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이후 한국교회 약사 略史
L4 로잔대회 중 "한국교회의 열 두 돌" 에서 일부 녹취,
한국교회의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유익한 내용이라서 발췌, 녹취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에 피폐한 국민들에게 소망이 되었던 한국교회
아무것도 없는 폐허 위에 사람들이 삼삼오 모여 앉았습니다.
생기를 잃은 시선들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봅니다.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폐허의 잔해들 가운데서, 쓰러진 나무기둥을 땅에 세워 꽂습니다.
그리고는 부서진 석재와 합판들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비와 햇빛을 가리는 천막을 치고 십자가를 내걸고 교회를 세웁니다.
그곳으로 전쟁 고아들과 미망인들, 오갈데 없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배급받은 밀가루와 가공유(분유)를 나누며, 오병이어를 재현합니다.
어둠이 내리자 사방이 붉은 십자가로 빼곡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거처는, 점차 큰 교회로 변모됩니다.
한국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삶의 터전은 잿더미 속에 사라졌습니다.
공산주의의 핍박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내려온 피난민들의 사정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가는 곳마다 천막교회를 세웠고
십자가 아래 모였습니다.
남한으로 내려온 피난민 공동체는 남한교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경직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한경직 목사님과 한국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은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지원받은 구호물자를, 굶주린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그때 1951년과 1952년에 미국의 부흥사인 밥 피어스 목사님과
에버렛 스완슨 목사님이 각각 방한하여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고
전쟁 피해자들을 돕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세계 최대의 민간 국제기구인 <월드비전>과 <컴패션>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또한 평양의대 교수였던 장기려 박사님은, 피난처였던 부산에 <복음병원>을 열어
가난한 환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하며, 오늘날 건강보험의 근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처럼 전후 재건기의 한국교회는, 무너진 세상 속에서 구원의 방주가 되었으며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거의 모든 영역에서 펼치며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6년
한국교회는 최찬영 선교사, 김순일 선교사를 태국으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세계선교의 뜨거운 열정을 회복하며 선교를 이어가게 됐습니다.
▲한국교회의 대중 전도 운동과 그 열매
한국사회 재건기 이후 1960년대 ~ 1980년대까지 한국사회는
민주화에 대한 전국적인 열망이 끓어오르며, 정치적으로 혼란과 변화에 직면합니다.
교회는 이때 산업화로 인해 도시로 모인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도시산업 선교회>를 설립합니다.
이를 통해 노동자 인권 운동과 함께, 민주화 시위를 지원하는 등
사회 정치적 운동을 펼칩니다.
또한 한 편에서는 <군 선교>를 통해 청년들의 복음화를 이루고
<학원선교> 역시 급속히 성장해 나갑니다.
1964년 한국 '개신교 선교 80주년'을 맞이하여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 총장인
김활란 박사는 교계 지도자 75명을 초청하여, 복음화 운동을 위한 간담회를 개최합니다.
그의 제안을, 교회 지도자들이 공감하고 지지하여
개신교 17개 교단이 함께 참여하기로 결의합니다.
이는 분열되었던 한국 교회의 연합과 더불어 제2의 부흥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965년부터 ~ 1988년까지 한국교회가 주도한 민족 복음화운동의 구호들을 소개합니다.
<민족 복음화 운동>은 1965년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라는 구호 아래
전국 대도시를 순회하는 대중 전도대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 갱신과 일치, 개인의 거듭남을 통한 사회 변화,
민족 전도운동을 그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 운동은 전교단이 초교파로 연합함으로써 분열된 한국교회의 상처를 꿰매고
다시 한 몸이 되게 했습니다.
이듬해인 1966년 베를린 세계 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만난
조종남 박사와 한경직 목사는 민족 복음화 운동을
대중전도 집회와 접목시킬 아이디어를 얻고 그를 한국에 초청합니다.
