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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의 만족, 영의 만족

LNCK 2024. 9. 19. 12:0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https://www.youtube.com/watch?v=vCBcII7aH0c

혼의 만족, 영의 만족           신13:1~18           

※기독교인이 
-명백한 반기독교 영화(파ㅁ, 신과함ㄲ 등)가 1천만 돌파하는데 일조해서는 안 되며, 28:30초~35:30
-또한 어떤 면에서 지루한 것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42:30~47:30

◑개요

신명기 13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살다 보면 영적으로 침체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기기도 하고, 
또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생기기도 하고 
또 하나님보다 더 그럴듯해 보이는 사상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모세는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섬긴다"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말로 풀어 설명하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생긴다는 거예요. 

맞아요. 여러분 영적 침체의 원인은 항상 동일하고 단순합니다. 뭐예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보다 더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생기고,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추구하게 되는 것이 생기는 것... 이게 영적 침체의 원인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것을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섬긴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13:6~7 

그래서 오늘은 이런 모세의 권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도록, 더 의지하도록 유혹하는 것에 대한 
세 가지 종류의 유혹을 언급하고요. 

두 번째는, 이런 유혹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거예요. 
대충 어영부영하면 안 되고,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그렇게 유혹하는 것이 있으면 
'전부 죽이고, 전부 불사르라'고 말씀합니다. 매우 단호하죠. 

이게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되고, 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이것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 됩니다.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불살라지기 전에, 그것(우상)들을 먼저 불살라버리십시오' 
이게 모세의 권면이에요. 
'너희의 삶이 그 유혹 때문에 다 불타 없어지기 전에, 그것들을 먼저 불태워 없애라'는 거예요.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 유혹들은 
어떤 종류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에 대해 모세는 무엇이라고 권면하는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첫 번째 유혹은,

신앙의 본질을 떠난 "표적과 기사와 예언"   13:1~5

신13:1~3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우리로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하고, 더 사랑하게 하는 첫 번째 유혹은 
'선지자나 꿈꾸는 자들'이래요. 

이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는 거예요. 또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맞아요.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끌립니다. 

그래서 첫 번째 유혹은 초자연적인 은사들의 유혹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이단에 끌리는 것을 보면, 항상 초자연적인 뭔가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저런 걸 도대체 누가 좇아가나?' 하지만, 
그런데 멀쩡한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쫓아가요. 
그래서 왜 그런가 보면, 그 안에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뭔가 신비한 게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님만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도 신비한 능력들을 행합니다. 

(*그래서 닐 앤더슨이 지적하기를, 신약성경에 '거짓 선지자'라는 단어가 나올 때,
그 단어 전후에 '표적, 기사'이런 단어가 꼭 같이 동반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악한 영들도 신비한 능력들을 행해요. 
그 안에서 별의별 희한한 이적들이 다 일어납니다. 

제가 직접 들은 얘기인데요. 어떤 이단교회가 여름 수양회를 갔대요. 
거기에 모기가 엄청 많았댑니다. 그러니까 교주되는 사람이 나와서 기도를 하는데, 
딱 기도하고 나니까, 잠자리떼들이 몰려와서 모기들을 다 먹어버렸대요. 신기하죠. 

그런데 이게 그냥 숲에서 잠자리 떼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서 뿅뿅뿅뿅 잠자리들이 날아와서 
모기를 다 먹어버렸다는 거예요. 이런 황당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멀쩡한 사람들이 가서, 그 이단 집회에 모이는 거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만 신기한 일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도 비슷한 일들을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끌리는 거죠. 

