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 행17:16~34 2024.09.22.
※본문은 행17장 '바울의 아덴에서의 전도'인데, 그래서인지 내용이 변증학적, 사변적입니다.
혹자는 미래 기독교 전망에서 '앞으로 변증학이 유행하게 될 것이다'고 전망했죠.
실제로 미국에서 팀 켈러, 라비 재커라이어스, 존 파이퍼 등이 변증학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온갖 컬트, 사교, 주술이 판을 치는 현재 아프리카 상황에서도
복음사역자들에게 '변증학'은 꼭 필요한 무기라고 합니다. ☞ <변증>
아래서 "이 세상에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은 세 가지로 전개됩니다.
1) 첫 번째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2) 두 번째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3) 세 번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
◑1.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한국에 많은 기독교 학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대학들에서는 대개 '성경' 과목, 혹은 '기독교 개론' 이런 시간이 있죠.
문제는 미션스쿨 이라고 해서, 학생들이 모두 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수업 시간의 분위기가 묘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하면, '그거 다 지어낸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정말 있습니까?'
그래서 어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그랬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레포트를 써 낼 수 있다면,
한 학기 내내 수업에 안 들어와도 괜찮다. 그리고 A 학점을 주겠다.'
그랬는데 학기 말까지, 그런 레포트를 제출하거나, 증명한 학생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분이, 몇 년 동안 학기 초에 똑같이 이렇게 말했는데
몇 년 동안에 레포트를 제출한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 라고 합니다. 당연하겠죠.
△'하나님은 존재한다' 즉 신의 존재 증명을 철학적으로 시도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것들은 성공적이었고, 어떤 시도들은 별로 였습니다.
그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있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머리로,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두 친구가 함께 여행하다가, 배가 난파되어서 어느 섬에 상륙 했다 라고 가정하십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해안에 둘만 누워 있어요. 파도가 왔다 갔다 하고요.
'친구야, 일어나 봐, 이 섬에 우리 뿐이야.'
'그래? 과연 여기가 어딜까?'
'무인도 같아!'
'아니야 아니야, 무인도 같진 않아, 사람이 살 수도 있어!'
이렇게 해서 한 명은 무인도라 그러고,
또 한 명은 '사람이 살 것 같아' 그러고 ... 서로 티격태격 합니다.
그리고 각자 증거를 찾아 나섰습니다. 누가 유리하겠습니까?
(유인도 라고 주장한 친구가 유리합니다. 왜냐면)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까지는 무인도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뭐 하나라도 증거가 나오면,
즉 불을 피운 흔적이든, 사냥한 흔적이든, 움막이 발견된다든지 하면,
그때는 '무인도론'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누구도 이 섬을 무인도라고 단장 할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있다면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무인도로 추정된다' 하는 말 정도일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유신론자가 있고,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은밀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무신론자는, 불가지론자(잘 모르겠다, 알 수 없다)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두, 나의 의지와 선택과 관계 없이
이 세상의 어느 지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죠. 파도에 밀려서 어느 해안에 다다르게 된 난파선의 승객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크면서 점점 알아가는 거죠.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또 다른 존재가 있는가, 없는가?'
'아 이 세상은 그냥 마음 먹은 대로 생겼어!
아무런 목적 없이 우연과 우연들이 모이고 겹쳐서 이렇게 굴러가는 곳이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어서, 의도를 가지고 이 우주를 만들어가고, 또 이끌어가고 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은 모든 인류에게 던져진 질문입니다.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종교가 없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죠. *설교 제목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우리는 모두가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렇죠.
21세기 사람들은, 과거 13세기를 잘 모릅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인도나 러시아나 브라질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를 몰라요.
여러분 이것은 지식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물학 지식이 있고, 공학의 지식이 있고, 역사학의 지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각은, 내 눈에 보이는 것, 내가 발로 닿을 수 있는 것,
거기에 대한 지식 입니다.
그 중에 특별히 시력이 좋고,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좀 더 멀리 볼 수 있겠죠.
그게 천재예요. 그 중에 석학도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천재, 석학도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이 인간의 지성과 감정 속에
뭔가 자신을 알 수 있는 그런 실마리를 넣어 놓지 않았을까?'
◑2.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이 말이,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있는가?