1973년 5월, "5천만을 그리스에게로" 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는 전국 6개 도시를 순회하고 나서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전구의 집회에서 총 440만 명, 서울 여의도 대회 때는 110만 명의 군중이
구름떼 같이 몰려들었고, 결신자만 10만명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수많은 군중 앞에서 빌리 그레이엄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북한 동포를 위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북한은 더 이상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 형제가 되었습니다.
<민족복음화 운동>은 그 이후로 CCC 김준곤 목사가 주도했던
1974년 explo 전도대회,
1977년 민족 복음화대성회,
1980년 세계복음화 대성회
1984년에 <한국 교회 선교100주년 기념 선교대회>와
1988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주도했던 <88세계복음화대성회>등의 대중전도 집회로 이어집니다.
이와 같은 열정은 평양대부흥 이후 한국교회의 DNA 속에 흐르는
부흥을 향한 열망이 다시 되살아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세계화가 이루어져
교회 성장과 선교 운동이 가속화되었습니다.
1960년에 5,011개에 불과했던 교회 숫자가 1990년에 이르러 35,819개까지 늘어났는데
이는 30년간 7배 이상 증가한 엄청난 성장이었습니다.
더불어 1960년에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했던 기독교인 인구는
1995년에는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하게 됩니다.
또 다른 성장의 측면으로 1980년대 전후로 이루어진
신도시 중심의 도시개발과 함께 대형 교회들이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1991년에 이르러 한국은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역사적인 전환을 이뤘다는 점입니다.
복음을 기반으로 구제와 양육을 실천하던 월드비전과 컴패션 등
국제 NGO 들의 수혜국에서
한국은 수많은 기독교인 후원자들이 참여하는 후원국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같은 급속한 성장을 허락하신 하나님 뜻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요?
▲대학생 청년 선교운동 급증
이 깃발들은 지난 40년간 한국 교회의 선교의 열정을 보여주는 상징들입니다.
1970년대의 대중전도 집회들을 통해 한국 교회는 다시 한국 너머를 보게 됩니다.
당시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74년 로잔 1차대회로 인한 변화를 느끼고 있었는데요.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그룹은, 80년대의 기독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현실 앞에 직면해서, 복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하고 있었죠.
그런데 74년도에 발표된 '로잔언약'에 이어
로잔의 문서들은 그들에게 한줄기 빛처럼 다가왔습니다.
기독 청년들은 복음이 단지 한국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이웃을 품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두 가지 운동이 일어나는데요.
1) 하나는 대학 캠퍼스 전도 운동과,
그 회신자들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일으킨 다양한 활동들이었고요,
2) 또 하나는 열방을 향한 선교 동원 운동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복음주의 청년 선교단체들이 활발히 일어나게 되는데요.
바로 이 깃발들의 주인들입니다. *여러 청년 학생 선교단체의 깃발들
그리스도를 멸망하고 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청년들이
이 깃발을 들고 일어난 것이죠.
이 사람들은 선교적이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한국교회 초기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처럼 뜨거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먼 타국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시기 대학생 선교 단체 출신들 중에서 주목할 만한 운동을 이끈
한국의 복음주의 리더들이 있습니다.
옥한흠, 홍정길, 하용조, 이동원 목사 등은, 개교회 성장을 넘어서
교회 갱신에 대한 시대적 필요의 응답으로,
제자훈련과, 선교헌신 운동을 주도하였고,
수많은 청년들을 일터선교와 세계선교에 헌신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깃발을 든 청녀들의 행진은 계속 이어져
미국의 학생자원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이 일어난
1886년의 100년 후인
1988년에 한국 대학생 선교운동이 한국에서 최초로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매 2년마다 열리는 <선교한국> 집회는 지난 35년 동안
수많은 청년 대학생들에게 선교를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 1980년에 100명이었던 해외선교사가
1989년엔 1천 명이 되고
2002년에는 1만 명을 돌파하더니,
2013년에는 2만명을 넘어서며
한국은 선교사 파송 순위로 세계 2위를 자리매김 합니다.