▲이단뿐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신비주의, 은사의 유혹은 우리를 위협합니다. 
'선지자나 꿈꾸는 자'라는 것은, 능력을 행하고 예언하는 사람들이죠. 
은사가 많고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인데.. 사람들은 여기에 쉽게 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그 초자연적인 은사를 더 의지하게 되고, 
또 하나님보다는 그런 초자연적인 은사를 더 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거죠. 
거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어디서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면, 거기로 우르르 몰려가고 
저기서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면, 거기로 우르르 몰려가고... 이런 게 사람의 심리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자신보다는 나타나는 신기한 현상들, 
은사들, 예언들, 치유들 그런 것을 더 의지하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되고,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더 추구하게 되고, 더 따라가게 되는 거... 이런 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게 모세의 첫 번째 권면입니다. 그러다 보면 실족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실족한다는 거예요. 왜 그럽니까? 
이게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네 그럼 본질은 뭐예요? 정말 영적인 건 뭡니까? 정말 믿음의 본질은 뭡니까? 
이어지는 3~4절에 보면, 모세가 진짜 믿음의 본질이 뭔지, 이렇게 얘기합니다. 

13:3~4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모세는 아주 명확하게 얘기합니다. 뭐라고 그래요?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왜요? 그게 신앙의 본질이 아니니까! 

▲그러면 믿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은 뭡니까? 
첫째,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는 거라는 거예요.  :3~4

이게 신앙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아멘이십니까? 

만약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하는 사역이, 
사람들을 이런 방향으로 인도하는 거라면 오케이! 

이런 방향으로 인도하는 거라면, 예언을 할 수도 있고, 또 능력이 나타날 수도 있고, 
성령께서 하시는데 불가능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거는 본질이 아니라, 그냥 수단이라는 거예요
어떤 수단?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따르고 청종하고 의지하고 섬기는 수단. 

 

이게 본질인데, 이 본질로 가게 하기 위해서 
기사와 표적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통로, 수단인데, 
자짓 잘못하면 이게 그냥 목적이 돼버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그런 식으로 유도한다면 
절대로 그들을 청종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사실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이런 거죠.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병이 낫고, 예언을 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 이런 '현상, 표적'들에 집중하게 돼요. 

-그래서 그 일을 행하는 사람한테 더 집중한다든지 
-아니면 그런 능력을 받는 일에 더 집중한다든지 
이런 실수들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고 청종하고 섬기고 의지하기 위해서 
표적, 기적, 예언이 나타날 수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사용하시는 수단이 되지만,

표적, 기적, 예언, 신유 자체가 주목을 받거나 
이것을 하나님보다 더 집중하거나, 이것을 하나님보다 더 추구하거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실족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놀랍게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기도록 하는 첫 번째 유혹은 '종교의 유혹'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사실 우리가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이기 때문에 
그냥 이것도 영적인 거라고 생각을 하고, 
이걸 추구하는 게 하나님을 추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은사의 나타남'에 있어서 두 가지를 분리해야 됩니다.
이런 신기한 일들, 초자연적인 영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정말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그냥 도와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면 OK,
-그러나 그 은사, 기적, 예언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것을 더 의지하게 되고, 거기로 빠져버리면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멘이십니까? 

신앙의 본질은 뭐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청종하고, 순종하고, 의지하고 섬기는 거예요. 아멘! 

◑2.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두 번째 유혹은 "가까운 사람, 혈육"    13:6~11

13:6~7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네 어머니의 아들, 곧 형제 자매, 자녀, 아내, 친한 친구가 다 하나님의 축복인데,
이들이 가만히 너를 꿰어, 우상 숭배, 이방 신들을 섬기게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축복(사람)이, 오히려 반대로 유혹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종교의 유혹보다 훨씬 강한 게 '내 품의 아내의 유혹'입니다. 
'아내가 이렇게 하자'고 하면, 이거는 종교의 유혹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합과 이세벨이 등장하죠.
북왕국의 아합 왕이 바알 숭배를 받아들여서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을 숭배하게 했던 것은, 
아내 이세벨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왕상21: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이세벨은 페니키아 왕 엣바알의 딸로, 바알 숭배자였으며, 
북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의 아내죠. 시돈 출신입니다.
시돈은 오늘날도 시돈(사이돈 Sidon)이란 명칭으로 유지되고 있는데, 레바논의 한 도시죠.

