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3가지 표지인 겸손, 눈물, 참음 행20:17~21, 고후12:12 설교녹취
*본문은 '바울의 밀레도에서의 고별설교' 입니다.
대신에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제 고별설교를 전합니다.
이 밀레도에서의 고별설교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안에서 유일하게 신자들을 위한 바울의 설교입니다.
설교를 듣는 대상이 전부 다 신자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주로 불신자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이거나, 이방인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누구를 대상으로 설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설교는 다시 보기는 어려울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가리켜서 '바울의 유언적 메시지'라고 부릅니다. 주1)
본문의 사도바울의 메시지는 세 토막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20:18~21절은, 과거를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에베소에서 했던 사역을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22~27절은, 바울이 처한 현재에 대한 설명입니다.
28~35절은, 닥쳐 올 미래에 대한 경고입니다.
여러분 이 바울의 설교의 흐름이 잡히시죠?
오늘은 그 가운데 첫 번째 토막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과거에 했던 사역을 회고합니다.
자 이 회고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의 사역의 자세입니다.
다른 말로 바울의 사도됨의 표지입니다.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이 구절에 보면 세 가지가 나옵니다. 겸손, 눈물, 시험을 참고.
그러니까 바울은 에베소교회에서 어떻게 사역을 했습니까?
겸손, 눈물, 시험을 참고... 이 세 가지 자세로 사역을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바울의 사도됨의 표지(mark, sign) 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 같은 성도의 표지이기도 하죠.
성도도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사도)'니까요.
참고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고후12:12 '사도의 표 mark, sign 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위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사도의 표 mark. sign' 라는 말을 빌어와서,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는 '사도 됨의 표지 3가지'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바울의 사도됨의 표지, 그 첫 번째는 <겸손> 입니다.
바울은 겸손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겸손이 아니라 '모든 겸손' 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이라는 말은, 매사에 겸손 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풀이하면 늘 어디서나 겸손 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나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겸손했다는 뜻입니다.
자 바울은 누구보다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스펙으로 따지면 남에게 꿀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단 출신 배경이 굉장히 좋았죠. 바울은 '유대인 중에 유대인' 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 출신인이었고, 정통 유대인 출신이라는 말은
그 당시에 뼈대있는 집안이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지만,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시민권자들은 로마 제국의 법적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제국 내에서 어디든지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직업 또한 선택할 수 있었고요.
또한 정당한 재판이 없이는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굉장한 특권을 누린 거죠.
그리고 바울은 학벌도 좋았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유대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신학 학위를 받을 때 중요한 게 지도 교수의 이름입니다.
지도 교수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학위의 권위가 달라집니다.
'어느 교수님의 지도를 받았는지' 꼭 자기가 받은 학위 옆에다 적어 둡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당시 유대 최고의 석학인 가밀라엘 밑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학벌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이었죠.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안에서 존경을 받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주2)
혹자는 바울이 '공회원'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근거는 행26: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을 받았다는 것도, 보통 신분의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하지만
특별히 '사람을 죽이는데 찬성(또는 반대) 투표를 하였다'는 것은
공회원 급의 지위를 가진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투표권이기 때문이죠.
자 그만큼 바울은 사회의 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모든 겸손으로 사역했다'고 말합니다. :19
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겸손으로 사역했다고 말합니다.
자 이것이 바로 주님을 만난 바울이 겪게 된 변화입니다.
바울은 교만에서 →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왜냐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겸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비교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저 사람을 보니까 나보다는 학벌이 좋은 사람이다,
나보다는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더 낮은 위치에 있어야지...'
그렇게 낮아지는 걸, 성경은 겸손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을 만날 때 찾아오는 인격의 변화, 신앙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믿어지는 순간,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미약하고, 작고,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보게 됩니다.
마치 아침 방안에 비치는 한 줄기의 빛에 공기 중 먼지가 생생히 드러나듯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설 수록, 또 그 분이 만드신 우주 만물을 볼수록
자신이 얼마나 누추한, 죄 많은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뒤집어 집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나의 실상을 정확히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3)
이것이 십자가가 우리를 데리고 가는 자리입니다. 바로 겸손의 자리입니다.
자 그래서 겸손은, 사람이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만들어 만드는 게 아닌 거죠.
