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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생명력, 모든 것을 바꾼다

LNCK 2024. 9. 2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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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생명력, 모든 것을 바꾼다 - YouTube

 

복음의 생명력, 모든 것을 바꾼다    행17:1~15      2024.09.08.

◑복음의 통로가 된 '비아 에그나티아'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를, 세계인들이 경이롭게 여깁니다. 
그 중에서 한국 현대 경제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꼽아보라면 
아마 이승만 대통령 때의 농지개혁, 
그리고 포항제철의 설립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게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입니다. 
당시로서는 '차도 별로 없는 나라에 이게 필요할까?' 
감당하기도 힘들고 상상도 잘 안되는 프로젝트였지만, 
결국에는 한국경제의 대동맥이 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에 해당하는 로마제국의 대동맥은 
비아 에그나티아 Via Egnacia 라는 도로였습니다. 주전 2세기에 건설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탄불에서 불가리아까지 긴 지역을 
당시로 말하면 거의 고속도로같이 빨리, 중앙분리대까지 있던 구역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자를 실어 나르고 사람들이 교류했던, 경제의 대동맥일 뿐 아니라 
사실 이 도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군사적 기능이었습니다. 

어디서 전쟁이 나거나 반란이 일어나면, 사실 군대가 한두 시간만 늦게 도착해도,
나라의 운명이 갈릴 때가 많잖아요. 군사도로로 기능을 많이 했습니다. 

아래는 빌립보 사진입니다. 중간에 큰 길이 보이시죠? 
여기가 비아 에그나티아입니다. 빌립보를 정중앙으로 관통합니다. 

 


지금도 여기 가면, '에그나티아 가도' 라는 표지석이 남아있고요. (위 사진)
표지석 위에는 헬라어이고 밑에는 라틴어입니다. 

 


빌립보 근처에 가면, 이렇게 당시 로마시대 때의 길이 그대로 일부 남아 있습니다. 
이 전체 길은 지금도 현대의 고속도로로 똑같은 이름으로 
'에그나치아 호도스'라는 이름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호도스 : 헬라어, 길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에그네티아 가도를 따라서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빌리포도 이 노상에 있었고, 여기서 서쪽으로 쭉 가면 
암비볼리를 지나서 대살로니가가 있었습니다. 

로마가 제국을 위해서 특별히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만든 이 길이, 
바울에 의해서 복음전도의 길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성을 쌓은 사람들' vs '길을 만든 사람들' 

중국이 최전성기 때 말리장성을 쌓았죠. 
그래서 있는 것을 지키려 하는 마인드셋과,  *중국
길을 만들어서 세계로 뻗어나가고 교류를 하는 마인드셋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로마
'세계가 어느 쪽의 것이 되겠느냐?' 하는 질문을 하지요. 

요11:47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위 발언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둔 것이었죠. 
어느 날 갑자기 예수가 유대사회에 등장하니까, 사회가 술렁거립니다. 
이때 '야 이러다가 우리 큰일난다.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길 수 있겠다'

사실 그때,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옹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한 조각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모든 새로운 가능성, 꿈틀대는 변화의 기운을 다 눌러버리려는 태도' 
그것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마인드셋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땅 끝까지 가라!' 
땅끝까지 가면,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을 포괄하면서 땅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난 봄에 우리가 이런 포스터를 만들었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기억하십니까? 
많은 분들이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실크로드가 가스풀로드가 되는 꿈을 우리가 함께 꾸어야 됩니다. 

또 하나의 도전이 있습니다. 
한국 경제사에서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때 온라인 시스템 인프라를 많이 구축해 놓은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날 한국 경제가 이만큼 올 수 있었다'는 평가들을 많이 합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이 디지털 세계가 중요해질 겁니다. 