지금도 레바논의 사이돈 근처 '바알벡'이란 고대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거기서 바알 우상숭배가 시작된 기원지라고 주장하는 곳이죠.

종교의 유혹보다 훨씬 더 떨쳐버리기 힘든 것이 가족의 유혹입니다. 
아내가 예수 안 믿겠다고 하는데, 남편 혼자 믿는 경우는 진짜 드물어요. 거의 못 봅니다. 
선교사로 헌신한 청년들도, 결국 선교지로 못 들어가는 건 다 가족 때문이에요. 
거의 다 그래요. 
부모의 반대, 배우자의 반대, 또 자녀가 발목 잡기도 하고...
그렇지만 노부모는 다들 버려두고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줄 믿고!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고 하셨죠.   마10:36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하나님의 뜻이나 길을 따르지 못하는데
최대 방해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유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1)
      
◑3.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세 번째 유혹은 "어떤 불량배" 입니다.   13:12~17
또는 "하나님을 떠난 성읍"입니다.

13:12~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주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주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가운데에 거주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어떤 불량배'는 누구일까요? 
그런데 본문을 잘 읽어보시면, '어떤 불량배'는 특정 인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일부 불량배가 문제가 아니라 
성읍 주민 전체가 문제였다는 거예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읍 전체를 다 죽이라'고 그러잖아요.  :15

앞에 두 가지 유혹을 보면,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면 
그 사람을 죽이라'고 그랬고요. 

형제나 자녀나 아내나 친구라도, 너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면
그 사람을 죽이래요.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죽이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는 누구를 죽이래요? 성읍 주민 전체를 죽이래요. 
그 이야기는 무슨 얘기겠어요? 
성읍 주민 전체가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불량배' 라는 것은, 그냥 도발을 시작했던 사람을 얘기하는 거고, 
실제로 여기서 유혹의 통로가 된 사람들은 '성읍 주민 전체'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유혹의 책임이,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성읍 전체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 번째 유혹의 통로는, '하나님을 떠난 성읍'이에요. 

(*그런데 여리고 성 같이 이방 성읍을 이렇게 전체로 멸한 적은 있으나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한 성읍을 전체로 멸한 적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럴 만한 일이 없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죠.

다만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되고, '정신, 의미'를 따라야죠.
그 정도로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사람들이나 문화'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필요한 경우, 불매운동을 한다든지 해서, 그런 이방문화가 퍼트려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거죠) 
 
▲'하나님을 떠난 성읍' 
이것을 오늘날로 풀어 얘기하면, 하나님을 떠난 세상 문화, 
또는 하나님을 떠난 세상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에는 세상 문화가 있습니다. 
세상 성읍 전체가 다른 신을 섬기는데, 우리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읍 전체가 동성애를 지지하는데, 우리 혼자 반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읍 전체가 진화론을 주장하는데, 우리 혼자 반대하고 창조론을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이 성읍, 이 세상의 문화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드라마, 영화, 유튜브, SNS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듣고 있는 거잖아요. 

특별히 요즘 영화나 드라마, 넷플릭스에서 나오는 것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반기도교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 라는 메시지를 은근히 담아내고 있든지, 
아니면 반기독교적이거나, 교회를 비아냥거리는 메시지를 은근히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성경적인 메시지를 아름답게 포장해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 '문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어요. 그것은 '구조, 시스템'이에요. 
'문화'라는 게 뭐냐면, 어떤 것을 집단적으로 반복하면 문화가 됩니다. 

교회 같은 경우도 교회 안에 문화가 있잖아요. 그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져요? 
많은 사람들이 반복하면 문화가 돼요. 

