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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오지병 렘19:1~13 2008년 ☞ <지옥>
서론
힌놈의 골짜기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고도 말하고, 때로는 ‘도벳’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힌놈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사람 이름인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면 ‘힌놈의 아들’이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 보니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다시는 이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힌놈’은, 애가 lamentation 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남서쪽에 위치합니다.
힌놈의 골짜기 중심부에 ‘아켈다마’가 자리하고 있죠. 가룟유다가 죽은 곳.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 남쪽 하시드문 밖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본문 2절에 “하시드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시드문은 오지병 조각문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토기장이들이 오지병을 만들 때 못 쓰게 된 작품들을 깨뜨려 버리는 문입니다.
하시드문밖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는 주전 7세기경부터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쓰레기뿐만 아니라 죽은 짐승과 사형 집행된 범죄자들의 시신을 태우는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병균이 들끓었기 때문에 소독을 위한 목적으로
24시간 365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이 골짜기를 가장 사악한 형태의 우상숭배장소로 사용했습니다.
몰록 혹은 몰렉이라 불리는 중동지방의 우상에게 자녀들을 불로 태워 드리는 장소로 사용한 것입니다.
왕하23:10절에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할 때 몰록에게 자녀를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를
금지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윤리성도 없고
극단적인 이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가 복받으려고 자기 자식을 불태워 죽이며
이것이 나의 경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비윤리적이고 극단적인 이기심인 것입니다.
자녀들이 불에 태워질 때, 산채로 던져지기 때문에 단말마적인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상숭배자들은 그 소리조차 듣지 않으려고 큰 북을 칩니다.
북소리로 자녀들의 비명소리를 덮어 듣지 않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힌놈의 골짜기를 가리켜 북(drum)이란 의미를 가진 ‘도벳’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헬라어로 “게헨나”라 하며 지옥(hell)으로 번역됩니다.
“게”는 골짜기라는 뜻이고, “헨나”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의 힌놈의 헬라어입니다.
그러므로 게헨나라 하는 것은 ‘힌놈의 골짜기’라는 의미의 헬라어입니다.
신약성서에 게헨나가 열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마10:28절에서 예수님은 게헨나에 대해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도 함께 게헨나(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지옥 갈 때에 영혼과 더불어 몸도 함께 갑니다.
이 세상에서의 몸이 아니라, 사망한 후에 부활하여 (요5:29)
부활한 육체를 가지고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과 영혼을 함께 능히 게헨나에서 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9:48절에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다 해도 죽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게헨나(지옥)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오지병을 샀습니다.
오지병은 진흙으로 만든 도자기, 진흙으로 만든 병(clay jar)인데 목은 좁고 몸통은 큽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실 때 오지병을 사용해서 마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오지병을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힌놈의 골짜기로 갔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니 그들의 목전에서 오지병을 던져
힌놈의 골짜기에서 깨뜨려 박살을 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전달합니다.
11절 전반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유다백성들이 힌놈의 골짜기에 던져 산산이 박살난 오지병 신세가 될 것이라는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유다백성들이 힌놈의 골짜기의 깨어진 오지병 신세가 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4a절에 “그들이 나를 버리고”
그들을 지으시고 양육하신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둘째, 우상숭배했기 때문입니다. 4b절~5절에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열조와
유다 왕들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명하거나 말하거나 뜻한바가 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셋째, 목을 곧게 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15b절에 “이는 그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며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힌놈의 골짜기에 던져져 산산이 부서질 오지병 신세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유다가 멸망당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무시한 불신자들은
영영히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영혼과 육신이 함께
영영히 고통 받는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시면 죽은 후에 힌놈의 골짜기에서 산산이 깨어진
오지병 신세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오지병의 실물교육을 통해서
지옥 심판에 대해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날이 오는 것은 “확실하다”
본문 3절에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무릇 그것을 듣는 자의 귀가 진동하리니라”
“지옥이 있다는 걸 청력이 약해서 못 들었습니다.”라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가 진동할 정도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귀가 울리고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크고 확실하게 그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결국 역사가 지난 후대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확실히 예언한 재앙이
틀림없이 임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그 말씀을 거역하며
우상숭배하는 불신자들에게 지옥의 심판은 확실합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조금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오십 보백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행17:31절에도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이 작정되어 있습니다.