한국선교연구원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으로
세계 174개국에서 21,917명의 한국인 장기 선교사와
451 명의 단기 선교사가 사역중입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두 번째 부흥기를 이끄신 하나님의 시선은
분명하게 세계의 땅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너도나도 복음의 일꾼이 되겠다고 소원했고
교회들은 기쁨으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 헌신과 기도를 통해, 이제 한국은 선교사를 받던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선교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의 참혹했던 역사의 시련기에도 믿음의 불씨를 이어가며
복음전도 씨앗을 뿌린 한국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의 선물이었습니다.
▲한국 선교사들의 헌신과 열매
한국 선교사들은 해외 선교지로 파송되자, 많은 선교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나라 선교사들과 현저하게 달리) 각자 선교지에서 교회 개척에 주력한 전략이었습니다.
2023년 말 기준 한국 장기선교사 49%가 현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역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교육선교는 특별합니다.
한국 선교사들은 근대화와 경제발전,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선교 수혜를 입은 경험을 바탕으로
선교지에서 국가와 민족을 섬긴 미래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2014년 기준 한국 선교사들은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직업훈련원을 포함한
총 810개의 학교를 선교지에 세웠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현재, 2024년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한국교회 이름으로 세워진 기독교 대학들만 해도 17개에 달합니다.
이렇듯 한국교회의 세계 선교가 확장될수록
미전도 종족에 대한 분명한 인지가 생겨나면서
1990년대 초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애통함(북한선교)이 일어나게 됩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선교에 헌신하게 되다
그것은 가장 가깝고도 먼 우리의 땅 끝인 북한과
그곳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함이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 가뭄이 들어, 수백 만명이 굶어 죽는 심각한 식량난이 발생합니다.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뉴스로 전해지면서
한국의 교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교회들은 북한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였고,
복음주의권 교회들은 본격적으로 북한 선교에 뛰어들게 됩니다.
한국 교회는 대북 식량 지원금의 90%를 감당하면서
3만 명이 넘는 북한 이탈 주민들을 기꺼이 환대합니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기독교 대안 학교가 전국 곳곳에 세워지고
교회마다 북한을 위한 기도회가 열리고,
다양한 탈북민 사역이 시작됩니다.
바야흐로 북한 선교의 시간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북한은 가장 가깝고도 먼 땅 끝입니다.
탈북민들을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는 여전히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몰래 들여온 성경을 입수하여 지하교회로 모이며,
발각될 경우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하다 목숨을 잃는다는 정황이 밝혀졌습니다.
국제오픈도어 선교회는,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의 숫자가 무려 5만 ~ 7만 명에 이른다고 발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한 땅에 남겨놓은 그루터기들인 지하교인들은
지금도 생명을 걸고 손글씨로 적은 쪽복음을 읽으며
'부흥의 땅 평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장기 정점을 찍은 이후 한국교회가 당면한 도전들
2019년 시작된 코비드-19 사태는 한국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 여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론 추산 1만 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고, 2024년 현재 30% 이르는 교인들이
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극심한 저출산과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다음 세대에 대한 전망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사회 전 영역에 걸친 심각한 분열과, 한반도의 평화 위기 또한 불안을 가증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AI(인공지능)를 비롯한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화에 직면하고 있으며,
기후 재난과 생태위기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존할 사명을 부여받은
한국교회와 글로벌교회의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금 당면한 이 모든 문제들을 견인해 나가기에는
(성장에) 제동이 걸린 상황입니다.
1995년 성장의 정점을 찍은 이후 한국교회는, 대체 어떤 파도들을 만난 것일까요?
한국교회는 제2의 부흥기를 지나,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맞이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이후 2005년까지 10년 동안 14만 4천 명의 성도가 감소했고
기독교인의 비율도 15%로 떨어졌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교회가 끼친 선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신뢰도가 급속히 하락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리서치에 따르면 현재 기독교에 대한 한국 사회의 호감도는 25%에 불과합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핵심 단어는 '배타적, 물질적, 위선적, 이기적'이었습니다.
