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80141874611
◈절망 때의 능력 렘14:7~12 2008년
본문 렘14장은 '가뭄에 대한 예언'입니다. 14:1
어느 시대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고, 이때 예레미야가 예언합니다.
렘14~15장은, 예레미야서의 6번째 설교입니다.
◑서론 / 범죄로 인해 얻어터지는 이스라엘
예레미야는 어려운 시대에 어려운 사역을 감당하느라 눈물을 많이 쏟은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미 앗수르에 멸망당했고,
남왕국 유다도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본문 렘14:11~12절에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찌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 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악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복을 구해도 소용이 없고
금식을 해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예물을 드려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범죄한 나라를 심판하시는 방법은 대체로 세 가지였습니다.
12b절에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칼은 전쟁이고, 기근은 아사 이며, 염병은 전염병입니다.
전쟁과 가뭄과 질병으로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하나님이 가뭄으로 유다를 치셨습니다.
14:1~6절을 보면 가뭄이 오니까, 세 가지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뭄이 오니까 물, 비, 풀, 세 가지가 없어집니다(No water, No rain, No grass)
1절에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3절에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가뭄이 들면, 제일 먼저 물이 없어지고요,
그 다음에는 연쇄적인 재앙이 닥치죠.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4
농사가 안 되고, 양식이 없어집니다.
5~6절에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어버리며
들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아득하여 하는도다”
연쇄적으로 풀이 없습니다. 풀이 없으니까,
암사슴이 새끼를 내버리고, 들나귀들도 헐떡거립니다.
이 짐승들은 풀을 먹고 사는데, 풀이 없으니까... 짐승들도 다 죽을 지경이 된 거죠.
그러면, 유대인은 유목민족인데, 목축도 못 하는 것입니다. 풀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귀인들도 마실 물이 없고, 들짐승도 먹을 풀을 구하지 못하여
심한 비탄과 고난과 재앙에 빠지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재앙의 때요 절망의 때인 것입니다.
유다가 자랑하는 솔로몬 성전도 파괴될 것이고,
유다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7:14~15등
예레미야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는 기도조차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기도의 거성인 ‘모세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징계를 철회하지 않으신다고 렘15: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소망이 없는 상황이요, 심판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이런 절망의 때에 예레미야가 복을 구하는 기도는 할 수 없어도
회개하는 기도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의 때에 회개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비결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14:7~9절에 예레미야가 이렇게 탄식하며 회개기도 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찌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내용을 아래에서 자세히 풀어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회개 기도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간단하고 단순한 기도이되
절망과 고통과 비탄을 벗어날 수 있는 필수적인 요소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하라 14:7
죄를 그대로 가지고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고백해야 됩니다.
예레미야의 고백기도를 보게 되면 죄를 고백하되
자신을 포함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도 범죄한 회중의 일부로 포함시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주의 종들의 기도는 대부분 그렇습니다.
“나는 빼고” “나는 아니라”가 아닌
“나를 포함하여 우리 백성이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느헤미야는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느1:6~7
다니엘은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라며 자기의 죄를 포함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단9:20
학사(율법학자) 에스라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에스라9:6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에스라9:15
에스라는 유다백성들의 죄악을 고백할 때에
자신의 죄도 포함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죄악을 지적하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대한민국 교회의 죄악이 많다고 합니다. 목사님들의 죄악이 크다고 합니다.
특별히 큰 교회 목사님들의 죄가 크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나는 아니라”하고 싹 빠지려 하는데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왜냐면 교회의 죄와 우리 각자의 죄는 구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몸이요 우리 각자는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이가 아픈데 위장이 이보고 “야, 네가 아파서 왜 주인을 괴롭히냐?”
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가 아프면 온 몸이 다 아픈 것입니다.
저는 제일 아픈 게 손톱에 균이 들어간 거였습니다.
