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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와 진흙 렘18:1-12 2008년
서론
우리는 어려서 진흙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단단한 돌을 가지고 놀지 않았습니다.
진흙은 부드러워서,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교육가 이십니다. 말로만 교육 하시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실물교육을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연구한 것이거나 요구를 했다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2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그때에 예레미야가 “하나님, 저희 집에는 토기가 많아 별 필요가 없는데
저를 왜 그런데 가라고 하십니까?”하는 대구를 하지 않고 두말없이 일어나서 순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축복의 비결입니다.
신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위대한 주제들을
하나님은 토기장이의 하는 일을 통해서 너무나 쉽게 이해시키십니다.
자기도 잘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어렵게 말하지만,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은 쉽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어려운 말 같아도, 사실 하나님의 언어는 쉬운 것입니다.
성경은 그 당시 중산층 사람들의 평범하고 쉬운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에 가서 그가 하는 일을 보니 진흙을 가지고 토기를 만드는 일입니다.
발로 바퀴를 돌리고 흙을 물에 반죽해 녹로(wheel)위에 얹어서 돌아갈 때
손으로 모양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워서 토기를 만들어 내다 파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시대가 주전 627년부터 587년까지 40년 세월인데
지금이나 그때나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드는 방법에는 발 대신 기계로 돌린다는 것 외에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릇이 조금 비뚤어 나오면 토기장이는
그 진흙을 다시 부수어서 그 원래 진흙을 가지고 다른 그릇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통해서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토기장이는 진흙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토기를 만든다.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와서 “나를 이조백자로 만들어 주십시오.”
혹은 “고려청자로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들고 싶은 대로, 자신의 뜻대로 진흙을 가지고 토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이라 부릅니다.
진흙이 자기 뜻대로 토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의 뜻대로 토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흙에 주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에게 주권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반대적 측면인 '인간의 자유의지'도 나옵니다.
본문은 그 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된 것입니다. 두루 볼 필요 있습니다.
물론 그 주권과, 그 은혜가 불가항력적,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요) ☞ <양면성, 모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얼마나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성경에는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가 본문 외에도 두 군데 더 나와
모두 세 군데 등장하는데 그 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첫째, 국가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먼저 본문 렘18:1~1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국가의 운명에 대한 주권자(Sovereignty of God Over National Life)이시다는 말입니다.
렘18:5~10절까지의 해석이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한 국가를 멸망시키려 하시다가도, 국가가 회개를 하면 다시 돌이켜
그 국가를 축복하십니다.
또 한 국가를 축복하시다가도, 국가가 악에 빠지게 되면 재앙을 내릴 수도 있으십니다.
즉 국가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6절 후반에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40일 후에 멸망시키시겠다 하시며
요나를 보내서 그 메시지를 전하라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메시지를 삼일동안 전한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아!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실 것이다.”하며 삼일동안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왕이 요나를 혼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왕은, 왕위에서 내려와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백성들에게
“니느웨 백성들아! 굵은 베를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라. 짐승들도 금식하라.”고 공포했습니다.
이렇게 금식하고 회개하자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니느웨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망하게 하려 하시다가도 회개하니 살려주셨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축복해 다른 나라를 정복케 하시고
어마어마한 바벨론 제국을 이루어 황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자기 손으로 바벨론 제국을 이루었다며 교만해지자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7년 동안 치셨습니다.
7년 동안 그는 소처럼 풀을 먹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처럼 되며 손톱이 새 발톱처럼 되는
비참한 미치광이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7년이 지나자 다시 총명을 보내주셨습니다.
총명이 돌아온 느부갓네살은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단4:35
국가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국가를 복 주시다가도, 저울에 달아 악이 크면 토기를 파쇄하듯이
망하게 할 수 있으십니다.
반대로 한 국가에 전쟁과 고난을 주시다가도 죄악에서 돌이키면
다시 축복을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떤 금융위기나 전쟁위기가 오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 여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백성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둘째, 개인의 인생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이사야 64: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개인의 인생사에 대한 주권자(Sovereignty of God Over Personal Life)이시다는 말입니다.