여러분, 아주 깜깜한 데서, 더듬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이 주제는, 신학자들 가운데 굉장히 많은 토론과 연구가 있는 대목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전3:11절에서 우리가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는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 처음과 끝을
사람이 알 수 없는 건 당연하죠. 하나님 그만큼 크신 분, 영원한 분이니까요.
또 그런데 알 수 없지만, 사람에게 뭐가 있는가 하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그랬어요.
'사모' 즉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죠.
여러분 영이 라는 자매가 철이 라는 형제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호동 이라는 애가 와가지고 '야 나 정도 면 괜찮지 않아? 나랑 사귀자'
그러자 영이가 '그럴까?' 이렇게 재어 본다면, 그거는 사모하는 게 아니죠.
'사모한다'는 말은, 너무 너무 간절히 원해서
'이 사람이 아니면 나는 만족하지 못한다' 할 때 쓰는 겁니다.
대체재가 없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예전에 <집으로> 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도시에 사는 엄마가 어려움에 처해서, 자기 아이를 산골에 할머니에게 맡기고 갔습니다.
그래서 이 할머니와 꼬마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 서로 소통의 과정을 그려낸
아주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할머니는 최선을 다 하는데, 아이는 만족을 못 합니다.
아이가 어느 날 할머니한테 '치킨이 먹고 싶어요.' 했는데,
주위에 치킨 집이 없는 거는 고사하고, 할머니는 치킨이 뭔지를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아이가 막 궁리하다가 나중에 '꼬꼬댁 꼬꼬댁' 하며 닭 흉내를 냈습니다.
할머니가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집에 있는 닭을 잡습니다.
부엌에서 요리를 해가지고 가져 오는데요. 닭백숙을 가져온 거예요.
아이는 뭐 기대가 이만큼 올라갔는데, 할머니는 닭백숙을 가져온 겁니다.
아이는 '할머니는 왜 닭을 물에 빠뜨려?' 이러는 거예요.
여러분 프라이드 양념 치킨, 그 바삭한 맛이 그립고, 너무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럴 때 치킨을 '사모한다' 할 수 있겠죠. 다른 걸로, 닭백숙으로 결코 만족 못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 것으로 만족 못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데,
영원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이에요.
짐승들은.. 적절한 환경을 공급해 주면 만족합니다.
적당한 온도, 놀 수 있는 공간, 먹이, 물... 그렇죠.
애완동물 키워 보신 분들은 알 거예요. 동물은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힘듭니다. 돈이 사람을 만족 못 시킵니다.
혹시 돈이 만족을 줄 거라 생각해서, 인생 전체를 돈에 올인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극 소수는 성공 하기도 해요. 물어보세요. '만족하시는지요?'
권력, 권력이 있어야 최고다 해서, 권력을 잡기 위해서 평생을 매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중에 정말 극소수만이 정점에 오릅니다. 물어보세요. '만족하시는지요?'
인간은, 이 세상 것으로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짐승보다 힘들게 사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위대한 이유입니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어요. '개 팔자가 상팔자다.' 들어보셨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여름에 뙈약 볕 아래서, 논밭에 가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 옵니다.
'야 입에 풀칠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그러는데 집에 오니까, 툇마루 밑에 시원한데, 개가 누워서 뻗어서 자고 있는 거예요.
개는 밥 먹고 배불러서, 시원한 곳에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 옛날 말이죠.
지금은 어때요? 여러분 인간이 환경과 형편이, 옛날보다 많이 더 좋아졌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지 못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개 팔자가 상 팔자다'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개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배고픈 인간의 되기를 원한다.
만족한 바보가 되기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원한다.' J S Mill의 말이죠.
It is better to be a human being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a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 J S Mill
인간은 배 부르다고 해서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아마데우스> 라는 영화 아시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에 살리에리 라는 궁정음악 악장이 나옵니다.
이 심각한 남자는 음악에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가 이 사람에게 배웠습니다. 그도 음악에 천재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불행했던 이유는 단 하나, 모차르트와 동시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의 이름이 막 알려질 때, 그는 궁정악장 이었습니다. 최고 중에 최고 마스터 였죠.
아마도 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 보다 후배였으면, 좀 괜찮았을지도 몰라요.
