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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LNCK 2024. 9. 4.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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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 사도행전 14:19-28 - YouTube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행14:19~28         2024.08.29.       

 

◑도입

 

9월 첫째 주에 청년집회부터 시작되어지는..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열리는 
예수동행집회를 위해서 오늘 우리가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하여 모였는데,

이렇게 모인 우리들 안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계속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차원도 그렇고, 
개개인의 삶 차원에도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두렵기도 하고 또 낙심하게 만드는 
일들을 우리가 계속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과 정말 함께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에게 주는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유익은,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검증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정말 바라보지 못하게 되면, 그러면 문제 속에 매몰 됩니다. 
죽을 것 같고, 너무 힘들고, 너무 억울하고, 너무 슬프고, 너무 막막하고... 
이런 감정이 극복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실제로 문제가 어려워서, 문제가 많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문제라면, 어려운 일이 없다면 괜찮은 걸까요? 

힘든 일도 없고, 뭐 괴로운 일도 없고... 
또 어떤 절벽이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위기 상황도 전혀 없는... 
편안하기만 하고, 모든 게 다 무난하고 그러면... 사람은 행복한 걸까요? 

가정 생활은, 항상 문제가 같이 동행합니다. 그죠.
우리가 교회 섬기는 일에도, 어느 교회나 동일하게 다 문제가 함께 일어납니다. 
또는 우리가 직장생활 하다보면, 항상 그 안에 문제도 함께 있습니다. 

가정도 없고, 학교도 없고, 교회도 없고, 직장도 없으면, 
그러면 우리는 정말 행복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 느끼죠. 

그렇죠. 문제가 있지만.. 가정이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하며,  
어려운 일이 있어도.. 교회는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힘든 일, 어려운 일, 고비가 많아도.. 직장이 주는 이익은 엄청 크잖아요. 

그게 (가정, 교회, 직장이) 없어지고 나면 알게 됩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게 너무나 소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제는, 
어려운 문제나.. 또는 또 그 문제가 많은 것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정말 예수 그리스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내게 실제 믿음이 되었냐/ 아니냐?' 하는 데 달려있는 거예요. 

여기서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여러분의 모습만 보면, 
하나도 문제가 없으신 분들 같아요. 

그러나 이제 하나하나 자기 문제를 털어 놓기 시작하면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아마 우리 안에 있겠죠. 

그런 어려운 문제들 속에, 힘드신 분들은 꼭 해보세요. 
주님이 우리에게 아주 명확한 답을 주신 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주님 안에 거하는' 시간을 꼭 가져 보세요. 
재정의 문제든, 건강의 문제든, 또는 가족의 문제든 
또는 깨어진 관계의 문제든, 여러분 진료의 문제든, 
사역이나 사명 때문에 갖는 문제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오늘 밤에 당장 해결해야 될 아주 난감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을, 내가 정말 믿고 
여러분이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다면... 그러면 그 문제 속에서, 
'어디서 이렇게 내가 편안하며, 어떻게 이렇게 내가 기쁠 수 있나?' 
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 문제가 문제가 아니었구나.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시는 예수님, 그 주님의 대한 나의 믿음이 
실제 reality 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였구나...' 하는 걸 내가 알게 돼요. 

▲<예수동행집회>를 이제 목요일마다 매주 갖는, 그런 체제로 가게 되는데 
이제 두 캠퍼스로 시작을 합니다. 

앞으로는 도시마다 캠퍼스가 이렇게 늘어나게 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예수동행집회를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에 대하여, 
눈이 뜨이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또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교회가 많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어떤 역사의 원형이, 예수동행 목요집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들이, 
개개인에게, 또 교회 교회마다 열려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또 다시 루스드라로 들어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사도행전 14:19~28절은 
올해 2024년에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이어가는 이번 주의 본문입니다. 

그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납니다. 

그래서 루스드라에 왔을 때, 거기서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놀랍게 치유하여 일으키는 
기적을 행합니다. 그러자 루스드라가 뒤집어져요. 
'신이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내려오셨다' 그렇게까지 반응할 정도로 
뭐 온 루스드라 성이 뒤집어집니다. 

그때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고, 몰려가서 사도 바울을 돌로 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서, 실제로 사람들이 보기에 죽었다고 판단이 되어서
바울의 (시신을) 성밖에 내다 버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서 다시 일어났어요.
제자들이 바울의 시신을 찾아서 둘러서서 기도하는데.. 바울이 기적적으로 일어났어요.
 
