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회복 엡4:1~3 2011.11.25. 녹취록 스크랩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점점 더 외로워져 가고, 관계가 어려워지는 세상
오늘 우리는 개인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져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외로운 존재이지만, 이 시대는 더 외로워졌습니다.
개인주의와 기계문명으로 개인과 개인의 접촉이 아니라 기계와 접촉합니다.
우울증이 많은 것은 외롭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울증은 비만과 중독과 연관이 있습니다. 외로워서 먹게 되고 집착하게 됩니다.
외롭게 사는 사람이 일반적인 사람보다 사망률이 3배가 높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매일 8시간 이상 일을 하고, 2시간 50분 이상 TV 시청을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토요일은 TV 시청을 평균 3시간 50분 한다고 합니다.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인간관계를 맺을 줄 모르게 되고
어른들은 사회성이 점점 더 떨어지게 됩니다.
▲특별히 20~30대층에서 대인기피증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은둔형 외톨이를 ‘히키코모리’라고 하는데
식사마저도 엄마가 밥을 방 앞에 두면 아무도 없을 때 가져가서 먹고는
다시 내놓고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은둔하는 사람이 상당히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교회를 나오긴 했지만,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피하는 대인공포증인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과 친밀해지고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병입니다.
될 수 있으면 사람을 피하고 개와 온종일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를 키우는 것은 좋지만, 개에게 너무 집착을 하는 것은 상담을 받아야 할 단계입니다.
인격적인 친밀감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적인 결함,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았거나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서 자라서 친밀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으로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서 거절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결혼해도 여전히 상대방에게 친밀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거부합니다.
배우자와 가까이 있는 것, 둘만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친밀감에 대한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여태까지 본 최악의 질병은 나병, 천연두, 치매가 아니라 외로움이다.”
라고 했습니다.
◑‘관계’가 좋아야 행복합니다
우리 시대의 최고의 이슈는 '접속 access' 이라는 단어입니다.
돈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접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소셜 네트워크로 많은 사람과 접속합니다.
그 속에서는 깊이 있는 사귐은 없지만, 외로움을 달래주는 애용품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창조 사역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공동체적입니다.
창1장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도 「우리가」를 보면 하나님을 복수로 쓰고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이 공동체적으로 사역하셨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이 외로워해서 하와를 지으셨는데, 두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3명 이상의 공동체가 되었는데 에덴동산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람과 관계를 맺는 수직적, 수평적 관계를 이룰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산 위해서 홀로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와 함께 접속되어 아름다운 교제와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함께」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합니다. 구원은 일대일로 받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관계 맺기입니다. 혼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가는 것은
공동체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은
소그룹, 사랑방에 참석하여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삶은 관계입니다. 신앙의 핵심도 관계입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있는 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바로 함께할 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때는 관계가 깨어질 때일 것입니다.
내가 암에 걸려 있어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면 견뎌내는 힘이 생기지만
관계가 단절되어 있을 때 찾아오는 아픔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건강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많이 맺고 있는 사람이 장수한다고 합니다.
사회적 지위, 재산 등에 따라서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결정됩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곁에 있어 줄 사람이 많은 그 사람이, 인생을 잘 산 것입니다.
살림이 어려워도 가족들의 관계가 좋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요즘 가족 관계의 갈등으로 고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형제끼리 법정싸움을 하고 원수가 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심각한 관계인 사람도 있고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관계가 좋지 않아 교회를 옮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처는 주로 관계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밤에 말씀을 통하여 관계 안에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관계가 회복되면 지옥 같은 삶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경제는 성장했지만, 이전만큼의 따스함은 없어졌습니다.
형제간에 혈육의 뜨거운 정 사이마저도 돈의 개입과 세상의 것들로 말미암아
살벌해진 모습을 볼 때가 잦습니다.