물론 온라인 범죄도 있고요. 여러가지 부작용이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현장이 되어야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온/오프라인과, SNS와, 메타버스와, 생성형 AI 세계에 
이르기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하는 말을 제가 책에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중요한 선교적 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런 자세를 가지고, 빌립보에도 갔고, 데살로니가에도 갔습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사역

데살로니가는 당시에 마게도니아 지역의 수도였고, 
지금도 그리스에 가면 아테네에 이어, 데살로니가는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여동생의 이름이 데살로니키 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지었고요. 
지금도 가면 그 중심가 해변에 거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을 볼 수 있는 도시입니다. 

여기 데살로니가에서의 사역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17:1~3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메시아다' 하는 일관된 메시지였습니다. 
장소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의 회당이었고, 
'세 안식일에' 그러니까 이 데살로니가의 사역이 불과 3주 남짓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의 사역이었습니다. 

▲'뜻을 풀어'  17:3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이 말을 영어성경을 보면 대부분은 explain이라고 해놨지만 
open 이라고 해놓은 성경들이 있습니다. 

헬라어 '디아노이고'는 직역하면 'open, 연다' 라는 말입니다. 
의역하면 '감추어져 있던, 모르고 있던 그 말씀의 뜻을 설명해 준다'는 뜻이죠.

누가복음에서 부활 후에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두 제자들에게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눅24:45, 디아노이고

빌립보에서도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행16:14, 디아노이고 
똑같은 '열어서' 라는 말입니다.  *디아노이고
이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바울이 이어서 하는 거예요. 

이때 엠마오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 임을 깨닫고 나서 이들이 한 말이 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직역하면 '성경 말씀을 열어주신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열어주시고, 우리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핍박합니다. 

바울에 대해 악선전을 하고요. 사람들을 선동하고요. 폭력을 사용합니다. 
불과 3주 정도의 짧은 데살로니가 사역을 하다가, 중간에 끊겨 버립니다. 

10절에 '밤의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전도도 그렇습니다. 공산국 국가나 전도가 막힌 많은 나라들에 
지금도 감옥에 갇힌 사람들, 핍박받는 선교사님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선교지에 별별 일들이 다 있어요. 바울의 후예들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야반도주해야 했던 바울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피했으니 다행이다' 이런 느낌이었다기 보다는
여러분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말씀을 전해보면 그렇습니다. 그 중에는 말씀을 열심히 듣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밖에서 핍박하고 언제 그냥 공안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라도
말씀을 귀담아 듣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해요. 

예전에 전도하면 감시받고 막 그런 살벌한 나라에 가서 집회를 하는데, 

첫날 저녁에 온 학생 하나가 조그만 여자애였는데,
엄마에게 계속 집회에 가고 싶다 그러는 거예요. 

'야 너 낮에는 학교 가야 되잖아, 공부해야지!' 
'공부는 지나고 나서 따라잡으면 되는데, 이 목사님 떠나시면 말씀을 못 듣잖아요.' 
그래서 부모를 설득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하고요. 
그래서 집회를 끝까지 참석했습니다. 

그 후에 이 나라에 선교사님들은 다 쫓겨났고
그런 집회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말을 들으니까, 이 아이가 믿음이 많이 자라서
또 그 나라에서 최고의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감사하다 하는 말을 선교사님께 전해왔습니다. 

여러분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다고 공부하는 거 아닙니다. 
공부도 동기가 필요하고, 인생의 목표와 의미가 있어야 됩니다. 

인생에 모든 게 때가 있어요. 공부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 듣고 은혜 받는 것도, 때가 있어요. 

지금 안 해도, 나중에 대학 가서 시간 있고, 그럴 때 교회 가면 되지... 
아니에요. 여러분 교회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다시 지금처럼 아이들의 마음이 열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입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회당사역, 그 핍박받는 와중에도 
말씀을 들으면서 눈이 반짝반짝하는 소년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 그 친구, 참 열심히 말씀을 들었는데... 조금만 더 가르쳤으면 좋았을 텐데...' 
아마 데살로니가를 떠나고 나서도, 바울은 그 소년, 그 사람의 얼굴이 계속 마음에 남았을 거예요.