그때의 경험을 그가 고후1:8~9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힘이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 구절의 '사형 선고'를 실제로 겪었던 곳이 루스드라 예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그래서 사람들은 다 죽은 줄 알았는데, 
바울이 다시 호흡을 하고, 그리고 동료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서 
그가 250리나 떨어진 더베 라는 곳으로 갑니다. 
거의 몸이 다 망가진 상태로 간 거죠.

근데 놀라운 것은, 그가 더베로 거기까지 걸어가요. 
앰뷸런스 타고 간 것도 아니고, 그 돌아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몸을 이끌고,
여기 저기 상처와 골절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 몸을 이끌고 250리 길을 걸어서, 더베에 가서 전도를 했다는 거죠. 
정말 믿어지지 않는 성경의 기록이에요. 

'이게 말이 되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예요.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자기가 돌에 맞아서 죽을 지경이 되었던 (혹자는 죽었다고 보죠)
루스드라로, 그가 되돌아 갑니다. 

거기로 되돌아 가는 이유는, 자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즉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진짜 죽게 된 자기를 보고, 
복음을 전도 받았던 교인들이 혹 마음에 낙심을 할까봐... 
'아 예수 믿는 거는 끔찍한 일이네.. 
복음을 전했던 사도바울이 저렇게 하다가 사라져버리고 마네' 

그래서 그들이 실족하게 될까 봐, 그들에게 복음으로 다시 권면하여, 
그들을 믿음으로 일으켜 세우려고 돌아갔다는 거예요. 

14: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자 이 루스드라 에서 사도바울이 겪었던 이 일을 가만히 보면, 
'아, 고난이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걸 알게 돼요. 

힘든 일이, 어려운 일이 우리를 좌절시키는 게 아니라는 거죠. 
만약에 그랬다면, 사도바울은 정말 무너져야 할 사람이죠. 

근데 사도바울은, 우리가 살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닥쳐오는 고난, 즉 
-가정을 꾸려 가족을 이루다 보니까 겪는 어려움, 
-직장생활 하다 보니까 부딪히는 문제들, 
-우리가 교회를 일으켜 세우며 가다 보니까 겪는 갈등들... 이런 문제가 아니었던 거예요. 

 

사도 바울은 전혀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사람입니다. 단 하나만 하면 돼요. 
전도만 안 하면, 이방인들을 찾아가서 전도만 안 하면, 
사도바울은 이런 일을 겪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사도바울은, 이런 고난을 스스로 자초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랬던 사도바울을 보면서, 우리가 무슨 도전을 받게 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뭔가에 사로 잡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돼요.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이 루스드라를 다시 방문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한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사람이 누구나 다 본성이, 고난을 싫어하고, 
돌에 맞아 죽을 지경까지 되는 일을 누가 겪고 싶겠어요?
혹시 그런 일을 어쩌다 겪었다고 한다면, 다시는 이제 그런 일을 안 당하고 싶죠. 
얼마나 끔찍한 일이에요! 

근데 사도 바울이 그런 일을 겪고도 
그런 일을 겪었던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또 돌에 맞을 수도 있잖아요)
거기서 믿음의 형제들을 권면하여, 그들을 다시 격려해서 세우는 이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진짜 주목해 봐야 될 것은, 
'도대체 사도 바울이 무엇에 사로 잡혔나?'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 잡힌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막연하게 믿는 대상이 아니었던 겁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함께 계심이 실제였던 사람이었어요. 
그게 오늘 본문 행14장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모습이에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전도 여행을 떠날 때, 행13장에서,
그 전도 여행을 떠났던 일 자체가, 성령께서 명확하게 
'이제는 도시마다 찾아다니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명하셔서 떠납니다. 

사도바울이 스스로 떠난 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떠나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주여,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렇게 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냥 떠나면서 '이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일 거야!' 라고 의미를 붙인 것도 아니에요. 
전적으로 성령께서 '이제는 복음을 전하러 떠나라' 하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 전도여행 중에 부딪혀 왔던 많은 시련들, 
심지어 돌에 맞아 죽을 지경이 되는 일 조차도, 그를 낙심시킬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반드시 이 일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가 있을 거야' 하는 
확신이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막연한 믿음이 되지 말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역사는, 
어떤 어려움도, 어떤 시험도... 그를 무너 드리지 못하는 거예요. 
너무나 큰 확신 때문입니다. 

