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glUFgTXF1Z8
◈약할 때 강함 고후12:1~10 2024.09.22.
이제 로잔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서 수많은 지도자들 내한하고 있습니다.
선교단체 대표들, 또 신학교 총장, 교수님들, 또 목회자와 선교사
또 각 전문 분야 영역의 전문 리더십(평신도)들 많은 분들이 내한하셨습니다.
1부 예배에 설교하실 분은 우리 헤럴드 김 목사님이십니다. Harold Kim
태어난지 석 달 때에 미국으로 부모님과 함께 이민간 2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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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나눌 주제는 "약함 가운데 힘을 주신다" 라는 내용입니다.
저는 자라면서 사도 바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나도 장차 커서 사도 바울처럼 되어야 되겠다'는 느낌이 들곤 했었죠.
그런데 조금 커면서 알았는데, 그건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건 여러분에게 '예수님처럼 되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겁니다.
저는 어릴 적에 '내가 사도 바울처럼 강한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처럼 신학적으로 탄탄한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또 사도 바울처럼, '기도에 힘쓰고, 절제하며, 스스로 훈련된 종이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주님이, 사도 바울처럼, 저를 사용하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제 착각이었죠. '내가 강해야' 주님이 쓰신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약해야' 주님이 쓰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돼야 된다'는 강박감이
저로 하여금 사도 바울처럼 되지 않아도 되는 저의 핑계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실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엄청난 고난을 겪거나, 그것을 극복해내는 철인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이, 즉 강철 같은 사람만,
사도 바울처럼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한 것이,
또한 그런 사도바울 같은 사람들을 우상화시키는 방식으로
제가 그 핑계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나는 바울같이 강철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바울처럼 안 되어도 되는 거지...
아뇨, 그분들도 저처럼 약한 사람들이었고, 주님은 그 약한 사람들을 쓰십니다)
▲저는 사도 바울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도바울은 적대자들부터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적대자들은 그를 공격하고, 핍박하며,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마치 변호사가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변호하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강력한 변호를 합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적대자들에게 던지는 마지막 강력한 변증이고 변호입니다. (서신의 끝 부분이니까)
아래의 변증은, 바울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가' 하는 변증이 아니라,
즉 바울은 '여러분은 나처럼 강해지십시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내가 얼마나 약한 지를 보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12:1~10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12:1~1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약하게 만드실뿐만 아니라
계속 그 약함 가운데 우리를 두십니다.
사도바울처럼 우리를 만들어가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강해지느냐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처음 만나셨을 때의 상태를 기억하십니까?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돌아서서
그리고 예수 구원자이신 예수께, 여러분을 의탁하셨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이 예수 믿기 위해 나왔을 때, 여러분이 강했기 때문에 나오셨습니까?
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울고 있었고, 정말로 기어다녀야 할 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누군가 해결해 줘야 될 구원자가 필요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났던 첫 번째 그 날, 그 상태가
어쩌면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가장 좋은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상태가, 최고의 영적 상태를 누리려면
그것은 '내가 얼마나 내가 강한가!' 하는 때가 아닙니다.
대신에 '내가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저는 세 가지 소주제를 가지고 오늘 말씀을 나눌 겁니다.
첫 번째는 시계추 같은 진자에 대해서 나눌 것이고
두 번째로 가시에 관한 것을 나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역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약함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강함'이라는 역설을 나눌 겁니다.
◑1. 먼저 <진자 시계추 운동> 같은 우리 삶에 대해 나눕니다.
본문 고후12:1~6절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뭔가 혼란에 빠진 것 같습니다. 왜 일까요?
왜냐면 바울은 평소에 스스로에 대해 자랑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부득불 자신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행19:11~12절을 보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과 앞치마를 가져가서
누구에게 덮어도, 치유의 기적인 일어났습니다.