혹은 가정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와서 펑펑 울던 아주머니, 
남편에게 맞았는지 시퍼런 눈으로 와가지고, 연신 눈물을 훔치던 어떤 여자분, 

어떤 아저씨는 모임에 와가지고 팔짱을 끼고 '어떻게 하나 보자' 
그런데 계속 말씀을 들으면서.. 팔짱이 풀리고, 무장이 해제되고, 자세가 녹아집니다. 
그렇게 시니컬한 표정으로 왔다가, 나중에 기도할 때는 가장 간절하게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야 저렇게 힘들었구나.. 하나님이 그 마음의 신음에 응답해 주셨구나' 

 

빌립보에서 바울은,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을 겨우 말려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뭐라 그랬습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자살하려던 사람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왜 그런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죽고 싶은 사람, 죽지 못해 사는 사람, 세상에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각기 다른 사연으로, 다른 표정으로 회당에 와가지고요, 
사도 바울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하나님이 그 뜻을 열어주실 때에, 
마음을 열고 듣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그 얼굴, 얼굴들... 

그런데 중간에 사역이 끊겨서, 야반도주를 해야 하다니... 여러분 바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했는가요? 

▲(베뢰아에서)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항구)까지 가게 하니라'  :14
그렇게 떠나면서도 실라와 디모데는 남겨두었습니다. 왜 남겨두었을까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계속할 지 궁금한 거예요. 

'그 아이들, 그 어른들... 이제 믿음이 막 뿌리 내리려고 그러는데 
막 이 핍박이 불어닥쳐가지고 어떡하나?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줘야 되겠다..'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거쳐서) 고린도에 가 있는데, 
이제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로 옵니다. 와서 만납니다. 

바울은 자기가 데살로니가를 떠난 이후에,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궁금했었는데, 
실라와 디모데로부터, 좋은 소식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 입니다. 
살전1:9절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이 말은,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대부분 이방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라면 '우상을 버리고' 이런 말을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못 믿을 수는 있지만, 우상을 섬기지는 않잖아요. *바벨론 포로 교훈 때문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했잖아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물에 콩나듯이 있는 이방인들, 그들의 친구들, 그 주위 사람들, 
어떻게 복음을 한 다리 건너서 들었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거기에 교회가 생긴 거예요.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 그런 그림이 떠오릅니다. 
여러분 가끔씩 주차장 이런 데 가면, 콘크리트 바닥인데 
중간에 약간 틈이 있는데 흙이 있어서, 거기에 들꽃이 핀 것을 본 적 있으시죠?

어떻게 그 좁은 틈바구니 사이에, 씨가 들어가서, 꽃이 피우는지요?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환란 가운데 부흥하는 교회
그 교회가 어떤 교회였을까요? 
살전1:5~7절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바울이 전도하다가 도망갔는데요.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교회가 세워질까?' 했는데요. 
교회가 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가 생겼습니다. 1:7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거예요. 1:7

여러분 환란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너무 머리가 좋아져가지고 분석은 잘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가 많이 성장했다 그러면, 
그 주위에 무슨 아파트 단지가 크게 들어왔겠지... 

어디 청년부가 잘 됐다면, 거기 대학교가 많이 생겼겠지? 
젊은이들이 직장이 가깝기 때문에, 그 지역에 많이 모였겠지? 

뭐 교회가 잘 된다 그러면, '누가 뭐 헌금을 많이 하나 보다' 
여러분 그렇게 좋은 환경과 인간적인 조건만 따지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런 등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교회가 잘 됐으면, 잘 될 만한 인간적인 조건이 있겠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 역사를 보면, 그 반대인 경우가 엄청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데, 교회는 부흥하는 거예요. 
핍박 받을 때 더 열심히 모이고, 신앙이 더 단단해집니다. 

