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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기 전, 구원받은 때, 구원받은 후

LNCK 2024. 9. 20. 18:0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2023 09 03  (80)  구원받기 전, 구원받은 때, 구원받은 후 - YouTube

 

구원받기 전, 구원받은 때, 구원받은 후            행22:1~21     

 

◑도입

 

행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오늘 본문은 바울의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나오는 '변명'이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아폴로기아 라는 단어인데요. 

뜻은 변호하다, 변증하다, defense 라는 뜻이죠. 

기독교 신학 학문 가운데 '기독교 변증학 Apologetics' 이라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어떤 종교냐?' 하고 물었을 때,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변증하는 학문입니다. 

때로는 기독교를 공격할 때 '아니야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야' 하고 
변호, 변증하기 위해 만든 학문이 "기독교 변증학"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스스로를 변호(변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기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자신에 대한 유대인의 공격에 스스로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행22장의 바울의 설교를 "변호 설교"라고 붙입니다. 
앞으로 바울은 총 6번에 걸쳐 스스로를 변호합니다. 

오늘 본문 행22장을 시작으로, 23장, 24장, 25장, 26장, 28장 
거의 매 장마다 바울은 자기를 변호합니다. 
본문 22장을 포함해서 총 6번에 걸쳐, 바울은 자기의 신앙과, 자기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바울의 변호 설교>가 본문 행22장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의 첫 번째 변호설교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설교가, 선포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안토니아 요새입니다.     *'안토니오 요새'와 동일

지난 시간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에서 죽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었죠. 

그때 바울은 천부장의 개입으로 위기 일보 직전에 살아났습니다. 
체포된 바울은 천부장에 의해 안토니아 요새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천부장에게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말할 기회를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21:39

그 요청을 천부장이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토니아 요새에서 말(전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행21: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바울이 안토니오 요새에 올라가는 돌 계단에 섰다는 뜻입니다. 


안토니아 요새의 그림인데요. 
안토니아 요새는 예루살렘 성전 북서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성전에서 요새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이 계단에 바울이 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변호를 했습니다. 

이 바울의 자기 변호(간증)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1~5절까지인데요. 구원받기 전 바울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6~11절까지인데요. 구원받은 때의 바울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 부분은 12~21절까지인데요. 구원받은 이후에 바울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이 세 가지 순서를 따라 바울은 자신을 변호합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구원받기 전 바울>의 모습입니다.   22:1~5

이 모습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도 구원받기 전에는 유대인들 너희와 같았다'는 얘기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유대인과 자기가 같았는지를 설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바울이 변호를 시작을 하는데 이들을 부르는 호칭이 있습니다. 
'부형들아'   22:1
바울은 유대인들을 가리켜서 '부형들아' 라고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형제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청중들 가운데는 나이 든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당신들은 나의 아버지입니다'하고 존경을 담아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의 형제입니다' 
유대인과 자기가 한 형제라는 호칭으로 바울은 변호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2:2
이 당시 유명한 신학자들도, 히브리 말을 읽는데 많은 어려움을 가졌다고 합니다. 

특히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헬라어나 히브리어 둘 중에 하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둘 다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백성들에게 말할 때, 모국어로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말합니다. 
때문에 청중들의 시선이 집중이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바울을 더 주목하게 되었을 겁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서로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나도 여러분들과 똑같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고 자랐다'고 말합니다. :3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야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에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하며' 

바울은 '나도 너희들과 같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비록 다소라는 외국 땅에서 태어났지만, 나도 유대인 혈통으로 태어난 유대인이다.. 라고 말합니다. 

빌3장에 보면,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나,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유대인으로 편입된 게 아니라, 
날때부터 유대인으로 태어난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에서 자랐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이죠.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바울이 언제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바울은, 성년이 된 13세 경에,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유학 온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가말리엘은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였습니다. 

그 밑에서 바울이 율법을 배웠다는 것은, 바울의 유대교 신앙을 보증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율법을 제대로 배우고,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도 너희들처럼 유대교 신앙 안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라는 얘기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조상들'이라는 말은, 같은 조상을 가진 한 유대인이라는 뜻이겠죠. 
계속해서 바울은 유대인들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과거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나 또한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3b

물론 이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죠. 
예수를 믿는 열심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열심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과거에 얼마나 특심이었나? 
'내가 이 도를 박해했다'고 말합니다. :4 
이 도는 기독교를 뜻하겠죠. 

