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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세 가지 동력

LNCK 2024. 9. 6. 18:0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독, 독대>         <고별, 작별설교>

2023 07 16 사도행전  (73) / 신앙의 세 가지 동력 - YouTube

 

신앙의 세 가지 동력                    행20:13~23             

우리는 바울의 3차 선교여행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바울은 드로아에 머물렀었죠. 
드로아에서 유두고 청년을 다시 살립니다. '부활'을 예표하는 기적이었습니다.


◑여정을 서두르는 바울

 

▲행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이제 바울은 이제 드로아를 떠납니다. 떠나는 경로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드로아에서 7일을 머물렀죠. 20:6

드로아에서 바울과 합류한 형제들은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20:4

앞서 이들은 배로 드로아에 먼저 도착해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로아에서 출항하는 배는 → 앗소 → 미둘레네 → 기오 → 사모 → 밀레도 
이렇게 항해할 예정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버스 정류소가 그렇게 차례로 되어있었던 겁니다. :14~15

그런데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아가는 편을 택합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맨 아래 단락에 나옵니다.)

▲20: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배는 미둘레네에서 하루를 정박합니다. 그리고 기오로 이동합니다. 
기오에서도 하루를 정박합니다. 

여러분 서사시 <오디세이아> 아시죠? 
<오디세이아>를 쓴 호메로스가 기오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의 일행이 하루를 정박합니다. 그리고 사모로 이동합니다. 
사모도 '피타고라스의 공식'을 발견한 피타고라스의 출생지가 '사모'라는 곳입니다. 
여기 사모 에서도 바울의 일행이 하루를 정박합니다. 그리고 밀레도로 이동합니다. 

보시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의 일행이 5개의 항구를 통과합니다. 
그런데 각 항구에서, 하루 밖에 머물지 않습니다. 

보통 바울은 어느 지역을 도착하면, 단 며칠이라도 그 지역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딱 하루 밖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날 짐을 챙겨 떠나기에 바빴습니다. 
방문한 지역에서 바로바로 코스 이동이 이어집니다. 

굉장히 빠르게 지나갑니다. 도착한 곳(항구)에서 뭘 했는지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도착하면 이튿날 떠났다는 기록만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바울의 행보가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누가 보면,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빠르게 이동합니다. 

△심지어 바울이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밀레도 위에 에베소가 있습니다.
밀레도와 에베소는 매우 가까운 지역입니다. *약40키로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를 지나쳐버립니다. 
여러분 바울에게 에베소는 어떠한 곳입니까? 바울이 3년을 사역했던 곳입니다. 
3년이면 바울의 1, 2, 3차 선교여행을 통틀어서 가장 오래 사역했던 곳입니다. 
3차 선교 여행의 중심지도 에베소였죠. 

바울이 가장 많은 시간과 땀을 쏟은 곳이 에베소 도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에베소를 패싱합니다. 

지나가는 길이니까, 원한다면 얼마든지 한 번쯤 들려도 되지 않습니까? 
3년을 사역했던 정든 곳이니까요. 

게다가 에베소에 또다시 언제 올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를 지나쳐버립니다. 패싱합니다.

대신에 바울은 에베소로 가는 대신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밀레도에서 고별설교를 전합니다. 
이 고별설교는 다음 시간에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지금 이동하는 경로를 보면, 굉장히 시간을 아끼고 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낼 만큼 시간을 아끼고 있습니다. 
시간을 아끼면서 바울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토록 빠르게 이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본문 16절에 나오는데요. 

▲20: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이 빠르게 이동하는 이유는,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는 지중해 전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유대인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를, 바울이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순절에 맞춰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목적이 무엇이었죠? 
마게도냐, 아가야, 갈라디아 교회들에서 모금한 구제 헌금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였죠. 
그래서 그 지역 교회 대표들과, 바울은 지금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20:4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루라도 속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이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걸음을 빨리 재촉했던 이유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바울의 서두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목적을 가지고,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으로 빨리 가려고 했던 거구나' 

그리고 이때 바울의 기분도 느껴집니다.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바울의 기분이 얼마나 설레였겠습니까? 

