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

LNCK 2024. 9. 16. 12:5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2023 08 27  (79)  /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 - YouTube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        행21:27~36

◑지난 시간 요약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첫 번째 에피소드를 살펴봤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두 번째 에피소드 입니다. 

이 두 번째 에피소드가 일어난 시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여기서 이레 (1주일)는 바울이 정결 예식을 치르는 일주일을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이방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방 땅을 밟고 온 유대인들은, 더러워진 몸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 예식을 
성전에 가서 치뤄야 했습니다. 그 정결 기간이 7일이었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바울의 정결 예식이 거의 다 끝나 간다는 뜻입니다. 

자 그런데 이때 바울 은요. 성전에 혼자 간 게 아니었습니다. 
나실인 서원을 한 네 명의 유대 성도들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왜 데리고 갔습니까? 

그들의 (나실일 서원이 끝났다는 표시로 드리는) 제사 비용을 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니 나실인 서원은 유대 성도들이 했는데, 
왜 거기에 필요한 제사 비용을 바울이 냈습니까? 
바울에 대한 유대인 성도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바울에 대한 오해가 있었었죠. '바울은 율법을 버리는 자'라는 오해 였습니다. 
그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 행동이 바로 나실인 서원을 지키는 데 필요한 제사 비용을, 바울이 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 대한 오해가 풀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나실인 서원한 사람의 제사 비용을 대신 내주는 걸 보니, 
'바울이 율법을 배반한 자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구나'하고 오해가 풀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 오해를 풀어 주려고, 바울은 나실인 서원한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성전에 갔습니다.  

◑그런데 오해를 풀어주려다가, 성전에서 더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 위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21: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그 위기를 일으킨 사람들은, 바로 아시아로 부터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시기가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3대 절기 중에 하나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그래서 이스라엘 전역에서 뿐만 아니라, 주변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도 
절기를 지키러 다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 가운데' 아시아로 부터 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아마 에베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에베소 출신의 그리스도인 드로비모를 알고 있었습니다. 
동향(같은 지역) 사람이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때 바울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베소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에베소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다가, 
장소를 두란노 서원을 옮겨야 했습니다. 19:8~9
두란노 서원으로 옮긴 후에도, 끊임없이 바울을 해하려고 했던 자들이 
에베소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참 찰거머리처럼 3년 동안 바울을 죽도록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지난 시간에 바울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오해했던 사람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고,

이번 시간, 바울이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헛소문을 퍼트린 사람들은
"유대인 비그리스도인들(극우파 유대교인들)"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성전 안에 있던 다른 유대인들을 충동합니다.  
어떻게 충동질 하느냐? 바울에게 4가지 죄목을 씌워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 짧은 한 절에, 4가지 고소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1) 바울은 우리 백성(유대인)을 비방했다는 제목입니다.  
그러나 이 고발은 가짜 뉴스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비방하고 다닌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어느 도시를 가든지, 늘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가는 곳마다 사역을 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그만큼 유대인들을 먼저 사랑하고 존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지라도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받기 원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유대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의 고소장을 보십시오.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바울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 유대인들을 비방하고 다녔다는 죄목입니다. 바울에게는 참 너무나 억울한 죄목입니다.  

2) 바울은 율법을 비방하고 다녔다는 제목입니다. 
이 죄목도 거짓 고발이죠. 우리가 지난 시간에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3) 바울은 이곳(성전)을 비방하고 다녔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을 비방하고 다녔다는 죄목인데, 당연히 가짜 뉴스입니다.  
바울은 예루설렘 성전을 비방하고 다닌 적이 없습니다.  

4) 마지막 네 번째 고발은, 바울이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고발입니다. 

21: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바울이 성전에 데리고 간 헬라인은,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 였습니다.
이게 가짜 뉴스죠. 바울은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위 29절에, '시내에'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있음을 보고서,
그들은 '성전에'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들어갔다고 착각했는지, 지어냈는지...
어쨌든 바울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성전에 있는 다른 유대인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이 네 번째 고발이, 모든 고발의 절정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어떤 고발보다, 가장 심각한 고발입니다.  
만약 이 고발이 맞다면, 바울은 즉시 그 자리에서 맞아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입니다.

