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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15장 충성된 증인의 고통과 상급

LNCK 2024. 9. 11. 10:53

설교본문 색인          예레미야              ▣선지자론 

 

https://blog.naver.com/karamos/80141874646

 

충성된 증인의 고통과 상급        렘15:10-11          2008년

 

※렘15장을 전체적으로 잘 해석하는 은혜로운 설교입니다. 특히 ◑2 단락.

 

서론

 

예레미야는 고통을 많이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소명을 충실하게 수행한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충성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정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렘20:14절에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이런 언어는 구약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했던 욥의 언어와 동일합니다.

욥기 3장을 봐도 욥은 자신의 태어난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의 고난이 욥의 고난과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이고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충성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에도 어려운 환난과 고생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3:12

예수님께서도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10:3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7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 때로는 핍박도 있고

또 각자가 져야할 십자가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졌던 십자가는 적은 것이 아니었지만

대가를 치르고 질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예레미야의 고통과 그에 따른 상급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충성된 증인이 겪는 고통

 

예레미야는 네 가지 고통을 겪었습니다.

 

▲첫째, 적대감의 고통(Pain of Hostility)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전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설교자였습니다.

본문 15:10절에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뀌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어머니가 예레미야 자기를 낳을 때,

온 세상이 자기(에레미야)를 때릴 것이고 욕할 것이며 저주할 자로 낳으셨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증거하는 이러한 메시지는 전혀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15:2절에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죽을 사람은 죽으라’는 거죠)

 

예레미야가 이런 메시지를 전하자 백성들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우리 민족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레미야의 대답은, 15:2절을 풀어서 쓰면 “너희 중에 4분의 1은 병으로 죽을 것이고,

4분의 1은 칼에 맞아 죽을 것이며, 4분의 1은 굶어 죽을 것이고,

나머지 4분의 1은 포로로 끌려갈 거다”

(*꼭 1/4이란 분량이 본문에 나오진 않지만, 4개의 재앙이라서 각각 1/4씩 분배)

 

또 15:3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이러니 누가 예레미야를 좋아하겠습니까! 미움받기 딱 알맞지요!

 

이 재앙은 연쇄적입니다.

-죽이는 칼이 제일 먼저이고, 그 결과

-칼에 맞아 죽은 사체를 개들이 와서 찢을 것이고,

(*개들, ‘케레브’는 이방 제사를 의미하기도 하죠. 시신이 이방 제사로 드려질 수 있죠)

-그 후에는 (제물로 드려진 시신을) 새들이 와서 먹을 것이고,

-그 후에는 땅의 짐승들이 와서, 새들이 먹고 남긴 것을 먹어 치울 것이다...

새나 하이에나 같은 것들은 죽은 사체를 먹죠.

 

유다백성들이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이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15:4절에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므낫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훌륭한 왕인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매우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열왕기하 21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행적은 시종일관 부정적입니다.

산당을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고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몰록 숭배를 했습니다.

또 점치며 박수무당을 신봉하고, 무죄한 자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사람, 하나님의 종들을 무수히 죽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서 죽인자도 바로 므낫세라고 하는 전승이 있습니다. 히11:37

 

므낫세 왕이 유혹을 하니까 백성들이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악에 빠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니까

내가 너희를 심판하겠다고 하시면

또 선지자들이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벌을 내리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또 뜻을 돌이켜 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이러기를 한 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을 했건만,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15:6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잘못된 지도자 므낫세 하나가 이처럼 백성들을 유혹해 나라를 아주 망쳐놨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잘 뽑아야 됩니다.

 

이런 나라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는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의 적대감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이처럼 적대감에 시달릴 것도 각오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쁘시게 하되

세상으로부터는 때로 대적 받을 것을 각오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고독의 고통(Pain of Loneliness)입니다.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인 아나돗 사람들조차도 그의 생명을 취하려 했습니다.