지금 한국교회도 돌이켜보면, 진짜 부흥은 말씀이 귀할 때였습니다. 
부흥회 한다 그러면, 두세 시간 걸어서 다닐 때가 있었잖아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환란 가운데에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 그랬습니다. 1:6
환란도 있고, 기쁨도 있는 거예요. 

여러분 삶은 안 그렇습니까? 
문제도 있고, 기쁨도 있는 거예요. 안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환란이 있냐/ 없냐가 아니에요. 
환란과 기쁨 중에, 무엇이 더 큰가? (기쁨이 더 큽니다)

우리의 삶이 그래요. 여러분 아무런 문제도 없고, 전혀 걱정거리 없는 
그런 가정은 없습니다. 그런 교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기쁨이 더 크면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기도가 그럴 수 있어요. 
'하나님 이것 좀 없애주세요. 이 고통 좀 끝내주세요.' 

그것보다 더 좋은 기도는 '하나님 이것을 능히 이길 성령의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거예요. 

천하를 어지럽히고 선동하는 사람은, 오히려 바울의 핍박자들

사람들이 핍박했는데, 어떻게 핍박했는가요? 

행17:6~7절 '(바울을)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바울이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 ... 사실은 자신들이 어지럽게 하죠. 
이 도시를 혼란스럽게 하고, 남의 집에 난입해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다른 임금 곧 예수' 
달리 번역하면 '예수라고 불리는 다른 왕이 있다 라고 전한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고발을 하는 거예요. 
이 말은 1차적으로 거짓입니다. 

어떤 면에서 거짓인가 하면, 로마 황제와 예수를 나란히 놓고, 
예수가 로마 황제한테 '너 비켜' 하면서 다른 나라를 세우는.. 
정권을 타도하겠다는 그런 식의 혁명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말은 거짓이죠. 

그러나 다른 면에서 '예수라고 불리는 다른 왕이 있다'는 말은, 일면 진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왕이시고,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거죠. 

여러분 '예수가 왕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다'라는 비판은
예수님 살아계실 때도 있었습니다.  눅23:1~5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러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왕이라고 사람들이 인식하고, 스스로도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이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는 거예요. 
당시 로마 총독의 제1의 의무는 '관할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역을 예방'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정보를 풀 가동해서, 위험한 사람들,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 
수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정보 조직을 풀 가동해서 의심하고 색출하는 게 
직업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빌라도 총독이 자기 앞에서 '내가 왕이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고발자들은 '저 사람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그러고 
빌라도는 '아니다, 위험하지 않다' 그럽니다. 누가 맞을까요? 

예수님이 그 다음에 보면 순순히 십자가에 달리시잖아요. 무력하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이 되는 겁니다. 그렇죠? 

군사를 일으켜서 폭력으로 혁명을 선동한다는 의미에서의 
다른 왕이 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하를 소란스럽게 한다' 그러는데요. 
바울은 조용한 사람이에요. 자기를 핍박하면 당하는 거예요. 때리면 맞는 거예요. 

천하를 어지럽히고 선동하는 사람은, 오히려 핍박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 그 통치는 어떻게 임하는가요? 

▲'마음이 열려 있는 베뢰아 사람들'
17:11~12절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이 말만 들으면, 우리 감각으로는 
그들이 집에 가서 개인적으로 큐티하고 묵상하고 공부했다..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책이 대단히 귀했고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성경을 낭독하고,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성경을 날마다 공부했다' 라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베뢰아 사람들은 더 너그러워서' 
옛날 성경에는 '신사적이어서'로 번역했는데, 
영어성경에는 '노블 캐릭터, 또는 noble minded' 즉 '고상한 성품'으로 번역했습니다.

종합하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너그러운, 고상한, 생각이 열려 있는... 그런 뜻입니다. 
'너그러운'이라는 게 '생각이 열려있는' 이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도 존중할 줄 알고, 
내 생각도 틀렸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줄 알았다는 겁니다. 