무서운 핍박이 있어요. '그래도 반드시 이곳에 예수 믿을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도시에 교회가 세워진다. 예수님은 반드시 역사 하신다. 전도는 반드시 된다' 
그러니까 믿음은 정말 놀라운 일인 거예요. 

사람이 한 번 믿어 지면, 막을 방법이 없어요. 
'내가 진짜 믿음이 있냐, 없냐?' 하는 것은, 어려움을 겪어봐야 알아요. 

어려움이 없을 때는, 내 믿음이 진짜 믿음 인줄 모릅니다. 
근데 내가 분명히 믿었어요. '주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 

그런데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큰 시험과 어려움이 닥쳐요. 
사실 그때가 바로 내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를 검증해 보는 시간이에요. 

'주님은 우리 가정에 계신다. 우리 가정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 
근데 가정에 어려운 일이 생겼어요. 큰 시험이 생겼어요. 
믿음이 다 흔들릴 정도예요. 

예수를 진짜 안 믿는 식구 몇 사람은, 완전히 마음이 그냥 굳어져 버리고, 
그럴 때가 사실은 믿음이 진짜 필요한 상황이에요. 

'그래도 주님은 우리 가정 안에 진정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이게 믿어 지면, 믿음으로 반응하게 돼요. 

그런데 전혀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회도 그렇고, 예수동행운동도 똑같아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 일을 시작하게 하셨느냐?' 하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러면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방향으로 가요. 

환란이 오고, 시험이 오고, 문제가 생겨도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방향으로 끝까지 가게 돼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 같은데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이미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나고 나서 보면, 그 골짜기를 지나서 푸른 초장을 만나게 돼요. 

사도 바울이 그랬던 거예요. 
바울과 바나바는, 실제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주목했습니다. 

비록 돌에 맞고,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어도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았어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을 파송해 주었던 안디옥교회로 돌아가서 
그 1차전도여행을 했던 보고를 하게 됩니다. 

근데 그 보고를 할 때, 사도바울이 뭐라고 보고 하냐면, 
14:27절에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았던 거예요. 
혼란도 있었고, 대적하는 사람도 일어났고, 
자기가 죽을 정도로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지만, 

그것보다도 사도 바울이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영혼이 구원 받고, 
도무지 믿음을 갖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믿게 되고, 
도무지 교회가 생기지 않을 곳에 교회가 이루어지는... 이런 일들을 본 거예요. 

'아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 
그래서 그가 가서 보고할 때,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고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거예요.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예수동행일기를 매일 쓰자고 하잖아요. 
동행일기에 도대체 뭘 쓰나요? 

오늘 하루 아침에 내가 눈을 뜨고 밤에 잘 때까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는 거예요. 

'제게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런 사람은 그날 일기쓰다가 거의 기절할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어요. 

근데 이제 잠잠이 '주님, 주님이 행하신 일을 저에게 알게 해주세요.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그때부터 이제 거의 기적을 경험하는 거예요. 하나하나 생각나기 시작합니다. 

'아 하나님이 이것도 행하셨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오늘 하루의 생명도 주셨구나. 
아 그 사람을 하나님이 만나게 하셨구나. 그런 일들 속에서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구나' 
근데 정말 저녁에 그걸 다 쓰다 보면, 정말 얼마나 많이 써야 될지 모르게 될 거예요.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안 되는 분들도 있긴 하지만, 
매일 매일 우리가 예수동행일기를 쓰는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만약에 내가 일기를 안 쓰면,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은 
다 망각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잠을 자고 나면, 어제 일은 기억에서 다 사라져 버려요. 
근데 기록하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그대로 기록이 돼요. 

그 기록이 한 달이 모이고, 그리고 일 년이 모이면, 
그건 본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엄청난 놀라운 비밀이 돼요.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 사실이냐?'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심지어 목회자들 조차도 잘 못 믿어요. 

실제로 정말 하나님이 행하신 하루 하루를, 기록해 보신 사람들은 
그걸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러했어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안디옥 교회에 돌아가서 보고했다는 겁니다. 

금광석 이라는 돌덩어리는 거의 대부분이 돌이에요. 
약간 금가루가 섞여있지만, 99%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돌덩어리 입니다. 

근데 그 돌덩어리 속에, 아주 극소량의 금이 들어 있는 거죠. 
그래서 그 덩어리를 녹여서, 그 소량의 금을 채취하는 거죠. 
그 금가루를 모아서, 재련해서, 골드바를 만드는 거예요. 