악한 영이 떠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 사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스스로 자랑하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분은 성경 어디에서 한 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No
사도 바울이 이 사건에 대해 자랑하듯 언급하는 것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No
사도행전은 바울의 친구인 의사였던 누가가 기록한 책입니다. (누가가 자랑해준 거죠)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옷 중에 일부 천조각이, 어떤 악한 영을 떠나게 할 수 있다면,
바로 인터넷 SNS 등에 올리면서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강함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행 20장에는 이런 일이 있습니다. 그의 설교가 너무 길었습니다.
그래서 밤이 늦었고,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에서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사도 바울은, 설교하던 다락에서 아래로 내려가,
유두고 앞에 엎드려 그를 깨워놨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죽었던 유두고가 사도 바울의 말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런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는데,
세상에 누가 이런 경험에 대해, 책을 내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 일에 대해서 강연을 하고, 그런 걸 널리 사방에 말하고 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4년 전에 자기가 봤던 삼층천의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사도 바울이 자기를 얼마나 드러내는데 주저하냐면,
삼층천에 갔던 사람이 자기이지만, 자기라고 말하지 않고,
3인칭 화법인 '그가' 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우린 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사도 바울의 자신의 경험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에 대한 마지막 그의 변호에서
자기가 얼마나 강해졌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랑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저하면서 3인칭 화법으로 자기의 삼층천 경험을 나눈 후에,
본문 7절에서 갑자기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제가 '전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3층천에 올라간 체험을 한 사람이, 갑자기 정 반대로 '나의 약함'을 얘기하기 때문이죠.
바울은 '나는 나의 약함에 대해서 당신들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3층천까지 올려져 갔던 바울이, 반대로 아주 낮은 곳에서 가시를 경험합니다.
어쩌면 3층천 가장 높은 천상의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바닥에 끌어내려져서 가시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시'보다 더 나쁘 것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시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있습니다.
네, 그것은 '자만심 conceit' 입니다.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7절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너무 크므로... 가시를 주셨다'고 합니다.
큰 은혜, 큰 계시, 큰 사명을 만약 받지 않았다면, 가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를 주신 이유는,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7
빌4: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바울은, 아주 낮은, 가장 비천한 상황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 고후12장에서는, 바울은 다른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가장 높은 천상의 것들, 삼층천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결국 가시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신앙의 진자 운동입니다.
'진자 Pendulum'는 좌측 끝과 우측 끝을 왔다갔다 하는 것인데,
과거에 괘종시계에 이런 진자를 볼 수 있었죠.
바울이 극단과 극단 사이를 왔다갔다 한 것입니다. 삼층천의 경험과, 가시의 경험!
바울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죠.
바로 그 가장 높은 천상의 것들을 경험할 때,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여러분은 끌어내리시는 겁니다. 가장 먼 대척점으로요!
그러므로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가시'를 경험할 때는,
금방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주 너무 높은 곳으로 올라갔구나...' 하고요!
◑2. 두 번째 <가시>에 대해서 입니다.
바울의 가시가 무엇입니까?
모든 신학자들과 성서 주석학자들은, 바울의 가시가 무엇인지, 동일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실이 더 마음에 듭니다.
동일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다양한 '가시'를, 바울의 '가시'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가시'란 생선 가시도 아니고, 과거에 탱자나무 가시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팔레스틴의 광야에서 자라는 '가시'는 아주 굵고 튼튼한 가시입니다. 튼튼한 못과 같은 가시죠.
어쩌면 바울의 가시는, 어떤 우울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안질이나 (간질 같은) 육체적 질병이었을 수도 있고,
언제나 가는 곳마다 바울을 핍박하고 대적한 수많은 적대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쩌면 그것이, 자기에게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죄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시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히 규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당신의 가시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이 '사탄의 사자(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사탄이 여러분이 각자 가진 '가시'를 통해
여러분에게 어떤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분들에게 계속 이런 이야기들을 할 겁니다.
'당신이 얼마나 비천한지 바라보십시오'
'당신이 얼마나 딱한지 보세요'
'당신과 같은 지도자가 어떻게 또 범죄하고 실수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그런 당신을 용납하시고, 받아주실 수는 없을 거야'
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만두고 포기하고 멈추라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탄이 우리에게 가시를 통해 주는 메시지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 메시지들이 사탄으로부터 온 것임을 압니다.