오순절에 가면, 각지에서 모인 많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도 구제헌금을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헌금을 받은 예루살렘 교인들의 표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바울을 기쁨으로 맞이하겠습니까? 
그런 그들의 표정을 상상만 해도, 바울은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나, 두려워하지 않고 직진하는 바울

▲20:22~23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빠르게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기다린 건, 환대가 아니라 결박과 환란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걸 바울이 몰랐던 게 아닙니다. 
바울은 여러 성을 거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바울에게 확신을 주셨던 거죠. 

'네가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데, 거기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너를 기다릴 것이다.' 
몇 번이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바울이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신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이 길을 가면.. 앞에 어떤 길이 보일지, 뻔히 내다. 보이는데도 빠르게 거기로 가는 겁니다. 

물론 바울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아주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22
그런데 확실하게 알았던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환란과 결박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23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예루살렘에 빨리 가고 싶습니까? 
저라면 시간을 끌었을 것입니다. 
최대한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가급적 늦게 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저라면, 어쩌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면 다른 길로 빙둘러 우회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남자분들 군대에서 휴가 나오면 복귀할 때 어떠셨습니까? 빨리 들어가고 싶었습니까? 
아니죠. 복귀할 때는 군화를 신은 발걸음이 그렇게도 무겁습니다. 

처음 휴가 나와서 복귀할 때는, 왜 그렇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이 따로 없습니다.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고참들의 갈굼과 핍박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갈굼과 핍박 수준이 아닙니다. 환란과 결박이라고 말합니다. :23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바울은 더 이상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바울은, 결박을 당한 채로 움직여야 합니다. 
결박을 당해서 감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때부터 순교의 길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길은,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걸음은, 굉장히 빠릅니다. 지체하지 않습니다. 
도망가지 않습니다. 우회하려는 마음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뻔히 보이는 결박과 죽음이 시작되는 곳으로, 바울은 빠르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 24절을 보십시오.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너무나도 유명한 바울의 고백이 여기서 터져 나옵니다. 
바울이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는 이유는,
예수님께 받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해서 바울은,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결박과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의 생명이 조금도 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기의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생명이 조금도 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24
주님을 위하는 길에는, 자기의 생명도 아깝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여러분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결심을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막내 아드님이셨던 주광조 장로님의 간증을 
제가 오래전에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장로님도 몇 년 전에 소천하셨는데요. 
그분의 간증을 들어보니까, 참 은혜가 되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을 다섯 번이나 당하셨습니다. 단순히 투옥만 당한 게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는 중에, 수없이 기절하다 깨다를 여러 번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옥중에서 순교를 하셨는데요. 

우리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주목사님이 남다르게 보이지 않습니까? Yes
'뭔가 그분은 우리와는 다른 대범하고 담대한 기질을 가졌을 것이다. 
강인한 성품을 가졌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광조 장로님이 말씀하시기를)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자기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에 대해서 설교시간에 인용을 하실 때,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믿음의 강한 용사이시고, 의지가 강하시고,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생명과 가정도 기꺼이 거부했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들인 제가 알고 있는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은, 
오히려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평범한 성격이었습니다. 

인정에도 너무나도 약하고, 그래서 눈물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닥치는 육신의 고문도, 견디기 힘들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네 번째로 잡혀가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날 갑자기 일본 순사들이 아버지를 잡으러 집으로 들이닥쳤는데, 
그때 아버지가 뒤로 내빼고 달아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으니까, 기둥을 안고 그대로 쓰러지신 채 
마치 어린아이가 울듯이 엉엉 소리를 내어 우셨습니다. 