얼마나 박해하고 다녔느냐 하면,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고 말합니다. 
'남녀노소를 가르지 않고, 기독교인이라면 닥치는 대로 감옥에 넣었다'고 합니다. :4

심지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외국인 다메섹까지도 쫓아가서 잡아올 만큼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했다고 말합니다. :5

여러분, 바울이 말하려는 포인트가 무엇입니까? 
'나는 옳고 너희들은 틀렸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들과 달랐다'는 게 아닙니다. 

'나도 너희들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나도 너희들처럼 유대교 신앙이 맞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들처럼 예수를 믿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믿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너희들처럼 기독교를 핍박했던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너희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구원 받기 전에 자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커다란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런 자기를,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본문 6절부터 시작되는데요. 

◑2. 바울이 이제 <구원을 받았을 때>입니다.  22:6~11

 

그때의 이야기를 바울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22: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때가 나옵니다. 
장소적으로는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이고요. 
시간적으로는 정오쯤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자기를 둘러 비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정오면, 태양빛이 하루 가운데 가장 강렬할 때입니다. 

그런데 태양빛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을 비추었다고 말합니다. 
초자연적인 신적인 빛이었다는 의미겠죠. 

순간 바울은 땅에 엎드려졌습니다.(아마 시력을 잃은 모양, 그러니 걸으면 쓰러지죠)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이 바울을 부르신 거죠.  :7

그때 바울은 대답합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7~8

여러분 이 만남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때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닌 거죠. :9

그들은, 빛을 보면서도, 주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오직 바울만 이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울만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건 무슨 얘기입니까? 
바울이 보고 싶어서 봤다는 얘기입니까? No
바울이 듣고 싶어서 들었다는 얘기입니까? No

바울에게만 예수님이 나타나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만 예수님이 들려주신 겁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찾은 게 아니라,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을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나도 너희들과 같은 자였다'고 했습니다. 
'나도 너희들처럼 율법에 열심이 있었고, 예수를 미워하는 자리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얘기죠?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얘기입니다. 

'나도 내가 예수를 믿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가 나를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찾은 게 아니라, 예수가 나를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바울의 변호가, 사실 우리의 고백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 역시도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불신자들 가운데 살았고요.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를 미워하며 살았고요. 교회를 싫어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내가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신 겁니다. 

어느 날 친구의 전도를 통해, 또 어느 날 누군가의 손에 붙들려서 교회를 나갔는데 
그게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오늘 바울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만 들렸습니다. 
그 날 목사님의 설교가, 나에게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은 게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오늘 '사울아, 사울아' 이름을 부르셨던 주님이, 나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고 계셨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떠한 사람인지, 내가 살아온 걸음들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 또한 직접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바로 '선택 Election' 이라는 단어입니다. 

22: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주님을 만난 바울이, 다메섹 성에 사는 아나니아를 찾아갑니다. 
그때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일어난 구원을 설명하면서, 바울에게 사용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택하셨다'는 말이었습니다. :14
하나님이 바울을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왜 다메섹으로 가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에게만 주님이 찾아오셨는가요? 
왜 바울에게만 빛 가운데 주님이 보이시고, 음성을 들려주셨는가요? 
하나님이 바울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택하심은,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창세 전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엡1:4

바울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바울을 창세 전에 구원하기로 택하셨습니다. 
그 택하심을 따라, 예수님이 시간 속에서 바울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일어난 구원이고요.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요? 우리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예수님을 박해하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불신자들과 다르지 않은, 불신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꼼꼼히 생각해 보니 '예수를 믿는 게 좋겠구나' 그래서 예수를 찾은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조차도 없었던 자들입니다. 
꿈에도 예수를 믿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직접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뒤돌아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전부터 우리를 부르고 계셨던, 하나님의 수많은 손길들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더듬어 가다 보면, 마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예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입니다. 바울처럼요.

바울이 지금 이 자리에서, 유대인들의 반대를 받게 된 이유는 
자기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삶 가운데에 그렇게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구원이고, 또한 나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받는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요.

여러분 이 세 가지 표현을 보면 한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면 일어나는 일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사울을 찾아오신 주님이, 사울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본문에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영적인 자각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예수를 박해한 죄인이다'라는 자각입니다.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다'라는 자각이 일어납니다. 

이 죄에 대한 영적인 자각, 내가 죄인이라는 영적인 자각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건, 무엇을 믿는다는 의미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분의 대속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그분의 대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나를 대신한 죽음'이라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서신 겁니다. 무엇 때문에요? 나의 죄 때문에요. 
그래서 십자가를 마주한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예수를 만나는 동시에, 자기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그 (십자가) 자리에 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달리셨구나' 반드시 그걸 마주합니다. 
오늘 바울이 들은 주님의 음성이 바로 이겁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인이었다'는 고발입니다. 