▲신앙생활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관계를 잘 맺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를 잘 맺기를 원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첫 번째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수평적 사랑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이것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직과 수평은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이
이웃, 가족과의 관계로도 반드시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관계를 회복 시기키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죽게 하신 이유는, 화평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해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화평의 복음을 우리에게 전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때, 축복의 정점은
모든 관계 안에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통해서 축복이 흘러가고 나에게 흘러오게 됩니다.
만약 관계가 단절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축복이 단절되는 것입니다.
관계를 통한 축복이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한데
이것은 구원의 사건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입니다.
문제는 관계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참 위험한 것이 많습니다.
교제하다 보면 반드시 갈등이 생깁니다. 젊은 남녀가 데이트할 때는 모르지만
결혼해서 살아보면 갈등이 생기고 관계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죄성을 가진 온전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갈등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부부가 싸울 수 있고, 교회 안에서도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었다고 관계를 거부하고 공동체를 떠나면
더 큰 고통이 옵니다. 누구든지 사랑을 하려고 하면 고통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사랑할수록 고통을 더 많이 겪습니다.
사랑으로 오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영원히 사랑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힘들어도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생각, 관점, 기질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같은 배에서 나온 쌍둥이도 서로 다른데,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이견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는 동안 갈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건강하게 극복하는 훈련을 해 나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와 다른 것, 갈등, 긴장관계, 상처를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관계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최근 아들이 엄마를 살해해서 8개월 동안 방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아들이 서울대 가는 것을 원하는데 공부하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하고 밥을 굶기며 그 아들을 코너로 몰아갔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분노가 쌓여 자기도 모르게 엄마를 죽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아이를 아이답게 대하지 않고 부모 마음에 있는 성취욕, 욕구불만 등을
아들을 통해 채우고자 했던 심리적 억눌림의 상처가 아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사회의 단면입니다. 그래서 기사를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가 엄마의 죽음에 대해서 별 슬퍼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어려운데 남을 변화시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이 우리의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미워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미운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워하고 분노하는 감정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쌓이면 큰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이런 감정들을 건강하게 다루는 방식을 익혀야 합니다.
미워하고 분노하는 감정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 아니고
관계 안에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관계 회복을 위한 가이드
▲1. 첫 번째는 모든 문제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 <자아>
설령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문제를 찾는 목회자는 목회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문제 많은 교인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될 길이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탓하는 동안에는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자녀를 대할 때도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몰아가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분명히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병든 사람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자기가 빠져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벗어나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됩니다.
자신은 옳고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없으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늘 남 탓만 합니다.
가정에 정신적인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만 치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상담학이나 심리학, 정신과 병원에서는 가족을 같이 치료합니다.
반드시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같이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의 출발은 ‘너’가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라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음치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자신의 음정은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리를 정확히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적 음치가 있습니다.
관계의 문제에서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관계 지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관계를 읽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은 관계로 얽혀 있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관계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관계를 할 줄 모르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전혀 읽을 줄 모릅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말은 사회적 관계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일반적인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데
이 증상이 심한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줘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단계는 치료를 요하는 수준의 단계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소외시키는 것을 모르고 사람들이 자신을 왕따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의 주변에는 사람이 가지 않습니다. 고립된 상태가 됩니다.
관계 지능의 문제가 있기 때문인데,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야지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버드에서 연구한 결과로는, 직장에서 퇴출당한 사람들은
실력 때문이 아니라, 관계 내지는 성품의 문제 때문인 경우가 훨씬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남들과의 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사람은 상처가 많거나 자아상에 문제가 있습니다.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 자아상입니다.
교제를 하다 보면 상처가 금방 나타납니다. 마음과 다르게 말이 나옵니다.
상처를 주려고 주는 것이 아니고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줍니다.
열등감이 좋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대인관계에 자신감이 없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에 빠지고 쉽게 원망하고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정죄를 잘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적입니다.
너무 예리해서 그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베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를 스스로 막습니다. 그리고 남 탓을 합니다.
