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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서는 용기

LNCK 2024. 9. 11. 19:1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난/영광의 신학

https://www.youtube.com/watch?v=e4lrm4TQr6I&t=5s

벼랑 끝에 서는 용기       고후1:8~10              

예수동행 목요집회에 오신 여러분들 정말 잘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정말 주님을 바라보자'고 하는 겁니다. 

2024년 9월부터는 서대문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만 집회로 모이는 게 아니고, 
동시에 분당 미금역 앞에 비홀드 처지에서도, 동일하게 지금 거기도 영상으로 
우리 청년들, 성도들이 모여서 예수동행 집회에 함께 참여합니다. 

앞으로 부산에서, 인천에서, 울산에서, 이 동행집회의 캠퍼스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아마 전국에 예수 동행 집회가 동시에 열리게 될 것 같습니다. 

◑도입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어느 집회에 '사람이 얼마나 모이냐?' 
'얼마나 그 집회가 큰 집회가 될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있게 되죠. 

이번 학기도 이제 9월 첫 집회가 열렸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올까? 얼마나 올까?' 하는 생각이, 준비하는 팀에서 늘 있었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저에게 너무나 강하게 주신 생각이 
'내가 그 집회에 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여러분의 관심이, 온통 주 예수님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믿게 될 때, 그건 정말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은 너무나 분명 하십니다. 
주님은 약속을 하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집에도 같이 계신 거고, 우리의 일터에도, 학교에도, 
또 우리 교회에도 주님이 같이 계십니다. 

문제는..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함께 계신데, 주님을 전혀 안 믿는..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 
우리 가운데도 일어납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그 주님을 주목 하느냐?' 
아니면 주님은 우리와 같이 계신데, 사실 우리는 초점이 전혀 다른 데가 있기 쉽습니다. 
조금 전에 찬양을 정말 뜨겁게 해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 초점이 찬양팀에 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설교하는 목사에게 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데, 우리의 관심이 
'도대체 얼마나 많이 모였나?' 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인 거죠. 

우리가 매번 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집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늘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닌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초점이 예수님에게 있지 않은 거예요. 
여러분 오늘 이 밤에도, 여러분이 오직 주님을 주목하게 되면... (잘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목적으로 예수 동행 집회를 열게 된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살면서,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만 찬양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예수님께만 귀 기울이고, 
정말 주님이 함께 계신 것을 믿는 성도들 끼리 모여서 
주님이 함께 계심에 대하여 서로 나누고, 
또 그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그런 집회가.. 어디선가 한 곳은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예수동행집회를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이 집회를 계기로, 한국교회 모든 예배와 집회에,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래서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는 불씨가 되기만을 원하는 거죠. 

오늘도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였다면, 정말 정말 복된 거죠.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이 집회에 모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게 되면, 
그러면 우리에게 깊은 통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정말 빛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내 죄와 허물이 다 보입니다. 

강력한 조명이 비추면, 
그러면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그런 얼룩도, 
또 뭐 거미줄도, 그리고 뿌연 안개도 다 드러나는 거죠. 
빛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서, 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다 드러나게 돼요. 

빛이신 주님을 우리가 정말 주목하게 되면, 
그러면 내 마음에 두려움과 염려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전에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 했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살았던 거예요. 
이제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갑자기 걱정 염려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됩니다. 

'뭐가 걱정이야? 뭐가 두려워?' 이런 믿음을 갖게 돼죠.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게 되면,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 좋은 길 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정말 시온을 향하여 가는, 아주 좁아 보였던 길이, 
그 길이 시온의 대로처럼 보이는 거예요. 
'야 이 길이 사는 길이 구나! 나는 전에는 정말 바보 같이 살았구나!'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게 되면, 
삶의 이유와 목적이 완전히 다 바뀌게 돼요. 

우리가 예수동행집회를 그렇게 갈망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겁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모든 게 바뀌어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게 될 때, 
내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일 중에 하나가 
<벼랑 끝에 서는 용기>가 생겨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띄었다 것 자체가, 벼랑 끝에 서게 되는 겁니다. 
정말 정말 그렇게 돼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게 되면, 
이 집회에 오기 전처럼 똑같이 살 사람이 아무도 없게 돼요.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이 완전히 변했다'고 그렇게 느끼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완전히 안 바뀌었다면, 오늘 이 집회에 헛되이 온 거예요. 

오늘 여러분이 집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갔는데 
가족이나 함께 지내는 사람이 
'어 당신은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아!' 만약 이런 말을 못 들었다면,
그러면 오늘 저녁 집회에 정말 헛되게 참석하신 거예요. 

'요즘 당신은 정말 달라진 것 같아!' 꼭 그런 말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그 달라진 것이, 변화된 모습이, 
그저 외모만이 아니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요. 
즉 아주 벼랑 끝에 서는 거예요.   

여러분 절벽 맨 끝에 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정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코 앞에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를 보는 것은 정말 두렵죠. 

우리의 삶이 이제 그렇게 살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나면, 
내 삶이 정말 벼랑 끝에 서는 것 같게 돼요. 