우리의 삶은 마치 금광석과도 같아요. 얼핏 보면 돌덩어리 이에요. 
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힘든 일 투성이에요. 짜증 나는 일만 많아요. 
속상 하기만 해요. 그렇지 않다니까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의 역사에 눈이 뜨고 나면 
정말 내 삶은 너무나 놀라운 삶이에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너무 분명해요. 

사명의 길이 분명히 힘듭니다. 
사도바울이 그때 당시 이방인 전도의 사명의 길이 얼마나 힘들었나요! 

근데 사도바울이 힘든 것만 보았다면.. 사명 감당을 못 했을 거예요. 
바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일만 보고, 끝까지 사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사명의 길이 어렵기는 했지만 
그가 주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계속 보았던 거예요. 

그가 순교 직전에, 그가 자신의 삶을 고백하기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표현 속에 보면, 그는 매일 매일 '달려가는' 삶을 살았어요. 

여러분 달려가는 심정 아시겠어요? 매일매일이 달려가는 것 같아요. 
마음이 특별한 거죠. 

사도바울이 달려가는 삶을 살았던 그 삶을, 실제로 가만히 펼쳐놓고 보면 
돌에 맞는 삶이고, 난파선으로 정말 죽을 지경에 있는 삶이고, 또 감옥생활이에요. 

'도대체 뭐 즐거울 일이 있다고, 그렇게 달려가는 삶을 살았을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실제였다는... 그거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비록 그 고난의 사명의 전도자의 길을 살면서도 
그는 '내가 달려가는 삶을 살았다'고 말을 하게 된 거예요. 
주님이 자기를 달려가게 하셨다는 거죠.

존 웨슬리가 당시에 복음을 전할 때 
영국 성공회 성도들, 또는 성직자들이 
웨슬리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했습니다. *원래 성공회 신부

그래서 폭도들을 동원해서 웨슬리의 사역을 훼방하고 가로 막았었어요.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에서 설교를 못하게 하니까 
이제 광산촌이나 길거리의 옥회에서 복음을 전해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모여서, 뭐 복음전도 센터를 만들고 그러면서 사역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항상 엄청난 봉변을 당했어요. 

한 번은 폭도 들에게 붙들려 가지고, 멱살을 잡혀서 두들겨 맞기도 하고 
한 여섯 시간을 끌려 다녔대요. 

여러분 멱살 잡히고 매 맞아 가면서, 여섯 시간을 끌려 다녀보는... 
상상만 해도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요. 

근데 그때 웨슬리가 쓴 일기를 보면, 웨슬리는 자기를 멱살 잡고 있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까?' 그 기회만 계속 생각했던 거예요. 

멱살 잡혀서 끌려다니는 웨슬리도 힘들었지만 
끌고 가는 그 사람도 힘들었을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뭐 잠깐 좀 조용한 시간, 그럴 때는 또 복음을 전하고... 
'아 웨슬리는 참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웨슬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였던 거죠. 

도대체 사도바울에게 어떤 역사가 있어서, 그는 주님을 그렇게 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게 너무 부러워요. '주님을 어떻게 그렇게 주목하고 바라볼 수 있었을까?' 

행14장을, 제가 몇 번을 묵상하면서 
사도바울이 겪었던 고난보다, 
그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아니하고 계속 복음을 전하고 
오히려 자기에게 돌 던지는 그 곳(루스드라)으로 다시 돌아가고, 

그리고 안디옥교회로 돌아가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했던 
사도바울이 보았던 그 주님! 
자기와 함께 하셨던 그 주님을.. 제가 생각해 보니까.. 그게 너무 너무 부러운 거예요. 

◑개척교회를 하나님께 맡기는 바울의 믿음

 

근데 오늘 말씀 속에 '아, 사도 바울이 이래서 그랬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된 것이, 
사도 바울은 진짜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맡겨 버렸습니다. 주님께 다 맡겼다는 거예요. 

바울과 바나바가 이제 루스드라 와 이고니온을 떠나서 
안디옥 으로 돌아가서, 자기를 파송해준 안디옥교회에 가서 선교보고를 하는데,
문제는 복음을 전했던 각 지역마다, 이제 교회 공동체가 생겼어요. 

요즘과 같이 이렇게 예배당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단 몇 사람이라도 성도들의 공동체가 생겼고, 그게 교회인 거죠. 