엉엉 우시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대요. 
'하나님 더는 제가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저를 빨리 데려가 주십시오' 

그때 뒤따라가던 어머님이, 아버지를 안고 엉엉 우시면서 
'목사님이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하냐고? 
목사님 보고 (신사침배 거부하며) 따라가는 교인들은 어떻게 하냐고? 
가셔서 목사님은 순교를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다시 또 붙잡혀가는 순간.. 목사님 내외가 부둥켜안고 엉엉 우셨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그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이, 아들인 자기가 기억하는 
순교자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연약한 아버지 주목사님이, 
어떻게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겠습니까?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향했던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믿음이 
모든 것에 우선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사님이, 주님을 위해 순교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의 의지나 결심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광조 장로님은, 이 말을 전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순교는 오직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순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의지나 믿음의 결심으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얘기를 나누면, 꼭 저에게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라며 순교할 수 있으세요?'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때 되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저도 순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비겁한 대답인 것 같지만, 이 대답이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오늘 바울의 고백(20:24)도, 단순히 바울의 남다른 무엇에서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지나 결심에서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이 남달리 담대하고 용감해서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24절의 바울의 이 고백을 이끌어낸 것은, 오롯이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여러분 바울이 지금 무엇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까? 
'성령에 매여!' 

지금 바울은, 자기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어떤 믿음의 결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결심이 굳세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느끈히 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령에 매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였다'는 말은, 헬라어로 '데오'인데, '묶다. 결박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성령께 묶여있는, 결박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이 단어가 사도행전 앞에서 한번 나온 적이 있습니다. 
행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여기서 '결박'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의 '매여'와 똑같은 '데오'라는 단어입니다. 
과거에 바울은, 신자들을 결박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성령께 결박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울을 묶고 있던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마음이 가는 대로, 
더 이상 자기가 주인 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성령님의 은혜와 간섭이, 바울을 묶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님께 매였기 때문에, 성령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이 부르신 그 사명의 길에, 순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은혜가 어땠기에, 그는 결박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이 길을 걸어가게 만든, 성령님의 간섭과 은혜는 무엇이었나요? 어떠했나요? 

즉 본문의 24절의 고백을 가능하게 만든, 성령님의 일하심은 무엇이었나요? 

▲1. 먼저는 드로아에서 일어난 사건, 죽었던 유두고가 살아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의 의미를 기억하시죠?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가 겪는 죽음과 부활의 의미입니다. 

유두고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바울은 부활의 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내가 믿는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요,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진하게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드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밤에!  20:7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바울의 걸음을 앞두고, 
하나님은 바울에게 위로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 길은 죽음으로 끝나는 길이 아니라,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4절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왜냐하면 바울은,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서, 영광의 주님을 만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부활을 맞이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을 통해서요. 

그래서 바울의 예루살렘 길은, 죽음으로 끝나는 길이 아니라, 부활의 길이라는... 
성령의 간섭과 은혜가, 본문의 바울의 고백(:24)과 담대함을 이끌어 내었던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간 사건입니다.

바울의 동행자들은 전부 다, 배를 타고 앗소로 이동했습니다. 
바울은 앗소까지 걸어가서, 앗소에서 다시 일행들과 합류한 거죠.

20: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드로아에서 앗소까지의 거리는 32KM 정도입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거리입니다. 
그 거리를 바울은 혼자 걸어서 갔습니다. 길도 굉장히 험악한 산지가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바울은 굉장히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며칠을 머무른 곳이 없습니다. 도착하면 바로바로 이동을 했습니다. 

심지어 에베소를 패싱할 만큼 빠르게 이동했습니다. 
조금도 지체 없이 급행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간을 아껴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앗소까지 갈 때에는, 혼자 걸어서 이동합니다. 지체하고 있습니다. 
일행들을 배에 태워놓고 혼자 이동합니다. 왜일까요? 
왜 바울은 아소까지 갈 때에는 혼자 걸어서 이동을 했을까요? 

바울은, 앗소까지 걸어가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혼자만의 시간은 어떠한 의미였겠습니까? 

많은 신학자들이 드로아에서 아소까지 걸어간 시간을, 하나의 사건에 비유합니다.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혼자 기도하신 예수님께 비유합니다. 

예수님은 바을보다 앞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의 자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의 사명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 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잠시 제자들과 떨어져서, 제자들은 잠을 잤죠.
개인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위로와 확신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십자가의 자리로 빠르게 나아가셨습니다. 