건강한 자아상은 자신과의 화해를 말합니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불편한 사람은 남을 편하게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상의 문제가 회복되면 편안해집니다.
이런 사람과 만나서 대화하면 쉼이 있습니다. 편안하고 행복감이 있습니다.
대화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어떤 말도 상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 안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고 관계의 걸림돌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변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2.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순간부터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금이 갔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공식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때 사람의 관계는 깨어지기 쉽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인간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과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증상이 나타납니다.
모든 갈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일어납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맺는 것은 잘하는 편입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충성하는 수직적인 관계는 너무나 잘하지만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많습니다.
최근 한국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난 교회가 참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해결이 안 돼서 법정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수평적 관계를 잘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사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맺기가 바르게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다면 복음의 능력으로 수평적 관계도 성공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과의 문제가 일어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으면 사람과의 관계도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가 떨어져도 관계 안에 증상이 나타납니다.
부부싸움이 잦아지면 경제문제나 애정문제를 체크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많아지는 것은 남편의 사랑을 기대한다고 하기보다는
더 근원적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채워지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사람에게 목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면 대부분 넘길 수 있습니다.
품는 능력과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관계의 문제가 생기면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거기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시고 이해해주시는
그분 앞으로 나아갈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물을 길었던 이유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기피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회복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물동이를 던져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갑니다. 사람들에게로 갔습니다. 관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채워진 충만함이 있었기 때문에
더는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면 인간관계의 마찰도 줄어들고
자신을 공격하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넉넉함을 가집니다.
이것이 성령의 힘입니다. 관계의 문제가 생기면 그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은혜로 회복되는 경험이 있을 때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마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3. 세 번째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내 성품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는 결국 성품의 문제입니다. 성품의 변화는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만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능력이나 열심보다 성품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일을 맡기면 훌륭히 잘 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사상자가 즐비합니다.
일하는 동안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은 해내는데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2절에서
인간관계의 키를 알려줍니다.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굉장히 중요한 인간관계의 키워드들이 나옵니다.
관계를 깨는 주요 원인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3절에 「3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남을 낮게 여기면 안 됩니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겸손함으로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내 안에 상대방을 낮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들면 그때부터 상대는 느낍니다.
그러면 관계는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또 여기 온유는 부딪히지 않는 성품을 말합니다. 대인 관계의 유연성을 말합니다.
강하면 부러집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많은 사람은 성격이 강한 사람입니다.
요즘 까도남, 까도녀라는 말이 있는데
뭐가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까칠한 사람을 말합니다.
비본질적인 것은 그냥 넘어갈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는데 본질적인 진리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카 롯과 목초지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온유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려주는 것, 오래 참음입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자녀도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또 용납은 품는 능력입니다. 바다는 넓고 다 품어서 색이 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좁은 시내는 탁류가 들어가면 금방 색이 변합니다.
우리 삶의 경계를 넓혀야 합니다.
너무 좁으면 가족조차도 품지 못합니다. 용납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품의 변화는 수용의 능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크기는 사람을 품는 용량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내 용량이 작아서 그런 것입니다.
요셉의 장점은 빨리 용서하는 능력을 갖춘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몇 명의 사람이 마음속에 잡혀 있으면 내 용량은 넓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용서하면서 품는 용량을 넓혀서 나라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힘들지만 실천하면 내 용량이 넓혀집니다.