손가락이 아프니, 온 몸이 다 아팠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체가 하나 아픈 것은 온 몸이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온 몸이 범죄한 것은 지체가 곧 범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고백할 때에 “아버지 한국 교회가 회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면서
‘나는 아니라’하고 빠지지 마시고, 언제나 자신도 포함시켜 죄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느헤미야와 다니엘, 그리고 에스라도 그랬습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를 보게 되면, 우리는 범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14:7b절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의 주해
1)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타락함’은 원어로 ‘므슈바’인데, ‘뒤돌아서 가다 turning away, turning back’
라는 뜻입니다.
구약에 13번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9번이 예레미야서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주1)
이 말(타락함, 므슈바)은, 다른 구절에는 '배역 背逆'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배신과 반역
영어성경에 backslide 보다, 한글성경의 '배역'이 더 좋은 번역입니다. 주2)
그러니까 예레미야서는 타락함, 배역을 경고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뒤돌아서며,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죄와 가까워지고 마귀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역한 자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의 죄가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멀어질 것도, 가까워질 것도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멀어질 수도 가까워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역, 타락함’은 불신자의 죄가 아니고 신자의 죄인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의 배역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는 단비가 그치고
늦은비가 그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른비도 안오고 늦은비도 안오면 물이없고
그로 말미암아 가뭄이 오고, 가뭄이 오면 기근이 오게 된 것입니다. :3~4
이 배역의 특징은 점점 증가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함(배역)이 많음이니이다”는 말씀은 배역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7b
‘많으니이다’ : 라하브, to be or become many
하나님을 조금 멀리하면 그 다음에는 더 멀리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더더욱 멀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예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증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류도 다양합니다. 마음이 배역하면 감정도 배역하고, 전 존재가 배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안 읽으면 기도도 안하게 되고, 기도 안하면 하나님 교회도 멀리하게 되고,
교회를 멀리하면 헌신도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배역함이라는 것이 종류도 다양한 것이고,
한 번 배역하면 자꾸 배역해서 증가된다는 것입니다.
5:6b절에도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많고’가 라하브, 점점 커진다는 뜻입니다.
‘심함이니이다’도 increased 점점 커진다는 뜻이죠.
'많고, 심함' 이 둘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배역은 반드시 체크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놔두면 점점 커지니까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면, 브레이크를 밟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다시 돌이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디까지 멀어지셨는지 체크하시고
브레이크를 밟고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레미야의 기도에서 이 ‘배역’이라는 범죄가 *배신과 반역, 본문14:7에는 '타락함'
얼마가 고약한 것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2) 본문 7b절에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말로는 평범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we have sinned against you.”
즉, “우리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범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대항해서 against
결국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꾸 멀어지는 배역이, 브레이크를 밟지 않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대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14:7b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타락함은 .. 므슈바인데, 배역(배신과 반역)이란 뜻이고
-많으니이다 .. 점점 증가한다는 뜻이고,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 주 하나님을 대항하여 죄를 짓게 되는데,
그것은 ‘타락함이 많아질 때’ .. 결국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가 된다..죠.
여기에 배역의 어리석음이 있는 것입니다.
전능자와 반대편에 서게 되면 결국 맞게 되는 것은 칼과 기근과 염병입니다. :15~19
어디 가든지 권능자와 반대편에 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권능자가 능력이 있어 결국 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중반에 미국은 남북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군도 북군도 모두 하나님은 내편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하나님편인 군인들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를 해방시킨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나는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자랑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겸손히 기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내편이십니다.”라는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라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역대하15:2절에도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찌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성공하는 최고의 비결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역하고 멀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반대편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과 한 편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한 편이 되면, 전쟁도 물러가고 기근도 물러가며
염병도 소리 없이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다가 고통과 재앙이 오게 되면
먼저 자신을 포함하여 회개기도를 하시되
하나님을 멀리했던 것을 회개하시고, 다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한다 14:8~9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 관을 바꿔야 됩니다.