그 겟세마네 동산의 시간이, 바로 바울에게는 '앗소까지 걸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바울은 앗소까지 걸으면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잠시 일행들과 떨어져 걸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곧 있으면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텐데,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처럼 
저도 주님을 위해 이 길을 믿음으로 가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어지는 바울의 발걸음입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발걸음이, 앗소를 기점으로, 굉장히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앗소를 기점으로 바울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바울은 계속해서 배를 타고 이동합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발걸음이 굉장히 빨라집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독대의 시간을 통해 
성령님이 바울에게 주시는 위로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바울은 성령님께 묶이는 경험을 또 한 번 가졌던 것입니다. 
그 성령의 매임이, 본문의 바울의 24절의 고백을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이런 믿음의 고백을 똑같이 가지는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24절의 고백처럼 각자 '나의 갈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각자에게 있습니다. 

그 사명은 꼭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삶입니다. 

이 사명의 자리가 꼭 교회만은 아닙니다. 
꼭 어디를 나가서 선교를 해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현장입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지지고 볶는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일상의 일터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의 현장입니다.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자리가, 
믿음대로 살아야 하는, 걸어야 하는..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부르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적용

물론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꼭 순교를 당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저마다 주어진 사명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 비추어서 세 가지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성령께 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믿음의 길, 사명의 길은, 우리의 실력과 결심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성령께 매여야만 갈 수 있는 믿음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도, 누구에게 묶인 매인 인생이기 때문입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고백한 자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성령께 묶여진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매여진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도 바울처럼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우리를 붙드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 성령께 매이는 삶을, 
날마다. 실제적으로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원함과 여러분의 계획에 매여 살아가진 않습니까?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와, 세상적인 것들에 매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여러분의 이기적인 마음과, 죄악된 마음에 붙들려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의 책망을 통해서 
때마다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날마다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날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이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때마다 주시는 성령의 간섭하심에, 저와 여러분을 쳐서 복종시키는.. 
순종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메어있는 삶이 아니라 
성령에 매여 살아가는 삶을 실제로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울처럼, 사명의 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24

여러분, 사람에게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울도 자기 생명이 소중한 걸 알았습니다. 경시한 게 아니죠. 

그러나 더 중요한 걸 알았습니다. 
그 생명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부활의 신앙'으로 실제적인 위로를 누렸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부활로 주님을 맞이할 것을 바울은 알았고 (유두고를 통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을 위하는 삶이었습니다. 
죽음 이후에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의 신앙이,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이 부르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했던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3. 세 번째, 바울이, 자기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대면하여 날마다 걸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바로 앗소까지 걸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바울은,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와 확신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걸음은, 굉장히 빨라졌습니다.
확신의 힘찬 믿음의 걸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도 앗소까지 걸어가는.. 그 시간이 매일의 삶 가운데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실력으로는, 우리의 죄악에 연약한 마음으로는, 
이 믿음의 길을 똑바로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앗소까지 걸어가는 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만나는 시간이, 매일의 삶 가운데 필요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쓰신 <생수를 구하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파스칼의 말을 인용한 부분인데요. 

"인간의 모든 질병은 자기 방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 주위는 언제나 늘 너무나도 시끄럽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홀로 방에서 앉아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고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독속에서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는, 사람들과 떨어져서 앗소까지 
혼자 걸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삶의는 '앗소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있으십니까? 
사람들과 떨어져서 하나님을 깊이 대면하는 일정을 (정기적으로) 가지고 계십니까? 

그런 면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새벽기도의 자리를 건면합니다. 
새벽기도의 자리만큼 하나님과 독대하기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 여러분들이 하루의 삶에서 떼어놓고 하나님을 독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시간만이 아니라 장소적으로도, 사람들을 떠나서 하나님을 깊게 만나는 자리를 
어디에서 가질 수 있습니까? 

새벽의 기도의 자리만큼, 사실 하나님을 만나기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물론 그 시간이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새벽기도의 시간이 아니더라도 
꼭 여러분의 매일의 삶에서, 앗소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위로와 도우심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매일의 삶 가운데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