개인이 잘 되는냐 못되느냐 이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기도해서 받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인생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시적인 언어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삼상2:6~8
사장님 아들이 방방한 삶을 살고 불쌍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위 아들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 성공한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강해지고 약해지는 일, 부해지고 가난해 지는 일, 살고 죽는 일, 높아지고 낮아지는 일이
모두다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나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삼상2:10
그릇이 토기장이를 대적하면 깨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삼상2:10b
성령 충만을 입은 하나님 백성의 뿔은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사에서 강해지고 부해지며 높아지고 싶으면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어
하나님께 잘 보이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헌신하여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낮은 자도 높이시고
약한 자도 강하게 하시며 가난한 자도 부하게 하시는 주권의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큰일에만 주권을 가지고 계신 게 아니라
우리의 아주 작은 일상사에도 모두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가 대전에 있을 때어느 할머니가 심한 관절염에 걸리셨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택시 운저사인 아들에게는 부인과 두 자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술을 먹고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며느리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하나님께 “아버지, 내 아들이 감옥에 갔고 며느리는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관절염이 있어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손자들 밥을 해줍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벌 두 마리가 날아와 한 마리가 다리 한 쪽씩 쏘고 갔습니다.
이 봉침을 맞고 다음날 일어나니 이상하게도 관절염이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손자들 밥을 해주고 아들도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까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머리카락도 다 세신바 된다고 했습니다.
참새도 하늘에서 떨어질 때는 하나님의 뜻 없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생사의 소소한 일에도 다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주권자 이십니다.
▲3.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9:20~21
이 말씀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 over Salvation)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시고 애서는 미워하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애서는 미워하셨다,
하나님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 택하신 영혼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다 하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교리를 싫어하는 신학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9장은 여전히 있어왔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권자 이시다하는 것을 당당히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토기장이는 목적을 가지고 토기를 만든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목적(purpose)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토기장이가 “밥그릇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러면 밥을 퍼먹기 좋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물컵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러면 물을 마시기 좋게 만들어야 됩니다.
또 국그릇을 만들어야 되겠다면 넓적하게 만들어서 국이 넘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이처럼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는 목적을 가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토기장이의 집에 견학을 갔다고 합시다.
거기에 녹로 앞에서 토기를 빚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토기를, 무슨 목적을 가지고 만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뭘 만드는지도 모르고, 목적도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 토기장이를 조금 이상한 토기장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국가를 일으키고 개인의 운명을 인도하시며
택하신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9:22~23절 말씀에서 그릇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서 어떤 그릇을 만드느냐 하는 절대 자유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히 쓸 그릇도 만들고 귀히 쓸 그릇도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천히 쓸 그릇을 진노의 그릇이라고 하고, 귀히 쓸 그릇을 긍휼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의 그릇을 만드시는 목적은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죄를 심판하실 능력이 있으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예수님 믿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은 진노의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죄에 대하여 진노하고
죄를 벌하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을 통해 보여주시려고
그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입니다.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말씀한 마26:24
가룟 유다같은 인생입니다. 이것이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긍휼의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긍휼의 그릇을 만드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부요한지를 보이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영광 받는 사람을 보면 대단합니다.
대통령이 취임할 때 고급차를 타고 사람들이 나팔을 불고 축제를 합니다.
또 영화배우들도 시상식 때 멋진 옷 입고 단상에 올라가 꽃다발과 트로피를 받습니다.
그리고 식장을 나와 좋은 차를 타고 멋지게 돌아갑니다. 이처럼 세상 영광도 큽니다.
그러나 세상 영광은 천국의 영광에 비하면 조족지혈인 것입니다. *새 발의 피
우리는 긍휼의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우리를 통해 나타내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인생을 행복하고 자신 있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토기장이는 “잘못된 토기를 파쇄하여
동일한 진흙 재료를 가지고 다른 그릇을 만드신다.
본문 4절에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지난 5월 9-16일까지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미국에 알리는
강진 청자 전시회가 Washington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우수한 예술적 가치가 고려청자를 만든 손길에 나타났습니다.
고려청자가 엄청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손길 때문입니다.
고려청자에 사용된 재로들은 평범한 흙에 불과합니다.
누가 그 흙을 가지고 만들었는가?
만든 사람들의 손길이 곧 그 도자기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우리 인간은 진흙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힘도, 능력도, 재능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토기장이 되신 분,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인생을 빗으시면
우리에게는 큰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길 때에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인생으로 여러분들을 새롭게 만들어 내실줄 믿습니다.