렘14:8~9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네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보는 하나님관이 아니라
배역한 유다 백성들이 보는 (잘못된) 하나님관, 신관을 예레미야가 옮겨서 말한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서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멀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반하장이죠.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여러분이 목사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목사님이 나를 멀리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은 언제나 교회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목사님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도
하나님이 자기를 멀리한다는 왜곡된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14:8~9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멀리했다고 생각하며,
(무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드는 비유는 네 가지입니다.
1) 첫 번째로 본문 8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 땅에 거류하는 자시라(like a stranger in this land)”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이 땅에 거류하는 나그네로 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은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이시라
(like a traveler who stays only a night)"고 말했습니다.
이틀도 아니고 하룻밤 묵고 가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9절에 보면 하나님은 “놀라 벙벙하는 자 같다
(like a man taken by surprise)” 놀라 가지고 어안이 벙벙하다고 합니다.
어안이 벙벙한 사람은 입을 벌리고 다닙니다.
사람이 길거리를 다닐 때 입을 벌리고 다니면 조금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이 하나님을 이런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4) 네 번째로 9절에서 하나님은 “구원치 못하는 용사같다
(like a soldier powerless to save)”라고 말했습니다.
구원하기에 무능한 군인 같다는 말입니다.
▲유다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관은,
1) 첫째로 하나님과의 친근감이 없다(No Intimacy)는 것입니다.
“아버지!”하고 불러도 친근감이 없고
“하나님!”하고 불러도 가깝게 느끼는 감이 없습니다.
땅에 겨류하는 자(외지인)와, 혹은 하룻밤 묵고 가는 행인에게
그 땅 거민들이 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백성들은 하나님과 친근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정열도 없습니다(No Passion for God).
2) 하나님을 놀라서 넋이 나간 사람 같은 존재로 보고 있으니 *3rd ‘놀란 자’
그런 존재를 향해 무슨 헌신이 있겠으며
그런 존재를 향해 무슨 사랑을 보이겠습니까?
3) 또 하나님을 향한 능력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No power to believe).
하나님을 힘없고 무능한 병사로 보고 있으니 *4th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구원의 능력을 기대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까지 날 위해 해준 게 뭐냐?
앞으로도 하나님이 날 위해 해 줄 능력이 없을 것이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배역한 성도, 배역한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관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계신 분이요 나를 도와줄 능력이 없는 분이라”
이런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8a절에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9b절에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며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우리중에 계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라”는 하나님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곤란한 때에 우리의 구원자 이시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절망과 위기에 빠진 것은 하나님 잘못이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이므로
세 가지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친근감을 회복해야 되고,
하나님을 향한 정열을 회복해야 되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됩니다.
이 세 가지를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라 14:7a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내게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7a절에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찌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9b절에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인생의 코너에 몰릴 수가 있습니다.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버지,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건저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심판이라 한다면
“아버지 내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내가 어떤 벌을 받아도
하나님이 잘 하시는 것입니다.”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먼저 그렇게 기도하시고 “그러나 내게는 그래도 주의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래도 하나님 자녀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내게 있지 않습니까?
주 예수의 이름이 내게 있지 않습니까? 성령의 이름이 내게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망하고 죽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걸고 넘어지라는 것입니다. 이게 기도의 핵심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마음이 민망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Now my heart is troubled, and what shall I say? 요12:27
“내가 십자가에서 안 죽으려고 하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지 않겠고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하니 그 고통이 내게 괴롭도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감정은 복잡하고 혼합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무슨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Father, glorify your name! 라고 기도했습니다. 요12:28
“아버지, 내가 마음이 민망하고 괴롭지만 내게 아버지의 이름이 있으니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도다,”
응답이 즉시로 온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두신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소서.”
“아버지여 내게 두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예수여 내게 두신 당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소서.”
“성령이여 나와 함께하신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나이다.”
소망 없는 절망의 순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때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데 싫다고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실 수 없는 강력한 논리를 가진 기도인 것입니다.
