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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과 선교 / Patrick Fung

LNCK 2024. 9. 25. 15:12

핍박과 선교                     행11:19~26                <로잔 운동>
Persecution and Mission                                 *설교를 듣고 정리

Rev. Patrick Fung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여러분들께 안부를 전합니다. 
본문 사도행전 11:19~26절은 정말 놀랍고도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일어난 선교 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마지막 절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1:26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에 두 가지 키워드가 있습니다. '제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인'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안디옥에서 맨 처음 받았습니다. 

여러분, 당시 초대교회에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 대략 3가지 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제자들', '형제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서너 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제자'라는 단어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최소 230번 쓰여졌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호칭이죠. 

 

'형제'라는 말을 쓸 때는, 특별히 사이가 가까울 때였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자기 서신서를 통해서 '성도'라는 말을 쓰기도 했죠.

그런데 이 호칭은, 문서로 쓴 것이지, 서로 실제로 불렀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라는 단어에 제가 형용사를 하나 덧붙이겠습니다. 
이들은 그냥 제자가 아닌 Radical, 즉 급진적인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행11장은 이러한 급진적 제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볼이 붙었으며 
핍박 속에서도 전도하며 퍼져나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선 그들이 '급진적인 제자'가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건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행11:19절을, 8:1절에서 연결시켜 봐야 합니다. 
8: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집니다. 
(사도들은 남아서 교회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극심한 핍박이 있었기 때문이죠. 

 

교회는 지금까지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왔습니다. 
2:47절에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42절에는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교회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행2장의 성령 강림을 통해, 교회는 눈에 띄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8장~12장에 이르기까지, 분위기는 급격하게 바뀝니다. 
교회가 시험을 받고, 극심한 핍박의 시기를 겪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한 박해 속에서, 선교 사역이 돌파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래야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안디옥으로 더욱 멀리 퍼져나갑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 가운데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사용하신 주요 전략 
또는 방법을 꼽자면, 바로 고난과 핍박입니다. 
왜냐하면 핍박은 절대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하지만,
타협한 복음은 교회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제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이러한 극심한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번째 포인트 <이름 없는 자들 the unnamed 의 능력> 

8:1절에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죠.

이어서 8: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저는 8:4절의 중국어 성경번역을 특히 좋아하는데요. 
'흩어진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전도하러 갔다'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往各處去傳道

이 제자들은 도망다니는 난민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흩어진 자들이 교회의 리더가 아니라 
평범하고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11:19절에 '흩어진 자들'이라고 했는데요.
이들은 '알려지지 않은 무명들 the unnamed' 이었죠.

비슷한 표현이 '그 중에 몇 사람이' 라고 나옵니다.
여기도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무명의 신자들입니다. 직분자들도 아닙니다.
그들이 안디옥교회를 세우는 주역들이었습니다.     주1)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the scattered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핍박으로 인해서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아직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죠. :20

여기에는 그 어떤 이름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익명의 제자들이 환란으로 말며만 흩어져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름 없는 제자들은 불확실성과 불안정한 상황을 맞이했음에도 
오로지 복음을 위해 불이 붙었습니다. 

그들은 다니는 곳마다 복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여기,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한 복음 운동이 일어납니다.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그리고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제자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선교는 국경 없이, 이런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 
초대교회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런던 대학교에 있는 아카이브 기록보관소에 초대되어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수석 아카이브 담당자가, 저를 이끌고 굉장히 큰 방에 
수천 개의 문서가 보관된 곳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보이는 문서 하나가, 중국 사람을 위해 바쳐진 한 생명입니다' 

분류된 각 문서 뭉치가 선교사님 한 분의 목숨을 뜻하며, 
그것은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희생된 목숨이었습니다. 
(영국과 중국을 오갔던 편지, 그 외 자료 문서가, 인물별로 분류되어 보관되어 있는 듯)

저는 책장에 보관된 수천 개의 문서 뭉치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이름들은 낯이 익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로버트 모리슨, 
그리고 또 중국에서 섬겼던 유명한 선교사님들의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제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수천명의 이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 이름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잊혀지기 위해 살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기억되게 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마이클 그린은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초대교회의 성장은 어떤 마스터 플랜이나, 카리스마 있는 리더나, 
대단한 전략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헌신된, 급진적이며, 두려움 없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자들 the unnamed'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요? 