▲제가 작년 2023년 4월에 목회를 공식적으로 은퇴했습니다. 
그때 많은 분들이 제게 물으셨어요. '목사님, 은퇴한 느낌이 어떠냐고?' 

근데 제가 설명을 해줄 수가 없었어요.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거니까. 
'당신이 은퇴해 보시면 압니다!' 이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었어요. 

은퇴를 안 한 사람은, 은퇴한 사람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을 하기 어려워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붉은 색을 어떻게 설명해요? 
그것과 마찬가지죠.

그래도 자꾸 제게 물어요. '은퇴한 느낌이 어떠시냐고?' 
그래서 생각난 것이 '번지 점프대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다' 
그런 비유를 들어 드렸어요. 

여러분, 점프 대에서 뛰어내리는 것, 그 느낌은 어떨까요?
그건 뛰어 내려 본 사람만 아는 거죠. 
옆에서 이렇게 쳐다 본 사람은, 실제로 정확히 그 느낌을 몰라요. 

번지 점프대에 올라가서, 거기서 뛰어내리면 정말 죽을 것 같은... 
그 점프대 맨 끝에 이렇게 섰을 때, 그 느낌이.. 은퇴하는 느낌이에요. 

거기서 아래로 뛰어 내릴 때, 그때 느끼는 가슴 철렁하는 순간의 두려움! 
그죠. 은퇴하는 느낌이 꼭 그와 같아요. 

근데 참 놀라운 것은, 뛰어 내렸을 때, 그때만 경험할 수 있는 '하늘을 나는 그 기분...' 
'하늘을 이렇게 나는 기분...'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번지 점프를 하는 거죠.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우리의 삶은 아주 그런 형태로 가요. 
예수님을 오롯이 바라보게 되면, 그러면 내 생각도, 감정도... 모든 게 다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고, 그때 우리의 삶은 마치 번지 점프대의 끝에 서는 것 같아요. 
그 번지 점프대를 뛰어내리는 것 같은... 
(상식적인 삶이 아니라, 상식을 초월하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믿음의 삶이.. 마치 번지 점프대를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모험이라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다들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사니까요.
근데 그 번지 점프대에서 뛰어내린 사람만, 하늘을 나는 그 기분을 느끼게 돼요. 
'아 이게 그 느낌이구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꼭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엄청난 복이에요.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지만, 
'내가 지금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은 느낌은 아니다' 
그러면 아직 여러분은, 진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진짜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이 정말 만나게 되고, 그리고 그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때 그 느낌이... 벼랑 끝에 서게 되는 느낌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이끄세요. 

광야에서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들을 먹일 떡은 없어요. 
근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

그때 한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로, 그 5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역사를, 그때 그들은 경험 해요. 
그러나 그 과정은, 진짜 벼랑 끝에 서는 상황과 똑같았어요.
 
또 예수님께서 풍랑 위를 걸어 오시는데, 
그때 배에 타고 있던 베드로가 
'주님이시면 나도 이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 
지금 풍랑이 이는 바다예요. 거기를 내려와서 물 위를 걸어 오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믿고,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라 살 때, 
그와 같은 상황을 계속 만나게 돼요. 
그러니까 벼랑 끝에 서는 용기가.. 바로 믿음인 거예요. 
진짜 예수님을 믿게 되는 믿음입니다. 

진짜 주님이 아니시면.. 죽을 것 같아요. (베드로가 '주님이시거든'에 빗대어) 
주님 아니시면.. 진짜 나는 죽는 거예요. 
꼭 요런 느낌으로 사는 거죠. 

여러분 이런 삶이 정말 쉽지 않죠. 
근데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만드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에요. 

절대로 우리를 힘들게 하시거나, 우리를 아주 괴롭히거나, 
우리를 아주 어렵게 만드려고 하심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정말 믿고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주님이 여러분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될 때, 꼭 기억하셔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시니까, 그렇게 하시는구나!' 
무엇이 사랑이죠?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거예요. 

벼랑 끝에 하나님이 우리를 몰고 가시는 이유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심입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심 입니다
벼랑 끝에서는... 그게 유일한 답이거든요. 

고후1:9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자기를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벼랑 끝에 서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보면, 이제 더 이상 나를 의지할 수가 없어요. 
내 힘으로는 안 되는 상황이에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돼요. 

그래서 '오직 예수!' 이런 표현이 나오게 된 거고, 
'오직 믿음, 오직 기도, 오직 순종!' 그런 표현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인 사람에게는 저절로 나오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순종하는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 하시고, 
우리의 인생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이 관여 하신다'는  
그 말의 뜻을 경험하게 돼요. 

전에는 하나님이 현실 reality 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정도는 믿었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 하시고... 
뭐 이런 정도 쯤의 고백은 돼요.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을 주관하시고, 
지금 오늘 하루 나와 함께 계시고, 
지금 내 문제 속에 주님은 역사 하시고... 이런 고백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현실이 아닌 거예요. (그냥 생각으로만 믿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신앙이 방황하는 겁니다. 

이유는, 오직 주님만 의뢰하는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벼랑 끝에 서는 용기가 없는 거예요. 

항상 안전만 확인해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 상식선에서만 머무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을 경험할 수가 없는 거예요. 