 

앞서 11:21절에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뿐만 아니라 형제와 아비집의 사람들도 그를 속이고 배반했습니다.

12:6절에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찌라도 너는 믿지 말찌니라”

 

또 그는 거짓 선지자 취급을 받았고 국가적으로도 반역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심지어 결혼도 하나님께 허락받지 못하고, 그러니 자녀도 없었습니다. 더 외로웠겠죠.

 

16:2절에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찌니라”

 

16:5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상가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초상집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16:8절에 “너는 잔치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잔치집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레미야의 삶은 고독 그 자체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외국에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본국에 있으면서 매우 외로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진리를 따라 살다 보면

때로는 이런 고독감에 시달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실패와 조롱당함의 고통(Pain of Failure)입니다.

예레미야가 가장 많이 외친 단어는 ‘돌아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슈브”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만 100번 이상 외쳤습니다.

 

예레미야는 큰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울면서 부르짖기도 하고

때로는 협박도 하고 온갖 수사학적인 기술을 다 동원하여

시적인 언어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20:7b절에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예레미야가 지나가면 거짓선지자라며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레미야는 실패자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실패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7:27절에서 하나님이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찌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뭘 하면 열매가 조금이라도 있어야지 열매가 전혀 없다면

얼마나 실패감이 크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실패감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넷째, 동정심의 고통(Pain of Sympathy)입니다.

*여기서 ‘동정심’은, 누구를 동정해서 불쌍히 여긴다는 뜻 말고도,

그의 아픔을 똑같이 여긴다 sympathy 의 뜻이 있죠.

 

저는 아주 바쁜 경우가 아닌 이상 환자 심방을 반드시 합니다.

그런데 환자가 배가 아프면 저도 배가 아프고,

환자가 머리가 아프면 저도 머리가 아픕니다. (이런 은사자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런 동정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한번은 제가 가서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덜덜 떤 적이 있습니다.

환자는 배에서 일하는 선원이었는데, 로프를 가지고 일을 하다가

그만 기계가 로프를 잡아 당겨, 로프가 자기 발에 감겼습니다.

 

그래서 로프가 굉장히 세게 그 선원의 다리를 감았으니,

그의 다리 살이 갈라지고 다리의 뼈가 보일 정도로 다친 것입니다.

 

그걸 보니까 식은땀이 나고 다리에 힘이 빠져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동정심의 고통’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사랑하지 않아도, 예레미야는 유다백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그들이 당할 심판과 고통을 괴로워한 것입니다.

 

9:1절에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예레미야의 동정심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러나 20:9절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는 백성들로부터 계속 미움, 왕따, 배척을 받으면서도

계속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들을 예언, 대언했습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예언, 대언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했기에, 또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했기에,

그는 미움과 배척을 받으면서도, 계속 예언, 대언했던 것입니다.

 

스위스의 “라불”이라는 공동체를 만든 유명한 프란시스 세퍼(Francis Schaeffer)박사는

“만일 당신이 진실로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한다면

심리적으로 동정심 Sympathy 의 큰 고통의 대가를 치루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 안에 불신자들이 겪을 지옥의 고통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죽으면 영원형벌을 받을 것인데도

아무런 동정심이 없으십니까?

우리 영혼 속에는 예레미야처럼 불신자들이 받을 고통에 대하여

울며 몸부림치고 기도하는 동정심이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2. 충성된 증인이 받는 상급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고통만 주시는 고약한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고생하는 사람들에게는 남이 알 수 없는 상급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가 네 가지 고통을 받았으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네 가지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는 축복입니다.