1) 이방인의 뜰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원래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 없었는데
헤롯대왕이 성전 지대를 증축해서 만든 곳입니다. '성전 바깥'인 거죠.
예수님이 채찍으로 정화하신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주1) '이방인의 뜰'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 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행3장의 '성전 미문'이었다고 합니다.

2) 여인의 뜰
이 여인의 뜰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연보궤가 그곳에 있었고(막12:41-44),
구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장소였으며,
초막절 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되고, 
초막절기가 끝나는 날에 물 길러 오는 예식이 이곳에서 진행되었고 
예수님께서 이곳에 나타나신 적이 있었습니다(요7:2-14, 요7:37-38).

3) 그 안에 이제 '이스라엘의 뜰'이 있습니다. 유대 남자들은 거기까지 들어갔죠.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가도록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전 바깥'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 담이 약 1.5미터여서
그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는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방인들이 이 뜰을 넘어가면 어떻게 되느냐? 바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사이에 경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벽을 함부로 이방인들이 넘어서면 안 된다(죽는다)는 경고가 담긴 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고 해요.  경고문이 이렇게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외국인도 성전과 경내를 둘러싼 이 경계벽(1.5m)을 넘어설 수 없다.
그렇게 하다가 붙잡힌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에게 임할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 경고문이 1872년과 1935년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굉장한 권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의 국가였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독만 할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유일한 권한이 뭐냐면, 이 성전의 법을 어겼을 때입니다. 

 

이방인들이 이방인의 뜰을 넘어갈 때, 즉 여인의 뜰이나 유대인의 뜰로 들어갈 때,  
유대인들은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허락되었습니다. 
(*이게 법에 명시되지는 않았겠지만, 현지 사정을 고려한 묵계로서 허락된 듯)

그만큼 이방인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바로 즉결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죄목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어디까지 들어갔느냐? 
'이스라엘의 뜰, 유대인의 뜰'까지 들어갔다는 겁니다.  

만일 이 고발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당장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발도 가짜 뉴스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유대인의 뜰'까지 들어간 걸 본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본 겁니다. 

그걸 가지고, 팩트 체크도 하지 않은 채,
자기들 마음대로 추측을 해서 바울을 성토하고, 성전에 모여있던 유대인들을 선동한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을 죽이거나 해코지 하고 싶으니까요. 

여러분 바울이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나실인 서원을 한 네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전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든지 '유대인의 뜰'에 출입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성전의 법을 어긴 적이 없는 거죠. 
성전을 더럽힌 적도 없습니다.  
이 고발도 엉터리 고발 입니다.  

그런데 이 엉터리 선동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충동질 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사실 팩트냐/ 아니냐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미우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 미울 수 있습니다.
내가 오해 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가 뭘 해도 오해합니다.  

극렬 유대인들은, 바울을 미워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팩트냐, 팩트가 아니냐는..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뭐 하나 라도 걸려라' 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정말 큰 게 한 방 걸린 겁니다. 
바울을 죽일 수 있는 굵직한 명분이 하나 걸린 겁니다.  

이걸 가지고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하게 되었습니다. 
흥분한 유대인들이 순식간에 바울 앞으로 달려와 모였습니다.  
그리고서는 바울을 잡아가지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21: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왜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어요?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왜냐면 성전 안에서는, 사람을 돌로 치면 안 됩니다. 
성전이 버렵혀지면 안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이때 우리가 눈여겨 봐야하는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성전 문이 곧 닫혔다'는 표현입니다. :30 

여러분 어떤 뉘앙스죠? 이제 바울은 그 문 닫히는 '쿵'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진짜로 죽었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바울은 성전 담벼락 안으로 들어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닫히자 말자, 즉 성전 뜰을 빠져나오자마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 작정으로 때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참 아이러니 한 게요. 여러분 이 장면,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스데반이 죽었을 때와 똑같은 그림입니다. 

