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렘17장 마음이 치료 받은 예레미야

LNCK 2024. 9. 19. 18:49

 

마음이 치료 받은 예레미야      렘17:1~18        설교 두 편 정리

 

서론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그의 설교의 대부분은 예언입니다.

한 개인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유다민족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렘17장 전반부는 민족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 각 개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언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인 말씀으로

예레미야서 전체에서도 대단히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시편 1편의 내용과 대동소이합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 얘기가 먼저 나오고, 연이어 악인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저주받은 자가 먼저 나오고, 복 받은 자가 뒤를 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1. 마음이 저주 받은 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본문의 메시지를 가장 빨리 파악하는 방법은

본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본문 렘17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를 살펴보면 “마음”이라는 단어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7:9

우리가 요절로 외우는 구절도, 본문에 나오지요.

 

▲1절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The sin of Judah is written with a pen of iron, and with the point of a diamond KJV

 

금강석(다이아몬드)는 강도가 강한 금속으로

유리를 자르는 기계나 땅굴을 파는 기계 끝부분에 다이아몬드를 달아놓습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가 돌아가면, 바위와 같은 딱딱한 물질이 깨집니다.

 

이런 다이아몬드 금강석 끝 철필로, 마음 판에 죄악이 새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금강석 철필로 기록해야할 만큼, 사람의 마음 판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는 거죠.

 

그러므로 유다백성들의 죄는 스스로 고칠 수가 없는 죄인 것입니다.

마음 판에 죄가 기록되었고, 그들의 제단 뿔에도 죄가 기록되었습니다.

 

번제단에는 뿔이 있는 것인데, 그 뿔에도 죄가 기록되었습니다.

‘제단 뿔’은 번제단에 달린 뿔 모양을 뜻하는 데,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상징합니다.

그 재질은 놋입니다. 제단 전체가 놋이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말씀에 의하면

제단 네 모퉁이 위에 네 개의 뿔을 만들라고 하셨죠(출27:1-8).

 

제단의 네 뿔을 잡는 것은 용서와 보호를 요청하는 행위였습니다.

백성들은 번제단에서 뿔을 붙잡고서 (마치 손잡이처럼 되어있죠) 희생제물을 드리며,

자신들의 죄를 고하고, 사죄의 은총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악된 유다 백성들은 겉으로는 죄를 고백하고 있지만,

형식에 치우친 말과 행동일 뿐 진정한 회개가 아니기에

그들이 고백한 죄악은, 사죄의 자리(제단 뿔)에서 사죄 받기 보다는,

오히려 그대로 제단 뿔에 새겨지듯, 하나님 앞에 새겨져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처럼 예레미야 17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갖고 계시느냐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나 학벌이나 재물에 관심을 갖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느냐?

마음이 여호와께 가까워졌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거짓 종교는 외관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온갖 금으로 장식합니다.

외관이 번쩍번쩍 화려하고 향냄새가 나듯, 보고 만지고 먹고 느끼는 감각적이고

외관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이 거짓종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저주받은 자의 문제는 마음에 죄악이 기록되어있되

그 죄악이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듯이 죄악이 습관화되고 체질화되어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사람과 혈육은 똑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강조법이죠.

사람은 즉, 혈육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피가 더러워지고 육체가 병들게 되면 사라지고

말 그대로 연약한 혈육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을 믿고 혈육으로 권력을 삼는다”는 것은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인데

그러면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게 된다는 거죠.

 

그러므로 사람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만든 지혜, 철학, 종교, 또 자기 자신의 능력, 이런 것들을 의지하고

그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 부류에 속하게 됩니다.

 

▲6절은, 이 저주받은 사람에 대해 대단히 무서운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저주받은 자는 사막에 거하는 떨기나무와 같다고 그랬습니다.

떨기나무가 사는 곳은 사막입니다.

 

광야 간조한 곳은 물기, 물이, 강이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건건한 땅은 영어로 “salt land” 즉, 소금 땅을 말합니다.

 

미국 동부에서 서부 LA 가까이 오게 되면 유타 주나 네바다 주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때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막지대가 보입니다. 집도 없고 울창한 숲도 없습니다.

초록 색깔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끔 독수리가 날아다닐 뿐입니다.

식물이라야 생존을 위해서 투쟁하는 선인장 종류나 떨기나무 종류밖에는 없습니다.

