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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LNCK 2024. 10. 2.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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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행23:1~11       2023.10.01. 설교녹취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변호입니다. 
바울의 1차 변호는 유대인 폭도들이 대상이었습니다. *안토니아 요새로 가는 계단에서

2차 변호의 대상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구입니다. 쉽게 말하면 유대교의 최고 법원이죠. 

산헤드린 공회는 총 71명으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이 숫자도 학자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70명이다, 72명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71명을 지지합니다. 그건 크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공회의 구성원은 대제사장,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거의 두 파가 나눠서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아래 그림에도 보시면 두 파가 나오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들이며, 대제사장을 차지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주로 서기관들입니다. 
대제사장이 공회의 의장직을 맡았습니다. (사진에 붉은 동그라미)

 


그리고 양쪽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각각 한쪽으로 앉았고, 
장로들도 거기에 같이 앉았습니다. 이게 산헤드린 공회의 모습입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의 주요 기능은 재판입니다. 주로 두 가지를 재판을 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재판이고요. 또 하나는 일상생활에 관한 민사적인 재판을 했습니다. 

지금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로마의 천부장이 바울을 재판하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자기를 변호해야 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변호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난장판이 된 산헤드린 공회의 바울 재판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먼저 바울이 변론을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나는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변호입니다. 
'나는 공회의 재판을 받을 만한 어떠한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공회원 중에 누군가가 바울의 말을 끊습니다. 
바로 대제사장 아나니아 입니다.    주1)

23: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1세기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이 사람에 대해 혹평했습니다. 
아나니아를 가리켜서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성질이 불같은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친로마 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많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자 그러면 대체 이런 사람이 어떻게 대제사장이 되었을까요? 
뒷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당국에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뒤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사람은 엉망입니다. 아주 엉터리입니다. 
율법을 잘 모르고요. 율법을 지키는 거에도 관심이 없었고, 성질만 고약한 사람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지금 말을 한 마디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1절이 전부거든요. 
그런데 딱 한 마디 듣고도 '바울의 입을 치라'고 말합니다. 듣기 싫다는 거죠. 

처음부터 바울을 때리고 시작하려고 달려듭니다. 
시작부터 공의회 분위기가 굉장히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 대제사장의 말에 바울이 굉장히 격앙되었습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의 말을 바로 받아칩니다. :3

 

13: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가리켜 '회칠한 담'이라고 부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가식적인 사람, 외식적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겉으론 종교적으로 보이지만, 속은 온갖 탐심과 불의로 가득하다는 폭로입니다. 

그러면서 아나니아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이건 일종의 워드 플레이입니다. 

대제사장이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받아서 돌려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라!'  

우리도 예전에 어릴 적에, 이런 놀이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친구가 뭐라고 놀리면 "반사!" 라고 한 마디 해 버렸습니다. 

바울이 지금 일종의 그런 '반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반사가, 아이러니하게 실제로 역사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약 10년 후인) AD 66년 경에 아나니아가 유대인들에 의해 피살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치신 거죠. 

바울이 그냥 홧김에 이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가 3b절에 나오는데요. 
대제사장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율법을 따라 재판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절대 재판을 고문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합리적인 재판 절차가 있고요. 순서가 있고요. 변론을 충분히 다 들어야 했습니다.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어떤 고문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일종의 '무죄 추정 원칙'을 가지고 재판을 해야 했던 거죠. 

바울이 말한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는 
율법에 기록된 저주 방식이라서, 욕을 한 게 아니라, 성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신28:22
그래서 혹자는 바울의 이 말을, 단순히 관용어적인 저주 선언이 아니라,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나니아가 AD 66년에 살해당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 견해도 일리가 있죠.

'율법대로...율법을 어기고' 
바울은 아나니아가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율법을 어기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율법에, 재판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레19:15 등

그랬더니 옆에 있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제사장 곁에 있던 사람들이 대제사장을 옹호하는 말을 합니다. :4

23: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이 말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23: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너라' 
왜 이 바울의 대답이 재밌냐면, 바울이 그가 대제사장인지 모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의 자리가 지정석으로 따로 있습니다. 

게다가 대제사장은, 입는 의복도 달랐습니다.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대제사장의 특별 의복이 있었습니다. 딱 보면 아는 거죠. 

그러니 바울이 대제사장을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바울도 당연히 알았겠죠. 
그러면 왜 바울이 '그가 대제사장인줄 몰랐다'고 했을까요? 

이건 전문 영어로 일종의 '돌려까기'입니다. 
'내 눈에는 당신이 대제사장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제사장의 권위를 부인하는 말입니다. 

율법을 따라 재판을 해야 할 대제사장이, 율법을 보란듯이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는 그런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건요 듣는 아나니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 나쁜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대화가, 시작부터 격앙되고 있습니다. 
공회와 바울의 분위기가 아주 팽팽하게 지금 맞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재판정의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갑자기 공회가 두 패로 나눠집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서로 나눠져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자기들 안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이 한 가지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6

23: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이, 일부는 바리새인이고, 일부는 사두개인 걸 알았습니다. 
그걸 알고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바리새인인데, 죽은 자의 소망, 그 부활 때문에 지금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그러자 공회원들이 반으로 쪼개지기 시작합니다. 