계20:12b절~15절에도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최후심판의 모습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지옥(게헨나)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불못(lake of fire)” 이라고
말했습니다. 지옥심판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며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자는 힌놈의 골짜기에 깨어진 오지병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지옥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만든 얘기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으로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데 입을 닫고 있어도 괜찮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전도하셔서 지옥심판으로부터 건지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공포스럽다”
영어로 무섭다는 뜻을 가진 단어는 “terrible” 이라는 말도 있지만,
보다 더 무섭다는 뜻을 가진 공포스럽다는 단어는 “horrible”입니다.
본문 7~9절의 말씀은 아웅산테레, 9.11테러 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공포 그 자체입니다.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지옥심판을 대항해 사람이 모략을 꾸미고 계획을 세워도 소용없습니다.
시체는 매장도 못되고 굴러다닙니다. 지나가는 개가 발로 찹니다.
지나가는 토끼도 뼈 하나를 물고 갑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 놀라며
“어찌하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되었는고” 말합니다.
먹을게 없어 아들과 딸과 친구의 고기를 먹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의 시간이 옵니다.
예레미야애가를 보면 이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백성들이 단순히 재수나 운이 없어서, 사주팔자가 나빠서, 손금이 짧아서,
세계정세가 변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신약에 게헨나가 열두번 나오는데, 그 중에 예수님이 11번 말씀하셨습니다.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뽑아버리고서라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또 발이 범죄 하면 발을 찍어버리고, 발 없이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잘라버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에 던지 우는 것보다 백번 낫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게헨나에 대한 열 두 구절을 모두 살펴보면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오는 영원한(eternal)곳이고, 벌 받는 곳이라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을 가리켜 영벌(永罰)의 장소라고 말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학자들의 자료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지옥이 영벌의 장소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게헨나는 단순히 유다민족을 심판하는 힌놈의 골짜기라고 말합니다.
힌놈의 골짜기가 그림자요 게헨나가 실체인데 실체를 보고
이것은 그림자라는 거꾸로 된 논리를 가지고 어리석은 말을 합니다.
그들은 신약성서의 게헨나는 유다민족에 대한 민족적인 심판이라고 말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을 합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두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마25:46절에 “저희는 영벌(eternal punishment)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41절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eternal fire)에 들어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영영한 지옥 불을 원래는 인간을 보내려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원래는 루시퍼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 타락한 천사들,
타락한 귀신 악령들을 보내려고 쓰레기 처리장으로 만든 곳이 바로 영영히 타는 불못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하나님이 싫고 마귀가 좋다며 영영히 타는 불못까지
마귀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를 섬기고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이런 공포스러운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이 공포스러운 곳에 영영히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3.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정당하다”
정당하다(just)는 말은 지나치지 않고(not excessive) 공정하다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수없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선지자를 톱으로 켜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다보면 사람들은 다 마음속으로 신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을 원하되 성경의 하나님을 원치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신은 자기들의 이기심을 채워주는 신입니다.
돈 벌고 싶을 때 돈을 채워주고, 건강하고 싶을 때 건강을 채워주며,
비가 필요할 때 비를 내려주고 풍년을 주는 신을 원합니다.
바알과 몰록을 신이라 하며 숭배합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죄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죄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이나 니느웨 사람이나 바벨론 사람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데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우상, 귀신, 악령을 하나님이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합니다. 신을 믿는다 하면서도 잘못된 신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범죄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도 어느 대상에게 죄를 짓느냐에 따라 벌이 달라집니다.
친구에게 “야 임마”하며 욕해도한 번 주먹질하고 싸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옆집 아저씨나 동네 이장님께 “야 임마” 그러면 동네에서 왕따 당합니다.
대통령께 “야 임마” 그러면 국가원수 모독죄로 감옥에 갑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그렇게 막말을 하고 욕을 했다면 똑같은 죄라도 벌이 다른 것입니다.
물질도 하나님이 주셨고 자녀도 하나님이 주셨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돈, 쌀, 떡, 자녀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중동에 갔습니다.