예를 들면, 금요예배 때는 한 7시부터 와서 줄을 서잖아요. 
이게 왜 문화가 됐느냐? 많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그렇게 하니까 그게 문화가 되는 거죠. 
그런데 '문화'가 지속이 되잖아요. 그럼 이제 이것이 '구조'가 됩니다. 
법을 통해서 '구조'를 만들기 시작해요. 사회의 '구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데 법으로 만들지 뭐'
그러면 이제 구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권, 차별금지'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사회구조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한 번 사회구조가 되고, 즉 법제화가 되고 나면 
그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무를 수도 없어요. 
즉 이전으로 되돌리는 건 훨씬 어렵습니다. 

문화가 발전해서..  이게 법제화가 되고 나서, 사회 구조가 되잖아요. 
그럼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그게 진리라고 배우게 될 거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죠. 

또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법의 제재를 받게 됩니다. 이게 참 무서운 거죠. 
그래서 어찌 보면 앞의 두 유혹(◑1, ◑2)보다 훨씬 심각하고 대규모적인 유혹이예요. 

세상의 문화와 구조를 통해서,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로 인도하는... 이게 훨씬 더 무섭다는 거예요. 

▲그러면 현대에 하나님을 대체할 만한 다른 신이 뭐가 있겠어요? 
대표적인 게 돈 아닙니까! 

그런데 계속해서 우리 문화가 반복해서 주입하는 게 뭐예요? 
'돈이 중요하다. 돈은 의지할 만하다. 위기 때는 돈이 있어야 된다. 
돈이 힘이다. 돈이 행복이다...' 결국 이 메시지를 계속 반복적으로 생산해서 주입하는 거잖아요. 

그럼 정확히 어떻게 됩니까? 
교인이라도, 하나님을 떠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로 가게 되는 거죠. 

겉모양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일 수 있어요. 
하지만 내 마음과 관심은, 다른 신에게로 가게 되는 거죠.
 
이게 뭐예요? 세상 문화와 구조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주입하는 거죠. 
그래서 사실 이것은 혼자 싸우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성읍은, 다 같이 우르르 가서 진멸하라고 하세요. 

(신약에 스데반을 돌로 치고, 사도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던 것도
구약의 이런 말씀을 잘못 적용한 데서 이루어진 사고였지요)

앞에 두 개는 싸움이에요. 개인의 영역에서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거는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에요. 
그래서 함께 연합해야만 전쟁할 수 있고, 정확한 전략이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여러분 연합하여 싸우고 정확한 전략을 가지고 
이 전쟁들을 해나가야 되는.. 그런 시점에 서 있다는 거예요. 아멘이십니까?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긴 이야기니까, 다음으로 넘기죠. 

▲그런데 이런 싸움, 이런 전쟁에 있어서도 
우리 개인이 해야 될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해야 될 몫들이 있다는 거예요. 

13:16절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차지한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지 아니할 것이라'

'성읍과의 전쟁'은 개인이 할 수 없어요. 이건 전쟁이니까 함께 해야 되는데, 
그러나 이 전쟁에서 개인이 해야 될 시작점이 있어요. 그게 뭐예요? 
진멸할 물건에 조금도 손을 대지 말라는 거예요. :17

그것이 영화든, 미디어든, 책이든, 노래든... 
하여간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에 일조하는 거라면, 
단호하게 손을 끊으라는 거예요. 

단호하게 보지도 말고, 가지도 말고, 손대지도 말라는 거예요. 
이게 이 싸움의 시작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읍에서 나온 거면, 손도 대지 말라는 거예요. 
쳐다보지도 말라는 거예요. 

일전에 어떤 형제가 저한테 이 얘기했다가 되게 혼난 적이 있는데 
'목사님, 그래도 이게 1천 만명이 넘게 본 영화인데 
보면 조금 반기독교적인 게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봐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그 영화를 봤다는 거예요. 
(뭐 최근에 '파ㅁ', 그 이전에는 '신과 함ㄲ' 이런 영화들이 있었죠.)