10절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고후1:10

큰 사망에서 우리가 건짐 받는 역사를, 그때 비로소 경험하게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진짜 사랑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려고, 

'하나님은 진짜 살아 계시는구나!' 
이걸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하려고, 현실 속에서 경험하게 하시려고, 
그래서 나를 확신 위에 거하게 하시려고, 그래서 진짜 복된 길로 가게 하시려고..

벼랑 끝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나고 난 다음에 '이게 망하는 길이 였구나' 
아브라함의 조가 롯이 잘 살아보려고,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갔다가 
다 망해버렸어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지 않도록, 

진짜 복된 길, 사는 길을 
정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나 스스로 보기에도 '잘 살았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해 주시려고... 우리를 벼랑 끝으로 가게 하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하고 난 다음에, 그들은 광야로 나갑니다. 
광야는 진짜 먹을 것, 또 머물 수 있는 집, 마실 물이 하나도 없는 곳이에요. 

우리는 그냥 '광야 생활을 했다' 그렇게만 쉽게 듣는데, 
실제 경험이 아니니까, 그게 뭔지 실감이 전혀 안 나요. 

제가 한 번 성지순례 갔다가, 주일 예배를 광야에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배 드릴 만한 곳을 찾고 찾다가... 요르단 이라는 나라에서 
여행자들이 주일 아침에 예배드릴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찾기가 참 어려웠어요. 

그래서 가이드 집사님이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어디에요?' 그랬더니 
'광야에서 주일 예배 드리면 어때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멋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 광야에서 드리는 주일 예배! 진짜 멋있겠군요. 거기서 합시다!' 

제가 광야를 못 가 봤기 때문에, 멋있게 느낌이 들었어요. 
여러분들도 아마 제 말을 들을 때 '그거 괜찮네' 이런 생각 하신 분이 있을 거예요. 

근데 실제로 차를 타고 쭉 가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 년을 걸어왔던 그 광야, 
그 광야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도로 바깥에 있는 그 광야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이제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 '도대체 여기서 40년을 살았다니...'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에, 고요하게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어디 제대로 뭘 농사지을 만한 땅이 아니에요. 물이 한 방울도 없으니까!
그러니 수확할 만한 것도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땡볕에... 뭐 나무가 있어야 그 그늘 아래 햇볕을 피하죠...

저녁에 해가 기울면, 그제야 산 뒤쪽에 그늘이 조금 생겨요. 
대낮에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할 데가.. 전혀 없어요. 그늘이라곤 없어요.

'도대체 이 사막에서,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어떻게 하루를 여기서 살기가 어렵게 보였어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침에 만나를 내려 주셨어요. 
그 만나를 거두어서 하루를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본능적으로 '내일도 만나가 계속 내릴지 어떨지 모르니까' 
2~3일 거를 좀 모아두는 심정이 있을 수 있죠. 
근데 그렇게 2~3일 거 모아둔 항아리는 만나가 다 썩어 버렸어요. 

딱 그날 먹을 하루 치 분량만 주어지는 삶! 벼랑 끝에 서는 거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사십 년을 먹이셨어요. 이건 정말 잔인하지 않아요?

여러분 오늘치 먹을 것만 딱 가지고 사는 분은, 오늘 여기에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래도 적어도 며칠~ 한 달 먹을 거는 가지고 있으실 거예요. 

그런데 광야 이스라엘은, 내일 아침에 먹을 게 없어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눈 뜨고, 장막 바깥에 나가면,
거기에 그날 먹을 것이 주어져 있었어요. 처음엔 신기하긴 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걸 '(사십 년을) 내리 그렇게 살아라고? 이건 죽으라는 거지...' 
이런 느낌이었을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완전히 벼랑 끝으로 내몰린 거예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된 거예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님께만 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만 바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모실 때, 그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절대로 그 일을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적용

얼마 전에 CGN TV 의 이홍렬 집사님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제가 출연했는데,
그때 이제 기억나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목사님, 요즘 청년들은 결혼을 안 하려고 그럽니다. 
또 결혼을 해도 아이를 안 낳으려고 그럽니다. 
이런 사태에 대해서 목사님은 어떻게 조언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그때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요즘 청년들이 결혼을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려고 하고, 
또 자녀를 나을 수도 있는데도 안 낳으려고 하는 이유는, 
행복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잘못됐기 때문이에요. 

고생 안 하고.. 부담 안 되고.. 귀찮은 일 없고.. 그렇게 살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혼이 부담이 되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게 편하다. 둘이 같이 살면 서로 맞춰줘야 되고.. 
여러 가지 신경 쓸 일도 많고...' 그렇게 생각이 드니까 결혼을 안 하려고 하는 거죠.

또 결혼은 했는데, 아이는 안 낳으려고 그래요. 
이유는 역시 '아이 낳으면 기르는데 너무 부담되고 힘드니까..' 
그러니까 아예 안 낳으려고 하는 거예요. 

다 그 동기는 '어쨌든지 좀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은' 거예요. 
근데 행복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가버리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게 행복이죠? 행복은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돼요. 
-하나는 힘든 상황이 주어져야 돼요. 
-두 번째는 사랑이 있어야 돼요.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그 다음에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죠. 

