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와 실천은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 Ed Stetzer학장(Talbot 신학교) - YouTube
*위 내용을 풀어서 옮겨보았습니다.
◈복음전파와 실천은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로잔 운동>
※교회와 선교운동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되,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놓치면 안 된다는 주제.
Ed Stetzer 탈봇 신학교 학장
저는 에드 스테처입니다.
4차로잔대회를 앞두고 몇 가지 제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4차로잔대회와 관련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우리보다 앞선 세대가 복음전파, 전도, 전통적인 선교에 대한 중요성을 잃어버렸던
그 길을 우리 세대는 따르지 않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난 이유는, *복음전도의 우선성 상실
과거에 우리처럼 예수님과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모여 ‘이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 외쳤는데요. *191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지적)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선교를 제각기 재정의 redefine 하게 되었습니다.
(전통적 선교방식에 '실천'이 차츰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로잔운동에서 나온 신앙고백서들은 훨씬 더 구체적으로 *1974~
복음주의 신앙, 믿음, 그리고 실천이 더욱 함께 가야 함을 강조해왔죠.
evangelical belief, faith and practice
저는 이것(로잔문서들)이
성경의 권위와, 회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강조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여러분이 로잔의 역사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면,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 사이에 약간의 논쟁 같은 의견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강조점 emphasis 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었죠.
복음전도에 더 강조점을 둘 것인가, 사회적 책임에 더 강조점을 둘 것인가?
▲여러분이 만약 존 스토트의 저서 Mission to the Modern World
<선교란 무엇인가>를 읽어보셨다면 알게 될 텐데,
그는 ‘선교란 복음전파와, 복음의 실천,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교를 복음의 전파와 복음의 실천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하며,
이를 매우 잘 설명했습니다. gospel proclamation, gospel demonstration
빌리 그레이엄은, 그런 스토트의 주장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빌리 그레이엄도, 사회적 문제에 일부 관여했다는 과거 역사를
여러분이 알면, 흥미로워 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민권 운동 civil rights movement 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레이엄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약간의 관심은 있었습니다. 민권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으니까요)
▲그런데 또한 그는, ‘우리가 앞선 세대가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앞선 세대의 실수’란
제가 이전 비디오에서
공의회선교운동에 대해 conciliar missions movement
조금 언급했는데,
그들은 처음에는 전통적인 선교와 전도에 강하게 집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로부터 멀어졌고, 결국 사회적 문제들이 우선시 되었죠.
그래서 빌리 그레이엄은 우선순위를 중요하게 따졌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되,
언제나 복음 전도나 전통적 사역들(전도, 교회개척)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죠.
복음 전도나 전통적 사역이 마치 ‘창끝’처럼 (최우선을 비유함)
즉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
최우선되어야 함을, 빌리 그레이엄은 말한 것입니다.
로잔운동이 지향하는 바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되,
50:50이 아니라,
그 우선성, 우선순위가 복음전도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스토트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얘기했지만,
그것이 50:50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레이엄은 ‘복음이 사회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복음전파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교회가 자연스럽게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게 되리라고 믿었죠.
하지만 그레이엄이 걱정했던 것은,
로잔 운동이 그 중요한 본래의 초점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종종 잃었다는 거죠)
▲흥미로운 것은, 3차 케이프타운 대회 이전에
‘로잔운동이, 에든버러의 실수를 반복하고, 중요한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 할까봐’
제가 염려하는 마음으로 몇 개의 글을 연속해서 썼습니다.
존 스토트가 가진 견해는 흔히 ‘통합적 선교’라고 불리며 integral mission
이것은 그 후에 한나 파디야, 올랜도 코스타스 등이 더 깊이 설명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선교가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 통합되어야 integral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죠.
이제까지 내용을 잠시 요약하자면,
스토트는 ‘통합적 선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요.
그레이엄이 원했던 것은 ‘(복음전도의) 우선순위’ 였습니다.
로잔은 항상 이 두가지 사이에서 고민해 왔습니다.
(둘 다 맞는 말이지만, 어느 것을 더 강조해야 할지.. 고민했죠)
예를 들면, 로잔운동에는 IFES(국제 복음주의 학생회) 출신으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주로 ‘통합적 선교’를 지지하고 강조합니다.