▲일제 시대 때 도공들을 일본에 데려갔답니다.
그런데 도기를 만들라고 하면서 흙을 갔다 주는데
그 흙으로는 질 좋은 그릇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점토가 있어야 좋은 도자기를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흙의 성질이 나쁘면 좋은 그릇을 만들 수가 없는데
그릇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항변합니다.
자기 맘대로 한 번 해볼려고 하는데 모든 환경들이 열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해 손가락질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토기장이들은 적어도 두 번째 시도를 머리에 두고 녹로를 돌렸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토기장이들은 같은 진흙으로 세 번 정도 시도한다고 합니다.
똑같은 기구에 똑같은 능력의 손에 붙잡혀서 그릇이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그릇으로 제대로 만들어지기 위한 열쇠는 진흙에 있습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라고 할지라도 진흙이 빚어지기를 거부하면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변화는 아픈 것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제자’ disciple라는 말은 ‘훈련’ discipline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훈련은 제자가 되게 하는데,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변화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다른 그릇이 되는 것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박살나고 천히 쓰다가 하나님의 진노나 보일 그런 그릇이 아니라
귀히 쓸 그릇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를 나타낼 귀한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타락한 인류의 소망이 있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엡1:11절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가지를 해야 됩니다.
첫째, 주권자 앞에 겸손해야 됩니다. 그릇이 교만하면 깨지는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다 겸손한 인격을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말도 겸손하게 해야 되고, 행동도 겸손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주권자라며 내 힘으로 다 되는 줄 알면 느부갓네살처럼 재앙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 겸손하십시오.
특별히 교회의 일꾼은 겸손해야 됩니다. 교회 일꾼이 교만해지면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둘째, 언제나 주권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정치를 하든, 경제를 하든, 문화를 하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들이 정책을 만들 때 이 정책이 우리 정당에 유익이 될까를 생각하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생 계획을 세울 때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주권자를 따돌리고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고려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될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고려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 의식성(God-consciousness)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죄로 파괴된 인생도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망가지고 파괴되고 빚도 많이 져서 살 소망이 없다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망가진 그릇도 다시 만들어
다른 그릇을 만드실 능력이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에 빠진 분이 계시다면 좌절하지 마시고 소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소망이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저를 다른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의 부요함을 이생에서나
내세에서나 넉넉하게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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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별 해석 (참고 자료)
18: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이 설교는 여호야김 통치 기간 중 그 어느 때,
아마 그의 첫 통치 삼 년 이내의 어느 때에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토기를 소재로 사용한 비유는 19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예화는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피조물인 인간을 다루심을 보여준다.
인생은 마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18: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녹로'란 말을 직역하면, '돌 두 개를 가지고'가 된다.
이것은 수직으로 된 굴대 위에 두 개의 돌로 된 바퀴가 놓여 있는 장치를 말한다.
밑의 바퀴를 발로 돌리면 위의 바퀴도 돌아가는데,
이때 토기장이는 이 윗바퀴에서 점토를 빚어 그릇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토기장이의 바퀴는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본절과 7절 이하의 보다 특정적인 적용 내용에서 유추하건대,
그 당시 바퀴 위에 있던 그 특정한 진흙이라고 하는 것은
토기장이가 만들고자 의도하였던 그릇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
다시 말하자면, 진흙의 질이 좋지 않아 그가 만들고자 하는 그 그릇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흙은 토기장이의 원래의 의도를 좌절시켜 버리고 말았으며,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토기장이이신 여호와는 지기 목적에 저항하는 이 진흙을 그에 맞게 처리하실 것이다.
이처럼 여기서는 진흙에 대한 토기장이의 주권적인 능력이 초점으로 부각되며(사 64:8, 롬 9:19-24),
아울러 자신이 원했던 그릇을 만들고자 하는 토기장이의 인내 또한 간과될 수 없는 사항이다.
18: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본절 이하에서는 앞의 상징적 내용에 대한 해설이 상세히 설명된다.
18: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여호와는 인간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위치에 있다.
이러한 절대 주권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존귀하고 부유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기도 하시고 반대로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시기도 한다(시 113:7).
따라서 장래사에 관한 한 아무도 스스로 장담할 수가 없다.
18: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민족적, 국가적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언급하는데,
이는 렘1:10에 표현된 사상(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무너뜨리며...) 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 구절은 용어면에서도 1:10의 내용과 유사하다.