만약에 힘든 상황이 없어요. 너무 편해요. 
부족함이 없어요. 모든 게 다 쉬워요... 그러면 행복이 절대로 느껴지지 않아요. 
편안하고,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부담되는 일도 없으면 행복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 가실 이유가 없어요. 
여러분의 지난 세월을 한 번 돌아 보세요. 

여러분의 짧은 세월 중에도, 아주 쉽고, 부담 없고, 편안하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을 거예요. 
근데 그 시절이 행복하다고 느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지루하고... 뭐 기억나는 것도 별로 없고... 
지금도 '내게 그런 세월이 과거에 있었어?' 이런 생각일 거예요. 

근데 힘들고.. 정말 어려웠고.. 눈물도 많이 흘렸고...
그런데 그때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같이 있었어요. 
가족들이 있었다거나, 또는 사랑하는 친구나 동기나 전우가 있었다면, 

그러고 난 다음에 지나고 나면, 다시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죠.
'우리 그때 정말 힘들었잖아... 그때 너무 어려웠지...' 
근데 그게 다 아름다운 추억들이에요. 

그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겪었던 어려움! 그게 행복이라는 거예요. 
지나고 나니까 그게 참 행복이었어요.
그러니까 고난이 없는 삶은, 행복을 포기한 거예요.  

결혼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어 가는 일...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지나고 나면, 그게 너무 행복한 거예요. 
자녀들을 낳고, 기르고, 신경 쓸 일이 한 둘이 아니에요. 

근데 지나고 보면, 그 아이들 때문에 내가 살았다(행복했다, 의미있었다)는 걸 알게 돼요. 
그래서 다들 이렇게 고백하죠.
'그 자녀 때문에 내가 산 거예요. 그 자녀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선물이에요.' 

▲싫지만 유익한 것이 있어요. 그 대표적인 게 고난이에요. 
우리 주님이 나를 이렇게 벼랑 끝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 하시기 때문이에요. 

진짜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을 경험하게 하시려고... 
물론 뭐 극단적으로 '무조건 힘든 게 좋은 거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이제는 내 판단, 내 생각을 다 내려놓고 
더 이상 '나는 이게 좋아, 이건 나빠!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 나는 이건 싫어!' 
이런 나 중심의 판단과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그게 무엇이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주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내게는 예수님이 계시니까요.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셨고, 내 왕이시니까... 뭐든지 주님 뜻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좀 힘든 삶을 살아야 된다면.. 뭘 포기해야 된다면... 
그건 정말 우리에게 너무 귀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용기가 있어야 돼요. 벼랑 끝에 서는 용기! 

▲제가 선한목자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을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이제 예배당을 완공해야 되고, 건축비를 상환해야 되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정말 무거운 과제가 제게 주어졌어요. 

근데 그때 참 감사하게도, 저는 이 예배당 공사를 완공 하고 
건축비 부채를 상환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그때 주 예수님을 붙잡았어요. 

제가 부임 예배 때, 그때 설교 했던 내용의 핵심은 
'우리는 이제부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게 그때 제 믿음이었어요. 

근데 예수님만 붙잡고, 주님만 바라보게 되니까 
점점점 어려운 결정을 해야 되는 거예요. 

예배당도 다 완공해야 되고, 건축비도 다 상환해야 되고, 
그 큰 예배당도 교인으로 가득 채워야 될 이런 엄청난 부담이 저에게 왔는데, 
주님은 정 반대로만 가게 만드시는 것 같아요. 

자 교인이 새로 한 명 왔어요. 
그 교인이 우리 교인이 되는 등록 과정을, 
'교회에 출석하면 바로 교인으로 등록 시키지 말라. 
10주 동안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일대일 양육을 다 10주 동안 하고, 
마지막에 선한목자교회로 정말 와야 될 간증문을 써 낸 사람만 등록을 받으라!' 
(성령님이 이런 감동을 제게 주셨습니다.)

이건 교회 망하게 하는 것과 똑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니 새신자가 교회 나오자마자 등록시키고 
'당신은 우리 교회의 교인입니다' 해서 그 다음 날 월요일에, 
교패를 대문에 갖다 붙이고... 이렇게 해도 교인이 될까 말까 한데,

'그런데 10주 동안 양육 끝내고, 그리고 간증문까지 써내고, 
그 간증문을 교인들 앞에서 간증문을 낭독하고... 그제야 등록 받겠다..?' 
'그렇게 까다로우면 나라도 등록 안 하겠다'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근데 그때 '한 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은, 한 가족이 된다는 뜻인데, 
도대체 가족은 어떻게 생기는가? 
한 아이가 엄마 뱃속에 잉태 되어서, 10달 동안 그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고 난 다음에
비로소 아이로 태어나는 거다'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죠. 결혼으로 한 가족이 되는 거죠. 
근데 여러분, 만나자마자 혼인신고부터 하러 갑니까? 그런 사람은 없잖아요. 

서로 만나고, 교제하고, 위기도 겪고... 다시 또 극복도 하고... 
서로 또 깊이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10주면.. 그래서 만난지 10주 만에 결혼했다... 그러면 엄청 빠른 거죠. 