 

강도 보이지 않습니다. 비가 와도 곧 물이 말라버려 물이 흘러간 자국만 남아있습니다.

이런 땅을 ‘건건한 땅’이라고 합니다. 외롭고 괴롭고 고달픈 곳입니다.

 

‘떨기나무’는 이런 곳에서 생존 자체를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8절 ‘물가에 심긴 나무’와 비교

나무에 윤기도 열매도 꽃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라봐야 그 재목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형편없는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주받은 자는 떨기나무와 같다는 무서운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 중반에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이 떨기나무 인생의 슬픈 미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현세에도 소망이 없고 내세에도 좋은 것이 오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슬픈 미래입니까?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가면 좋은 일도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노래를 하지만

저주 받은 자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세월도 아무 약효가 없고 세월이 지나가도 좋은 것을 볼 수 없다는

즉, 아무소용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막의 떨기나무 같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9~10절에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사람의 마음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혹은 우리 몸의 어떤 지체보다도 가장 거짓된 것이요

가장 속이는(deceitful)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합니다. 또 하나님을 마귀라 하고 마귀를 하나님이라 합니다.

진리를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진리라 합니다.

전쟁을 평화라 하고, 평화를 전쟁이라 합니다.

저주를 축복이라 하고, 축복을 저주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어서도 안되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마음의 부패함을 알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을 살피시고 우리 마음에 있는 악과 죄를 드러내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인류에 속해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가 없이 이처럼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부패한 마음을 스스로 감찰하거나 스스로 고치거나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인류의 대 문제는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연 상태에서는 모두 다

“저주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저주의 길에서 축복의 길로 돌아서는 것은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됩니다.

 

몸이 여기 교회에 와서 앉아 있어도, 마음으로는 바뀌지 않았다면 소용없습니다.

양심의 악을 깨닫고 회개하고 마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성경적인 구원입니다.

이런 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천국을 볼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의지로 자기 마음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인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1절에도 저주받은 인생에 대한 또다른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저주 받은 마음을 가진 인생은, 일평생 ‘돈’만 추구하며 삽니다.

 

본문 11절에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저주 받은 인생은 자고새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자고새는 메추라기와 비슷하되 메추라기보다는 조금 덩치가 큽니다.

그런데 이 자고새는 자기가 알을 낳지 않았는데, 남의 둥지에 가서 알을 훔쳐다가

자기가 알을 낳은 것처럼 품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고새는 알이 없어도 남의 알이라도 훔쳐 품습니다.

남의 둥지에서 알을 가져다가 품기는 품지만, 그것은 자기가 낳은 알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자의 쌓은 부는, 대부분 정직한 부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라” 했습니다.

불의로 치부한 부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은 자고새와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불의하게 모은 재물은

그만큼 쉽게 허비되며 상실되어지고 만다는 데에 있습니다(잠 23:5 참조).

 

자고새가 남의 새의 알을 갖다 품고 있다가 새가 부화하여 깨어납니다.

그런데 그 새끼를 보니 자기 새끼가 아닙니다. 새끼가 보니 자기 어미도 아닙니다.

생긴 게 다릅니다.

그래서 “여기는 우리 집도 아니고 이 새는 우리 어미도 아니네.”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은 것처럼 저주받은 자가 불의로 치부한 부를 깔고 있다 할지라도

중년이 되면 다 날아가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는 인생을 가리켜 ‘자고새 인생’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생이 되지 않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절에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떨기나무 같은 인생, 자고새 인생이 없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모두 다 ‘마음’의 기초 위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2. 마음이 복 받은 자

 

여러분, 복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고대광실에 살아도...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분노한다면... 그게 무슨 복입니까?

마음이 먼저 복을 받는 것이, 진정한 복인 것입니다.

 

▲7절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간단하고 단순하고 명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은 복을 주십니다.

 

▲8절에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복 받은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도 원래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막에서 떨기나무처럼 태어나 그렇게 떨기나무처럼 자라나고 있던 중

어느 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그를 뽑아 물가로 옮겨 심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trans-planted)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물가로 이식된 것입니다.

 

*‘심다 (샤텔 plant)’는 심다도 되고, 옮겨 심다(transplant)는 뜻도 됩니다.