1)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 익명의 제자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들의 대담함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했다'고 2:4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2:43

그리고 행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유대교 종교당국자들의 협박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4:19~20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들은 교회로 돌아가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대주재여' 4:24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두 가지를 구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담대함을 구했습니다. 
4: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다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기적을 통해 병을 낫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소서' 4:30

오늘 날도 비슷하게, 교회가 반대 세력을 마주하거나 여러 가지 박해를 당할 때 
전능하신 주님께 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선포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4:29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깨어진 세상 속에 회복을 이루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4:30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와 같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셔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믿음을 지키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복의 공동체로, 어두운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길 바랍니다. 

2) 그들은 기꺼이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복음이 바깥으로 전해지는 두 가지 방법은 
지리적인 전파와, 또 문화적인 전파가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선교활동은 북쪽으로 퍼져, 
유대와 사마리아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문화적으로는  
선교를 통해 유대인들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 중에는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11:20

당시 유대인 성도들은,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고방식의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민족 중심주의를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깊은 적대감에 대한 예시를 이렇게 들었습니다. 

'만약에 유대인이 길을 지나가다가, 이방인 산모가 갑자기 진통을 겪는 것을 보고 
분만하는 것을 돕는다면, 그 유대인은 다시는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왜냐면 그는 영구적으로 부정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이 유대인 신자들은 누구였나요?
그들은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들이었습니다. 11:20

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었지만, (앞선 헬라 시대의 박해 등을 이유로)
지중해 세계 각지에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자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과 유대에 돌아와 살게 되었지만, 
이제는 기독교 박해로 인해서 구브로, 구레네 등지로 흩어졌습니다.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구브로 구레네 몇 사람'이란, 예루살렘 토박이들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들이었기 때문에 

'구브로, 구레네 사람'이란 호칭이, 그들에게 붙여졌던 것입니다.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인 성도들은 이미 다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이었고 
좀 더 넓은 세계관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때를 위해서 준비시키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안에 문화적인 또는 역사적인 자국 중심주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 형제 자매들이 
한때는 서로 원수였던 국가에 살았지만, 지금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변화시키는 힘을 보여주신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셨으며, 
우리를 갈라세우는 벽을 허무셨습니다. 

▲그 다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나타냈습니다. 
누가는 '주'라는 단어를 11장에 7번 사용했습니다. 몇 구절만 찾아봅니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누가가 이 단어를 반복해서 쓴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중국 내지 선교의 개척자였던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성도의 모든 영역에 주가 되지 않으면, 그 분은 주가 아니시다'
If Jesus is not Lord of all, He is not Lord at all'

이런 급진적 제자들이 초대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스스로 복종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민족 중심주의를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익명의 사람들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2. 두 번째 포인트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특수한 상황을 인지했으며 
그들 스스로 이러한 새로운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나바를 보내어, 모든 것이 괜찮은지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나바가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그가 본 것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보았습니다.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바나바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게 되어 크게 기뻐했습니다. 

새로운 국제 공동체의 탄생으로,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행동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선교하기도 전에... 저절로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거죠)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선교활동은, 주로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에서 시작합니다. 
사람의 계획이 아닌,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시작합니다. 

누가는 바나바가 한 일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얘기해줍니다. 

11:23~24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의 사역은 격려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닌, 
제자들이 주님 안에서 굳건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바나바 - 위로(격려)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준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스코틀랜드 신학자인데 
그는 바나바를 '가장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자신의 통제권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격려했지만, 교회를 성장시키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11:24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때로는 하나님이 그분의 전능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의 통제권을 내려놓게 하심으로써, 교회를 성장시키십니다. 

1951년 (중국이 공산화 된 해) 6천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마지못해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놀드 린은 중국 선교회 대표로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늘 독립적이며, 스스로 건전하게 지탱하는 중국 교회를 옹호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방법으로, 중국의 무신론 정부가 이 (선교)운동을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바나바가 사울을 찾는 노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1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사울은 함께 일하고 싶은 동역자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리더들도 초기에는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제자들이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9:26

하지만 바나바는 사울을 믿고 그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 11:26
이것은 협력하는 정말 강력한 예시입니다. 

바나바는 수백 마일을 이동해서, 다소로 가서, 사울이 그의 사역을 돕도록 설득했습니다. 
사울은 바나바보다 더 많이 배우고, 또 은사도 많았습니다. 