18: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돌이키다'로 번역된 원어는 각각, '슈브'와 '나함'이다.
본문에서 전자는 인간의 회개를, 후자는 하나님의 긍휼에 따른 돌이킴심을 각각 의미한다.
그리고 '악'으로 번역된 말과 '재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동일하게 '라'이다.
18: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한 국가의 흥망 성쇠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즉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자동적으로 축복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사 시대로부터 유다왕국의 멸망 때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에빠졌을 때 하나님은 질병, 사망, 기근 등으로써
그들을 징벌하셨으며(삿2:11-15, 3:7,8, 6:11, 왕상16:7, 왕하24:9-20 등 참조),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유다는 패망의 비운을 맞아야 했다.
18: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8: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제' '아타'란 표현은 어떤 변론의 결말 부분을 도입할 때 종종 쓰였던 말이다(신4:1등).
문맥상 본절은 1-10절에서 진행되어 왔던 내용의 논리적 귀결점이 되고 있다.
유다 백성은 거듭되는 회개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그 완악한 마음이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당할일만 남겨 놓고 있었다.
그들의 패역한 생활은 언약의 저주 조항의 발동을 요청하는 그런 것이었다.
오직 근본적인 변화만이 그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나, 그러한 변화에의 기대는 어렵게 되었다.
18: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여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그들은 패역의 길을 너무도 멀리 걸어가 버렸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토기장이에게 소용도 없는 거칠고 뻣뻣한 진흙과 같은 것이 되어
더 이상 토기장이가 의도했던 고귀한 형태로 빚어질 수 없었다.
오직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만 그들은 토기장이의 손에 알맞는 진흙으로 다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온갖 악한 행위와 계속 되어온 언약 파기가
어떤 결말로 인도되고 있는가 하는 슬픈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
18:1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처녀 이스라엘'이란 말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신부라고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이
그에 합당하게 순결해야 된다는 의미를 암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남편 맞을 준비를 하는 처녀와 같이 영적 순결을 지켰어야 했지만,
이방 종교 관습에 빠져 자기 몸을 더럽히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사 다른 어떤 민족보다 사랑스런 존재로 여기고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기를 원하셨으나(호2:16참조),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배도의 길로 가버렸다. 이스라엘의 외도행각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고
열방 중에서도 볼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는 2:10-13의 내용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18:14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여기에는 유다 민족의 신의 없는 행실이 자연의 불변성과 대조를 이루며 기록되고 있다.
한편, 아담 클라크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취하기도 한다:
'레바논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로 농작하던 땅을 버리고
메마른 돌짝 밭을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은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레바논을 버리고 박토를 택하였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몰두해 있는 것이다.'
a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b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a절과 b절은 서로 대구(평행)를 이루며,
같은 내용을 한 번 더 반복한 것이다.
이렇게 자연은 불변한데,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이다. :18
18:15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여기서는 배도의 내용이 자세히 설명된다.
여호와의 백성은 이미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말았으며 허무한 것에 분향하였다.
이 '허무한 것'(솨웨)이란 어떤 우상을 가리키며
아마 바알을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의 결과로서, 또는 이런 짓을 하는 도중에 우상과 더불어
그들의 길에서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옛길이란 6:16에서 '선한 길'로도 표현되었는데,
여호와를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축복의 길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따랐어야 할 길은 우상에게 분향하는 길이 아니라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고 그의 언약에 순종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이방인들조차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쉽게 여호와를 거역하고 배신하였다(2:10, 11).
18:16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머리를 흔들리라'
이곳에는 배도의 결과를 중에 하나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 민족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이 황폐화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암 4:6-10 등).
이런 재앙으로 그 땅은 영영한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웃음거리'(쉐레카)란 '휘파람이나 휘유하고 내뱉는 소리'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이 땅이 너무나 비참한 상황으로 전락하여서
지나가는 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긴 한숨을 내뱉게 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19:8).
한편 클라크는 이를 조소와 멸시의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18:17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간결하지만 대단히 힘있는 어투로 언약을 유기한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이 선언되고 있다.
동풍(함심)이라고 하는 것은 동쪽 광야 또는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열풍(4:11, 13:24 참조)을 말하는데, 여호와의 심판이 바로 이 열풍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동쪽 바벨론의 침략을 상징적으로 동풍이라 표현하였다고도 볼수 있겠다.