결론
인생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코너에 몰리셨다고 한다면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역한 것이 범죄의 근본임을 깨닫고
브레이크를 밟아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1
둘째,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십시오.
‘하나님은 어찌 멀리 계시고날 돕지 아니하시며내게 능력이 안되시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2
셋째, 내게 두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는 덩달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레미야의 절망 상황에서의 능력은
바로 7~9절까지의 회개 기도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은 실로 우리의 소망이시며 곤란한 때에 구원자 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시기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참고 자료)
14: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가뭄에 대하여' 팔레스틴 땅에는 강우량의 부족으로 원래 가뭄이 잦기는 하였으나,
성경에서 가뭄은 기근과 함께 언약적 저주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예가 많다.
(신28:23, 24) 본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겠다.
14: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애통하니'
'성문의 무리'의 문자적 번역은 '성문들'로서 유다의 전 도시들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예루살렘에서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소리가 백성들 중에서 올라온다.
우리는 민족 재앙 때에 볼 수 있는 민족적 애도의 장면을 소개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애도의 장면은 대개 곤경, 가뭄, 적의 침략과 그에 대한 패배 등에 대한 서술로 시작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2-9절을 시편에 등장하는 애도가들과 같은, 예배석상에서의 애도가로 이해하고 있으나(시70, 74편, 욜1, 2장) 근거가 불확실한 견해이다.
클라크는 '애통하니'에 해당하는 '카다르‘를 '검다'라고 번역하며, 슬픔과 재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머리에서 발까지 검은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14: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그 머리를 가리우며' '가리우며'의 히브리어 '하파'는 '덮다', '가리우다'는 뜻이지만
브라이트는 본문을 '고개를 떨군 채'라고 번역하였다.
어쨌든 이는 당황과 비탄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4절 끝부분에도 나온다. 70인역(LXX)에는 4절 후반부에 이것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한 어구를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 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표현이다.
14: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갈라지니'(하타)는 '낙담하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메마른 땅이 쩍쩍 쪼개짐으로 인한 농부들의 비통한 심경을 암시적으로 전달하는 말이다.
한편 심한 가뭄시에 팔레스틴 땅의 균열은 어떤 곳에서는 폭이 한 규빗 정도 되는 곳도 있으며,
또 때로는 깊이가 사람의 키만큼 이를 때도 있다고 한다.
14:5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가뭄으로 인해 들의 야생 동물들도 고초를 격는다. 암사슴이 새끼를 낳았지만
새끼를 먹일 풀이 없으므로 그 새끼를 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4:6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들 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승냥이같이 헐떡이며'
'승냥이'로 번역된 '탄님'은 때로는 하마와 같은 물 속에서 사는 짐승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물 속에 있다가 건조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오곤 하였다.
그리고 들 나귀는 갈증이나 굶주림을 오래도록 견뎌내는 강한 체질을 가진 짐승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으로 재앙이 어느 정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본문의 '들 나귀'는 굶주림에 지쳐 있음은 물론
뜨거운 열기로 인해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14: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자기 백성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대변자로 나서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민족의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죄악을 고백하면서 구원해줄 것을 요청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름은 종종 그 이름을 가진 이의 본질적 의미는
'당신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이름에 맞도록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소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의 명성과 명예가 위태롭다고
생각하거나, 여호와께서 이 반역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가하는 것이
그의 이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시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축복 조항들이 가동되게 하셨던 것과 같이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들의 가동을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여기서 비록 저주받아 마땅한 백성이지만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하는 간절한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 하겠다.
14: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주께서는 이 백성의 유일한 희망의 대상이라는 호소이다.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예레미야는 여기서 여호와께 어찌하여 이 곤궁한 때에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손처럼 이 땅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지를 묻고 있다.