본문 11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11절은 예레미야에게 주는 상급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1:18~19절에도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15:20절에도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찌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그리고 지금 살피고 있는 15:11절이죠. 이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지금은 대적들이 예레미야를 괄시하고 대적하지만,

그들이 재앙과 환란을 당하면, 예레미야에게 찾아와서, 부탁을 하게 된다는 거죠.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시드기야 왕은 조용히 예레미야를 불러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물었습니다. 37:17

 

성경에 이렇게 대적들이, 성도 앞에 무릎 꿇게 되고,

오히려 은총과 자비를 간구하게 된다는 구절이 여러 구절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요셉을 핍박했던 형들이, 나중에 요셉에게 은혜를 구했고요,

 

계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내적인 용기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어려서 대통령이나 장군이 아니라

싸움 날 때 맨 앞에서 용감하게 나서는 동급생을 가장 존경했습니다.

그를 보며 저는 속으로 ‘나도 저런 용기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용기는 자연적인 용기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종류의 용기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안으로 부어 주시는 위대한 용기가 충만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밖으로는 울기도 했지만

안으로는 하나님이 강하게 하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내면적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축복입니다.

성경의 기도 가운데 예레미야의 기도만큼 담대한 기도가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어떤 때는 하나님한테 시비 거는 것 같습니다.

 

15:18절에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하나님이 왜 나에게 고통을 계속주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속이는 시내(deceptive brook)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방에 “네게브”라는 사막이 있고

그 사막에는 비가 오면 일시적으로 시내가 흐릅니다.

그런데 그 시내를 보고, 얼마 후에 물을 얻으려고 가면, 금방 말라버려 시내가 없어졌습니다.

 

이런 걸 가리켜 “와디”라고 하는데

지금 예레미야는 “하나님, 당신이 속이는 시내입니까(Are you wadi)?”

“왜 날 속이십니까?” “날 상대로 왜 사기를 치십니까?”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7절을 보면 더욱 무례해 보이는 언어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라고

우리말 성경에는 아주 점잖게 번역되어 있지만

 

NIV 영어성경을 보면 “O LORD, you deceived me, and I was deceived

(주께서 나를 속이셨고 그래서 내가 속았습니다)”라고

무례할 정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기도를 다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투정을 하는구나. 그래 그정도 고통을 당하면 투정할만도 하지. 내가 받아주마.

내가 너를 속인다고? 내가 너를 속이는 것 같지만 너에게 큰 복을 주려고

지금 그렇게 하는 거다.” 하시며 그 기도를 다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나를 속이시는 분입니까?”라고 했다가는 혼 납니다.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는 그런 수준의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대단히 깊다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시73:28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복은 돈이 많거나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15:11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은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가까이 해 주시고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 주시겠다는 복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레미야는 기도도 이렇게 담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도 얻어 먹었습니다.

 

15:16절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주의 일은 힘듭니다. 목회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힘이 들어도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을 얻어먹는 기쁨입니다.

이 말씀 한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묵상하며 몸부림치다가

말씀에 담긴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설교원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남이 알 수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런 기쁨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얻어먹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고생하는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상급인 것입니다.

 

▲셋째, 원수에 대한 승리의 축복입니다.

15:11b절에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원수가 괴롭혀도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면 네 앞에 와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5:21절에도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속하리라”

고 기록되었습니다.

 

▲넷째, 예수님을 닮은 인물이 되는 축복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예레미야가 받은 복중에

가장 큰 복은, 그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라는 평을 받은 것입니다.

 

신약시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은 “이분이다. 저분이다.”하고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마16:13~14절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을 보고, ‘저분은 예레미야다’ 라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성경에서 가장 닮은 인물은 예레미야라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고향에서도 배척을 당하셨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으셨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매를 맞고 나중에는 칼로 죽었다는 전승이 있는데

예수님도 매를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는데 예수님도 조롱거리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닮은꼴입니다. 가장 닮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레미야가, 고난을 많이 당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었습니다.

 

결론

 

예수님을 믿고 복만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 복을 다 받으면

천국에서 무슨 상급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때로는 욕도 먹고 고통도 당하며 잠도 못자는 고통이 있어야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충성은 적지 않은 고통도 따르지만

고통의 이면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보석 같은 축복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천사들과 먼저 간 허다한 증인들 앞에서

우리를 소개할 때 “이 사람은 내가 평생에 사용한 내 종이다.