근데 우리 교인들은 '목사님, 새신자 과정이 왜 그렇게 길어요?' 
한 가족 되는 일이 만만치가 않은 일이거든요. 

'절대로 교인 수 신경 쓰지 말고, 
정말 진짜 교인 공동체를 만들어 봅시다!'      

교회 부채.. '목사님, 우리 교회의 건축비 부채가 도대체 얼마예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 하시면 됩니다!' 

목회자 입장으로는, 교회 부채가 많은 것은 감추고 싶어요. 왜요? 
'교회 부채가 지금 얼마입니다' 그랬다가, 
'그럼 안녕히 계세요!' 꼭 이렇게 되기 십상이거든요. 

그래서 교회 부채 총액을 공개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감출 게 따로 있는 거지.. 우리가 다 같은 믿음의 한 가족인데... 
도대체 우리가 얼마 정도의 부채가 있는지 다 교인들도 알아야지... 
만약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시는 분이 나오면, 그러면 그분은 가족이 아닌 거지...' 

그래서 연말에 우리 교인 전체 총회를 할 때, 
교회의 재정을 있는 그대로 다 공개를 했습니다. 

예배당도 3천명 정도 모이는 새예배당 인데, 
그 예배당도 다 안 찼는데, 
옆에 있는 이웃 미자립 교회에, 교인들을 파송 하는 일을 시작했어요. 

'하나님 여기라도 다 차면 보낼게요.' 
'그때 보낼 거라면 지금부터 보내라!' 
아 정말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교회당 건축비 부채 상환을 빨리 해야 되는데, 
교인들이 십일조, 감사헌금 낸 것은,  선교비, 교육비, 구제비로 보내야 되고... 
교회 살림 살이가 너무 많아요. 그런데 그 비용을 좀 줄여서 건축비로 당겨 썼으면 좋겠는데...

건축헌금이 적게 모이면, 그러면 일단 다른 현금으로라도 
일단 건축비를 상환을 해야 되는... 그런 마음이 항상 생기지요. 

그런데 기도하면, '꼭 건축헌금 이라고 쓴 것만 가지고 건축비 상환을 해라' 
이것도 저에게 참 순종하기 어려운 거였어요. 
'건축헌금입니다' 라고 쓴 것만 가지고, 건축비 이자도 갚고, 원금도 갚아라는 거죠.

정상적으로 교회가 써야 될 일에 제대로 써라는 거예요. 
(아끼지 말고) 선교비도 보내고, 구제비도 보내고, 교육비도 사용하고... 

우리도 지금 한 1백억이 넘는 빚이 있는데, 
일본에 있는 개척한 교회에서 예배당을 마련하는데, 5억이 모자란다고... 

그래서 은행에 빚을 5억 내서 일본 교회 건축비로 보냈어요.
우리는 은행빚이 100억이 105억으로 늘어났죠.
그때 우리 느낌은 '뭐 100억이나 105억이나 그게 그거지 뭐...
5 더 붙었다고 그래서 뭐 갚을 수 있는 게, 갚을 수 없는 게 되진 않겠지...'

애초에 우리 능력으로 갚을 수 없는 빚이니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어요. 

교회 재정을 아끼고 절약해서 사용하는데, 꼭 어디서 도와달라는 말이 들려와요. 
돈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보내야지...'  
그래서 있는 돈 다 박박 긁어서 보내고... 또 긁어서 보내고... 
재정 장로님이 엄청 힘들어 하셨어요. '아니 목사님, 어떻게 이렇게 하십니까?' 

제가 거짓말을 못 하겠어요. 돈이 없으면 '돈이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할 텐데, 
'우리가 재정이 조금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거라도 도와주세요'
그러면 남은 거 털어서라도 보내야죠 뭐. 

교단에 보내는 부담금(상회비)도 정직하게 다 보내고, 
TV 방송설교 해달라는 요청이 오는데, 보니까 방송설교 헌금을 해야 되더라고요. 
'우리는 방송설교 안 합니다' 그만큼 재정이 어려웠다는 거죠.

어느 날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터졌어요. 
2008년에, 교인들도 재정적으로 엄청 어려워지기 시작했죠. 
헌금이 정말 어려워지기 시작했죠. 
'하나님 이거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헌금이 기쁜 사람만 헌금을 하게 하라!' 
교인들은 다 얼굴이 정말 사색 같이 됐어요. 교회는 빚도 많죠. 
올해도 건축헌금 상환하면서, 남은 건축을 계속 해 나가야죠. 
'이거 언제까지 매년 건축헌금을 해야 되나?' 정말 교인들이 그런 심정이더라고요. 

그때 교인들에게 '헌금이 기쁜 사람만 하세요. 현금이 힘든 사람은 안 하셔도 됩니다.' 
교인들의 얼굴을 보니 얼마나 편안해 하시는지... 
'그럼 안 기쁘면 안 내도 됩니까?' 
'기쁘지 않은 헌금을 하나님이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저는 진짜 헌금 하고 싶어요!' 그런 분은 말리지 않습니다.
근데 2008년 그때부터 원금 상환이 이루어졌어요. 
그 전에는 이자만 겨우 갚아갔었거든요.

