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80055489055
◈자유케 하는 율법 약1:23-27, 갈5:1 2003.01.19.
청바지 차림의 한 신사가 은행의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그는 사업상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면서 은행에서 의논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마침 담당 직원이 외근 중이라서 만날 수가 없었고,
해당 부서에 상담해 줄 지점장도 제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동안 앉아서 기다렸지만, 여전히 상담해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오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이야기 하는 여직원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여직원에게 자동차 주차권 확인 도장을 좀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탁을 했는데, 여직원은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와서 저금을 한 것도 아니고 인출 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 찍어 드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은행의 방침이고 규칙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신사는 아주 불쾌했습니다.
그는 다음날 다시 와서, 자기가 예금했던 거액의 돈을 모두 인출 해 갔습니다.
그는 IBM회장이었던 존 에이커스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융통성이 없는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은행과 거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돈을 찾아가버렸습니다. *본 설교 제목이 '자유케 하는 법'
여러분 법이 무엇입니까? 방침이 무엇입니까? 규칙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위한 규칙이고 무엇을 위한 법입니까?
좀 더 성숙한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자동차를 운전하십니까? 운전하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내 앞에 신호등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너무 많다고 할 만큼 신호등이 많습니다.
빨간불 파란불 노란불이 번갈아 꺼지고 켜집니다. 그 앞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저 신호등은 참으로 고맙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저것은 왜 있어서 남의 길을 가로막나?' 이렇게 생각 하십니까?
'저기에 서 있는 경찰을 보면서 이 더운날, 추운날.. 나와서 우리를 위해 수고하시는구나.. 참 고맙다.'
이렇게 인사를 못해도 고맙다 하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저 양반은 왜 저기에 서서 남을 못가게 만드나?..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법을 통해서 자유를 느낍니까? 아니면 속박을 느낍니까?
그것은 내 마음에 달렸습니다. 당신은 어느쪽입니까? 그것이 바로 당신의 수준입니다.
당신의 인간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갈5:1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입니다.
인간은 그가 누리는 자유만큼의 영역을 사는 것입니다.
자유만큼의 인격을 사는 것입니다. 자, 얼마나 자유를 느끼고 있습니까?
저 신호등을 보시며 자유를 느낍니까? 속박을 느낍니까?
법을 보면서 자유를 느낍니까? 두려움을 느낍니까?
그것이 당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생의 원문의 뜻은 ‘겐네세 아노센’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위로부터 난다는 말 뜻입니다. born from above.이렇게 직역할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출생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을 합니다.
중생하기 전에는 그(자연인)는 노예입니다. 불평불만의 사람입니다.
만사가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살고싶지 않습니다. 고마운 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원망하고 하나님도 원망합니다. 그 사람은 노예입니다. 노예적 성질 속의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주관자도 하나님이십니다.
모순된 것 같으나 현실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자유롭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세브란스 병원에 원목으로 오래 있던 제 동기 동창 친구가 있습니다.
그 분이 제게 아주 자세하게 말해 준 실화입니다.
연세대학교에 한 학생이 있었는데, 아주 데모를 많이 하는 친구입니다.
공부는 안하고 밤낮 거리에 나서서 데모하는데 선두에 서고, 학생회장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감옥에 들락날락하고. 이런 학생이 있었는데,
학교도 세상도 정치도 누구도 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학생이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이 없었지만, 의사들이 그 젊음이 너무 아까워서
의사들이 자신들의 돈을 모아서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수술을 하고 보니, 암세포가 꽉 차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대로 봉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잘 살면 6개월을 살 것이니,
뜻있게 살기를 바란다고...
그 학생이 병원에서 나설 때에,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병원문을 나서는데,
나오자마자 그대로 병원 마당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하늘로 향하더랍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면서 '하늘이 이렇게 푸르고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습니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하나님, 1년만 살게 해주세요. 좀 보람 있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병원언덕을 내려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안 된 얘기지만, 살아있을 때, 건강할 때
좀 그렇게 자유인으로서, 세상을 아름답게 느끼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평소에는 불평불만이 가득해서 살다가, 꼭 그렇게 사형선고를 받고나서야
삶의 의미와 감사를 느낀다면... 그는 평소에 자유인으로서 살지 못한 것입니다.
종으로 노예로 살았던 것이지요. 불평불만의 종, 부정적 시각과 비방의 종!
▲여러분, 하늘을 푸르게 보십니까? 어둡게 보십니까?