'행인'이라 하는 것은 밤중에 잠시 투숙하였다가 날이 밝는 대로 급히 떠나가야 하는
여행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14:9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여호와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다시금 반복된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에 절실히 요구되었던 사안은 갈대아인의 진군에 의한 임박한 재난
으로부터의 실질적인 구원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땅에 영원히 관심이 없는,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처럼 멀리 계신다.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괴리를 자초한 측은 바로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주권을 거부하였으며 또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았던 이런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로우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같은 소외의 감정은
오직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였던 것이며,
설령 그들이 이론적으로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와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자들에게로 국한될 것이다.
14: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어그러진'에 해당하는 '누아'는 '흔들리다', '방황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헛된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변덕스러움을 지적하신 내용이다.
그러한 방황과 변덕의 구체적인 예는 그들이 이방 열국이나 이방의 우상들을 의지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위기가 닥쳐올수록 이 백성은 사 30:15의 말씀처럼 잠잠하고
여호와를 신뢰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으나 정반대로 행동하였다.
14: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말라' 7:16, 11:14에 이어 중보 기도 금지 명령이
다시금 주어졌다. 백성들을 중재하는 일은 선지자들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삼상 7:8).
그러나 당시 유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12절에 가서는 그들에게 임할 재앙이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14: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형식에 치우친 종교 제사의 무익함이 재강조되고 있다.
순종이 결여된 '금식', '번제', '소제' 등은 여호와께 수납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칼', '기근', '염병' 등의 세 항목은 전쟁 때에 언제나 수반되는 것들이었으며,
구약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5:12, 14:15 , 29:18, 삼하 24:13 등).
이러한 재난들은 B.C. 586년 예루살렘 파괴 때 적나라하게 임했다.
14:13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클라크는 본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여 의미 전달을 명확히 해보고자 하였다 :
'오, 여호와여. 그들은 참으로 지나치게 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처벌을 완화해주옵소서.'
14: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밝히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설교했었지만 그들이 설교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고
아무런 가치없는 복술, 혹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했다.
예레미야와 같은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사이의 구별은
그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14:15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자들은
제일 먼저 '칼'과 '기근'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쉽게 현혹되었던 불충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며,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의를 두다가 묻어줄 자도 없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거리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16절).
땅에 묻히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결말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14:16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그들의 악을 그 위에' '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는 도덕적인 악이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재앙을 동시에 다 가리킨다.
14: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본문의 1인칭 주어인 '나'는 예레미야를 가리키다.
여기서 선지자는 반대 감정 병존 상태(ambivalence)인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멸 선고를 받은 백성들의 대표자인 입장에서는 가슴이 녹아 내리는 듯한 비애감을,
아울러 그 백성을 징벌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큰 아픔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파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르'는 단순한 부상(wound, NIV) 정도 이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분쇄', '파멸', '파괴' 등의 뜻인 바, 개역 성경의 번역이 정확하다 하겠다.
14:18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내가 성읍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두루 다니도다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가는 곳곳마다 끔찍하고 무서운 광경이다. 상처입은 자, 죽어가는 자, 기아에 허덕이는 자,
살해당한 자들뿐이다. 죽은 자를 묻어 줄 자도 없으며, 죽어가는 자를 위로해줄 자도 없다.
구원과 희망이 될 만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다 땅에 두루 다니며'
선지자나 제사장들도 그 성읍들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다닌다.
블레이니(Blayney) 박사는 이 어구를 '그들은 돈벌이를 위해 물건을 싸들고 다니는 행상들
처럼 거짓 교리나 잘못된 예언을 퍼뜨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라고 이해하였다.
14:19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
7-9절과 13절에 이어 또다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가 나오고 있다.
22절까지 이어지는 이 기도는 아브라함과 (창 18:23-33)
모세의(출 32:11-13) 중재의 탄원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응답이 점차 강렬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움츠러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버리지 마옵소서'(9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때문임을 참작하여 주십시오'(13절),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주의 언약을 생각하사 용서해주십시오'(21절)라고 전개되어 간다.
14:20 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우리가 우리의 악과 인정하나이다'
'우리 조상의 죄악'이란 말 속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지금까지 축적된 민족 공동의 죄가 포함된다.