원래 식물이나 나무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심기도 하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물가로 옮겨 놓으셨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께 복 받은 인생은 하나님이 물가로 옮겨놓으신 인생이 된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뿌리를 물가에 뻗치고 있기 때문에, 가뭄이 와도 아무 염려 없습니다.

또 더위가 와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잎이 언제나 청청하고 열매가 끊이지 않고

사시사철 열매가 달려있는 나무와 같습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여유 있으며 풍성한 모습입니까?

우리 모두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 같은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이 치료 받은 예레미야

 

지금까지 즉 17:1~13절까지,

-저주 받은 마음과

-물가에 심기운 나무 같은 복된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물가에 심기운 나무’의 예는 어떤 사람인가요?

본문의 예레미야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볼 때, ‘물가에 심겨진 나무’는

그저 가만히 있어도 만사형통한.. 그런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사면초가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하나님께 꼭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수액을, 늘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아니라,

물론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예레미야처럼 사방에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그 어려움으로 인하여, 주님께 더욱 꼭 붙어 있게 되니,

그게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마음이 부패한 것을 알았으니, 내 마음을 나도 고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나를 고쳐 주소서.” 이것이 바로 14절의 기도입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내 마음이 부패했고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내 마음을 고치시는 분이시니 나를 고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다윗왕도 언제나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시편 26:2절에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내 마음을 검토해 보시고(examine my heart) 내 마음을 고쳐주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저주받느냐 축복받느냐 하는 관건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15절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여기서 예레미야는 예언 성취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대라고 조소하는 자들의 말을 인용합니다.

 

예레미야가 남유다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다.. 라고 계속 예언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실제로 20~40년 후에 성취되었거든요.

1차포로는 20년 후에, 3차 포로와 멸망은 40년 후 성취였죠.

 

그러니까 남유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조금 겁을 먹었다가도

1년, 2년, 3년이 지나도, 하나님의 심판이 곧장 시행되지 않는 겁니다.

 

지금 마치 폭풍이 밀려오기 전인 폭풍 전야인데... 날씨는 고요하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핍박합니다.

‘너는 거짓 선지자야!’ 그러면서 잡아 죽이려고 하고, 폭행하고, 감금하고, 때리고 그러면서

‘여호와의 말씀이 언제 이루어지냐? 어디 있냐?’하고 조롱하는 거죠.

 

'네가 예언한 바, 여호와의 위협과 공갈이 성취된 것이 어디 있느뇨?

너는 이 성과 성전이 함께 멸망할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난 증거가 전혀 없다'라는 조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15절입니다.

 

▲16절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그런 동족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자기의 맡은 바 사명을 내어버리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마음이었던 거죠.

'예언을 신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재앙이 속히 닥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나는 오히려 심판을 잠시 연기시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당신의 진리를 선언하였습니다.

나는 선지자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주께서 명령했으므로, 나는 순종했을 뿐입니다.'

 

예레미야가 딜레마에 빠진 거죠.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16

자기는 재앙을 선포, 예언하지만... 그걸 자기 자신도 원하지 않는 바였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신 예언인지라, 그걸 또 입을 닫고 침묵할 수도 없었던 거죠.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6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너 예언은 가짜다, 하나도 성취되지 않았다’ 하고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그런 내용(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하는 예언 사역으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니까,

더욱 딜레마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좋다, 그럼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내가 예언하지 말아 줄게!’

‘그래,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입을 꾹 닫고 있으면... 정말 그게 너희에게 좋은지 두고 보자!’

이런 인간적인 생각이 들 때도 간혹 있었겠죠.

그런데 파숫꾼이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런 인간적 마음, 즉 자기 사명을 내팽개치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고, 신실하게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다짐합니다. :16

 

▲17: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공동번역은 ‘그러니 제발 무섭게 행하시지는 마십시오’

 

예레미야는, 자기가 유다백성들에게 받는 핍박과 괴로움을,

너무 무섭게 하지는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모든 사람이 원치도 않는 예언, 자기 자신도 원치 않는 예언자의 사명을

목자의 심정으로 꿋꿋이 감당하겠사오니,

‘제가 너무 무서운 일은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이어지는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와 잘 연결되죠.

이어지는 18절과도 잘 연결돕니다.

 

▲17: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예레미야는 핍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지자적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백일 하에 진실이 드러나게 될 때까지 대적들의 박해를 멈추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때가 되면, 그가 믿음으로 선포해 왔던 메시지가 단순히 그의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을 분명히 입증될 것입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어떻게 지키실까요?