자 문제는 '이 교회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떠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세운 것이 '장로' 예요. 

각 지역에서 장로를 세우고, 그들에게 교회를 맡기고 
이제 자기는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다 초신자들입니다. 이방인들이고 초신자 예요. 
당시에 성경책도 없었어요. 신학교를 졸업한 무슨 사역자도 없었어요. 
이런 예배당 건물이 번듯하게 있는 것도 아니에요. 
무슨 교회 조직이 있어서, 거기서 듣고 보고 배운 것도 없습니다. 

정말 이제 몇 주~ 몇 달동안, 바울로 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 믿게된 그 사람들끼리 
이렇게 모인 그룹들 중에 한 사람을 장로를 세우고 
그에게 교회를 맡기고 떠나버리면 됩니까? 

계속 거기에 남아서 그 사람들을 돌봐주고, 
그들의 믿음이 견고하게 세워지도록 계속 양육하고, 상담도 해주고, 목회도 해주고... 
이렇게 해줘야지 교회가 세워지는 거지, 

아니 어떻게 그 중에 한 사람을 장로로 세우고, 교회를 그에게 맡기고 떠나냐 말이에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했느냐? 
본문에 "주님께 맡겼다"고 했습니다. :23
"주님께 맡겼으니" 거기를 믿고 떠날 수 있었던 거죠. 또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니까요.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 것을 사도 바울이 너무나 분명하게 믿은 거예요. 
그러니 '주께 그들을 맡길 수' 있었던 겁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고, 그들에게 교회를 맡겨버린 것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는, 예수 처음 믿고 바로 장로가 될 수 없잖아요. 
근데 이 당시 때는, 그렇게 몇 년을 지나고, 집사 거치고, 그래서 장로가 되던 게 아니었죠.

그냥 새로 믿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 이기도 하고,
믿음도 견고한 사람 몇 사람 중에.. 
즉 새가족 중에 그 중에 괜찮은 사람을, 장로로 세우고, 그에게 교회를 맡긴 거예요.

어떻게 보면, 세상에 무책임한 거죠. 
그러나 진짜 '주님이 함께 계심'을 보니까, 그게 가능했던 거예요.

사실은 사도바울 자신이, 안디옥 교회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파송 받을 때 
그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금식하며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다'고 나옵니다. 

14: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안디옥 교회도 바울과 바나바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오늘날 우리가 선교사 파송을 하면, 생활비를 책임져 드린다거나 
현지에 집을 마련해 드린다거나 합니다만,

근데 이때 당시 안디옥 교회는 파송만 했을 뿐이지 무대책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을 했어요. '하나님, 이 두 사람을 책임져 주세요!'
근데 이게 가능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사도바울은 그 하나님의 은혜로 사명을 감당하고 돌아온 거예요. 
자기가 그랬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실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런 사명을 주시고 
당신은 승천하셨어요. 그러면 돼요, 안 돼요?
아니 이건 너무 무책임 하잖아요. 

제자들이 어떤 제자들인지는... 예수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간 제자들... 
예수님 세 번이나 부인했던 제자들... 

그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가 가서 전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 
아 이런 엄청난 사명을 맡기고, 그냥 가버리시면... 어떻게 하냐는 거예요? 

주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실제로 주님은 그냥 가 버리신 게 아니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오셔서, 그 일을 당신이 직접 하셨던 거예요. 
꼭 같이 하신 거예요.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지만, 주님이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하셔서 
그 모든 일을 하셨어요. 사도바울이 그걸 알았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주님께, 루스드라 와 이고니온 장로들에게 교회를 맡긴 거예요.
그건 주님께 맡긴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었던 거죠. 
사도 바울은 전적으로 주님께 자신을 맡겼어요.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본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일을 계속 보게 된 거예요. 

골1:29절에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래서 이게 사도 바울의 생생한 고백이에요.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 분의 능력으로' 내가 수고하고 헌신한 거죠. 

저는 이번 <예수동행 목요집회>가 지금 우리 시대에, 
바로 꼭 본문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에 대한 실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의 
모임이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마18: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 그러셨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동행 목요집회는, 어떤 강사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도 아니에요. 
장소가 좋아서 모이는 것도 아니고, 
그 날 그 모임에 가면 특별한 설교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정말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이, 지금 우리 한국 안에 꼭 필요하다는 거죠. 

저는 사람이 많인 모이는 그런 집회에 대한 이야기도 듣긴 했어요. 
무슨 엄청난 기적이 많이 일어나는 일로 유명한 집회도 있었어요. 