이번 추석에 다들 긴장합니다. 이 경제난에 의료대란까지, 
여러분 이 사태 자체도 문제지만,
한국 사회가 앞으로 어떤 갈등이 생기면, 
사회가 마음을 모아서 같이 풀 수 있는 여지가 있을까요?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어느 사회나 의견 차이에 있기 마련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마음이 너그러워서) 

한 발씩 양보해서 대의를 향해서 가야 되는데 너무 경직되어 있어요. 

내 생각에는 그게 아니어도 '일단 들어보자, 듣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해법을 찾아보자' 
그래서 조금 바꾸기도 하고요. 타협하기도 하고요. 
그게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처럼 노블한 거고 고상한 거예요. 
그게 여러분 품격 있는 겁니다. 

품격이 뭐예요? 명품 옷을 입고, 프랑스 와인에, 이탈리아 커피에, 
클래식 음악에... 그게 품격이 아니에요. 진정한 인생의 품격은, 너그러운 거예요. 
마음이 열려있는 거예요. 

▲안 될 것 같지만, 되는 '복음 전파' .. 복음의 생명력 때문
여기서 또 하나 더 중요한 초점은, 
'베뢰아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본받자'라는 점보다는, 
복음의 본질을 말하는 겁니다. 
차분히 들어보면, 바뀔 거라는 거죠. 

여러분 대부분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보지도 않고, 말씀을 들어보지도 않고 
거부한다는 거예요. 안티기독교인들, 그들은
대부분 인터넷에,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이런저런 말들 들어보고 그냥 옮기는 거예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러워서' 
들어보고 생각해보았다 라는 거예요. 그저 남의 말, 헛 소문을 퍼나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말씀에 그런 거 있잖아요. 
'천국은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가서 밭에 씨를 뿌릴 때,
씨를 흩어서 뿌리는 거예요. 하나는 길가에 떨어지고, 하나는 돌밭에 떨어지고, 
하나는 가시밭에 떨어지고... 제대로 되는 게 없어요. 
그런데 그 중에는 좋은 밭에 떨어지는 씨앗도 있었다는 거죠.

이게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가는 곳마다 핍박하잖아요.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안 믿잖아요. 밤에 야반 도주해야 되잖아요. 
말씀 전하다가 돌에 맞잖아요. 될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 그 중에 어떻게 하나가 좋은 땅에 떨어졌는데,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할렐루야! 
그게 여러분 교회의 역사예요. 그게 여러분 복음의 역사예요. 

여러분 어떤 땅이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씨앗이에요. 
복음이 갖는 생명력입니다. 

이 복음이라는 씨앗이 갖는 생명력에, 우리가 주목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낯선 자를 환대하지 못하는 핍박자들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왕이시다 그랬습니다. 그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의 나라는 폭력으로, '너 나와, 비켜, 내가 왕할게!' 그런 나라가 아니에요. 
말씀이 심겨지는 거죠. 
말씀이 심겨진 곳에 생명이 자라나고, 그 생명이 사람을 바꾸고 온 세상을 바꿉니다. 

여러분 바뀌는 거예요. 나라가 바뀌고, 왕이 바뀌고, 제국이 되고, 대통령이 바뀌어도
지나가보면 사회가 별로 안 바뀌어요. 조금만 바뀌어요. 

그러나 예수가 왕이 되면.. 전부 다 바뀝니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의 목표가 바뀌고, 가정생활의 패턴이 바뀌고요. 
말도 바뀌고, 표정까지도 바뀌는 거예요. 믿습니까? 모든 게 바뀌는 거예요. 
마침내 세상도 바뀌는 겁니다. 어떻게 바뀌는가요? 

본문의 데살로니가의 핍박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고소하는 내용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17:7

폭도들이 바울을 잡으러 찾아다니는데, 바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먼데로 복음을 전하러 갔다 봅니다.