상하게 하시고, 깨뜨리심으로써, 우리 마음을 지키시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지지 않도록,

강퍅함으로 굳어 지거나, 원망으로 굳어 지거나, 교만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 마음을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기의 상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 앞에 나갔을 때 그 마음이 깨뜨려져요.

 

그게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되는 거고요,

그러면요 위로부터 비가 내려서, 이 건조하고 딱딱하고 메마른 땅에 :6참조

빗물이 스며들어 그 땅을 적시는 것처럼,

우리 깨어진 마음 속에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부어져 머무는 거예요.

 

예레미야처럼, 그래서 다윗의 마음은 늘 상했어요.

반대로 솔로몬의 마음은 늘 쾌락에 젖어 있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계속 깨뜨리시고, 계속 상하게 하셨어요.

본문의 예레미야도, 계속 마음이 상했던 것을 14~18절까지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지키십니까?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환경 속에 우리를 몰아가셔서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고, :14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만드시고 :8

자고새처럼 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11

 

특별히 신약시대는 은혜시대입니다.

은혜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겔36:26절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다가올 은혜의 시대를 예언했습니다.

 

겔11:19절에도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라는 동일한 약속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금강석 끝 철필로 죄가 기록되어 있듯이

죄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죄의 노예 되어 있고 마귀의 노예 되어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자기 의지로 자기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처럼, 깨어짐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와 같은 고난과 환란의 환경속에서도,

오히려 내 마음이 치료받는 기회로 삼아야 되겠습니다.

 

...............................................

 

◑절별 해석  (참고 자료)

 

17: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비문을 새겨 넣는 과정을 엿볼수 있다.

이런 도구로 새기는 대상물은 대개 바위였는데,

여기서는 유다의 죄악을 새겨 넣을 매개물이 그들의 마음 판인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들의 죄악은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본서 후반부에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이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철저한 변화(31:31-34)가 일어나기 전에는 결코 박멸될 수가 없었다.

 

17:2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정형 동사(finite verb)가 없는 관계로, 본절은 해석하기 어렵다.

대략 다음 다음두 가지 정도로 해석이 갈린다.

1) 사람들이 그 자식들을 간절히 생각하듯이, 그들의 우상 제단들을 생각한다(NASB).

2) 유다의 자녀들이, 그 부모들에 의해 우상 숭배에 너무 물들어 있어서,

조그마한 부추김에도 쉽사리 그러한 욕구가 발동된다.

문맥상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이해된다.

 

아세라들이란 아세라 우상을 새긴 목상(木像)들을 가리킨다.

아세라는 고대 근동의 여러 족속, 특히 아모리족과 가나안족이 숭배한 여신으로서

'아낫'(Anath), '아스다롯'(Ashtaroth)과 더불어 가나안의 3대 여신 중 하나였으며,

이스라엘 역사에 일찍부터 등장한 우상이다(신 16:21).

따라서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우상 숭배에 대한 암시가 나타난다 하겠다.

 

17:3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들에 있는 나의 산아' 여기서 예레미야는 유다 땅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데,

거기는 산이 많은 지역이었다(신 3:25).

그리고 예루살렘이 부분적으로 언덕 위에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다 땅의 대표격으로서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7:4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

 

유다 백성이 유업으로 받은 땅을 상실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그 백성은 여호와의 오래 참으심을 무시함으로써 여호와의 분노를 격발시켰던 것이다.

 

17: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본절에는 사람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히브리어가 세 개 등장한다. 이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맨 처음 '사람'으로 번역된 '아담'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인간을 뜻하며,

'육신'으로 번역된 '바사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대조되는 인생의 연약성과, 결함을 시사한다.

마지막의 '사람'에 해당하는 '게베르'는 '강한 자', '용사'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17: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사막의 떨기나무' 가지만 앙상한 작은 관목이나 두송(杜松)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 나무는 메마르고 무익함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 언급되고 있다.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17: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앞의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축복받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여호와를 언약의 주로 인정하며, 그에게 복종한다.

내용상 시 1:3과 다소 유사한데 거기서는 복있는 사람이 물가에 심기워 과실을 맺는 나무에

비유되었으며, 여기에는 보다 더 능동적이고 동적인 차원에서 언급되어 있다.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마음'이란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위의 원천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모든 것보다 거짓되다고 묘사되어 있다.