여러분 이 음성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세주이신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죄를 가지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 죄가 어떠한 죄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예수를 못 박은 그 죄'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걸 아는 이상, 더 이상 죄를 가지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거기서부터 죄를 떠나 예수님을 위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2. 그래서 둘째, 10절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을 만난 바울이 주님께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리까?' 라는 질문입니다. :10

주님을 만나자, 삶에 대한 진정한 질문이 시작됩니다. 
'주님 제가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 자신을 위하는 극도의 이기적인 삶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전부 중심이 자기에게 메어져 있습니다. 전부 다 나를 위해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기도의 초점도 전부 다 '나'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뭐하고 계십니까?' 하고 기도합니다. 
주님도 나를 위해 계시는 분으로 믿고 있는 거죠. 

그러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중심의 이동이 일어납니다. 
'나를 위해 주님은 뭘 하시겠습니까?'가 아니라, 
'제가 주님을 위하여 이제는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제가 이제는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이렇게 주님을 위한 질문이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이 부분도 참 주목할 만한 내용인데요. 

주님은 바울에게 직접 알려주시지 않으십니다. 
바울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직접 알려주시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0

이 부분을 칼빈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울을 교회 안으로 들여보내고 계신다' 

참 무릎을 딱 치게 되는, 참 멋진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바울을 직접 가르치지 않으시고, 교회 안으로 들여보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바울에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가 교회에 몸 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건,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를 떠나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말하는 '가나안' 성도는, 사실 성경에 그런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할 사람을 교회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우리의 신앙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번 주부터 다락 모임, 교리반이 시작됩니다. 

오늘 바울을 교회 안으로 들여보내고 계시는 주님이, 
여러분을 교회 안으로 들여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하시고, 가르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나니아를 찾으라'
바라기는 이 부르심에 순종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세 번째 주목해야 할 표현은 "이끌려" 입니다.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빛을 본 바울은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바울이 '끌려다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도 참 재미있는 표현인데요.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끌려다녔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끌고 다녔으면 다녔지, 끌려다녔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늘 자기의 열심으로, 자기 인생을 끌고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주님을 만나자 처음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끌려다녔다'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참 재미있는 표현이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8 

여러분 이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바뀌어진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닙니다. 

가끔가다 보면, 주님을 끌고 다니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 그건 예수를 믿는 게 아닙니다.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목에 걸고 다니는 게 아니라, 등에 지고 다니는 거다'

예수님을 만나면, 다른 삶이 시작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띠띠우고, 주님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곳으로 가기 시작하는' 
이전과는 정반대 방향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전에 자기 멋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께 끌려다니는 삶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3. 이어서 주님을 만난 바울의 이후의 삶이 나옵니다.  22:12~21

  그것은 이후로 '증인 되는 삶' 을 사는 것입니다

 

앞서 주님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10

그 말씀대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들어가, 바로 아나니아 라는 경건한 사람을 만납니다.
이 아나니아로부터, 바울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듣습니다. 

'네가 그 Jesus 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22:15

하나님이 바울을 구원하여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보고 들은 것의 증인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 증인의 삶이 구체적으로 본문 22절에 나오는데요. 

22: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바울을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십니다. 
이방인에게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도록 부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이 자리에서, 그 약속대로 증인이 되었다) 
이렇게 자기를 변호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기를 변호한 내용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고, 내가 왜 너희들이 반대하는 자리에, 
핍박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를' 변호, 변증했습니다. 

특별히 세 가지 시제를 따라 변호합니다. 
구원받기 전 / 구원받은 때 / 구원받은 후

이 바울의 변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겁니다. 
'나도 구원받기 전에는 너희와 똑같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얼마나 그 일에 열심이 있었던지,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공의회의 공문을 받아가지고 이웃 나라 다메섹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잡아올 정도로 열심히 있었던 사람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나를 핍박하는 지금 그 자리에 
나도 그 자리에 누군가를 핍박하며 살고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나는 예수의 '예'자도 싫어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바울은 자기를 변호합니다. 
그 이유는 딱 하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건 내 의도나, 내 계획이나, 내 원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를 홀연히 찾아와 주셨던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다메섹 도상에서)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는 삶으로 부르셨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이유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 바울의 변호는, 우리의 신앙의 고백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역시도 바울과 같은 과정으로 이 자리에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꿈에도 예수를 믿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를 박해하던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 예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삶을, 우리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이유는 하나이죠.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 하나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설교자의 구원 간증

 

여러분 저는 (명지)대학교를 다니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저는 예수를 박해하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어릴 때 동네 교회는 다녔습니다.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려고 하니까,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대로는 졸업할 수 없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제가 채플을 하도 많이 빼먹어서, 졸업이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제가 군대 가기 전에, 채플을 많이 빼먹었거든요. 