그래서 대신에 야손(영어로 제이슨)을 붙잡았어요.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맞아들인 유대인이죠.

그를 핍박해서 옥에 가두는데, 옥에 가두는 죄 정도가 되려면 
뭔가 좀 그럴듯한 죄목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죄목이 너무 간단해요.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나그네에게 문을 열어줬다, 환대했다'는 거예요. 

환대가 죄가 되는 사회, 이건 너그럽지 못한 거죠. 기억하십니까? 
성을 쌓는 사람들이 있고,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는 사람이 있고요.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쪽입니까? 
열심히 세상을 향해서 진취적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거기서 상처도 받고, 넘어지기도 하고, 오해도 받고, 핍박도 받습니다마는 
결국에는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달려간 사람들이... 세상을 얻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는 사람들은, 결국 그 안에서 망해갔습니다. 
왜냐하면 환대가 죄가 되는 사회는, 불안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많은 전통사회들이 낯선 사람들을 의심합니다. 
낯선 사상,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그게, 그들이 우리를 망칠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 낯선 사람들은 쉽게 타자화되고, 죄인이 되고, 악마화됩니다. 

이번 2024 미국 대선에서도 한 후보가 
'이민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더라' 이게 악마화 케이스잖아요.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 그걸 자극하는 거죠. 

▲낯선 자를 환대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발전한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조카 롯, 소돔과 고모라에서 
핍박받은 이유는, 나그네(천사들)를 환대했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신약과 똑같습니다. 거기서도 롯의 집을 침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 도시의 안녕을 위협하고 망하게 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었어요.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17:7
accept, welcome 했다는 말은, 환대, 영접, 받아들임... 기독교의 핵심 가치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게 뭡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입니다.
영접,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입니다. 
삭개오가 그랬잖아요. 
자기 집을 열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계가 넓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족, 내 친구, 우리 동향들, 우리 동문들, 우리 지역 사람들, 
적어도 이 정도 교육받은 사람들, 품격 있는 사람들... 그걸 넘어서는 거예요. 

그래서 낯선 사람도 받아들이는 게, 복음을 받아들인 삶의 
가장 중요한 생활 방식입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17:7
이 짧은 고소 내용은,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 믿으면 무엇이 바뀌는지를 결정적으로 드러내줍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성령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생생하고, 현실적이고, 강력한 기쁨이었는지 
환란을 견디게 하는 거예요.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거예요. 
그 말씀 위에 서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야손이 맞아들였다' 그랬는데 
이 사람이 핍박받고요. 고소당하고요. 감옥에 가셨는데 
여러분 이 사람이 예수 믿은 지 고작 3주 된 사람이에요. 

오늘날 초신자가 교회에 왔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왔어요. 
'저는 초신자예요. 아직 잘 몰라요. 그냥 뭐 좀 다녀보죠. 뭐' 그럴 시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 그 무시무시한 핍박을 견뎌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 말이 아니고요. 
사람을 그렇게 바꾸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특별하고 대단한 거예요. 

옥토도 있어야 되지만, 옥토가 아무리 있어도 뭐합니까? 씨앗이 있어야 돼요. 
생명은 씨앗에 있는 겁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너그러워서, 즉 고상해서' 그것도 좋아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에 심겨진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 말씀에 있는 생명이, 환란을 견뎌게 하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불과 지나가는 나그네 전도자한테 2~3일 말씀을 들었는데 
여러분 불과 3개월, 혹은 3주 훈련만 받았는데... 거기에 자기 인생을 겁니다. 

핍박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요. 
우리처럼 불안하고, 우리처럼 흔들리고, 우리처럼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쉽게 낙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이 들어갈 때, 진정한 왕 예수를 만났을 때,
그들의 인생이 달라진 줄 믿습니다. 확신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되었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말씀의 씨앗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신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에, 베뢰아 사람들과, 야손과 동일한 은혜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도 풍성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의 은혜 누리며 이 말씀의 굳게 서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