그래서 그 형제가 저한테 혼났습니다. '형제여, 미쳤냐고?' 
성경은 뭐예요? '손도 대지 말라고 하는데... 그런 걸 보고 앉았냐고?' :17

아니,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아냥거리고 있는데 
그걸 앉아서 보는 게 괜찮으세요? 

성경 뭐라고 그럽니까? 
'진멸할 물건에는 손도 대지 말라'고 했는데, 
그거 왜 만지냐고.. 

영적인 건 여러분, 단호하라고 그러셨어요. *본문 13장의 주제
그런 작은 틈을 주는 거 아닙니다. 
그런 작은 틈이 우리 영혼을 다 무너뜨리는 거예요. 

'아니 목사님, 그래도 이거 뭐 전체적인 내용이 괜찮아요'
OK, 혹시 전체적인 내용은 괜찮다고 칩시다. 그래도 문제가 뭐냐면, 
여러분들이 그거를 보니까, 관객수가 한 명 더 늘어난 거 아니에요? 

1천만이 아니라, 999만 9999명으로 끝날 거를, 
여러분이 보니까 1천만 관객 돌파가 된 거 아니에요? 

이게, 여러분 사람들이 보고 지지를 얻으니까, 계속 그런 문화가 재생산되는 거 아니에요? 
'아~ 이런 거 만들면 장사가 되는구나, 이런 거 만들면 조회수가 되는구나...'

그러니까 하는 거잖아요. 그 일에 성도들이 왜 일조하냐고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만드는 일에, 하나님의 자녀가 왜 일조하냐고요? 

여러분이 가서 그것을 밀어줬고, 표를 팔아줬고, 클릭을 해줬기 때문에, 
그게 힘을 얻고 계속 재생산되는 거 아닙니까! 

그 책임을 져야 될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면... 나는 괜찮을지 몰라요. 
'목사님, 나를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나는 그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뭐 그럴 거예요. 

그렇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 때문에, 그게 자꾸 확대 재생산 되면서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는데요? 
그것이 계속 힘을 얻어서 문화로 형성되어 가면, '성읍 전체가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는 거죠.

내가 한 명이 더 지지해줬기 때문에 999만 명으로 끝날 게, 1천만이 됐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이후로 더 유명해지게 된 거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밀어줘서 그렇게 됐다고요. 
그러면 '아 이거 돈이 되는구나' 하면서, 계속 그렇게 만드는 거죠.

그럼 우리 자녀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성읍 전체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면 어떡하냐고요?
그렇게 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나중에 '무료'가 되면, 잠깐 보면서, 세상 문화의 현실을 파악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다가 배알이 꼬여서 못 보겠다 싶으면, 혹시 속에서 불이 올라와 못 보겠거든
그냥 중간이라도 꺼버리면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멀쩡하게 그걸 보고 있을 수 있어요?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요. 
성경은 뭐라고 그럽니까? '진멸할 물건은 손도 대지 말아라' :17

◑성령의 사람은, 신앙생활이 혹시 지루하더라도.. 계속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혹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13: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13:6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13:13 '너희 가운데서 어떤 불량배가 일어나서 그 성읍 주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위 세 가지 유혹, 위 세 구절에서 공통된 것은
'알지 못하거든'입니다. 세 번 반복됩니다.

즉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서 하나님을 떠나도록 유혹했다는 거예요.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해서' 하나님을 떠나도록 유혹했다는 거예요. 

'알지 못하던'이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새롭고 신기한 것은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이게 어떤 사람들에게 작동했을까 보세요. 
이미 영적인 일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던 사람은 
'알지 못하던 것'을 들어도, 별로 유혹이 안 됩니다. 
이미 내가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귀가 솔깃하게 들리는 거예요.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 
-지금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새로운 게 있어' 그러면 
'그래? 그게 뭐야?'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알지 못하던 것'에 귀가 솔깃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하고, 별로 재미없고... 
이런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을 사단이 '하나님을 떠나도록' 타겟팅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함정이 뭐냐면 
새로운 것은 항상 혼을 자극하지, 영을 깨우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깨어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영은, 새롭고 신기한 가르침으로 깨어나지 않아요. 