교회 부지 내에 탈북 청소년 학교를 건축하는 일, 
우리 교회에 부채도 여전히 많은데,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 건물을 건축을 해야 되는 일, 
도무지 주님은 계속 벼랑 끝으로 몰아가시는 거예요. 

근데 그때 제 마음에 '이렇게 해도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거지...' 그런 정말 마음에 이렇게 반전의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벼랑 끝에 서는 것이 점점점 용기가 생기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실 일이 기대가 되는 거예요. 

▲자 이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 중에 '아휴 목사님 저는 못 해요. 
나는 그렇게는 신앙 생활 하기 어려워요. 지금도 힘든데... 벼랑 끝에까지 꼭 서야 됩니까?' 
이런 분들이 틀림없이 계실 거예요. 

그 이유는, 마귀가 우리의 판단을 완전히 왜곡시켜 놓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이 그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돼요. 

그래서 복된 길은 오히려 어렵게 느껴지고, 
정말 망하는 길이 쉬운 길 처럼 보이는 거예요.
마귀가 우리 판단을 완전히 왜곡시켜 놨습니다. 

진리는 거짓이라고 느끼고, 거짓이 진리 처럼 이렇게 믿어지는... 
요즘 세상이 그런 세상이에요. 

우리에게도 똑같아요. 정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길은, 그건 어려워서 못하겠다... 
근데 진짜 망하는 길은, 그건 막 정말 저절로 하게 되는... 
여러분 절대로 여기서 속으면 안 돼요. 

◑제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달라진 것이, 
바로 <고난에 대한 믿음>이 달라진 거예요. 

디트리히 본 회퍼가 "유럽 교회가 몰락한 이유"를 
'고난을 거부하고 문화적인 기독교를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적했어요. 

'유럽 교회가 왜 이렇게 됐나?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성도들이, 또한 교회가 고난을 싫어해요. 
그건 사람의 본능 과도 같은 거죠. 

그리고 기독교는 서서히 그냥 문화적인 현상처럼만 되었어요. 
완전히 교회는 영적으로 확 꺾어진 거예요. 

▲평생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여유로운 삶을 사신 장로님이 한 분 계신데, 
어느 날 목사님 한 분에게, 그 장로님이 아주 참 어려운 고백을 하셨어요. 

자신이 점점점 '두려워 진다'는 거예요. 
나이가 들어서 이제 하나님 앞에 갈 때가 가까이 오는데.. 점점 두려워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아니 장로님처럼, 정말 다복하게 사신 분, 
하나님이 장로님처럼 복을 주신 사람이 또 있겠나' 그렇게 생각되는데, 왜 두려우시나요?

그랬더니 그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평생 한 번도 믿음의 모험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 안전한 길, 무난한 길, 편안한 길만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앞에 설 때가 가까워옴을 느낍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서면 내게 뭐라고 말씀 하실까? 그게 걱정이 됩니다.」 

자 그 장로님은 평생 편안하게 살았어요. 
힘든 일, 모험 되는 일, 부담되는 일은 하나도 안 했어요. 

실제로 뭐 경제적으로도, 모든 환경도, 
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도 뛰어나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그래도 여유로운 층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셨어요. 

교회에서도 장로님이 되셨고, 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야 이 정도면 진짜 누구나 부러워할 분이시죠. 

그런데 그 장로님이 이제 주님 앞에 갈 날이 가까이 왔는데 
주님 앞에 서는 것이 두렵다는 겁니다. 이유는 뭐죠?
고생 한 번 해본 적이 없어요. 

'복음 때문에, 믿음 때문에, 주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나는 한 번도 어떤 모험의 신앙을 살아본 기억이 없어요.' 
'과연 주님이 나를 어떻게 기억 하실까?' 그게 갑자기 두려워 진다는 거예요. 

▲북한 성도들의 신앙고백문을 제가 읽은 적이 있어요. 
여러분도 아마 혹시 어디서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예수님 전사들의 수칙 
예수님의 제자를을, 그들은 전사들이라고 그렇게 표현했어요. 

'예수로 혁명화 하자' 이것도 또 북한 식이에요. 
거기에 다섯 가지 강령이 있어요. 

첫째, 예수 믿는 사람은 천대 받게 되어 있다. 그것이 긍지요 기쁨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승리다. 

두 번째, 칭찬 받는 것보다 욕 먹는 것을 먼저 배우라 

세 번째, 예수 믿는 사람은 인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며 
주위의 모든 고통 당하는 자들의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네 번째, 사랑이 사랑을 낳고, 또 그 사랑이 새로운 사랑을 낳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전사로 만들어야 한다. 

다섯 번째, 성경이라는 잣대로 제일 먼저 살아가야 한다.」 

북한이라는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나요? 
다섯 가지 강령의 느낌이 우리에게 확 와요. 

그들은 예수 믿는 것은 고난이라고.. 아예 전제하고 예수를 믿어요. 
예수 믿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을 알아요. 왜요?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또 실제로 그들 주변에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니까 아주 이것이 당연해요. 

여러분, 우리도 북한에 있는 우리 예수 믿는 성도와 우리는 
정말 거리상으로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왜 우리는 다른가요?)