본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면, '마음은 그 어떤 것보다 더 더럽고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이다.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인간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이 마음을 하나님은 꿰뚫어 보시며 그것을 살피신다.

개역 성경은 9절의 '레브'라는 히브리어를 '마음'으로 번역하였고

본절의 '켈레요트'를 '심장'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둘을 서로 바꾸어 번역해도 무방하겠다.

 

'마음'으로 번역된 '레브'는 앞으로 살펴보았듯이 생각과 의지의 중심으로

그리고 본절의 '켈레요트'는 다소 감정적인 요소의 중심으로 대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두 낱말은 공히 인간의 성품과 인격을 나타내는 내면적 요소들을 총망라할 때 쓰였다.

인간에게는 숨겨진 것이라 하더라도 여호와께는 숨겨진 것일 수가 없는 것이다.

 

17: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여기서는 불의로 재물을 축적하는 자가 자기 알이 아닌 것을 품는 새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비유의 핵심은 불의하게 모은 재물은 그만큼 쉽게 허비되며 상실되어지고 만다는 데에 있다(잠 23:5 참조).

더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모으는 데에만 혈안이 된 자는

이미 영적, 도덕적 파산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하겠다.

 

17: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영화로우신 보좌' 이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 혹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불의로써 치부로 재물이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보좌는 영원하므로 참된 의지처가 된다.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본절에는 이스라엘의 소망(미크웨 이스라엘)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단어가 쓰이고 있다(14:8, 50:7 참조),

이스라엘은 위기의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그들의 희망의 근거로서 여호와께 의지하여야 했다.

따라서 여호와를 배신하는 자들은 스스로 그 희망의 근거를 무너뜨리며 또 언약을 거부하는 셈이 되었다.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여호와를 버리는 자는 결코 참된 영예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먼지 중에 기록될 것이며, 바람이 불기만 하면,

그 이름은 몽땅 날려가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는 그 이름이 영원히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과 대조된다(빌 4:3).

 

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선포된 메시지는 동족들에게 환영받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어서,

때때로 그는 심각한 위기와 고통에 처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했다(15:18).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을 구해내시며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본절에서는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치유와 구원에 관한 예레미야의 갈망은 대적들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서 흔들리고 허물어져 가고 있는 자신의 영적 질병에 대한 치유까지 포함하고 있다 할 것이다.

 

▲예레미야의 한탄

 

17:15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여기서 예레미야는 예언 성취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대라고 조소하는 자들의 말을 인용한다.

이는 또한 '여호와의 위협과 공갈이 성취된 것이 어디 있느뇨?

너는 이 성과 성전이 함께 멸망할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난 증거가 전혀 없다'라는 조롱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된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하고 말았으며,

그 모든 심판 선언들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17: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동족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맡은 바 사명을 내어버리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이런 맥락에서 클라크(Clarke)는 계속 이렇게 지적한다 :

'예언을 신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재앙이 속히 닥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나는 오히려 재판을 잠시 연기시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당신의 진리를 선언하였습니다.

나는 선지자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주께서 명령했으므로, 나는 순종했을 뿐입니다.'

 

한편 '목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로 보고 '', '재앙'의 뜻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RSV, NEB, JB).

그러나 이는 맛소라 본문상의 히브리어에 모음 변화를 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개역성경의 번역이더 나을 것이다(KJV, ASV, NASB, NIV).

 

17: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예레미야는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두려움이 되지 마시고

그의 '피난처'(마하세)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피난처란 말과 이 말의 동사인 '피난하다'(하사)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강렬한 신뢰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로 쓰였다(시 16:1, 사 14:32, 30:2 등 참조). 그리고 하나님이 무죄한 자를

변호할 것이라는 믿음은 애도의 시에서 종종 나타난다(시17장 참조).

 

17: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적에 대한 보복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울부짖고 있는데,

이 같은 형식의 애가는 시편의 애가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한다(20:12, 시 17:13, 14 참조).

 

예레미야는 핍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지자적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백일 하에 진실이 드러나게 될 때까지 대적들의 박해를 멈추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 때가 되면, 그가 믿음으로 선포해 왔던 메시지가 단순히 그의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을 분명히 입증될 것이다.