그 원인으로는 한국교회의 경쟁적인 개교회 주의와, 양적 성장에만 치중했던 점,
목회자와 신자들의 타락, 그리고 소통을 가로막는 교회 시스템이 문제로 지적됐습니다.
즉 기독교 신자 개개인이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지 못한
위선적 이미지가 그 원인으로 꼽힙니다.
(1984년 선교 백주년 이후) 지난 30여 년간 한국 교회의 선교는 눈부신 성취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 교회가 침체하면서, 해외선교 역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파송 선교사가 줄어들고 있으며,
현장에서는 선교사 리더십의 문제와 지나친 성과주의,
교계와 선교계의 과당 경쟁 문제 등이 불거지며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로서의 전략면에서도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점차 소외되어가는 지역교회 활성화,
늘어나는 이주민들을 품는 사역,
청년과 다음 세대를 위한 미디어 사역 등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는 사역들을 위한
세심한 전략과,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사회적 책임'을 일깨웠던 로잔운동
1974년 로잔대회가 열린 10년 뒤인 1984년에
'보라, 내가 새일을 행하리라' 라는 표어 아래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에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1980년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민족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죄를 고백했습니다.
로잔 운동은 당시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각성시켰고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식을 일깨워서
사회 선교에 대한 열망이 한국교회안에 비로소 일어나게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선교사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
어떤 이들은 사회를 선교지로 삼아 묵묵히 헌신했죠.
그리고 올해 2024년은 로잔 운동의 희년입니다. 50년째 되는 해이죠.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비판은
로잔 대회를 잉태하게 했습니다.
로잔은 '복음전도와 사회선교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라고 선언하면서
복음주의 교회들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 지나온 50년 동안 로잔은, 한국교회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어주었죠.
이제 다시 한국교회는 회개를 선포하며
로잔의 정신과 동행하여 선교의 해법을 찾고
세상으로부터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정리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교회사 140년에 걸쳐 드러난 복음의 파장을 보았습니다.
이 140년의 내러티브(이야기)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만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사에 일어났던 총체적 사역들은,
먼저 뜨겁게 복음을 수용한 참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개교회 차원이 아닌, 민족 복음화 운동으로 연결된 부흥운동은
지도자들의 책임 의식과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세대가 바뀌어도 이런 사명감이 계승된 것은
한국 교회 가운데 성령의 감동이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빈곤 상태였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다양한 선교사업을 펼치는 선진국이 되어, 복음의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선교회는 2024년 현재, 풀어가기 쉽지 않은 문제들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문제들 앞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스스로에게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만 합니다.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깊이 숙고하며, 참 제자도를 실천하고 있는가?"
앞으로도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성숙의 과정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도 성숙'의 과제는, 고도 성장을 경험한 교회일수록 더욱 절실해지는데,
이는 글로벌 교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삶과 존재와 행동과 말이
우리의 총체적 사명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선교사들이 번역한 <부족 언어 성경>들은
구한말 조선의 흑암에 비추인 <예수성교전서>처럼 *최초의 한글 성경
이들 부족들의 땅에 창세기 1장 3절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에 자신을 던져
가난하고 무지한 조선의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청춘을 불살랐던
파란눈의 선교사들을 기억합니다.
한국 선교는 그 기억으로 닻을 삼아 항해 중이고
앞으로도 그 항해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부르심은, 이 땅의 역사가 말해주듯, 세계선교와 복음 통일에 있습니다.
아직 발자국이 남긴 적 없는 세계의 수많은 미지의 땅이
검은 머리의 한국 선교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7년 그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던 장소에는
지금 평양 최대 규모의 김일성 부자 동상이 서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부르심을 향한 항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 열두 돌을 찾아 떠난 여행의 종착지에 와 있습니다.
단 하나의 관문을 남겨둔 제 말입니다.
코리텐 붐은 '기억은 과거가 아닌 미래의 열쇠'라고 했습니다.
열두 돌을 찾아 떠난 과거로의 여정은, 추억을 회상함이 아니라,
미래를 다시 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 열쇠를 찾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열쇠를 찾기 위해, 지금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장소는 과연 어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