그래서 그 전화를 받고, 계절 학기로 채플을 이수하고 졸업을 겨우 했습니다. 
그만큼 예배를 싫어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이 기독교 학교라는 걸 누구보다 못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참 세상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를 제대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저희 '과 기도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죠. 

채풀도 도망다녔던 제가, 저희 학과 기도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보통 그런 거 할 때는, 학교 게시판에 포스터를 붙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성격이 못 돼서요. 포스터를 붙이고 그런 거 못합니다. 
마치 지하교회처럼 남들 모르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냥 주변에 같이 어울리던 교회에 다니던 동기 후배를 불러서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목사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요. 
'너는 기타 칠 수 있으니까, 네가 기타 좀 쳐라' 그렇게 조촐하게 3명에서 시작했습니다. 
제가 교수님 조교였는데, 교수님 연구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나중에는 인원이 많아져서, 학교 예배실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저희 학교에서, '캠퍼스 워십'이 열렸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 전도단이라는 단체에서, 대학교를 순회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저희 학교에서도 '캠퍼스 워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목실 목사님이 제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이번에 캠퍼스 워십을 하는데, 학과 기도 모임 대표들이 특송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하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학과 기도 모임 대표들이 모여서 특송 연습도 하고, 같이 준비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정된 날짜에 캠퍼스 워십이 열렸습니다. 

그때가 저녁이었는데요. 학교 운동장에다 무대를 세팅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특송 차례가 돼서, 이제 제가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쭉 서서 특송을 했는데요. 
'그리스도의 계절'이라는 찬양이었습니다. 그 찬양을 딱 시작을 하는데요. 

보니까 이제 저랑 같이 술 먹었던 불신 친구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한 소절도 부르지 못하고 내려왔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악보로 얼굴을 가리다가 내려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보처럼 계속 울다가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부르는데요. 순간 연습할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거든요. 
근데 단에 올라가서 딱 선 순간에, 이런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내가 왜 여기서, 같이 저렇게 술 먹었던 친구들 앞에서,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는 이러려고 이 학교를 온 게 아니었는데...'
 
내가 특송을 하는 대표로 서 있는 겁니다. 변한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학교는 그대로였고요. 후배들과 동기들도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늘 다니던 학교였습니다. 
내가 늘 술 마시고 놀았던 학교 운동장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제가 학과 기도 모임 대표로 찬양을 하는 겁니다. 
꿈에도 그리지 않았던 일이고요. 
이러려고 기독교 학교를 들어온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명지대학이 기독교 학교인지도 모르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채플도 도망다녔던 저였습니다. 
그런 제가 변화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런 저를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짧은 과정들이 필름처럼 제 뇌리를 지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울다가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딱 자리에 앉으니까요. 후배들이 다 저를 쳐다보고 웃고 있더라고요. 
다 보였던 거죠. 

참 그날이 지금도 개인적으로 저는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바울이, 그걸 말하는 겁니다. '나는 꿈에도 몰랐다'는 겁니다. 
'나는 내 의도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메섹까지 좇아가서 예수를 핍박했던 나 같은 죄인을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고, 사실 우리의 간증입니다. 
딱 하나,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여러분, 이게 진짜 예수를 만나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삶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내가 만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가 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주님이라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그러니 그 죄를 끌어안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주님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삶이 시작됩니다. 
나를 사랑하사 창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자기를 내어주신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시작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위하여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 위해 살아가는 질문이 시작됩니다. 

더 이상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께 붙잡혀 주님께 끌려다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삶이, 전혀 불행하지가 않습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길이라는 삶입니다. 기쁨으로 걸어갑니다. 

그 길이 진짜 생명의 길이고, 부활의 길이고, 영생의 길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고, 그 예수를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고백이 있으십니까? 
바울과 같이 예수를 만난 자의 고백, 
구원받기 전, 구원받은 때, 구원받은 이후에 삶의 고백이 있으십니까? 

전에 저는 제 뜻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참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계획대로, 내 삶을 끌고 간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어느 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내 삶은, 주님을 위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저 자신을 위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께 붙들려서 
주님께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제게 이런 인생을 맡기셨고, 그 삶을 위해, 저는 현재의 삶(목회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