이게 바로 벼랑 끝에 서는 용기예요.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 내 삶은 이제 벼랑 끝에 서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에게 그 용기가 있나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시는데 
여러분은 정말 벼랑 끝에 서는 그 느낌인가요? 

▲저희 할아버지께서 625 전쟁 때 순교하셨어요. 
저는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근데 솔직히 저는 고난이 두려웠어요. 
할아버님 처럼 그렇게 순교하는 것이, 저에게는 두려움 이었어요. 

저는 이왕 목사가 되는 거, 큰 교회 목사가 되고 싶었고, 
대접 받는 목사, 존경 받는 목사.. 그런 목사가 되고 싶지, 
힘든 고난의 길은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언젠가 한 번 어느 대학교에서 제가 개강예배 설교를 부탁받았습니다. 
그 대학에 있는 크리스천 대학생들과 교수님들이 
예배 드리는 채플시간에 설교를 해야 하는데, 

제가 그 설교를 준비하다가, 너무 너무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내가 이 대학생들 앞에서, 도대체 내 삶으로 그동안 평생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인하여 겪었던 고난이 무엇이었다고 이야기 해야 되나?'

물론 뭐 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성경에 고난 받은 사람들 이야기만 하고 
설교를 끝낼 수 있어요. 그러나 설교 자는 항상 '증인'이어야 된다고... 

근데 저는 예수님 때문에 겪었던 고난, 
그 고난에 대해서, 아무리 제 지나온 삶을 돌아봐도, 
딱 이거라고 짚을 게 없더라고요. 

아버님이 목회 하면서 고생하신 거, 
어머님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돌아가신 거, 
할아버님은 아예 625 전쟁 때 순교 하신 거, 
근데 저는 좋은 길, 편안한 길, 그저 대접 받는 목회의 길만 왔던 것 같아요. 

제가 그때 알았어요. '아 진짜 복된 길은, 돌짝밭 길, 가시밭 길, 험한 길, 고난의 길이구나.. 
그게 진짜 복된 길이구나!' 

우리가 만약 이 세상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그럴 리가 없죠. 
근데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의 삶이잖아요. 거기가 진짜거든요. 

제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달라진 것이, 
바로 고난에 대한 믿음이 달라진 거예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뜨이기 시작하고 
예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신 게 믿어 지니까 
그 다음에 고난이 달리 생각이 되는 거예요. 

벼랑 끝에 서는 것이.. 느낌이 달라요. 기대가 생겨요. 
주님을 더 새롭게 경험하는 그런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저는 솔직히 목사 되는 게 싫었어요. 신학교 가는 것도 정말 싫었어요. 
그런데 저는 목사가 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돌아보니까, 제가 목사 된 것이 제게는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러나 그때는 몰랐어요. 그 길이 그렇게 좋은 길인 줄 몰랐어요. 

제가 신학교까지 와서도, 목사 안수 받기 전 날, 저는 하염없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어요. 
그 때 인천에서 열린 백주년 기념 연회(총회)에서 안수를 받았는데 
안수 받기 전날 저는 인천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어요. 
'오늘 도망가야 되나... 내일 안수 받으면 이젠 도망도 못 가는데...' 

저는 용기가 없어서 안수를 받았어요. 도망갈 용기가 없었어요. 
근데 지금 생각하니까, 이렇게 목사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는 설교가 너무 너무 힘들었어요. 설교에 너무너무 열등감이 많았어요. 
저는 사람들 앞에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굉장히 제게는 어려운 일이에요. 

그렇지만 설교를 해야 돼요. 목사가 되었으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제가 눈물로 기도했어요. 
'아 이왕 해야 되는 설교라면,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자가 되게 해달라고' 
엄청 물었어요. 

'자격이 없으면 차라리 제가 사찰(관리집사)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너 안 돼, 넌 자격 없어! 그러시면 
제가 깨끗하게 내려 놓겠습니다. 

저는 교회 사찰이라도 평생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주님 앞에 가는 게 차라리 훨씬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랬던 그 설교 때문에, 저는 제 신앙이 
해마다 계속 조금씩이라도 상승 곡선을 탔어요. 

말씀을 통해서 가장 먼저 은혜 받았고, 가장 많은 은혜를 받았고, 
말씀이 저를 계속해서 깨우고 살렸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설교가 저를 살린 거예요. 

저는 선한목자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예수님만 바라보는 목회를 하겠다'고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많았어요. 

근데 그래서 오히려 목회가 복을 받았어요. 
예수동행일기를 쓰는 것은 아주 전형적인 일이에요. 

예수동행일기 쓰자고 교인들에게 공표하고, 얼마나 제가 후회했는지 몰라요. 
교인들이 다 싫어하는 거예요. 다 부담스러워 하는 거예요.

부목사님들은 교회 떠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내가 결정적인 실수를 했구나.. 그냥 지금 이대로만 가면 목회 그냥 잘 마무리할 건데,
괜히 일기 쓰게 쓰자고 해놓고.. 내가 이렇게 정말 어려움을 겪나?' 