왜냐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한 교리가 각각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부활이 어디 있느냐?' 
이들은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사나 영을 믿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존재, 초월적인 존재도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신기하죠? 하나님을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인데요. 
한마디로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이들은 현세주의적인 삶을 지향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도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죠.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세 가지를 다 믿었습니다. 
부활을 믿었고, 천사도 믿었고, 영도 믿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부활은, 성경과 일치하진 않습니다. 
일단 이들도 악인과 의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 부활의 날은 우주의 마지막 날, 종말의 날, 심판의 날입니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즉 의인들과 악인들을 전부 부활시켜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때 의인에게는 복을 주시되, 악인은 심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맞는 얘기입니다. 요5:29

그러면 어떤 부분에서 이들이 틀렸는가?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전해준 전통을 지킬 때 
의인의 부활에 동참한다고 믿었습니다. 

자기들의 조상이 만든 종교 관습을 지킬 때, 행할 때 
의인의 부활에, 생명의 부활에 동참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건 틀린 거죠.

의인의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에는 누구만 참여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를 믿는 자만이, 의인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과, 바리새인이 믿는 부활의 다른 차이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종교 관습을 지키는 행함으로써 의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게 잘못된 부분입니다. 

그래도 아무튼 바리새인들은 '부활'이라는 큰 개념은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나는 부활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나는 죽은 자의 소망 부활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심문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6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바울을 갑자기 지지합니다. 
'바울이 부활을 믿는다고? 그럼 우리 편이네? 우리랑 같은 노선 아닌가?'
하고 바울을 옹호하기 시작합니다. 

23: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9절에 '심지어 바울에게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혹시 아느냐? 천사가 바울에게 와서 말한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바울을 지금까지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갑자기 바울을 향한 지지 발언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바울을 두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사이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하나였던 그들이 쪼개집니다. 
지금까지 바울을 공격하던 그들이 서로를 향해 공격합니다. 
얼마나 서로 싸웠는가 10절에 보면요. 이때의 상황을 큰 분쟁이라고 표현합니다. 

23: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쉽게 말해 난장판이 됐다는 뜻입니다. 재판정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두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 싸우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학자들끼리도 다툼이 일어납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왜 다투는가? 바울의 오늘 처세 때문입니다. 
과연 이때 '부활'이라는 이슈를 꺼내든 바울의 처세가 합당했는가? 
바울의 처세가 비열했다는 부정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과거에 저도 본문을 읽을 때, 이게 좀 의문이었거든요. 
바울이 일부러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부활이라는 주제를 꺼내서 편가르기를 했다는 해석입니다.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이, 바리새인과 사도개인 인줄 알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부활이라는 주제를 꺼내서 서로 싸우게 했다는 거죠.

여러분 정치인들이 많이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영남과 호남을 가르고, 세대와 세대를 가르고, 여성과 남성을 가르고, 
자파와 우파를 가르듯이 
그것처럼 바울도 위기를 모면하려고 편가르기를 했다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해석이 다릅니다. 
꼭 그렇게 바울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바울은 어디를 가나, 늘 죽은 자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번만이 아니라, 바울이 전했던 메시지의 핵심은 
늘 예수님의 죽으신과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늘 하던 대로, 여기서도 부활을 전했을 뿐입니다. 
특별히 지금 재판정의 분위기가 시작부터 어떻습니까? 

바울이 변론을 시작하자마자 '입을 치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바울의 입장에서는, 시급한 마음에 
자기가 분명히 전해야 할 메시지를 (서론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꺼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법정이 난장판이 되자,
천부장은 군사들에게 명하여, 바울을 다시 안토니아 요새 안으로 이동시킵니다. :10
 
◑밤 중에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 격려하시다

그 날 밤에,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이 바울에게 
'왜 너는 낮에 일부러 다툼을 일으켰니?' 라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바울을 격려하십니다. 
그러니 '바울이 영리하게 양 진영의 논쟁을 촉발시켰다'는 논리는, 틀린 거죠.

어쨌든 그 날 밤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바울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 라는 말은
산헤드린에서 바울이 증거한 내용이 옳았다는 주님의 판단입니다. 

그 내용이 본문 행23장에 자세히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11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이 예수님을 증거했다'고 추측할 수 있죠.
예수님의 구약 예언과, 탄생, 생애,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을 증언했을 것입니다. *'나의 일' :11

▲이 장면이 오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인데요.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장면이 몇 번이나 나올까요? 
딱 네 번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1)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이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바울은 회심을 경험합니다. 

2) 두 번째는 행18장 고린도에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18:10 

3) 세 번째는, 오늘 본문의 경험입니다. 23:11 
예루살렘 로마군대 진지(영내)에서,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 주셨고요.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후로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에서, 로마로 가게 되는 것은
위 구절에, 예수님이 그에게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소까지 예수님이 지시하신 것은 아니고, 상소는 자신이 판단해서 했을 것입니다.