여러분이 쳐다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모든 역사가 복잡하고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 같아도
중생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이렇게 복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유케 하는 율법!
약1:25절에 보면 '자유케 하는 율법'.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자유의 율법.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고 양심의 법이 있고 도덕의 법이 있고,
나라의 법이 있고, 규칙이 있고, 규례가 있습니다.
이런 법들은 있어야 합니다. 법이 있어야 질서가 있고 있어야 우리가 자유합니다.
그런데 이 법을 통해서 내가 자유를 얻느냐. 아니면, 속박을 느끼느냐,
이 법을 통해서 무한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느냐, 아니면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사느냐"
그것은 당신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법이 내게 '속박'하지 않고, '자유케 하는 율법'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유케 하는 율법을 향유할 수 있을 까요?
먼저는 율법의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본래적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요8:32절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아는 순간 진리의 깊은 뜻을 아는 순간, 내 영혼은 자유한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합니다.
율법의 본 뜻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알고 율법을 느끼고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 뜻을. 그 깊은 뜻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그 본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법과 규례인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10:13
예수님께서는 아주 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그것은 엄청난 질문입니다.
말을 바꾸면,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느냐?'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고, 안식일도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잘못 이해하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많은 규례를 주셨습니다.
규칙을 주시고 법을 주었을 때에...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본래적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대요리문답 속에 그가 해석하는 십계 해석을 저는 사랑합니다.
너무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해석이었습니다. 중간에 몇 말씀만 드립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우리의 순결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 우리의 사유재산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의 인격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거짓말을 할 때는 통쾌할지 모르지만, 속으면 아주 괴롭습니다.
인격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런 가슴 아픈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거짓증거 하지 말아라.
모두가 거짓증거를 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격이 얼마나 아름답게 지켜져 나가겠습니까?
이것이 사랑 아닙니까!
그러므로 율법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나를 위해서 내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깊은 뜻을 알면, 율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율법을 알고 율법의 뜻을 배우는 것만 아니라, 율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 사랑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자유케하는 율법'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윤리를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이것은 종교개혁 신학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논리입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고, 이것을 지키면 자유인이 되게 한다,
구원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 가지 재앙과 큰 능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셨습니다.
건져서 구원하여 홍해를 건너오게 하고, 광야(시내산)에 데려다 놓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구해내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라.'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구원 받았으니 지켜라. 그리하여 자유하라. 그리하여 행복하라는 것이 율법의 근본 뜻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 입니까? 그러므로 율법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마음대로 학교 다니기 전에 뛰어 놀다가
초등학교 들어가서 1학년 2학년 다니다 보니 얼마나 속박이 많습니까?
시간 지켜야지 일찍 일어나야지. 그러다 겨울방학이 되었습니다.
'살았다. 이제는 늦잠을 잘 것이다. 밤늦게 까지 놀다가 이제는 늦잠을 자도 된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아버지께서 보통 때보다 더 일찍 깨우셨습니다.
'일어나라. 산책 가자.' 자기를 데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졸려죽겠는데,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어느 동물이 늦잠을 자느냐. 참새도 일찍 일어나고, 소와 닭도 일찍 일어나고
모든 동물이 부지런해야 사느니라. 일어나!' 아침마다 깨우십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바이오리듬이 깨지면 안 된다. 한 평생을 통해서 일이 있어도 없어도
사람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 데리고 아침마다 산책을 합니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원망스럽습니다.
여러분, 이 아이가 몇 살이 되어야 아버지에 대해 고마워 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쯤 철이 나서 '우리 아버지는 훌륭하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내가 그 분의 자식이 된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이 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래라. 저래라.' 이 많은 규례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런데 아직 불평스럽습니까? 원망스럽습니까? 언제 철이 날 것입니까?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든 율법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또한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그 행한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1:25
그렇습니다. 행해야 합니다. 행하면서 깨닫고 행하면서 자유의 법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르치라 곧 잊어버릴 것이다. 보여주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참여시켜라 동참하게 하라. 행동하게 하라. 그러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소용없습니다. 자신이 경험할 것만큼만 압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컴퓨터니, 뭐니해서 많이 배우기는 하지만, 세상에 무식합니다.
왜요? 경험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데, 실제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데 그 산 교육이 없습니다.
말만 많습니다. 생각만 많습니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헬라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라고 있습니다.