근데 진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집회, 
그 집회에 온 사람들은 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어요. 

그래서 그 집회 안에,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 집회! 
그때 강사가 누구였는지...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또 얼마나 큰 예배당에서 모였는지... 얼마나 큰 운동장에서 모였는지... 
그런 거는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게 없고, 

'그 집회는 오로지 예수님만 드러나더라.. 처음에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온통 초점은 예수님이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고, 사람들은 다 주님을 바라 보았고, 
오직 주님 만을 찬양하고 예배 했고, 주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했고...  
그랬던 집회가, 이제는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야 되지 않겠냐?'  
그게 예수동행 목요집회 인 거예요. 

우리가 가지려고 하는.. 이제 9월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 
예수동행 목요집회인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그게 예수동행 목요집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분이 교회 게시판에, 교회 한 직원에 대해서 글을 올린 적이 있었어요. 
제가 읽어 드릴게요. 

「수요 예배를 드리고 내려오는데, 허름한 잠바 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한 청년에게 혼신의 힘을 실은 쉰 목소리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고, 애절하고, 감동적이었어요. 
'내가 전하는 복음을 한 번 들어나 보시오!' 라는 식의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제발, 제발 이 복음을 듣고 그냥 흘려 보내지 마세요. 
오직 이것 만이 당신이 살 길이요,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더 당신에게, 이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당신이 복음을 받아들일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당신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당신의 그 귀한 영혼이 사망의 늪에서 벗어나, 생명의 삶을 얻게 할 수 있을까요? 

간절함과 영혼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그 직원으로부터 절절히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그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는 아예 없어 보였습니다. 
자존심도 체면도 다 버렸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길은 오직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그 사람만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아 저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구나! 저 사람은 진정 예수님의 마음을 지녔구나! 
저런 전도자는 내가 처음 본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다가가 보았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섬겼던 이전 교회 여집사님의 남편이었거든요. 
그는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부인을 교회에 오래 붙잡아 두고, 집에 안 돌려보낸다고 
대놓고 목사님에게 대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집사님을 통하여, 남편에 대한 하소연을 가끔 듣기도 했었습니다. 

그 후 그 집사님 가정이 어느 교회로 옮겨 갔는데, 늦둥이도 태어났으며 
놀랍게도 그 여집사님의 남편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보통 뒤집어진 것이 아니라는 좋은 소문이 들렸습니다. 

'어떻게 뒤집어졌길래 여기까지 소문이 들리나?' 물었더니 
'그냥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게 아니라니까!' 
'그럼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데요?'
'아주 그냥 예수님한테 완전히 붙잡혀 산데!'

저는 '꽤나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나 보다' 라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를 선한목자교회에서, 그날 처음 만났던 것입니다...」

이 주인공이, 세상 떠나신 고 김대영 권사님 이라는 분이에요. 
그 분이 안산광림교회에서 세례 받고, 그 세례 간증을 할 때 
아내도 있고, 뭐 교인들 다 있는 앞에서, 
자기가 간음한 그 죄를 다 고백해서, 성도들이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저런 고백을 해도 되나?' 아주 그 교회에서는 그날 정말 유명한 사건이 되었죠. 

그러면서 그가 사람이 확 뒤집어지게 되었어요.
그 분이 선한목자 교회에 경비로 잠깐 섬겼어요. 
그분은 원래 조경 사업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듣고 회심한 다음에 
그가 완전히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전도 자의 삶을 살다가 
중국 선교사로 갈 결심을 해요. 

자기 조경사업을 내려놓고 선교사 훈련을 받고 싶어서, 
교회 스테프로 들어오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그분에게 맡길 일이 경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교회 경비라도 하겠느냐?' 
그래서 너무 기쁜 마음으로 교회 경비가 되신 거예요. 

근데 교회 경비를 서시면서, 그는 함께 일하는 다른 경비 직원들을 
다 제자훈련 시켰습니다. 

교회 경비 일을 하다 보면, 제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요. 
뭐 행려자들, 교회 구걸 하러 오는 사람들, 교회에 시비 걸러 오는 사람들... 
그런 분들을 만납니다. 그들을 다 붙잡고 울면서 전도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엄청 감동을 받았어요. 
행려자들.. 그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고, 먹이고, 
그 김대영 권사님 한 사람 때문에, 교회 전체의 목자 사역이 엄청나게 영적으로 깊어졌어요. 