중동에 대한민국 건설회사가 많이 진출해서 많은 사람들이 일꾼으로 가서 달러를 벌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경제가 이처럼 발전한 것은 그 때 중동에서 피땀 흘려 고생한 사람들의 공헌이
컸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감옥에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기업을 하자니 뇌물 주는 일도 있고 발각되면 감옥에 잡아가서 죽이기까지 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달러를 벌어 한국에 남아있는 아내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있다 돌아옵니다. ‘아, 이제 나도 아파트 한 채 사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했는데 은행잔고를 보니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했더니 그걸 가지고 부인이 바람이 나 남편이 보내준 달러를 제비족에게
다 써버린 것입니다. 남편이 그 아내에 대해서진노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라 정당한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그 때 술 마시고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유다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부당하지도 않고 과도하지도 않습니다.
자식을 불태워 죽이는 자들에게 자식 잡아먹으라고 하는 게 뭐 잘못됐습니까?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우상의 본거지로 유학 보내고
우상숭배 본거지에서 포로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부당합니까?
하나님과 천국을 싫다 하는 사람을 지옥 보내시는 것은 부당하지 않습니다.
지옥심판은 정당한 것입니다. 계16:7절에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기록되었고,
19:2a절에도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처럼 무서운 지옥심판을 하시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끝까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시라는 걸 잊지 마셔야 됩니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도 제가 지어낸 이야기도 신화도 거짓말도 아니라
참 하나님이 참 인간들에게 하시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 믿기를 거부하고 확실하게 예수 믿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공포스러운 지옥으로 가려 하지 마시고 예수 믿어 천국 가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피할 수 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기까지 하신 사랑의 예수님께서 게헨나(지옥)에 대해서
이처럼 많은 말씀을 하신 이유는 지옥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제가 이처럼 열정적으로 말씀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지옥을 피할 길이 있기 때문에
그 길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피할 길이 없는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없으나, 피할 길이 있기 때문에 피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요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심판을 예언하시는 이유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심판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백성들은 회개도 안했고
하나님께 돌아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죄인이고 지옥에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시어 우리가 받아야 될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심판이 면제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심판을 면제 받아 구원받고 언제 죽어도 천국 가는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결심을 확실히 하십시오.
결론
예수 믿고 구원받아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들이
낭떠러지로 향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습니까?
저들이 조금 더 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힌놈의 골짜기에 떨어져
산산이 깨어진 오지병 신세가 될 텐데, 그걸 입 다물고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환자들이 한 번만 먹으면 병이 낫는 특효약이 있다고 합시다.
본인도 그 약을 먹어 나았는데 남들에게 그 약을 나눠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입니까?
겔3:18절에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옥 가는 걸 뻔히 보고도 교회에 홀로 오시렵니까?
혼자 오지 마시고 세 분을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전도해야 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돈 벌고 출세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삽니까?
지금 죽으나, 십 년 뒤에 죽으나, 이십 년 뒤에 죽으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을 천국에서 보내시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천국으로 동행케 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참고 자료)
19: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오지병'이란 목이 좁고 오짓물을 발라서 구어 만든 것으로서 윤이 나는 병이다.
한편, 일단 구어진 오지병은 부분적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에 토기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게
구어진 것은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유의 병이 고고학 발굴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종류에 따라 높이가 약 10-25cm 정도되었다.
'백성의 어른들' 백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급 장로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증인으로 동반되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탄압받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런 막강한 위치에 있던 자들을 설득시켜 자기와 동행하게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아마 그들은 예레미야에게서 어떤 책잡을 만한 것을 찾고자 하였을 수도 있다.
19:2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예레미야의 행동화된 예언이 진행되는 무대에 관한 언급이다.
고대 예루살렘의 하시드 문이란 곳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위치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이름은 그 일대의 토기장이들의 작업장이 있는 데서 연유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문 근처에다 깨어진 토기들을 내버렸을 것이다.
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 아래에 가파른 지역에 있었으며,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렇다면 하시드 문 역시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10, 11절에 묘사되어 있는 상징적 행위를 연출하는 데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탈굼역(Targum)은 이 하시드 문을 본문(느2:13, 3:13, 14)과 동일시하였다.
만약 하시드 문이 이미 잘 알려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면,
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말은 부가적으로 쓰여진 것임에 분명하다.
어떤 주석가들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말을 편집 과정상 추가된 설명 어구라고 보기도 하나
히브리 저자들은 이처럼 부가적으로 덧붙이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였다.
19:3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여기서부터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시작되고 있다.
그 대상은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이다.
이 설교는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고하는 공개적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청중은 예레미가 데리고 간 어른들과 제사장들 뿐이었다(1절).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이고
그 실제적인 청중은 작은 그룹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민족 전체를 두고 설교하였던 것이 보통이었다.