스데반이 죽었던 이유가, 성전모독죄 였습니다.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곡해해서 '모독'으로 봤음

그런데 그때 그 죄목으로, 스데반을 죽였던 사람이 누구였죠? 바울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던 그 자리에 바울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바울이 똑같은 죄목으로, 
그 스데반이 죽었던 똑같은 자리에서, 바울이 지금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죽음까지 각오한 바울에게, 정말 죽음이 코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기가 막힌 개입이 일어납니다. 

21: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유대인들이 바울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때립니다. 
거진 바울이 다 죽게 되었는데, 이때 기가 막히게 하나님이 개입을 하십니다.  

21: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성전에서 일어난 소동이, 로마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립니다.  
그리고 즉시 천부장이 군사들을 데리고 신속하게 현장에 출동합니다.  
천부장이 로마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목적이 치안유지, 소요사태 진압이거든요.

21: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그 순간 바로 유대인들이 바울 치기를 중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천부장이 투입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돌에 맞아 죽었겠지요.  

이 천부장이 어디에 있었냐면, 예루살렘 성전 바로 옆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 라는 곳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 사진 참조

이 안토니아 요새는 예루살렘 성전을 감시하기 위해 세워진 곳입니다. 
성전을 감시했던 이유는, 이 성전에서 일어나는 유대인들의 폭동(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입니다. 

워낙 예루살렘이 소요사태가 많은 성이었으니까요. 
아예 성전에서 일어나는 폭동을 감시하려고, 이렇게 성전 바로 옆에 요새를 세웠습니다. 
이 요새에 이제 로마 군인들이, 군단 규모로 주둔하고 있었고요. *천부장이 군단장

이 요새의 망대 높이가 30 미터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30미터 높이의 망대면, 한 눈에 예루살렘이 성전이 훤하게 보였겠죠. 
그러니 '이방인의 뜰'에서 유대인 폭도들에 의해 벌어진 소요사태가 즉시 파악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천부장은 루시아 이었습니다.  23:26
이 소요사태를 보고 받은 천부장이, 로마 군대를 이끌고 급히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그 즉시 유대인들이 바울 치기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일단 이 상황을 빠르게 수습합니다. 
먼저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합니다.  
바울이 이 소란을 야기한 원인으로 판단해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했습니다.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당시에 군인들은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 체포용 쇠사슬을 가지고 다녔고, 
죄수의 도주를 막기 위하여, 자기와 함께 묶었습니다. 
두 명의 군인이 바울의 양쪽에서 각각 쇠사슬로 바울과 함께 묶었던 거죠.

천부장은, 법적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 바울을 이렇게 체포한 것입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21:11절의 아가보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아가보의 예언

이 예언이 지금 그대로 이루어진 장면입니다. 
선지지 아가보의 예언대로, 바울은 결박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바울을 치던 유대인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 듣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이렇게 사람을 죽일 듯이 때리는지, 알고 싶어했죠.  

21: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그러나 도저히 진상 파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너무나 시끄러운 목소리로, 서로 다른 진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어떻게 합니까?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서 안토니아 요새로 바울을 호송해서 데리고 들어갑니다. 
안토니아 요새는 유대인들이 쫓아 들어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21: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지금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군 요새는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여러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바울은 가장 위험한 장소인 성전 바깥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인 로마군 진지 내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영 내' :34

하나님이 천부장을 통해서 바울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적용

 

이렇게 우리는, 바울의 예루살렘에서의 두 번째 에피소드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주어졌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주어졌던 예언이 두 가지의 내용이었습니다.  
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을 당할 것이다. 
2) 결박된 채로 이방인의 손에 넘겨 질 것이다.    21:11

그래서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울면서 말렸다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두로에서 형제들이, 아가보가, 빌립 집사의 딸들이.
 
그러나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기까지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실제로 오늘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결박과 환란을 당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처럼, 바울은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게 예언 대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와 모든 게 예언대로 되었구나. 하나님은 틀림 없는 분이구나. 
바울은 예언대로 고난을 당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마치면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하셨다는 겁니다
바울이 체포되어서 로마로 가는 길에,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하셨다는 겁니다.  