겸손은, 단순히 인사할 때 허리의 각도가 낮아지는 게 아닙니다.
겸손은 단순히 '나는 못 합니다. 저는 아니에요'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빼는 게 아닙니다.
참된 겸손은,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가지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 <겸손>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누구도 겸손의 자리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겸손은, 그건 겸손을 가장한 위선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고,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을 보십시오, 이전의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바울이 겸손을 가지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뒤입니다.
다메섹 도상까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열심히 잡으려고 좇아갔던 자신을
주님은 찾아와 주셨습니다.
주님을 핍박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죄악된 실상과, 주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해서
바울은, 그 이후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요' 하는 겸손한 종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그 십자가 앞에서 바울은 철저한 자기 무너짐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 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겸손하게 되었던 겁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바울은 자기가 지금껏 가졌던 모든 것들이 깨지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자 그래서 겸손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신앙의 성품입니다.
자 그런 면에서 겸손은, 참된 성도의 표지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신앙을 고백한다 할지라도, 겸손하지 않으면, 참된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주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 존재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자 이것이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나서 겪게 된 신앙의 변화 였습니다.
사도됨의 표지였던 거죠. 첫 번째로 겸손!
▲여러분 이런 면에서 기독교가, 세상의 종교와 참 다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종교는, 신을 만나면 강해집니다.
신을 만나면 능력을 얻게 되고요. 자기가 강화됩니다.
자기가 섬기는 신이, 자기를 높여주고, 자기를 세워 줍니다.
자 그러나 기독교는 반대로 낮아집니다. 있던 능력도 자랑할 게 없게 됩니다.
자기는 부인 되고, 주님만 높이게 됩니다.
자기 강함이 아니라, 약해지는 자리로,
자기 가치의 자리가 아니라, 무가치의 자리로,
자기 능력이 아니라, 무능함의 자리로 인도됩니다.
너무나도 역설적인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때 비로소 진정 강해지고, 능력있게 되는 거죠.
뿐만 아니라 바울의 이후의 삶을 보십시오.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육체의 가시까지 얻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건, 그 가시가, 바울의 목회사역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의 치명적인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전에 없었던) 치명적인 장애물을 얻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더 겸손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더 밑바닥의 자리로, 겸손의 자리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자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늘 바울이 했던 고백이 뭐죠?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도 '모든 겸손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20:19
이것이 바울의 사도 됨의 첫 번째 표지... 겸손이었습니다.
◑2. 두 번째로 바울은 <눈물>로 사역했다고 말합니다.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여러분, 이 눈물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생긴 신앙의 표지입니다.
여러분 이전에 바울을 아시죠? 참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다메섹까지라도 쫓아가서 잡아올 만큼
참 독한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었던 거죠.
요즘에 하는 MBTI로 보면, F(감정형) 보다는 T(사고형) 성향의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 바울이, 에베소에서 눈물로 사역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고 나서 바울은, 눈물을 얻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눈물'이 원어로 보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many tears
그러니까 '수많은, 잦은 눈물을 흘렸다'는 뜻입니다.
*개역에 many의 번역이 빠져있으나, 19절 서두의 '모든'에 수식받는 것으로 봄.
곧 '모든 눈물' 또는 '많은 눈물', many tears가 정확한 번역.
▲실제로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본문이 포함된 다른 구절들을 보더라도,
'눈물'이 두 번 더 등장합니다.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을 사역했습니다. 그 3년 동안 바울은 눈물로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이별할 때에도 눈물로 이별했다고 말합니다.
자 바울은 여기 에베소 교회에서만 눈물을 흘린 게 아닙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바울은 눈물로 사역을 했습니다.
고후2: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많은 눈물로' ... many tears 눈물이 복수이죠.
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바울은 눈물로 사역했고,
아래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도, 바울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이처럼 바울은 가는 곳마다 눈물을 뿌려야 했습니다.
자 그러면 왜 바울이 눈물로 사역을 했을까요?
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수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추론인데요.
구약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왜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 박영선 목사님이 기가 막힌 대답을 내놓으셨습니다.
그 분이 쓰신 <고난이 하는 일>이라는 책에 보면, 예레미야의 눈물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레미야는 할 수 없어서 울었다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감성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
우는 것 밖에 없어서 울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였습니다.