'내가 대선배인데, 당대의 최고였는데, 모두가 나를 존중하고 우르러 봤는데...'
그 관심이 모차르트에게 옮겨가니까 자기가 힘든 거예요.
이 영화에 아주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차르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는 나에게 주셨는데
모차르트 같이 작곡 할 수 있는 재능은, 내게 주지 않으셨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그래서 너무 괴로운 거예요.
여러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면, 요즘 말로 '막귀' 라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들어보니까, 모차르트의 음악이 너무 너무 훌륭한 거예요.
그거는 너무도 분명히 아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그런 음악을 만들 자신이 없어...'
바로 이 딜레마가, 모든 인간이 처한 딜레마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요.
내가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된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 영원을 알 수도 없고, 확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 그러면서도, 뭔가 마음 한 켠에 텅빈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설교 한 내용입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수준 높은 지성의 도시, 철학의 도시, 심오한 문화를 건설했던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가서, 바울의 반응이 어땠는가요?
▲17:16~17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지성으로 명성이 높은 도시인데, 정작 가 보니까 우상이 가득한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붙잡고 변론합니다.
'장터'는 그리스 어로 '아고라' 입니다. *광장 또는 장터
그때로부터 약 4백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아고라에서
지나가던 청년들을 붙잡고 '여보게, 자네는 진리가 뭐라 생각하는가?'
'자네의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자네는 왜 사는가?' 이렇게 질문하던 그곳이었습니다.
여러분, 철학은 질문하는 힘에 있습니다.
철학의 도움을 받아서, 철학적 사상가의 도움을 받아서... 질문하는 거예요.
내 문제를 내가 붙잡고 씨름할 줄 아는 그게.. 진짜 철학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떤 다른 철학자가 내 놓은 대답, 이론, 그거 달달 외워서 아는 척 하는 것,
그게 철학이 아닙니다.
인생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할 줄 아는 사람!
그 질문을 붙잡고 스스로 씨름할 줄 아는 사람이 철학자 입니다.
그래서 아고라에는, 그런 전통이 내려오는 거예요.
이제 바울이, 그 전통, 그 문화에 따라서,
아고라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질문하고, 진리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이때 아테네의 지적인 상황은 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할 정도로
뭔가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습니다.
기존의 것이 모자란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소크라테스가 있었고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에피큐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의
수 많은 스승들이 있었습니다.
그 위대한 철학자들이, 주옥같은 가르침을 베풀고, 제자를 양성한지 3~5백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후예들이, 바로 그 아테네 거리에서
아직도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거예요. 만족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근세에 와서 스튜어트 밀 까지 말하잖아요. *위에 J S Mill 로 소개했음
이 수천을 내려온 이 이미지, '불만족한 소크라테스', 이게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고상한 목표는 있어요. 근데 만족은 없어요.
진리에 대한 갈구는 있어요. 그러나 확신을 주는 진리는 없습니다.
'인생이 이게 다가 아닐 거다' 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지만
'그러면 인생은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그들의 불만족 과 목마음, 갈망을 보여주는 최고의 정점은 23절에 나옵니다.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들은 신, 절대자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신을 경외하고 싶었어요.
근데 어떤 신을 경외해야 되지? 너무 많은 신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올림푸스 산의 주 신만 해도 열두 신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신이 있는 거예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세 세상이 다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신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신이 진짜 절대자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기도 만들고.. 저기도 만들고...
이 신, 저 신을 막 만들다가 나중에는 안 되니까 뭐라고 그랬어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그리고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슬픈 현실 입니까? 얼마나 답답한 상황입니까?
이 답답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고 숭배하는 것을, 내가 너에게 알게 하리라' 하고
차근 차근히 가르쳐 줍니다.
◑3.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정말 천지를 지은 신이 있다면, '인간이 지은 템플, 그 신전에 있겠느냐?'
그렇죠. 어떤 건물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아가서 인간의 어떤 개념에 갇혀 있지도 않습니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라고 그랬죠.
이 '존재의 집'인 개념, 언어 안에 하나님이 가두어져 있지 않다 라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누구도 '신이 있다'하고 쉽게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럼 지금 바울이 말하는 거는 뭐냐? 증명이 아니고, 증거예요. 증거!