그렇게 한지 15년이 지났어요. 
예수 동행의 삶은 한국 교회를 일깨우고, 
영적으로 깨우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을 지금 보아요. 

▲마치는 말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예수님을 정말 바라보고, 주님을 진짜 믿으면 
우리를 자꾸 벼랑 끝으로 몰고 가시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내가 사는 길이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벼랑 끝에 서는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절대로 편안한 삶, 쉬운 삶이 우리에게 답이 아니에요. 

지난 6월에 선한목자교회 위드 지저스 데이 주일에 
가장 일기 쓰기 힘든 부류의 두 사람이 간증을 했어요. 

한 사람은 고3 학생, 진짜 일기 쓰고 나누기 어려운 사람이죠.
또 한 사람은, 시니어 교회인 갈렙 교회 집사님인데, 치매 판정 받은 지 5년 되신 분. 
치매 판정 받은 지 이제 5년이 된 집사님. 그 분의 간증을 제가 잠깐 읽어드리고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치매가 시작된 지 5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더디게 진행되어 일상 생활을 하는데 큰 지장은 없으나 
숫자와 사람의 이름을 자꾸 잊어버려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능숙하게 해내던 컴퓨터 작업도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어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를 쓸 때가 있습니다. 일기 쓴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앱 사용법도 매번 잊어버려서 어려움도 있지만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이기에, 제 마음이 편하고 
주님과 대화가 되니, 지금 상황에 대한 아쉬움도, 외로움도 없고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동행일기 쓰는 시간이 신나고 즐겁습니다. 
그래서 제 보잘 것 없는 일기는 항상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로 마칩니다. 

저는 주로 새벽에 말씀을 읽고 일기를 씁니다. 
말씀이 이해가 안 돼서 어려울 때도 있고, 기도도 잘 못해서, 
주기도문을 읽는 것으로 대신할 때가 많지만, 
이렇게 아침을 말씀과 일기로 시작하면, 
게이트볼 치러 가는 발걸음도 날아가듯이 가볍고 하루가 기쁩니다. 

일주일에 두 번, 딸 집에 가서 자폐성 장애를 가진 손자를 돌봅니다. 
처음 손자가 태어났을 때,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이 
독신으로 살겠다는 딸을 괜히 결혼하라고 독촉한 내 탓인 것 같아' 자책 했지만 

손자를 키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손자를 통해, 나도, 딸도 믿음이 깊어 지니, 
손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덩이 입니다. 

비록 시작은 고난이었으나, 이제는 나도, 딸의 가정도 웃습니다. 
얼마 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 쳐다보고 
사람과 눈을 전혀 마주치지 않는 손자가 
황토 진흙 속에 발을 담그며 나를 쳐다보았을 때 정말 기뻤고, 
조금씩 성장해 가는 손자를 돌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이번 간증을 준비하면서 치매가 더 깊어져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딸의 가정이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너무 슬픈 일입니다. 

저는 매일 치매도, 손자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나의 치매를 감사로 바꿀 수 있으며, 
힘 닫는 데까지 딸의 가정을 도울 것이며, 
어떻게라도 동행일기를 쓰며, 명랑하게 주님과 함께 손 잡고 걸을 것입니다. 

저에게 예수동행일기는 기도이며, 주님을 잊지 않게 해주는 좋은 치료제입니다. 
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정말 기가 막힌 간증이었어요. 
정말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진짜 주님을 믿으면 
비록 내 삶이 지금 벼랑 끝에 서는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걱정이 안 돼요. 

오히려 기대가 돼요. '주님은 얼마나 놀라운 일을 나에게 주시려고 
나를 이렇게 이끄시나?'

오늘 여러분, 특히 우리 청년들, 
여러분의 삶에 주님을 여러분이 진짜 믿게 되고, 주님을 바라보게 된 것은 
정말 말할 수 없는 복이에요. 
청년 때부터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계속해 나가셔야 해요. 

기복이 있지 않아야 좋아요. 
'청년 시절에 결혼하기 전에 잠깐 동행일기도 써 봤던 적이 있었어.
그러다가 눈 깜짝 하고 보니, 이제 육십이 되었네...'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부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그렇게 이십 대를 보내고, 삼십 대를 맞고, 
삼십 대 중반이 지나도록 계속 주님과 동행하고, 
사십을 바라보며 살 때... 여러분 정말 놀라운 일을 여러분이 경험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이제 같이 기도하게 될 텐데 
'하나님, 이 시간에 저는 주님께 제 삶 전체를 맡깁니다. 
주님께 정말 저를 완전히 드립니다. 
주님이 저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저는 더 이상 묻지도 않겠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거나, 또는 괴로워 하지도 않겠습니다. 

주님이시면 됩니다. 주님과만 함께 할 겁니다. 
주님께 제 삶 전체를 맡겨 드립니다. 제 길을 저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오늘 제게 말씀하소서,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제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를 주님 안에서 해결 받기 원합니다. 

제가 바로 어제까지, 오늘 아침까지도 은밀한 죄, 습관적인 죄에 묶여 살았습니다. 
이 시간에 보혈로 깨끗하게 저를 씻어 주소서.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게 해주소서' 
우리 '주 품에' 찬양 부르고 그리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