그가 전해야 할 메세지는,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회개의 메세지였죠.
그러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리라' 렘15:1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할 마음이 없다(그만큼 화가 나셨다)'는 하나님의 뜻이 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실패한 선지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을 중재해야 하는, 그 선지자의 사명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돌이켜 것도,
또 모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도... 예레미야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실패의 자리에서, 예레미야의 눈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눈물은, 단순히 바울이 풍부한 감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울었던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할 사도로, 예레미야 같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모두가 변화된 건 아니었습니다.
변화 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바울은 보았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바울은 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바울을 핍박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그들이 듣기에 불편했기 때문이죠.
▲여러분, 본문 20절을 한 번 보십시오. 바울이 어떻게 말씀을 전했는지가 나옵니다.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는 겁니다.
타협하지 않았다는 거죠.
사람이 두려워서 말씀을 물을 타거나, 희석시키거나, 침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특별히 21절을 보십시오.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이 전한 이 메시지를, 누가는 두 개의 단어로 딱 요약하는데, 회개와 믿음입니다.
여러분 '회개하라'는 설교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두가 불편해 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복음을 듣고,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가만히 놔 두었겠습니까? 바울을 미워했겠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그걸 우리가 에베소 교회에서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행19장
바울은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상, 우상으로부터 돌이키라'고 설교했죠.
그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아데미 신상을 버렸습니다.
자 그러나 바울의 그 메시지 때문에, 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상 조합원들'이었습니다. 자 바울 때문에 자기의 밥줄이 끊어지니까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에베소에서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소요사태를 일으켰죠.
그러니까 바울은, 그들을 보면서 울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말씀을 전해도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말씀을 전해야 하니까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들의 반응 사이에 끼어서 바울은 그저 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물론 바울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 이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영혼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우는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울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울의 사도 됨의 두 번째 표지... <눈물> 이었습니다. ☞ <눈물>
◑3. 마지막 세 번째로 바울은 <시험을 참았다> 말합니다.
19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켰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한 순간도 편안하게 목회한 적이 없습니다.
늘 유대인들이 바울을 쉬지 않고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유대인들은, 바울을 그 도시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바울을 뒤쫓아가서, 원정가서 괴롭혔습니다.
그러니까 찰거머리처럼 따라다니면서, 바울을 참 힘들게 했던 거죠.
에베소에서도, 유대인들은 바울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선교를 시작할 때, 회당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서, 두란노 서원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19:8~9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바울이 설교하는 것을 막은 것이죠.
이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의 목회는 한 순간도 편하거나 쉬웠던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사실 이 유대인들의 시험도,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없었을 시험입니다.
유대인들이 이토록 바울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최고의 변절자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바울은 누구보다 유대교에 진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 출신의 바리새파 였죠.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개종한 후로는, 유대교 사람들을 집중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니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바울은 배신자요, 변절자이고, 오히려 유대교를 성경으로 공격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을 죽이고 싶었을 겁니다.
▲여러분이 참 역설적 이지 않습니까?
그가 주님을 만났는데, 시험이 제거된 게 아니었고, 오히려 없던 시험이 생겼습니다.
자 그러나 바울은 '내가 모든 시험을 참았다'고 말합니다. :19
왜냐하면 20b절에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주님을 섬기는 자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바울에게, 나타나 사도됨의 표지 mark 를 보십시오.
첫째가 겸손이었고, 둘째가 눈물이었고, 셋째가 참음이었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예수 믿고 나면 첫째 능력, 둘째 축복, 셋째 강함...
이런 게 나와야 맞지 않습니까?