새롭고 신기한 것에 반응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혼이에요. 지적인 호기심! 
왜 그러냐면 영적인 원리 때문에 그래요. 

영은 그 속성상, 지루함이라는 걸 몰라요. 
그러니까 영의 세계에는 지루함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영은 늘 새로워요.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요. 

그러니까 천국이 있는 거예요. 
만약 영에 지루함이라는 게 있다면, 천국은 큰일 납니다. 

천국은, 백년 천년 만년도 아니고 영원한 세월을 거기 있어야 되는데 
만약 지루하다면, 그게 고문이고 지옥이지, 그게 어떻게 천국입니까?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 영에는 지루함이라는 컨셉 자체가 없어요.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늘 첫날 같아요. 늘 새롭고, 또 새롭습니다.
이게 영의 속성이에요. 

그래서 영으로 사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영 안에서 새로움이 날마다 날마다 반복되는데, 뭐하러 또 새로운 걸 찾겠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혼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물론 아주 초신자여서 교회를 처음 나와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때는 배워야죠. 
근데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성경도 이미 알만큼 알고, 
신앙생활이 뭔지도 알만큼 알고 그러는데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이건 무슨 뜻이겠어요? 혼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는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졌다. 그동안 혼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웬만하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살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또 영으로 산다고 했다가 혼이 작동해가지고 매너리즘에 잠시 빠지기도 하지만 

하여간 새로운 걸 추구하는 것은 혼의 작용입니다. 
영은 새로운 걸 추구하지 않아요. 추구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새로운데요 뭐...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게 영에 속한 기능이잖아요. 
사랑은 여러분 매일이 그날 같아요. 매일이 처음 만난 날 같아요. 안 그러세요? 

제가 연애할 때도 그랬고요. 제가 결혼한 지 33년 되는데, 지금도 신혼 같아요. 
저는 매일매일이 새롭고, 한 번도 지루한 적이 없고요. 매일매일이 신혼 같아요. 
왜요? 사랑이 원래 그런 거예요. 

제가 궁금해가지고 집사람한테도 물어봤어요. 
'신혼 때가 좋아, 지금이 좋아?' 
지금이 훨씬 좋대요. 

이게 뭐예요? 사랑은 원래 그런 거예요. 
사랑은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람은 그냥 한결 같아요.

영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10년 뒤나 100년 뒤나 한결 같아요.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롭고 첫날 같고 이게 영입니다.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알지 못하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건 바람피는 겁니다. 

사람들은 여러분 지적 만족을, 영적 만족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고, 새로운 신학을 추구하고, 
알지 못하던 어떤 것들을 추구하고... 
이 지적인 만족을, 영적인 만족이라고 착각합니다. 

또 사람들은 감정의 만족을, 영적인 만족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어디서 성령의 역사가 있다 그러면, 거기로 우르르 쫓아가고 
어디서 치유가 있고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면, 거기로 우르르 쫓아가고 하는 게 뭐예요? 
대부분은 그냥 감정적인 만족이에요. 

물론 한두 번은 신기해서 가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계속 습관적으로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습관적으로 쫓아다니는 사람들! 뭐예요? 
자기 감정을 만족시키려는 거지, 영적인 만족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그 집회 가면 그런 거 있잖아요. 한 번 와왕 울고 나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고, 
또 무슨 팍 쓰러지고 나면, 뭐라도 된 것 같고... 이게 다 뭐예요? 
감정의 만족을 추구하는 거죠. 

▲그렇다면 진짜 영적인 사람은 어떻습니까? 
13:3~4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이게 진짜 영적인 거라는 거예요. 
진짜 영적인 게 뭐라고요? 

첫째,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이게 영적인 겁니다. 

 

둘째,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예요. 
'그를 경외하며, 그를 따르며, 그를 청종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 
이게 영적인 거라는 거예요. 