그의 윤리학이라는 책에서 그는 선을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선이요. 공부하는 것. 이스라엘 사람들의 6대 덕목 중에도 첫째가 공부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 안하는 것이 죄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공부하는 것이 제일 덕입니다.
두 번째 덕목은 도덕적인 선입니다. 그것은 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건물을 지어야 건축가가 됩니다. 하프를 연주해야 하프연주가가 됩니다.
피아노를 쳐야 피아니스트입니다.
이제 말씀드립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만이 피아노의 소리를 압니다.
저희 교회 피아노가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입니다. 스타인웨이.
여러분 피아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피아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냥 피아노가 아닙니다. 이것이 연주가들이 때때로 나에게 와서 저를 괴롭힙니다.
“목사님 제가 연주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피아노 한 번 쳐보면 안 되나요? 꼭 쳐보게 해주십시오.”
“안됩니다. 왜요? 교회 물건을 누구에게 줍니까? 피아노 많은데 아무거나 치지.”
“아닙니다. 그것을 한 번 곡 쳐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피아니스트여야 피아노를 압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만이 피아노 소리를 압니다.
그와 같이 율법을 준행하는 사람만이 율법을 앞니다.
사랑하라 할 때에 사랑한 사람만이 압니다. 희생하라 할 때에 희생한 사람만이 압니다.
십자가를 져라 십자가를 저본 사람만이 십자가의 능력을 압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그 깊은 뜻. 그 율법 속에 있는 깊은 사랑.
▲어떤 날 예수님께 율법사가 질문을 했습니다. 십계명이 있는데, 그 계명의 첫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이다.'
여러분,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하는 이야기와
십계명과 사랑하라는 말이 같은 것으로 들려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라고 했습니다. 계명을 보면서 사랑을 알아야합니다.
아가페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사랑하라는 것의 그 뜻을 압니다. 그리고 감격합니다.
미워하는 자와 불평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는 영영 율법을 모릅니다.
율법을 통해서 두려움만을 느낍니다. 절망, 저주만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율법을 통해서 사랑과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지그 지글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쓴 [정상에서 만납니다] 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왜? 법을 지키기를 싫어할까? 3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지켜보려고 해도 지켜지지 못할 것,
맹세해 보아도 소용이 없는 것 되는대로 살자. 부정적입니다.
둘째는 망설임 때문입니다. 오늘 하지 말고 다음부터 하자. 다음에 하지,
다음에. 그러면서 한 세상 다 살았습니다.
세 번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지켰을 때에 그 다음에 오는 후속 결과는 무엇인가
유인인가 불이익인가를 생각합니다.
여러분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은 말씀에 따라 자기의 생명의 의탁하는 것입니다.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그 다음에 들은 세상에 대해 묻지 마십시오.
죽든 살든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습니다.
사람이 알아주든 몰라주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모든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이스라엘 랍비가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질문을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느라 고생을 하더군요.
그래요. 24시간 지키는 것이지만, 실수를 할까봐 25시간을 지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25시간을 꼼짝 못하고
all stop하고 안식일을 지키니 얼마나 힘들겠냐고, 장사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그렇게 질문을 했더니, 랍비가 껄껄 웃으며,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저는 안식일이 없다면 어떻게 살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밖에는 식사를 하지 못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바쁩니다.
이렇게 돌아가다. 안식일이 되면 땡하고 그 다음에 전화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신문도 안 보고 텔레비젼도 보지 않고 all stop하고 회당에 아이들과 같이 갔다 와서
식사를 하고 또 아이들과 놀고 하루를 지냅니다.
이 안식일이 없다면 제가 어떻게 안식하며 살겠습니까?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합니다.”
(랍비가 안식일을 '자유케 하는 율법으로, 즐기며 지켰다는 얘기죠)
질문자의 완패입니다. 얻어맞았습니다. 여러분 주일을 어떻게 지키십니까?
하나님의 날을 어떻게 지키십니까? 감사하면서 지켜야 합니다.
자유케 하는 율법, 나를 행복하게 하는 율법, 사랑으로 충만한 율법을 지켜나가면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 기 도 -
하 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율법을 주셨지만,
그 율법과 규례를 우리는 마치 굴레처럼 속박처럼 고통처럼 생각하며
그렇게 불만스럽게 살고 그리하여 점점 더 무서운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율법을 알고 율법을 사랑하고 그리고 율법을 지켜서
그 속에 있는 생명과 그 속에 있는 소망과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될 수 있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며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