자 그러나 첫째는 겸손이고, 둘째는 눈물이고, 셋째가 참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바울의 능력과, 축복과, 강함을 가지고 일하시지 않으셨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바울의 사역 가운데 능력과 기적과 치유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바울 에게도 사도의 표지로 능력과 기적과 치유가 나타났습니다. 고후12:12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바울의 사역에서 나타난 것은
겸손과, 눈물과, 참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매사에 바울에게, 능력과, 축복과, 기적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보다는 매사에, 모든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사역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역시, 바울의 겸손과, 눈물과, 참음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왜냐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신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이 땅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사역은, 겸손과, 눈물과, 참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빌2:4~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영광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 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그러니까 기적을 구한 게 아니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리라'
예수님은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 수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고, 그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정을 하나씩 매달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여러분, 상상만 해도 통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분은 십자가에 달려 참으셨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나타난 겸손, 눈물, 참음이란 사도됨 표지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인내, 오래참음>
◑정리 및 적용
예수님은 능력과 기적으로 우리를 구원 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은 겸손과, 눈물과, 참으심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서 일하신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이 표지들을 통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이 길을 따라 걸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걸어간 길 또한, 능력과 축복과 강함의 길이 아니라,
겸손과 눈물과 참음의 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걷는 길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능력과 축복과 기적으로 이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물론 기적과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의 하루 하루는, 능력과 축복과 기적이 아니라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설교를 열심히 준비하고 전해도,
한 번에 여러분들이 변화되는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아주 서서히 변화가 되는 거죠.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도, 때로는 설교를 죽 쑤는 날이 있습니다.
제가 기도를 해도, 성도들의 병이 다 치유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기적과 능력보다는,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의 매일의 삶도
능력과 축복과 기적이 아니라,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걸어가는 날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또 하나님은, 바울에게 주셨던 '육체의 가시'를 우리 각자의 삶에 주십니다.
그 육체의 가시 때문에, 더 이상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겸손히 사역하도록 만드십니다.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사역을 마친 후에도, 전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바울 처럼,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눈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눈물 흘릴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이후로는 눈물이 없이는 하루를 지내지 못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
기도를 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의 자리, 삶의 자리를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데
너무나도 믿음 없고 무능력한 자신을 마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물이 흐릅니다.
때로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눈물 속에는, 감사와 기쁨과 감격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처럼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참아야 할 시험이 생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우리 역시도 핍박과 고난을 받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누군가의 관계로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이 당했던 것처럼, 늘 변함 없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가시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험을 없애 주지 않으십니다.
그 시험을 하루하루 참으며 걸어가도록 하십니다. 인내하게 하십니다.
참으면서 하루 하루를 살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걸어가는 하루 하루의 길은
기적과 축복과 능력으로 가기보다는,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겸손과 그 눈물과 참음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일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 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내(참음)를 통하여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그 연단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 땅의 소망이 아니라,
썩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 우리의 겸손과 눈물과 참음은.. 실패의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하루를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삶 가운데 놀랍도록 신실하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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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도행전에는 사도바울이 남긴 세 편의 설교가 있는데요.
1) 행13장에 기록된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선포된 설교로
이것은 '유대인에게 선포한 설교'입니다. *1차여행 중
2) 행17장에 아덴에서 선포된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이방인들을 향하여 선포한 설교'입니다. *2차여행 중
3) 또 한 편의 설교는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밀레도의 작별 설교는,
'교회의 제자(성도)들을 향하여 선포된 설교'입니다. * 3차여행 중
주2) 바리새인
바리새인은 ‘분리시키다, 격리시키다, 고립시키다(Seclude)’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파라쉬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분리주의자, 분리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 시대에 바리새파는 회원이 6,000명으로 가장 규모가 큰 종파이었으며,
서민 대중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당시 유대 백성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종파였다.
본격적인 바리새파의 기원은 하스모니안 왕가의 요나단 (BC 161-143)이
불법으로 대제사장직을 강탈했던 시기로 잡을 수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BC 167/166년에 악명 높았던 안티오쿠스 4세
(Antiochus IV. Epiphanes)에 대항했던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이라는 큰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야욕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모든 불결을 제거하려는 성격에서 출발하였다.
바리새파는 BC 2세기 중엽 이 하시딤의 그룹에서 분리되어
독자노선을 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3)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주님을 만났을 때
바울은 주님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때 주님은 바울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만났을 때도, 주님은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예수님의 음성에, 우리는 엎드린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내가 예수님을 박해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마주합니다.
그 사실 앞에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보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박해한 죄인이구나,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구나'
로마 병정이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그 누가 아니라,
'내가 바로 예수를 못 박은 죄인이구나!' 나의 정체성이 하나로 정의 됩니다.
'예수를 박해한 죄인!'
이 죄인됨의 고백이 십자가를 마주한 모든 참된 성도의 고백입니다.
자 그런데 주님이,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주님은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 그러니 십자가에서 두 가지를 마주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런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