바울을 영입함으로써 바나바는, 스스로의 리더십이나 명성을 위태롭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스스로의 권력, 지위, 자격을 내려놓는 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11:24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매우 단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는 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갖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나바로 하여금, 위험을 감수하고 사울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울을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3. 세 번째 포인트 <신실한 증인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1:26 '(사울과 바나바가)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그들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를 양성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에 투자하는 것이며 
이것은 교회 성장의 핵심입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왜냐면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먼저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까 처음 시작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유가 
그들 스스로 믿음에 대해 잠잠히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말이죠. 
그들은 복음에 대해서 말하며, 결국에는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성품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냈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요세푸스 라는 로마시대의 역사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깊이 헌신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가치를 따랐다. 
이들은 기꺼이 나서서 문둥병으로 죽은 환자들을 묻었다. 
그들 가족도 꺼리고 두려워하는 일을 말이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위험을 감수했는데,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그들의 주인을 위한 것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11장을 통해, 익명의 알려지지 않은 자들을 통한 
선교운동에 대해 보여주었지만, 
또한 초대교회 당시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음을, 사도행전 12장에서 말해줍니다.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에 공격이 더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실한 증인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반대 세력으로부터 도망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때려는 폭력적인 반대 세력이 있습니다. 

12:1~2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헤롯 아그립바는 1세는 폭군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재차 공격을 가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당시 매우 심각한 위기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베드로는 구하셨는데 
야고보는 그러시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헤롯의 파괴적인 권력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하지만 저는 존 스토트 박사님의 이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가운데 시계추는 
성장과 반대 세력, 성장과 수축, 전진과 후퇴 사이를 (시계 추처럼) 오갔으며, 
교회는, 죽음과 지옥의 권세마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우리는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졌기 때문이다.'    주2)
바로 우리의 반석 되신 그리스도 위에 말입니다. 

2015년 2월, 20명의 이집트 콥트 기독교인들과 중동 사람들이 
아이시스 무장세력에 참수당했습니다. 이것이 비디오로 전세계에 송출되었습니다. 

전 세계는, 이 주황색 점프수트를 입은 21명의 남성들의 이미지를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순교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신실하고 평화롭고 회복력 있는 우리 '주님의 이름'이 
곧 닥쳐올 죽음 앞에서, 그들의 입술을 통해 말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교단을 넘어서서 많은 크리스찬들에게 전해졌고, 
수백만의 믿음의 사람들과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강력한 간증으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놀라운 선교 운동 중 하나는 네스토리안 교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선교사들의 회복 탄력성과 영적인 활력이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대륙을 휩쓸었던 사건입니다. 

(*AD 635년 당唐의 수도 장안 長安, 西安 에 들어오면서부터 경교 景敎로 불림, 신라에도 전파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은 424년경부터 이집트, 시리아, 및 인도까지도 전파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성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려고 해서, 초대교회 때 이단으로 정죄됨)

학자들은 이러한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의 힘과 회복력을 뒷받침해준 두 가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1) 첫 번째는 바로 핍박입니다. 페르시아 지역의 박해를 통해서 
네스토리안 선교가 놀랍게 확산되어 4세기, 5세기에 이어 동방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2) 두 번째 요인은 바로 네스토리안 그들의 일터입니다. 
대부분이 상인으로 장사를 했고, 그들은 헌신적인 삶을 살며 
열심을 다해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상인으로나 장인, 성직자로 또는 평신도로 
그들은 항상 복음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 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 핍박을 허락하십니다. 

서양에서도 크리스천들은 미묘한 형태의 박해를 경험하곤 합니다. 
오늘날 핍박이란, 전 세계적으로 경험하는 어려움 외에도 
법률 제정, 사회적인 변화를 통해 종교적인 표현과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이 선포되고 나타나게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말이죠.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선교의 돌파구를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중심부에서가 아닌, 주변부에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핍박은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핍박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통해,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주여,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냅시다. 두려움 없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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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행13:1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이름 중에
즉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혹시 11:20절에 나오는 '그 중에 몇 사람' 일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죠.

주2) "Indeed, throuhgout church history the pendulum has swung between expansion and opposition, growth and shrinkage, advance and retreat, although with the assurance that even the powers of death and hell will never prevail against Christ's church, since it is built on the rock - the rock of Christ" - John Sto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