이 사람은 나를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였느니라.

이 사람은 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상을 주노라.”라는 칭찬을 들어야지,

 

“이 사람은 그냥 나 때문에 수지만 맞은 사람이야.

이 사람은 나를 위해서 고생은 하나도 안했고 예수님을 닮지도 않은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고생하실 것은 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 닮은 내 백성이라”는 칭찬의 말을 듣는

“충성된 증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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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별 해석  (참고 자료)                    한글 주석 - HANGL NOCR

 

15: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탄원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탄원을 들으사

그들을 용서하셨으며(출 32:11-14, 민 14:13- 20),

사무엘 역시 그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을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삼상 7:9).

 

그러나 이제 이러한 위대한 중보자들이 기도하고 탄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죄악은 워낙 뿌리가 깊고, 도저히 돌이킬 수없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하였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모세와 사무엘에 대한 언급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즉 그는 이 두 선지자들에게서 그의 사역의 모형을 볼 수 있었던 것이며,

그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계승자였던 것이다.

 

15: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죽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웨트'는 '멸망', '염병'으로도 번역된다.

본 절에서처럼 하나님의 징벌에 따른 재앙이,'사망', '칼', '기근', '포로', 혹은 '염병' 등으로

묘사되는 예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14:12, 43:11, 겔 14:21, 33:27).

 

15: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네 가지로 벌하리니' 이 네 가지 심판의 도구들은

1) 죽이는 칼

2) 칼에 맞아죽은 시체를 찢어 놓을 개들,

3) 죽은 시체를 먹고 사는 새들,

4) 시체를 먹는 새들이 남기고 간 것을 먹어 치울 짐승들 등이다.

 

15: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행한 바를 인하여' 유다의 반역과 배도를 부채질했던 열왕들 중

대표적 인물로서 므낫세가 지적되고 있다.

왕하의 여러 곳에 이 므낫세의 악행에 대한 내용이 곳곳에 지적되어 있다(왕하21:10-15, 24:3).

 

므낫세는 다윗계 열왕들 중에서 종교 혼합주의를 가장 많이 도입한 자였으며,

민족에게 대단히 깊은 악영향을 끼쳤다(왕하21장).

 

한편 본절과 앞절의 어투는 신28:25, 26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15: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물을 자 누구뇨'

예루살렘의 심각한 운명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내용이다.

본절의 세 가지 질문 사항들은 예루살렘을 동정하거나 위로할자가 아무도 없으며

또한 그들의 안부를 물어볼 자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B.C. 586년의 엄청난 파국을 반영하고 있는 예레미야 애가서의

절망적인 분위기를 상기할 수 있다(애 1:1, 12, 2:13, 20).

 

15: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났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내게서 물러났으므로'

히브리어 원문상 '아호르 텔레키'는 '네가 계속적으로 뒷걸음질 친다(타락해왔다)'는 뜻이다.

또 여호와를 버리고 뒷걸음질 친 자가 바로 '너'라고 표현하면서 너란 대명사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오래도록 참고 자비를 베푸셨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미루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자비로우신 배려가 아무 쓸모 없었기 때문이다.

 

15: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어' 이런 장면은 타작 마당에 수확한 것을 모아두고

매년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알기 쉬운 예화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곡식을 키질하여 겨를 날려 보내듯이 이스라엘을 키질하여,

그들을 다 흩어버리실 것이다.

본절의 예언은 세차례에 걸친 바벨론의 유다 침공을 통해 성취되었다.

 

15:8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

 

'그들의 과부가...모래보다' 남자들이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에 과부가 여인들이 많아졌음을 지적한다.

 

'청년들의 어미를'

칠십인역(LXX)은 '어머니(와) 청년들'로,

벌게이트역(Vulgate)은 '청년의 어머니'로,

수리아역(Syriac Version)은 '어머니와 청년들이 다 함께'로 각각 번역한다.