(맞는 말인데, 그러다 보면 복음전도의 우선성이 퇴색될까봐 우려하는 거죠)
그러나 로잔운동이, 그 관점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어서
그레이엄과 스토트 사이에 가벼운 논쟁이 있었고,
이 논쟁은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저는, 선교가 복음전파와 실천(사회적 책임)
proclamation 과 demonstration, 이 두 영역을 모두 포함한다고 믿지만
지나온 과거 역사를 보면,
복음전도를 우선시하지 않으면, 결국은 복음전도가 흐지부지 되어버리더라는 거죠.
(이것은 계2장의 에베소 교회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복음전도와 실천 둘 다 같이 가다가, 첫사랑을 먼저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실천만 남아서 한 동안 지속되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 실천마저도 소멸되는 거죠.
왜냐면 복음전도의 첫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실천도 감당할 동력이 안 생기는 거죠.)
한국에서 열릴 4차로잔대회에서,
저는 이런 제 주장을 펼칠 생각입니다.
네, 선교는 복음전파와 실천, gospel proclamation 과 demonstration
이 두가지를 모두 포함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이 둘은, 선교의 큰 두 축이며, 두 기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토트의 말대로) 이 두 가지를 함께 추진한다면,
세상은 대체로 교회가 자비를 베푸는 일(실천)에 대해서는 환영할 것입니다.
교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선행을 베푸는 일을 하면, 사회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선포를 공공연히 하면, 세상은 저항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선교의 한 측면(복음 전파)을 잃지 않도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두 기둥, 두 축으로 함께 선교를 추진할 때,
세상은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네, 우리 나라에 와서 좋은 일을 해 주세요.
우리는 당신이 선행을 베풀어주는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거나,
믿고 회개하라는 등의 얘기는 해주지 말아주세요!’ 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복음전파는 저항을 받고,
선행 등 복음 실천이 환영을 받는다면,
교회는 우선순위를 정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복음전파가 소멸됩니다)
제 논지는, 기본적으로 선교는 그 성격상 통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저항할 때, 우리는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때때로
‘믿음을 나누는 것은 망설여지지만, 선행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하죠.
이 영상을 보고 누군가는
‘에드 스태처가 선행을 반대한다’라고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 책에도 썼지만,
교회가 선행이나 사회적 책임 감당을, 지금보다 더 했으면 하고 생각하지,
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4차서울인천대회나 그 이후에,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깨끗한 물을 제공하기 위해 우물을 파고,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구출하는 일에 대해 더 많이 논의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들이 모두 선교의 일부라는 점을, 더 많이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선교의 일부라는 데 대체로 동의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의 모두가 그것을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점을 유지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로잔문서 작성이나 그런 일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이 영상을 만드는 이유는,
이런 의견을, 북미 대표단과 공유하고
또한 온라인에 게시하여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L4(4차로잔서울인천대회)에서
다시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복음전도, 교회개척, 개인의 회심
과 같은 전통적 사역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람들이 이러한 전통적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무관심해 했을 때,
한 세대 안에서 선교의 초점을 잃어버리는 사례들이 반복적으로 있었습니다.
(즉, 복음전도의 우선성이 소멸되니까 (선교지 현지인들이 복음을 바라지 않음)
나중에는 실천, 사회적 책임도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첫 사랑’이라는 동력을 잃어버리니까...
점점 형식적으로 겉치레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나가다가
결국 둘 다 함께 소멸되더라는 것이죠)
바로 지난 한 세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봅니다.
(WCC가 그랬다는 것이죠. 사회적 책임 감당을 강조하다가
나중에는 사회적 책임 감당 마저도 안 되고
WCC가 전체적으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죠)
실제로 최초의 세계선교사 대회였던 1910년 IMC 에딘버러 대회 이후,
1928년쯤 되었을 때,
불과 18년만에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의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선교지의 열악한 상황에서 ‘복음전도’만 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인가?
그래서 점점 WCC로 가게 되었던 거죠)
지금 문화와 교회 내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바라기는, 이번 로잔대회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이 도출되기를 바랍니다.
선교는 복음전파와 실천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로잔이 이미 그런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우리가 계속해서 우선순위를 올바로 정해야 합니다.
즉 복음전도의 우선성, 전통적 선교방식의 우선성을 견지하고,
그 초점, 강조점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
주) 설교자는 이것을 ‘통합 우선주의’라고 부릅니다. integral prioritism
복음전파와 실천을 통합하되, 그 안에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는 뜻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