왜냐면 여기서는 바벨론의 침략이 임박했으며 또 수많은 사람들이 멀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서 다 흩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은 구속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18: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본절은 백성들의 말을 인용한 부분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완악한 자세가 한결같아서 개전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6:13, 23:9-40).
백성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예레미야의 말이 거짓으로 보였다.
더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짓되고 참람한 언행을 하지 못하도록 제거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이곳에 지적되어 있는 세 계층, 즉 제사장과 지혜로운 자,
그리고 선지자에 대해서 무자비하고 신랄한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해치려는 음모를 선동하고 일을 꾸몄던 자들이
바로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점은 자연스럽게 추측된다.
그들의 이와같은 자기 만족적 응답이나, 눈이 감겨버린 의식의 마비,
소경으로서 소경을 인도하려드는 모습(마 15:14)은 12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지도자나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현 처지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계속 그대로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지도자들이나
오도된 길을 가고 있는백성들의 의식을 뒤집어 놓으려는 시도는
오직 심각한 반발만을 초래할 뿐이었다.
진리에 대한 비진리의 핍박 양상은 왜곡되고 부패한 사회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가 진리 족에 확고히 보장되어 있음을 맏는 자는
이러한 핍박을 오히려 기쁨으로 수용할 수 있다(마 5:10-12).
18: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들어보옵소서'
예레미야의 반응은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과 돌보심을 간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순되는 왜곡된 현실 속에서 공의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반응이다(시 5:3, 10:17, 17:1, 55:2, 61:1, 66:19, 86:6, 142:6 참조),
그런데 앞 구절의 해석 문제를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70인역은 18절의 끝 구문을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의 번역과 70인역의 번역은 본문의 의미 전달에는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만약 70인역의 번역을 따를 경우, 예레미야의 대적들은 그를 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예레미야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란 다름 아니라
그의 말을 책잡기 위함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러한 상황을 여호와께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18: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예레미야의 딜레마가 대단히 깊은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동족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내려는 뜨거운 열정, 바로 그것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악으로써 선을 갚는 잔인 무도한 행태는 시35:12, 109:5 등에서도 폭로된 바 있다.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에 관한 언급이다.
우리는 이 내용과 17:16에서 보여준 선지자의 항의를 함께 상고해보는 것이 좋겠다.
18:21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이 구절의 저주 조항은 예레미야의 악의에 찬 저주라기보다는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한 선지자적 선언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의 저주를 보고서 대단히 충격을 받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이 예레미야의 다른 말들과 대단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
어떤 이들은 이것이 전적으로 다른 저자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보복에 대한 예레미야의 부르짖음은 본서 내내 종종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것을 그의 어록에서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근과 전쟁의 칼에서의 죽음, 남편과의 사별 등 계속적인 공포는
모두 적의 침략에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었다.
예레미야는 북방으로부터 닥쳐올 적에 대해 종종 언급하여 왔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북방의 작은 점차 더 분명한 윤곽을 띠게 되었다.
18:22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파멸에 대한 전체 양상 중에 그 일부를 구성하는 내용이 또다시 지적되고 있다.
이제 살육당하는 곳이 전쟁터(21절)가 아니라 집이다.
집 속에 피신한 자들조차 침략군에 의해 색출, 처형당하는 살벌한 장면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같은 재앙 역시 단순한 선지자 자신의 사사로운 보복이 아니라
예레미야 자신이 여호와의 메시지와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핍박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언약 요구 사항을 무시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선지자를 조롱하며 핍박하였던 적들의 태도는 여호와를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였던 셈이다.
18:23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아시오니' 이렇게 호소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15:15 참조).
여기서 '알다'(야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지식적인 앎보다 뜻을 전달한다.
자신에 대한 여호와의 지식이 대단히 깊은 것이며,
그래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든 경험을 꿰뚫어 보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에서
예레미야는 소망과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한편 11:20, 12:1-4, 15:14-18 등에는 예레미야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던 반면에,
이곳과 17:14-18에는 구체적인 응답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종의 모든 말에 일일이 다 대답해주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살펴보면, 때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던 반면에(11:21-23),
때로는 책망의 말씀을 주셨다(12:5, 6,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