어떻게 될까요? 

근데 조심해서 가다가도 얼마 못 가서요. 삐죽삐죽 튀어 나옵니다. 
칼끝이 나오고, 송곳 끝이 삐져나오고요. 그게 나를 날카롭게 찌르기도 하고요... 

물론 바울은 우리보다 인격이 나았습니다. 훨씬 훌륭하고 성숙한 분입니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았어요. 사람은 칼 끝, 송곳 끝처럼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저는 처음에 성경공부할 때는, 이게 그냥 바울이 겸손한 척 하려고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어요. 
'바울쯤 되면 이제는 완전의 경지에 이르렀겠지...'

그런데 성경을 계속 보니까.. 아니네요. 바울의 고백이 너무 사실이에요. 
그렇잖아요. 바울이 바나바와 싸우는 거 보세요.

이 두 사도가, 얼마 전에 1차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이런 일을 경험합니다. 
바울이 막 병을 고치고, 앉은뱅이 일으키고, 이러니까 
그 능력만 보니까.. 그때 그 지방 사람들이 뭐라 그랬습니까?  14:12
바나바는 제우스로, 바울은 헤르메스(그의 대변인)로 칭송했습니다.
그들을 신으로 여기고, 그 앞에서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14:14~15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이것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너무도 절절한 자신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낙심하고, 우리도 자기 중심적이고, 
기분 나쁜 거 있으면 그냥 순식간에 분노하고... 그런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라는 거예요. 

바울과 바나바가 그럴 정도니...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실망할 때,  
하는 일마다 다 막히고 내가 내 판단을 신뢰하지 못할 때에 
의외로, 하나님은 가장 큰 걸음을 옮기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결국 길이 막힌 연고로, 마게도냐로 갔잖아요. 
아시아에 머물러 있던 선교가, 유럽으로 향하게 되었잖아요. 
세계 역사의 가장 위대한 빅 스텝이, 이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선교팀이 깨어진 아픔을 딛고서... 
바울이 '야 나 같은 것이, 이 못난 것이 도대체 어디에 써 먹겠나?'
이렇게 자책했을 바울,  

바로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나는 막 헤매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 거예요. 

내 인생, 이것저것 다 막히고, 안 되는 것 같은 그때에 
하나님은 나를 위해, 나를 사용하시려고 
더 좋은 길을 예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인도하심 받고 쓰임 받는 우리 모두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