 

▲안식일에 관하여 

 

17:19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 안식일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예레미야가 서서 외쳤던

'평민의 문'이 어디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맛소라 사본은 이곳을 '백성들의 아들들의 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런 명칭의 문이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고 또 어딘지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베냐민의 문에 대한 필경사의 오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RSV).

이곳을 베냐민 문으로 주장하는 견해는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문서상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

 

아무튼 이 문은 예루살렘 성벽 북쪽에 있었던 것 같으며, 베냐민 영토로 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붙어 있는 '유다왕들의 출입하는 '이란 수식 어구에서

'유다 왕들'은 왕과 그를 보좌하였던 방백들을 포함하는 말인 듯하다.

 

17:20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이 부분은 예레미야가 어떤 특정 계층을 지목하지 않고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된, 말씀을 선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만약 이곳의 내용을 하나 하나 특정인을 향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각 계층을 찾아다니면서 말씀을 선포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자들은 최고위층에서부터 최하위층에까지 이르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다 여호와의 언약 규정 조항에 포함되어 있었다.

 

17:2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짐을 지고 들어오지 말며' 이 구절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절들을 보면,

유다인의 멸망의 근원중에 하나가 안식일 규례의 파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은 결국 희생 제사와 공적 예배에 대한 무성의와 태만으로 이어졌을 것이며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촉발하고 말았을 것이다.

한편,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명령은 이미 십계명에 포함되어 있었던 명령이다(출 20:8-11, 신5:12-15).

 

17: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십계명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었던 안식일 율법규례

에 대한 표현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안식일에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은 출20:9, 10과 신5:13, 14에 볼 수 있으며,

또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는 명령은 출 20:8, 11과 신 5:12에서 보인다.

 

17:23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은 목을 곧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뿐만 아니라 현 세대의 유다 민족 역시

여호와의 교훈을 듣지 않고 순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완악성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깊이
뿌리 박힌 고질적 병패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실례라 할 수 있겠다.

 

17: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지라도 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여기서는 언약 준수를 통한 축복이 '너희가 만일 청종하면'이라는 조건절로 도입되고 있다.

 

또한 이 조건절은 '너희가 삼가 하면'이라는 강조형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두 가지 조건의 내용은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면'이란 조건과

'안식일을 거룩히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이다.

 

얼핏보면, 예레미야는 이 민족의 생존이 안식일 율법에 대한 문자적 준수 여부에

조건적으로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런 맥락에서 본문에는 포로 후기 유다 종교가 강조하였던

안식일 문제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느 13:15-22 참조)

 

그러나 이 문맥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쳐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예레미야는 다른 어떤 선지자에 못지 않게 고대부터의 언약 전승과 밀접한 위치에 서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마음에 새겨질 새 언약에 대해 말했을 때도

그는 여호와의 '법'을 생각하고 있었다(31:33).

 

현 문맥에서는 다만, 십계명의 한 계명을 강조하였을 뿐이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너희가 진실로(삼가) 언약을 준수하면'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7:23-26, 11:6-8 참조).

 

그러므로 이것은 언약 요구 사항의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안식일과 같은 언약 요구 사항들 중의 하나를 도전적이고 공개적으로 파기하는 행위는

언약 전체를 거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17:25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여기서는 조건절(24절)에 대한 귀결절이 독특한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유다의 주권이 회복될 것이고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들이 또한 회복될 것이며,

성전의 의식들이 회복될 것이다. 이러한 회복은 여호와께서 순종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언약의 축복 사항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신 28:1-14 참조).

 

17:26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겝으로부터 와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오려니와

 

여호와로부터 주어지는 축복의 또 다른 양상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이 백성이 온 땅에서, 즉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지역과 서쪽으로 평지,

그리고 산악지대에서부터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앞절과 결부에서 보면, 다윗 왕가와 성전,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 거명되었는데,

이 세 가지 요소는 언약 백성의 종교적, 정치적 존립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언약의 주께 충성을 다하고 언약의 요구 사항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17:27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여기서는 앞의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반드시 언약의 저주 조항이 발동되고 말 것이라는 내용이 그것인데,

이러한 저주는 궁전을 사르게 될 끌 수 없는 불로 상징되었다(49:27, 암1:3-2:1).

 

본절에는 이렇게 될 경우 왕좌나 성전, 그리고 성(城)도 다 태워져 없어질 것이라는

암시도 들어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