선지자는 지금 이 백성을 대신해서 그리고 자신과 백성을 동일시하여 죄악을 고백하였다.
이처럼 당대의 죄악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악을 인식하는 것은 전형적인 애가의 형식을 반영한다.
(레 26:40, 시 79:8,9, 106:6,)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이 언약 당사자와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듯이(창 18:1-8).
그것을 상실하게끔 만든 죄악과 거기에 대한 책임 또한 양자에게 속하는 것이다.
(3:24, 7:26 , 11:10, 16:12,13)
14: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미워하지 마옵소서'
이 백성의 곤경에 대한 묘사와 자비를 구하는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열방은 여호와를 유다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의 신용과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말것이라는 호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의해
오해와 모욕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백성의 죄악을 철저히 징계하신다.
'주의 영광의 위' '당신의 영광스러운 보좌'란 뜻이다.
여호와는 성전 안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보좌가 유다 민족의 안전에 대한 보증인 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적 실체가 결여된 채 형식적 종교 행사만 치러지는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었다(마 24:2 참조).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 '언약'은 출 24:7, 8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언약을 파기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절하였으며, 우상에게 자신의 몸을 바쳤던 것이다.
언약의 한 당사자가 이를 파기한 이상, 상대방은 이제 언약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14:22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예상되는 심각한 기근 상황과 관련되는 호소인 듯하다.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사 비를 주시는 것은 참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인 것이다.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이 어구는 '우리는 주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라고도 번역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기를 거부한다면 철저히 망하고 말 것이라는 애절한 탄원이다.
그러나 이 백성이 여호와의 사랑과 은혜를 인정하면서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기다린다고 해도 이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허황되고 속이 빈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뿐이었다.
.....................................
※렘14~15장은 예레미야서의 12편의 설교 중에서, 6번째입니다.(중요하진 않음)
혹자는 렘1~25장에 나오는 12편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제1설교(2:1-3:5) / 유다의 하나님께 대한 고의적 배도 행위 고발과 심판경고
제2설교(3:6-6:30) /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답습하는 유다를 향한 회개 촉구와 심판경고
제3설교(7:1-10:25) / 유다의 위선적인 신앙 고발과 심판 경고
제4설교(11:1-12:17) /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유다를 향한 심판 경고
제5설교(13:1-27) / 두 가지 비유와 세 가지의 직접적인 심판 경고
제6설교(14:1-15:21) / 가뭄 재앙과 관련한 중보기도와 하나님의 답변을 통한 심판 경고
제7설교(16:1-17:27) / 예레미야의 신변과 관련된 금지 명령을 통한 심판 경고
제8설교(18:1-20:18) / 여호와의 절대 주권에 근거한 심판 경고
제9설교(21:1-23:8) / 유다 왕가를 향한 심판 경고
제10설교(23:9-40) / 유다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경고
제11설교(24:1-10) / 무화과 두 광주리의 비유
제12설교(25:1-38) / 유다 백성들의 바벨론 포수 및 열방을 향한 심판 예언
주1) 14:7절의 ‘타락함’
같은 단어 므슈바가
2:19, 5:6 ‘반역’으로 번역,
3:6, 3:8 3:11, 3:12, 3:22 ‘배역’으로 번역, *배신과 반역
8:5 ‘(나를) 떠나 물러감’으로 번역
14:7 ‘타락함’으로 번역
주2) ‘배역’
배역(므슈바)이란 말은, 우리 말로 ‘배신과 반역’이란 뜻입니다. 背逆
일부 영어성경에 이 말(므슈바)을 ‘backsliding’ (뒤로 넘어짐)이라고 번역했죠.
차라리 ‘배역’이란 번역이 더 좋습니다.
원래 뜻이 ‘turning back, turning away’인데, ‘뒤돌아서 가버렸다’인데,
영어성경에 backslide로 번역하면, ‘배신’이란 뜻이 사라집니다. 그게 그거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