사탄이 그 가시를 통해서, 여러분들을 괴롭히고 망가뜨리려고 한다는 겁니다.
당신을 망가뜨리고 그 낙담한 상태로 놓아두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시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십니다.
당신을 겸손케 해서, 자만심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사탄은 당신의 가시를 당신을 해치기 위해 사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회복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실 것입니다.
가시보다 더 나쁜 그 자만심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시기 위해 가시를 허락하십니다.
자만심이란 것은, 여러분들이 지금 볼 수도 없고,
내가 자만심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는데
그런 여러분을 보호하시기 위해, 가시를 사용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자비입니다.
즉 자만심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자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자만심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약함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 가운데 바울을 머물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가시를 허락하신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2012년에 제가 있던 교회에서, 제가 이제 분리 독립 개척을 하게 됐습니다.
정말 기쁨이었고 정말로 자랑스러운 사건이었죠.
저희 미국 교단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모교회에서 영어예배부가 분립을 했지만, 계속 함께 동역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저에 있어서 하늘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2013년에, 제가 목회하던 그 분립한 교회에서
3명의 성도를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불과 1년 사이에 3명을 잃었습니다.
두 분은 자살했고,
세 번째 그 분은 어떤 비참한 사고가 있었다가,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심각한 우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병원에 가게 됐습니다. 의사들도 제가 무슨 문제가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 제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제가 담임목사로서 실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제 안에는 어떤 것도 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코비드 19가 오기 4년 전에, 또 다시 저는 가장 낮은 자리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번 아웃(탈진) 증후군을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그런 무기력함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왜 그것들을 제게 허락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제가 그 가시들을 지나도록, 저를 그렇게 두셨는지 아직도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왜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 가시 가운데 두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가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 모습때문에,
여러분이 힘들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너무 절망적이고 어둡기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과거의 한 때 저처럼, 아예 잠도 이루지 못하고,
삶의 행복함을 전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제가 왜 그런 가시를 통과하게 하시는지,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이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내가 압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시는지' 제가 압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나를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그곳에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가시 가운데서 크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우리가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욱더 약해져야 한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절하고 절박한 처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역설 Paradox>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바울은 가시가 떠나도록 주께 세 번이나 간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가시를 내게서 가져가 주십시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십니다.
한번 더 '이 가시를 가져가 주십시오!' 라고 구하지만, 하나님이 또 거절하시지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하나님 이 가시를 가져가 주십시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거절하십니다.
이 세 번의 거절을 보시면서 생각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완전히 의로우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무릎 꿇고 하나님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3번에 걸쳐 아니라고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기 직전에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셔야 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가시와 비교할 수도 없는
참혹한 가시를 지금 맞이해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셔야 하는 가시가, 예수님 앞에 지금 놓여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그 간구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네 앞에서 치워 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아니다' 하시며 거절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이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냐면,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이 가시를 두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이 가시를 치워주시든지, 없애 주십시오'
'이게 너무 오래됐고, 이것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께, 오늘 하나님께서는 'No!'라고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너의 가시를 내가 치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능력이 네게 머물게 할 것이다.
그 상황을 견딜 은혜를 너에게 줄 것이다.
바로 그 가시를 통해, 내가 너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냐면 '자만심'이라는 더 심한 가시로부터,
여러분을 지키시기 위해, 여러분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가시를 통한 약해짐 가운데, 여러분을 두실 겁니다.
예수님을 닮은 가장 용감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저는 기억합니다.
오늘 이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만났던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예수님 같았고, 가장 담대했던 그분들은
언제나 자기의 삶 가운데 가시가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 가시 가운데, 그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강하고, 아름답고, 은혜가 족한(충분한) 사람들이 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약함 가운데 두기 원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설 Paradox 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내 능력이 네가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9a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러한 고백을 다시 올려 드릴 수 있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약한 것들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과 모욕과 핍박과 곤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하기 때문입니다.' :9b~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