여러분 오늘 지금 몸에 열이 나는데
아스피린 한 알 갖다 놓고,
그 아스피린의 효과를, 여러분이 분석하고 설명해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화학적 성분이 몸에 작용하는 의학적 메카니즘, 그 효과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증거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아스피린을 먹어보니까 낫더라' 이러면 그게 증거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행전의 증인들은, 전부 다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증명은 쉽지 않지만, 증거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습니다. 제가 그걸 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부활 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셨던 것,
함께 밥 먹고 얘기했던 것... 그것들을 우리가 보았어요. 만졌어요.
그리고 오늘도 그 분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에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가 말씀 나눌 때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걸 증거 하는 거예요. 증거이지, 증명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요? Yes 혹은 No 입니다.
하나님 존재를 증명 할 수는 없지만, 증거 했던 사람은 많습니다.
▲17:27절을 다시 읽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않도다' 무슨 말이에요?
몇십 키로, 몇 광년을 뜻할까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죠.
옛날에 한국 드라마나 영화 보면, 가끔씩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아빠가 사고 쳐서 외국에 가든지, 돌아가시든지, 혹은 교도소에 갔습니다.
그럼 철 모르는 아이가 아빠를 찾잖아요. 엄마한테 물어봅니다. '아빠 어디 갔어?'
그러면 엄마는 '멀리 갔어, 먼 나라에 갔어!' 그런 장면이 많이 나왔어요.
이게 할 수 없이 거짓말 하는 것 같은데, 나름 진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버스타고 한 시간만 가는 있는 교도소에, 아버지가 있어도
그 담장에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아빠를 못 만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 '먼 나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 '먼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아프리카에 있어도, 집에 급한 일이 있으면, 하룻 만에 옵니다.
거리가 멀어서 먼 곳은 없어요. 비자가 없어서 못 가고, 비행기 삯이 없어서 못 가고...
하는 어떤 상황이 있는 거지, 마음만 먹으면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먼 것은, 여러분, 마음이 멀면 못 만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중입니다.
멀든지 가깝든지, 거리, 공간의 제약이 문제가 아니라
결정적인 것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멀면...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내 가까이에 계셔도, 마음이 멀면...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저 하늘 끝에 멀리 계신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가까우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지금 미국 뉴욕에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 에 있으면, 나에게서 어느 정도 거리입니까?
지금 나에게, 미국 대통령이 먼가요? 한국에 있는 내 친구가 먼가요?
누가 더 멀리 있습니까?
물리적으로는, 거리적으로는, 미국 대통령이 가깝고, 한국에 있는 친구가 멀죠.
근데 한국에 있는 친구는, 내가 정말 보고 싶으면, 비행기 타면, 당장 내일 만날 수 있어요.
미국 대통령은 물리적으로면, 4~5 시간 운전해서 가면, 백악관까지 갑니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을 내 마음대로 만날 수는 없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27
여러분, 만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가 아니라 의지입니다.
'멀지 않다'는 말은 그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말이에요.
뭐든지 이런 만남이 성사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의지 예요.」
만나는 방법은 누가 만듭니까? 내가 대통령을 만나려면 어떻게 만나나요?
'내가 다음 주 목요일에 시간 되는데, 대통령님, 포항의 멋진 카페로 오세요'
이건 말이 안 돼요.
보통 사람이 대통령을 만나려면, 백악관이 정해주는 시간에, 그 장소에 맞춰서 가야 돼요.
내가 대통령을 만나려면, 방법과 시간을 대통령실에서 정하죠.
내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 방법을 누가 정합니까? 하나님이 정하는 거예요.
내 생각에 '이쯤이면 하나님이 좋아 하시겠지' 그걸로 안 통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하나님 여기서 만나요'
우리가 정말 멋지게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휘양찬란하게 지어 놨어요.
'이 정도면 하나님이 오실 만 하지 않습니까? 아니라는 거죠.
파르테논 신전, 뭐 제우스 신전,
당대에 최고의 건축 기술과 미학이 동원된 신전들이 아덴에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이 오실 만 하겠지... 이 정도면 우리가 신을 만날 만 하겠지...'
거기에 그 문화의 최고가 투입 되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그건 인간의 생각이죠.
건축물 좀 잘 멋지게 지어 놨다고, 그것 때문에 신이 내려오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날려면,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법을 따라야 됩니다.