▲1. 첫째, 하나님은 바울을 유대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전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바울을 구원해 내셨습니까? 
로마군 천부장을 통해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치안 책임자입니다. 그곳 로마 군대의 최고 지휘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천부장이 바울을 구출하러 온 겁니다. 백부장들을 데리고요.
본문에 '들리매'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1B 

여러분 누가의 의도적인 표현인 거죠. 수동태입니다. 
들은 게 아니라 들린 겁니다. 하나님이 들려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천부장의 귀에 까지 들리도록, 들려 주신 겁니다.  
그러면 이 일은 누가 한 겁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부장을 동원해서 바울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2. 그래서 둘째,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 군대의 보호 아래 넘기니까  
그래서 다음 장에 보시면, 바울은 로마 군대의 보호 아래서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기가 오순절 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기 였습니다. 
때문에 어느 시기보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상황입니다. 
유대 전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한 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은, 로마군대의 보호 안에서 유대인들에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건, 바울에게 굉장히 놀라운 반전입니다. 

바울 평생에, 가장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할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쉬운 게 아닙니다. 

여러분 아시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중간에 항상 끌려가서 매를 맞았습니다. 
설교를 제대로 마음 놓고 끝까지 전한 적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끌려가서 매 맞고, 또 전하다가 붙잡혀서 죽다 살아나고, 
그러나 이번에는 유대인들에게 마음 놓고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안전하게 신변을 보장받는 상황에서, 바울은 마음 놓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지라도 구원받기를 원했던 동족 유대인들에게 
마음 놓고 복음을 전할 기회가, 처음으로 주어진 겁니다. 
여러분 누가 이것을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가 막힌 반전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의 호위를 받으면서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까지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예언대로 환란과 결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것들을 통하여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오히려 바울을 보호하시고,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더 신실하게, 
바울이 생각지 못한 계획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받게 되는 환란과 결박이 있습니다. 
삶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환란과 결박 때문에, 어떤 신자들은 자기 믿음을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즉 현실이 주는 두려움에 굴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두려워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살아갈 때 받게 되는 환란과 결박과 불이익이 있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이 다 하는 날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비록 환란과 결박이 있는 삶이지만,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마치 시23편의 고백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 환란과 결박을 통해서,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더 신실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마치 바울이 이방인 로마 군대의 손에 넘겨 졌지만, 
그것을 통해 바울이 더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안전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환란과 결박을 통하여 
우리의 계획보다 더 많은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졌지만, 
그것을 통해 바울이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로마로, 안전하게 가게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혼란과 결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서는 환란과 결박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란과 결박이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우리를, 결코 묶어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환란과 결박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이렇게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들입니다.  

그러니 환란과 결박이 끝이 아닙니다. 
그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임했던 환란과 결박의 예언은, 두려워하라고 알려주신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실 것이니, 바울을 안심 시키기 위해 주셨던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들을 통해서도 
우리의 삶 가운데에 선하게 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오늘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란과 핍박이 예언대로 있었지만,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고통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 바울이 믿음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환란과 핍박이 예언대로 그대로 되었지만 
참 기가 막힌 하나님의 주권으로, 천부장 이라는 최고의 권력까지도 동원해서 
바울을 구원해 내시고, 참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그것들을 통해서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모든 상황의 배후에서, 절대 주권의 하나님이 컨트롤 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3. 그러면서 누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살아야 하는가요? 