복수로 언급된 '유다 왕들'이란 표현 역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유다 통치자들을 전체적으로 보고 연설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살아생전에 모두 네 명의 왕들이 다스리는 시대에 살았다.
현 문맥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칭의 보다 완전한 형태들 중의 하나인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름을 사용하며 다가올 재앙으로 인해서
귀가 진동할 것임을 지적하였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 이 표현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엄청난 재난을 당했을 때
백성들의 반응을 묘사했던 표현이다(삼상 3:11, 왕하 21:12).
19: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이 곳을 불결케 하며' 이 문구는 '이곳을 이방인의 땅으로 만들었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들은 이방 신들을 예배함으로써 그곳을 이방인 문화와 종교가 놓인 그런곳으로 변질시켜 놓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땅이 이제 이스라엘 땅인지 이방 땅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편 클라크는 '이곳'을 성전으로 보고 여호와의 성전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설명한다.
19: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바알을 위하여 불살라 드렸나니'
이 백성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것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과의 절대적 언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겔8장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묘사되고 있는데,
B.C. 597년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갈 당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형태의 이방 종교의
종교 의식이 언급되어 있다.
이 구절의 중요한 내용인 인간을 제물로 잡아 바치는 제사는 중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특히 베니게(페니키아)와 가나안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악한 풍습은 이스라엘에서는 처음부터 금지되었지만(창 22:1-19 참조),
아하스(왕하 16:3)나 므낫세(왕하 21:6) 당시에 이스라엘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왕하 23:10에는 요시야 당시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행해졌던 인신 제사가 철폐되는
기사가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악습이 여호야김 시대에 되살아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거부였으며,
여호와를 정면에서 모욕하는 행위였다.
자기들의 연약의 주를 거부한 방자한 행위에 대한 결과는
언약의 저주 조항의 발동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19:6 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곳을 죽음(살육)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3~9절의 내용이 오지병을 깨뜨리는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으나,
이는 극적인 문맥 전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리라 본다.
예레미야를 따라갔던 몇몇 청중들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오지병이
분명히 어떤 상징적인 행위 예언의 일부일 것으로 예측하면서
과연 그 오지병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궁금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이 백성과 이 성의 멸망을 언급하면서
이 오지병을 깨뜨린 것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주었을 것이다(10, 11절 참조).
한편, 이곳의 '도벳'이란 말은 '불의 장소', '불이 타오르는 곳'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인
'테파트'나 '타파'란 말에서 유래되었던 것 같다.
또한 이 '도벳'의 자음을 변경시키면, '치욕', '수치'란 뜻의 '보셋'(보쉐트)이란 말이 된다.
아무튼 그 어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제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는 힌놈 골짜기에 있었던 이교 사당을 지칭하는 듯 하며,
이곳이 살육의 처소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에서 임박한 심판의 처절함이 시사되기에 족하다.
19:7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여호와의 분노는 여기서 더욱 상세히 설명된다.
여기서 ‘계획’은,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 노력하며 애쓰는 모든 계획과 자구책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다 무너뜨리실 것이다.
또한 '무효케하다'로 번역된 원어 '바카크'는 '비우다', '실패하다', '공허하게 하다'는 뜻으로서
용기나 오지병의 뜻으로 번역된 '박부크'란 명사와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는 동사이다.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적들의 칼에 죽임당한 그들의 시체는 매장되지 못하여 짐승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동일한 장면이 7:33, 16:4, 34:20 등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모두 산문체로 기록되어 있다.
신28:26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예레미야가 신명기의 내용에 익숙하였음을 반영한다.
19:8 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
'이 성으로 놀람과 조롱거리가 되게 하리니'
'놀람'에 해당하는 '솽마'는 '멸망', '경악'이란 뜻으로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모욕거리'에 해당하는 '쉐레카'는
깜짝 놀라거나 경멸의 뜻을 나타낼 때 내는 소리에서 유래한 말이다.
19:9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그 아들의 고기, 딸의 살을 먹게 하고' 참혹한 저주의 결과가 계속 묘사된다.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거민들은 자기 자식의 고기를 먹게 될 것이며,
서로 잡아 먹게 될 것이다(레26:29, 신28:53, 겔5:10 참조).