거기에 우리가 맞춰야 돼요. 그 방법이 뭡니까? 30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내가 지은 죄를 막 탈탈 털어가지고,
막 옛날 죄까지 다 꺼집어 내 놓고 눈물 흘리면서 막 그냥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것도 물론 회개지만, 여기서 회개는 그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회초리 들고 '회개 해!' 이게 아니고요.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하나님께 돌아 오라'는 말이에요.
우리 하나님께서 '회개하라' 그러실 때는
나를 혼낼 준비하시고, 회초리를 들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안아 주시려고 '나에게로 오라' 하시며, 나를 품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해야 돼요.
'회개하라'는 말은, 나에게 나아오라는 말이에요.
불순종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말이에요. *본문에서는 그렇습니다.
회개는,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신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설교가, 다 다르게 접근 하지만
결론은 '회개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말입니다.
▲정리하면,
이 세상에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세 가지입니다.
1) 첫 번째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2) 두 번째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3) 세 번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세 질문이 다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여러분 누구나 답을 가져야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의 삶을 좌우 합니다. 내 영혼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 합니다.
혹시 '지금 내가 충분히 알 수가 없겠다' 하는 분들은,
'내가 좀 더 자세히 알아 봐야지' 좋습니다. 공부해 보시고, 탐구해 보시고, 책도 보십시오.
그런데 제가 예언합니다. '내가 내 지성으로 탐구해 보겠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면서 죽을 것입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그 후에 무엇이 있습니까? 31절입니다.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심판, 반드시 심판 날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활을 주셨고,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증명은 할 수 없어요. 인간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증거는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부활하셨다. 우리가 친히 보았다. 우리가 친히 그 말씀을 들었다.'
하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 걸고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증거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듣고 있는 이 복음 입니다.
내가 머리에 열이 나는데, 이 약을 붙잡고 아무리 성분 분석을 하고,
어떻게 이 약이 내 열을 내리게 하는지... 우리가 증명하기는 힘들어요.
그렇지만 내 몸에 열이 나는데, 어떻합니까?
약을 먹어보면 압니다. 먹어서 내 몸에서 열이 내리면, 그게 해열제인줄 알죠.
그래서 내가 그 원리를 증명할 수는 없어도, 몸에서 열이 내렸다고 증거할 수는 있는 거죠.
'나는 예전에 이런 사람이었는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이렇게 변했습니다.'
이렇게 증거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히12:1
그들이 다 증인들입니다. 복음의 증인들! *증거한 사람들
어떤 수준에서 살게 되는가요?
17:28 '우리가 그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이 세 가지 동사 하나하나가 철학적 표현으로서
당시의 철학적 신의 추구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피상적인 레벨 이고요.
사실 이 말씀 안에, 개인적이고 고백적인 언어가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오늘 움직이는 힘, 내가 오늘 찬송하면서 사는 힘,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 길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들, 증거가 있다는 거예요.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
△1966.04.08. <타임> 매거진에 이런 표지가 나왔습니다.
몇몇 학자들이 당시에 그런 말을 했어요.
'2차대전 후에 하나님은 죽었다.'
여러분 현대 사회가 참 묘한 면이 있습니다. 미국 사회가 특별히 그런데요.
센세이션이라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 몇몇 학자들이, 좀 허접한 학자들이라도, 자극적인 글을 발표하면,
그게 신문에 실리고, 기사가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보거든요.
별 내용이 없어도 신문이 팔리거든요. 센세이션이 일어나죠.
그래서 여러분, 유명해지려면, 이렇게 좀 삐딱하게 말하면,
금방 유명해지는 그런 게 있잖아요.
옛날 아테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시간을 쓰지 않더라' :21
아주 비슷한 현상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언 하고, 그 안에서 은혜 받고,
그 분을 높이고, 섬기며 사는데' 그거는 다 도외시 하고,
아주 극소수 사람들이 '하나님은 죽었다' 말하면, 그게 타임지 기사에 나오는 거예요.
현대 사회가 그래요.
그 기사를 쓰면서 타임지 기자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이런 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하나님이 돌아가셨다고요?
저는 조금 전까지 그 분과 함께 있었는데요!'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동행 하고, 살고 있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