 

문맥상 '어미'를 수도나 대도시로 이해하여,

본절을 예루살렘 거민들의 모성인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15:9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직도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져서 그에게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들들이 모두 전쟁에서 몰살당했음을 가리킨다.

클라크는 이 '여인'을 예루살렘으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녀, 예루살렘은 수많은 자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 땅의 수많은 도시들과 마을들, 그리고 가문들의 어미였다.

 

그리고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를 뜻한다.

한편, 일곱 아들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큰 축복으로 여겨졌다(룻 4:15, 삼상2:5).

 

그러나 그들이 백주에 몽땅 멸망하고 말 때에는, 일곱 자식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만다. 아들이 7명이나 모두 죽었으므로.

더 큰 비극은, 이들 젊은이들은 한창 피어날 나이에 전쟁에서 죽게 되어

대를 상속할 자손마저 없어져 버린다.

 

15: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나’는 예레미야 자신이다.

깊은 절망감 속에서 내뱉는 부르짖음이다.

이런 애도는 20:14-18의 날카로운 비명속에서도 나타난다.

이곳의 주제는 자기 동포의 손에 핍박받는 것에 대한 것이다(11:18-12:6 참조).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불안과 고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다(욥 3:3-10).

그러나 그의 부르심은 어미의 태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1:5),

그렇기 때문에 그의 탄생날에 대한 이 같은 한탄은

맡은 바 사명을 차라리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는 '온 땅을 향해 법적인 투쟁과 변론을 벌일 자로'라고도 번역된다.

그는 아마 자기 민족을 향해 계속 소송을 거는 자로 보였던 것 같다.

 

'내게 뀌이지도' 또 예레미야는 여기서 자신이 마치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하소연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유없이 자기를 걸고 넘어진다는 뜻이다.

 

15: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네 원수로...간구하게 하리라'

'간구하게'의 히브리어 '파가'는 '간청(요청)하다', '만나다'는 뜻이다.

그런데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동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절의 해석도 달라진다.

 

1) '내가 네 대적을 만나 은밀한 영향력으로써 그로 하여금 네게 선대하도록 만들어 주겠다'(KJV).

2) '이제까지는 네 대적이 너를 조롱하고 대적하였으나 그날에는 오히려 네 대적이

네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NIV)

 

이 두견해 중 어느 한 쪽만을 지지하기란 어렵다.

1)의 견해를 따를 경우 이 예언은 40:1 이하에서 성취되었으며,

2)의 견해를 따를 경우 그 예언은 38:14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과 12-14절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제시되고 있다.

혹자는 11절만을 선지자에게 적용시키고

12-14절은 유다 백성에게 적용시키는가 하면(Calvin, Grotius, Henry, Scott),

 

또 어떤 학자는 11-14절 전체가 유다 백성에게 선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장 지지받는 견해는 11-14절 전체를 선지자에게 선포된 말씀으로 보되,

11절은 다분히 개인적으로 하신 말씀으로,

12-14절은 백성들과의 동일선상에서 말씀하신 내용으로 보는 것이다.

 

15:12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문맥을 살펴보면, 예레미야에게 지금 유다에 닥쳐올 적의 성질이 어떠한 것인지 설명한다.

유다로서는 그 어떤 확신과 자신감도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유다인들의 의지가(혹은 무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래서 그것이 마치 철이나 놋과 같다 할지라도

북방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적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15:13 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유다를 침공할 적군들이 모든 값진 재물들을 노략해 갈 것을 뜻한다.

 

15:14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

 

앞 구절과 본절은 17:3, 4의 내용과 유사하다.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묘사한다.

 

15: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나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한다. 이 말은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여호와께 기억해 주십사 하고 간구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인정하심을 얻기 원할 때이다(느13:14, 시25:7, 106:4등).