그러던 중에, 그분이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근데 그가 말기 판정을 받고 난 다음에, 중국 나환자 촌으로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아니 암 말기인데.. 어떻게 중국 나환자 촌으로 가겠다고 하십니까?' 
'목사님, 제가 선교사로 헌신했는데, 근데 솔직히 망설임이 제 속에도 있었습니다. 
내가 선교사로 정말 중국에 갈 수 있을까?' 

그때 갈 곳으로 부름 받은 게 나환자 촌이에요. 
그냥 중국 선교사도 아니고, 중국 나환자 촌으로 섬기러 가려는데, 
자기 마음에 완전한 그런 확신이 없더래요. 

근데 대장암 말기 라는 진단을 딱 받고, 모든 갈등이 다 없어졌대요. 
'주여,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 제가 중국 나환자 촌으로 갈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가 중국 나환자 촌으로 실제로 갔다 옵니다. 

도무지 몸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중국 나환자 촌으로 그가 떠나면서, 그렇게 좋아했어요. 
하나님이 자기 마음의 갈등을 완전히 해결해 주셨다고... 

제가 설교할 때마다 이따금 사람들이 제게 물어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요즘 시대에 실제로 있나요?' 

제가 그 질문을 받을 때, 그때 딱 떠오르는 사람이 고 김대영 (남)권사였어요. 
그 분이 한 번은 성령집회 때 간증을 했는데, 간증 시작을 이렇게 했습니다. 

"성전 파수의 사명을 맡은 김대영 권사입니다." 
그래서 다들 어이가 없었어요. 

'누가 그 분에게 성전 파수의 사명을 맡겼나?'
담임 목사인 저도 아니고, 장로님도 아니고, 완전히 자기 혼자 맡은 거예요.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가 진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목회 했어요. 
담임 목사가 해야 될 그 어려운 영역을, 그 분이 경비하면서, 그 분들을 목회를 했어요. 
선한목자교회가 그때 그 힘들고 어려웠던 분들에게, 굉장히 좋은 소문이 많이 났어요. 

교인들 중에 제가 가만히 보니까, 김대영 권사님한테 가서 
기도 받으려고 줄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교인들이 느끼기에 '아 이 분이 뭔가 진짜 같으다' 이런 느낌을 받았나 봐요. 
결국 그 분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굉장히 많은 분들이 그분의 장례식 때 참 슬퍼하고, 그 분을 추모했어요. 

그래서 이제 그분에 대한 기록을, 제가 소책자로 남겨두었습니다. 
'이건 기록에 남겨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소책자를 만들었죠.

여러분, 주님께 정말 다 맡긴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역사를 봐요. 
본인도 보게 되고, 주변 사람들도 다 보게 됩니다. 

주님께 맡기지 않는 것이, 사실 가장 어리석은 일이고 두려운 일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지 못한 것 때문에, 
문제가 다 생기는 것들입니다. 
주님께 정말 다 맡기고 나면, 어떤 상황도 감사하고, 어떤 일도 기쁨이에요. 

 

예수동행 목요집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여러분, 
'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이번 9월부터는 이제 좀 사람이 좀 많이 모였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없어요. 

오히려 '진짜 예수님과 동행 하려고 하는 사람, 주님이 함께 계심을 정말 믿는 사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의 모임'으로 더 명확해 지기를, 
그래서 시작부터 주님을 바라보고, 오직 주님만 찬양하고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그 한 주간 동안 되어진 일들 서로 나누고 
주의 말씀 앞에 서고, 주의 부르심을 경험하고, 주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다시 깨끗한 모습으로 다시 한 주간을 시작하고...'  

'그리고 그렇게 되어지는 주님의 임재를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는... 
그래서 그 불이, 섬기는 교회들 마다 가서 불이 옮겨붙는 역사가 일어나는...'  
그런 집회가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진짜 믿으시기 바랍니다. 
슬프게도 지금 우리 시대는, 예수를 믿어도 어설프게 믿는 것도 괜찮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예요. 

근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정말 믿어야 돼요. 
내 안에 계시고.. 그리고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 주님을 진짜 믿으면.. 
우리 모두가 다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에게 사로잡힌바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떤 고난도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해요. 어떤 문제 때문에 우리가 꺾여지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되는 거죠. 
이제 우리 계속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겠는데, 제가 먼저 기도하고, 그리고 기도회를 갖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