인육(人肉)을 먹게 되는 장면은 북이스라엘과 아람과의 전쟁 때(왕하 6:24 이하)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 공격 때(애 2:20, 4:10),
그리고 A.D. 70년 로마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입증되었다.
19:10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그 오지병을 깨뜨리고' 이제 오지병을 깨뜨릴 적절한 때가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의 내용을 앞의 구절들과 독립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뿐만 아니라 항아리를 깨뜨려서 어떤 질병을 쫓는다거나
또는 어떤 조약을 어긴 자들에 대한 저주를 불러온다거나 하였던
앗수르인, 헷인, 아람인들의 주술적 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는 그러한 주술적 의미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는 이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신탁의 말씀과
똑같은 상징적 행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레미야에게는 선포된 말씀과 상징화된 행위가 같이 수반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19:11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항아리를 깨뜨린 이 사건은 여기서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비록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대단히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서 예레미야의 말과 행동을 널리 퍼뜨려
문제시할 수 있는 자들이었으며,
그에게 적절한 처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아무튼, 오지병을 깨뜨린 것은
백성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상징이었다.
이것은 또한 토기장이가 용기가 깨뜨리는 이야기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쓸모없다고 인정된 병이 산산조각나고 말았는데, 이것이 한번 깨어지고 나면
그것을 다시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예레미야가 다른 곳에서 심판이후의 희망에 대해
언급한 바 있긴 하지만(24:4-7, 31:31-33, 32:13-15)
그의 행위는 가장 참혹한 용어로 전달된 심판선고였다.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이 문구는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어떤 번역 성경은, 다른 곳에는
그들의 시체를 묻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도벳에 장사할 것이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Men because there will be no place else to bury, RSV).
그러나 '자리가 없도록'에 해당하는 '메엔 마콤'이란 말은
'그곳에 남는 여지가 없을 때까지(도벳이 장지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도벳이 남아도는 시체를 받아들이는 장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공동 묘지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곳이 완전히 차버리면, 다른 묻히지 못한 수많은 시체들이 매장되지 못하게 되어
썩은 고기를 먹는 야생 새들과 짐승들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7:33 참조).
19: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 곳과 그 가운데 주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성읍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이 성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이 곳을 살육과 파멸의 장소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이 성에 시체가 가득하다는 것은 성이 부정케 되었음을 암시한다(레 21:1이하, 민 5:2 등).
그러나 이 성이 부정하게 된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음절에 언급되고 있다시피
이교도의 우상 숭배가 이곳에서 자행되었다는 데 있었다.
19:13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더러워졌은즉'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여기서 동사로 번역되어 있는 '더러워졌은즉'이 명사로 기록되어
'더럽혀진 곳'이란 의미이다. 한편 '하늘의 만상'이라고 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천체 신들을 가리키는데, 그중에서 아스다롯(아쉬타르)이 특히 유명하였다(7:16-20).
그리고 유다인들은 이 신들에게 번제를 바쳤으며 술을 부어 전제로 바쳤다.
라스 솽라 토판에는 지붕에서 천체 신들을 위한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언급되어 있다.
예레미야 뿐만아니라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스바냐도 이런 관행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습1:5).
한편, 구약에는 시체와 접촉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더러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와 같은 관념이 이들 이교도 제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즉 요시야는 벧엘에 있는 산당과 이교도 제단들을 더럽히고 모욕하기 위해
무덤에서 뼈들을 끄집어내는 그 위에 흩은 바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그들에게도 이러한 관념이있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19:14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본절에서부터 전기체 기사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예레미야는 도벳에서 성전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전 뜰로 나아갔다.
본절에서부터 20:6까지는 1-13의 단락과는 대조적으로 3인칭 화법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중 후반부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전 뜰의 청중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제사장들과 백성의 어른들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앞의 내용을 압축했다 뿐이지 동일한 사항이었다.
19: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이 성과 그 모든 촌락'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은 이를
'이 도시와 그 모든 성읍들'(하이르 칼 아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좀 특이한 표현으로서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다의 성읍들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표현은 '우세비보테하'로서 '(예루살렘과) 그 주변들'이라는 뜻이다.
'목을 곧게 한다'는 표현은 말은 잘 듣지 않고 멍에메기를 거부하는 황소로부터 취한 은유이다.
이 백성은 율법대로 사는 삶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스스로의 정욕과 충동이 이끄는 대로 좇아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