 

마지막 어구들을 살펴보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박해자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대변자를 해치려고 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즉 여기서 예레미야가 여기서 호소하고 있는 내용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사사로운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할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다.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면 기꺼이 받아들였다.

에스겔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하였다(겔2:8-3:3).

 

예레미야나 에스겔은 공히 처음에는 입에 맞지 않는 것 같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예레미야는'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였고, 에스겔은 '꿀처럼 달게' 받아들였다.

 

또한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란 말은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신 12:5)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곳'(신 12:11)이란 어구와 같은 맥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다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천명이다.

 

15: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원문상의 직역은 '흥겹게 떠드는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지 않았으며'이다.

예레미야는 그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것도 누릴 수가 없었다.

본절에서는 그의 사명에 대한 이 같은 헌신적인 성실성이 상세히 지적되고 있다.

 

15: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여기에는 박해받는 중에 있는 하나님의 종이 터뜨리는 애절한 탄식이 언급되어 있다.

이 질문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토로하는 울부짖음이 들어 있다(시 22:1 참조).

 

예레미야에게는 그의 고통이 끝없이 계속될 것이며 그의 상처는 절망적이어서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참기 어려운 고난으로 인해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께서(2:13)

마치 '물이 말라 속이는 시내'인 것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속이는 시내'란 여름철에는 말라버려 물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시내를 말한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많은 비가 왔을 때만 물이 흘렀던 수많은 와디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하기 쉬운 예화였을 것이다.

여행자들은 물을 찾기 위해 종종 와디에 다가가지만 대부분 물을 찾지 못하고 만다.

 

15: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 앞에 세울것이며'

클라크는 본 문구를, '만일 네가 회개하면 다시 유다 땅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선지자 직분에 관련된 내용으로 봄이 더 나을 것 같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불러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문구는 '네가 돌아오면 나는 너에게 선지자의 직무를 돌려주겠다'란 의미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도 '돌아오다'(슈브)란 동사의 언어 유희가 쓰이고 있다.

 

예레미야의 쓰라린 경험은 선지자로서의 그의 입을 거의 봉해 버렸으며

자기를 보낸 이에 대한 확신과 신적 소명에 거의 눈을 감아버리게 했다(20:7-9 참조).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의 반응에 개의치 말고

다시 돌아와서 오직 당신만 신뢰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불평을 비난하면서도 우선 천한 것에서부터 귀한 것을 취할 것을 권면하신다.

즉 백성들의 속이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에게로 돌아서라고 만든다.

그렇게 할 경우 그는 하나님의 입 같이(렘1:9)될 것이며,

그의 말은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 역시 그 말씀을 그러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5: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구하여 건짐이니라'

'네가 나에게 충실한 이상, 그 어느 누구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다시 부르시는 재확인 절차이다.

 

이 내용의 어투는 1:8, 18, 19의 내용을 강하게 상기시켜 준다.

본절의 약속은 구약에서 구원과 관련해서 흔히 등장하는 세 동사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은 본절의 '구하다'(야솨), '건지다'(나찰)와 다음 절의 '구속하다'(파다)이다,

 

이 동사들은 모두 출애굽 사건을 묘사하는 상당히 비중있는 구절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때때로 보다 일반적인 상황에도 적용되었다.

이들 각 동사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해 제작기 다름 면을 강조하고 있다.

 

'구하다'에 해당하는 '야솨'와 그 관련 명사들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압제받고 있는 자들은

구해낸다는 점에 강조점이 두어졌다.

'건지다'에 해당하는 '나찰'은 강한 자가 자기 먹이를 빼앗아 가려고 할 때

그것을 와락 붙잡는 자의 적극적인 행위를 나타내며 본절에서는

특히 죽음, 무덤, 죄악, 고통, 공포 등으로부터 건짐받는 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파다'는 대부분 어떤 사람의 소유에서 속전을 지불하고 그를 해방시켜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5: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무서운 자의 손에서' '갈대아 군대의 손에서'의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도 땅에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