4) 마지막 네 번째 경험은, 행27장에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나옵니다. 
27:23~24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런데 여러분,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에 대한 누가의 표현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이 바울 곁에 서셨다'고 말합니다. 

바울 곁에 주님이 서 계십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예루살렘에 들어온 이후, 바울의 행적을 살펴보십시오. 

바울은 거의 홀로 지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시다시피 선교여행을 할 때, 팀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는, 변론하는 데 시간을 거의 다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바울은, 혼자 변론대 앞에 서야 했습니다. 
바울 곁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재판정 밖에서 기다리겠지요)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본문에 그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들 중 누구의 이야기도, 본문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바울 곁에 (지지자로)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어떠한 도움이나 격려를 받았다는 기록이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 천부장에게 붙잡혔을 때부터, 그는 혼자였고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바울은 지금 혼자 변론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 영내에 혼자 갇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주님이 바울 곁에 서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혼자 두지 않으시고,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한마디로 '바울, 너는 예루살렘에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는 로마까지 반드시 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보증을 해 주십니다.

'네가 로마까지 가도록, 내가 너를 지키고, 붙들어주고, 인도할 것이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분명한 약속을 주십니다. 

이렇게 꼭 필요한 때에, 꼭 방향성과 인도하심이 필요한 타이밍에
절묘하게 우리 각자의 삶과 사역을 인도하시고, 지시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를 향하여, 안전하게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바울 곁에 서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지금 바울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온통 대적들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이 믿을만한 것이나, 의지할 사람들이 현재 눈 앞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표면적으로는) 
어떤 도움이나 격려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철저히 혼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그런 바울 곁에 함께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 하나가, 다른 모든 위협들을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들도, 또 로마의 천부장도,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바울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바울 곁에는, 눈에 보이는 그들이 아니라, 주님이 곁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 곁에 계신 주님이, 약속대로 
로마까지 자기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바울의 운명을,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운명의 결국은, 눈에 보이는 그들이 아니라 
결국 바울 곁에 계신 주님의 손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위협하고 겁을 주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이루고자 한 일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반드시 바울은,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그 자리까지, 가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 곁에는 주님이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디모데후서입니다.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장인 4장에 보면, (모든 바울서신의 마지막 장도 되죠)
바울은 그동안의 일평생 사역을 돌아보며, 주님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이 이렇게 나옵니다. 

딤후4: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바울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에 쓴 편지에서, 주님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본문 23:11과 똑같은 표현을, 딤후4:17에서 또 다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의 일생동안 '내 곁에 서 계신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바울 곁에 서 계신 주님이었습니다. 

바울은 사역하는 동안에 많은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바울의 곁을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사역은, 우리가 아는 대로, 거듭되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험난한 사역 가운데 낙심하지 아니하고, 
늘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은 자기 곁을 떠날지라도, 주님이 언제나 그의 곁에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곁에 서 계신 주님 때문에, 
바울은 고독한 상황, 위험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그때마다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바울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런 바울 곁에 늘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 곁에 서 계셨던 주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약속대로 늘 곁에 서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특별히 본문 23:11절에서, 주님이 바울을 다시 찾아왔던 시점을 보십시오. 
'그날 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날 밤'은 어떠한 밤입니까? 

바울이 낙심하고 실의에 빠졌을 밤입니다. 
바울은 거듭되는 박해와, 거듭되게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로 인해서 
인간인지라 낙담하고, 많이 위축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날 밤은 외롭고 고독한 밤이었을 겁니다. 
동역자 누구도 바울 곁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주님은, 바울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바울 곁으로 찾아오십니다. 
바울이 겪는 그 삶의 자리에서, 그 깊은 지침 tired 과 괴로움이 반복되는 그날 밤에 
하나님이 바울을 찾아오셔서, 곁에 서서 위로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그날 밤'이 있습니다. 
낙심하고 실의에 빠지는 그날 밤이 있습니다. 
거듭되는 고난으로 낙심하고 힘이 없는 '그날 밤'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삶의 문제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날 밤'이 있습니다. 

때로는 누구 하나 의지할 수 없는 바울과 같이, 인생의 외로운 '그날 밤'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안한 내일의 미래 때문에, 발뻗고 마음 편히 자지 못하는 '그날 밤'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후회와 한탄으로 보내야 할 '그날 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그날 밤'에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날 밤'에 주님이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주님이 이렇게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담대하라!' 

왜냐하면 바울과 같이, 주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고자 하시는 그 자리까지, 
주님이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지키시고, 끝까지 신실하게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의 생애를 돌아보며 고백했던 바처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딤후4:17
이 고백이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도 똑같은 고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등」이라는 컬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일등은 하고 싶은 일, 이등은 해야 하는 일, 삼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입니다.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 줍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거리에서도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내 자신,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삼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는 일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워 할 때는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 생각 들 때는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께 언제나 일등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일등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만나고, 작은 고비 때마다 손을 꼭 붙잡는 내게 일등으로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일등이신 하나님을 나도 일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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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아나니아 :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은혜' 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사도행전 안에서 3명의 아나니아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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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대제사장 아나니아