환란과 결박 때문에, 세상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뭐가 내게 유리한가?' 하는 기준으로 믿음을 타협하는 게 아니라, 
내게 불리하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을 걸어갈 때 분명히 고난이 있지만 
고난 속에서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더욱 더 선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할 것이 세상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시는데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해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롬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주1) 이방인의 뜰

출처 http://www.thedreamtogether.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

'이방인의 뜰' 이라고 했을 때, 
'예수님 시대의 성전(헤롯성전을 의미-필자 주)에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명칭의 장소가 있었는데 

여기는 이방인들도 들어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도록 배려를 한 곳이다. 
이것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곳을 장사와 환전하는 곳으로 만들어 더럽히면서 
이곳을 이방인들의 예배와 기도 장소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분노를 이끌어냈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몸소 증명해 보이셨다'... 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오해와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이 '이방인의 뜰'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1. [이방인의 뜰]은 본래 성전에 속한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헤롯이 제2성전(스룹바벨 성전)을 개축, 확장하면서 
소위 [성전산]이라고 불리는 확장된 형태의 [대규모 성전 테마파크]를 지으면서 
늘어난 공간 중 하나입니다. 이는 헤롯이 자신의 위세도 과시하면서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봐라 내가 사실은 이렇게 끝내주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용 시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헤롯에 잔인한 정치에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로마의 '윗 분'들에게 들어갔다가는 헤롯의 정치적 생명도 위태롭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했던 것입니다. 즉 민심을 잡기 위한 일종의 [전시행정]을 한 것입니다.

이곳은 본래 성전과 확장된 [성전산] 사이에 존재하게 된 공간입니다. 
본래의 성전 즉, 스룹바벨 성전이 소위 [내벽]이 되고, 
헤롯이 새롭게 조성한 성전산이 [외벽]을 이루는 구조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공간이 생긴 것입니다. *외벽과 내벽 사이

따라서 이곳(이방인의 뜰)은 헤롯이 조성한 별개의 공간 중 하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전의 본래 구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오리지널 성전에는 애당초 [이방인의 뜰]이라는 명칭의 공간 자체가 없습니다.

이곳이 [이방인의 뜰]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이곳은 성전과는 관련이 없는 곳, 
즉 일종의 관광구역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전산에 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방인(특히 로마인들)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이들을 위한 각종 편의들이 제공되었습니다(요즘으로 말하면 노점 같은 것들). 

또 멀리서 성전에 제사하러 오는 유대인들을 위한 행정적 편의(성경에 나오는 환전, 
제물로 사용할 동물들의 매매 등)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게 나중에 예수님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2. [이방인의 뜰]은 예배나 기도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 없는 곳이고 
당연히 예배 장소도 아닙니다. 여기는 앞서 말씀 드린대로 관광지 비슷한 곳이었습니다. 
만일 이방인들 가운데 실제로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사람은 
유대교로 개종을 하고 소위 안뜰(스룹바벨 성전)로 들어가 정해진 규정에 따라 정식으로 
종교적 제의를 했습니다.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실제 사례도 있었던 일들입니다.

3.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공존을 말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심각하게 왜곡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방인의 뜰]은 오히려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방인을 끔찍히 경멸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곳과 성전 사이에 약 1.5미터 정도의 담을 쌓아두고 
'여기를 넘어가면 이방인은 죽을 줄 알아라!' 하고 무시무시하게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치졸한 일인데 담의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실제 성전 안쪽을 훤히 볼 수 있고 실제로 들어갈 수도 있게 해 놓고 
막상 들어가면 죽인다고 협박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방인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잘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혀 있는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성경에서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성전 내에 이방인들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고소당해 집단린치를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행 21:27-36) 
이것을 봤을 때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방인들을 사람 같이 생각하지 않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의 뜰]과 성전을 격리하는 것은 
결코 이방인들을 향한 호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이방인들의 뜰]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집어엎으신 까닭은 이곳이 원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곳인데, 
거기를 장사하는 곳으로 바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긴 원래 장사도 할 수 있는 곳이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소통하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화가 나신 이유는 거기서 장사를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나와서 
같이 장사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제사와 관련된 제물을 팔고, 
거기에 필요한 환전을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나와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분노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장사를 하면 안 되는 인생들이 나와서 장사를 
- 그것도 어마어마한 폭리를 남기는 절반은 사기에 가까운 짓들을 - 하고 있었으니 
성전의 본래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은 이에 대해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그들의 비리에 대해 
분노하신 것을 넘어,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성전은 이제 그 기능과 목적을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성전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의미를 완성하시고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학적]인 것이라고 
예수님의 행동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