셋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하나님께 헌신하며, 드리며,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것, 

넷째,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내 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세상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이게 영적인 거라는 거예요. 

 알지 못하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는 것을 신실하게 지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을 진짜 믿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늘 새로운 것을 찾아, 지적 만족, 감정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영적인 사람은, 알지 못하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신실하게 지키는 거예요. 아는 것을 신실하게 지키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인 수도사들이 정의했던 영성의 규정이 뭔지 아세요.? 

영적인 사람의 정의가 뭐냐면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게 중세 수도사들이 정의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영의 속성이니까요. 정확히 꿰뚫어본 거거든요. 
혼은 그거 못해요. 
똑같은 거를 두 번, 세 번, 1년, 10년 하면 지루해져요. 돌아버려요. 
그래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이게 혼이에요. 

그런데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 영성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그 똑같은 것을 평생 반복할 수 있는 거예요. 평생! 
그게 뭐예요? 성령의 사람이에요. 성령의 생활이에요.

이게 수도사들이 정의했던 영성의 데피니션입니다. 
영의 속성 때문에 그래요. 

다니엘이 그 예표 아닙니까?

다니엘이 여러분 10대 때 뜻을 정해서 하루 3번씩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이거를 80년을 지속합니다.

10대 때도, 20대 때도,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 계속...

 

사자 굴에 집어넣고 풀무불에 집어넣어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지속해요.

와,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그게 영이에요. 그게 혼으로는 불가능해요.

이게 성령의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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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한 사람의 성도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가, 
그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펀 글)

여러분 오늘 바울을 말린 건, 마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그동안 괴롭혀왔던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바울을 말린 건, 바울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심지어 바울의 일행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같이 말렸다고 나옵니다. 그 '우리' 안에는 누가도 포함되었습니다. :12
바울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들이,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막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슷한 사실이, 마16:21~22절에도 나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길을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을 말린 것처럼 
정확히 오버랩(겹쳐짐)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망치려고 예수님의 길을 반대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길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십시오. 
본문의 제자들은 누구보다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말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동안에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13

그만큼 그들의 만류는, 눈물어린 사랑의 권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만류는, 바울의 편에서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큰 방해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내 삶을 가장 방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가 될 수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에 
때로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 자신을 돌아 봅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자녀가 둘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쩌면 가장 큰 장애물은
아버지인 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 아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이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어느 날 첫째가 자라서 저에게 찾아와서 
'아버지, 저는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떠나겠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겠습니다...' 

'그때 저는 사랑하는 자녀를 순수하게 보내줄 수 있을까? 
아멘! 하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이 자녀를 드릴 수 있을까?' 

어쩌면 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선교는 나이 들어도 갈 수 있으니까, 회사 생활을 더 해 보렴! 
아니면 선교라는 게 꼭 선교사가 되는 것만 선교가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도 있단다. 
보내는 선교사도 선교사일 수 있으니, 물질로 후원하는 것도 기도해 보렴!'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자녀는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마음이, 제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제가, 
자녀의 신앙에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제가, 우리 자녀가 하나님 앞에 훈련을 받고 
신앙이 자라가는데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기도합니다. 하나님보다 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도록,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데, 저와 아내가 장애물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저와 아내가 이 아이들의 신앙을 망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두 자녀들에게 필요하다면, 주님이 인생의 광야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그 기도를 우리 자녀들은 모르고 있겠죠. 

그렇게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이 아이들이 고백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단순히 목사의 자녀의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 살아가는 인생이 될 수 있다면 
광야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자녀들도 때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자녀들이, 저와 제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빚어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반대로 제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때론 제 아이들이, 제게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그 선택을 가장 주저하게 하는 존재가, 제 자녀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 아이들이 힘들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 걱정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는 선택을 머뭇거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 아내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는 선택을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가장 큰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13절의 바울의 답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여러분, 이 13절의 고백을, 여러분의 가훈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