용서의 기적이 의외의 것에서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성품의 문제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됩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십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성품의 문제에 성령이 역사 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이 임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4. 마지막으로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공동체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주일 예배 참석만 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사랑방, 소그룹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소그룹에 들어가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늘 있습니다. 그러나 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소그룹 안에 들어가면 상처받을 수 있는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관계 속에서 상처의 회복을 경험하면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격을 다듬어 주시고 관계를 더욱더 풍성히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외로움으로 정신적 질환이 생기는 이 시대에 공동체 안으로 깊이 들어가
가족과 같은 좋은 관계를 경험할 때
과거에 관계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고 건강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건강한 공동체 안에 있으면 우울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을 편안하게 열어두고 사람들이 오고 가도록 하면
자녀들에게도 정서적으로 너무나 좋고 사람들을 통해서 회복의 역사도 일어나고
축복도 받고 삶의 여유도 생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시도한다면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보면 예루살렘의 교회는 가정을 열어두었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로 관계를 회복시키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 안에 관계들로 말미암아 아픔을 겪는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처럼 문제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여 문제가 생기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품의 변화를 받고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회복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고
삶의 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교회에서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도록 관계를 만들어간다면
그 친밀함 속에서 주는 힘과 행복과 회복과 변화를 맛보고 천국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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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해치는 ‘자기 의’
1)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에 대하여, 자기 의가 있지요?
‘내가 너를 낳았다. 이 놈 자식아, 나를 이렇게 네가 힘들게 할 수가 있냐?
내가 얼마나 너를 고생하면서 낳았는데..’
특히 어머님들, ‘얼마나 배가 아픈 줄 아느냐, 별이 보였다.
근데 공부도 안하고, 이 놈 자식아’ 하면서, 희생했다. 희생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희생했는지 아느냐?
2) 부부사이에서도 자기 의가 다 있죠.
여자분은 ‘내가 당신 만나서, 미스터 김, 미스터 박, 다 포기하고,
내가 자기랑 결혼했는데... 진짜 실망했다.’ 그런 말.
이렇게 부부사이에서도 자기 의가 있어요.
남자는 그래도, ‘내가 돈벌어주고, 내가 진짜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손님 막 접대하느라고 힘든데... 당신은 이렇게 남편 고생하는 걸 안 알아주는 거냐?’
이렇게 부부관계에서 자기 의가 얼마나 많은지요.
3) 뭐 교회에서, 참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그래도 내가 담임으로 개척해서, 일구었다 이런 마음, 가질 수 있겠죠?
또 ‘나는 이렇게 교회에서 봉사했는데, 나는 이만큼 뭔가를 했는데,
나는 그래도 이런 공로가 있는데’,
이런 게 얼마나 많아요, 우리 안에. 뭐 겉으로는 표현 안 해도 깊은 마음 안에,
‘난 그래도 이렇게 희생했는데, 나는 뭔가 최선을 다했는데..’
이런 자기 스스로, 나는 뭐를 했다고 하는, 공로주의. 이게 자기 의의 대명사이구요.
4) 또 하나 대표적인 대명사는, ‘내가 누구다’라고 하는 신분입니다.
나는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
집사는 자격이 없습니다. ‘나 집사인데요’, 보통은 집사 이야기하면, 긁적거려요,
이렇게 나이롱인데, 이렇게 말하는데,
그래도 난 권산데, 이렇게. 나는 장론데. 나는 교역잔데. 담임목산데.
또는 뭐 세상적으로 학교 출신. 나는 SKY대 출신인데.
나는 그래도 이런 지위가 있는데. 이런 신분의식!,
5) 어저께 영적 교만함 이야기 했는데요. 경건한 영역에서도, 본인의 자기 의가 있죠.
‘나는 이렇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인데..’
‘나는 이렇게 설교를 잘 하는데..’
세계적인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가 쓴「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보면,
그 책의 4장에서,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때 영국에서 열렸던 <비교종교학 회의>때 있었던 일입니다.
여러 종교를 서로 비교하는 학회가 열렸는데, 그때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진 독특성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학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성육신 사건>에 있다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활신앙>에 있다고.
확실히 부활은 기독교 신앙과 교리에 독특한 사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때 C. S. 루이스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은혜>에 있습니다.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
그 은혜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입니다.’
그 은혜의 눈으로, 내 자녀, 내 배우자, 내 부모, 내 이웃을 바라보자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